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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의 '돈 냄새'는 죄인가? 자본주의와 구유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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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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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약] 에세이스트 존 맥 글리온은 상업주의가 성탄절을 타락시킨 것이 아니라 지탱해왔다고 주장한다. 성육신은 물질을 긍정하며, 자본주의는 선물의 기쁨을 대중화했다는 논리다. 그러나 본지는 이에 대해 '물질의 긍정'과 '소비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구원은 '거래'가 아닌 '일방적 증여'이며, 성탄의 본질은 상품의 소비가 아닌 관계의 회복에 있음을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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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핑백 속 욕망과 구유의 거룩함, 그 사이 어디쯤 있는 우리의 성탄. (AI사진)

 

12월의 뉴욕 거리는 거대한 거룩과 속물의 전시장이다. 한쪽에서는 구세군 종소리가 울리고, 바로 옆 쇼윈도에서는 명품 가방이 "나를 가지라"고 유혹한다. 매년 이맘때면 교회 강단은 "성탄이 상업적으로 변질되었다"는 자성으로 뜨겁다. 우리가 예수를 백화점 마네킹과 맞바꿨다는 죄책감이다.

 

그런데 최근 에세이스트 존 맥 글리온(John Mac Ghlionn)은 이 익숙한 회개에 찬물을 끼얹는 도발적인 칼럼을 내놓았다. 그의 주장은 명쾌하다. "상업주의는 성탄절의 적(Enemy)이 아니라, 오히려 수호자다."

 

어도비(Adobe) 분석에 따르면 올 연말 미국 온라인 매출은 2,534억 달러(약 350조 원)를 넘어설 전망이다. 맥 글리온은 이 숫자를 탐욕의 지표로만 보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성육신(Incarnation)'을 근거로 든다.

 

하나님은 관념으로 오지 않고, 살과 피, 돌과 흙이라는 '물질'을 입고 오셨다. 성육신은 물질 세계를 긍정하고 거룩하게 만든 사건이다. 따라서 물질을 주고받는 행위, 즉 상업적 교환 자체가 악일 수는 없다는 논리다. 그는 심지어 구원을 "신이 행한 최초이자 최후의 상업적 거래(Divine Commerce)"라고 묘사하며, 자본주의의 교환 원리가 성경적 가치와 맞닿아 있다고 역설한다.

 

'거래'가 아닌 '선물'의 경제학

 

맥 글리온의 통찰은 영지주의(물질을 악하게 보는 사상)에 빠진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환기점을 준다. 우리는 이슬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속 따뜻한 성탄 만찬도, 아이들의 머리맡에 놓인 선물도 결국은 시장 경제의 풍요가 만들어낸 축복임은 부인할 수 없는 팩트다. 자본주의는 왕족의 전유물이었던 '베푸는 기쁨'을 평범한 공장 노동자에게도 민주화했다.

 

그러나 저널리스트로서, 그리고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논리에는 묵과할 수 없는 '신학적 비약'이 존재한다.

 

가장 위험한 대목은 구원을 '거래(Transaction)'로 묘사한 점이다. 시장 경제의 핵심은 '등가 교환'이다. 내가 100달러를 주면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받는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은 이 시장 논리를 철저히 파괴한다. 구원은 거래가 아니라 '증여(Gift)'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 그것이 은혜(Grace)다.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가 지적했듯, 시장은 "네가 지불한 만큼 갖는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네가 지불할 수 없기에 내가 대신 지불했다"고 선언한다. 성탄이 위대한 것은 신과 인간의 '거래'가 성사되어서가 아니라, 신이 인간의 '부채'를 일방적으로 탕감하고 자신을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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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훈련하는 전례(Liturgy)로서의 쇼핑

 

현대 철학자 제임스 스미스(James K.A. Smith)의 지적처럼, 쇼핑몰은 현대의 성전(Temple)이 되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소비라는 예배를 드린다. 맥 글리온은 "포장지가 아닌 내용을 예배하라"고 조언하지만, 현대 자본주의는 포장지(이미지) 그 자체를 팔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물질을 통해 구원(행복, 안정, 인정)을 얻으려 하는 '소비주의적 영성'이다.

 

성탄 선물이 거룩해지려면 '교환의 논리'를 넘어 '관계의 회복'으로 나아가야 한다. 동방박사의 황금은 거래 수단이 아니라 경배의 도구였다. 오늘날 우리가 주고받는 선물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내가 너를 위해 지갑을 열었다"는 과시가 아니라, "내 노동의 대가인 물질을 희생하여 너의 기쁨을 산다"는 성례전적 의미를 담아야 한다.

 

성육신은 '상품'이 아니라 '몸'이 되는 것

 

맥 글리온의 주장대로 상업주의를 무조건 악마화할 필요는 없다. 12월의 경제가 활발히 돌아가야 누군가는 임금을 받고 따뜻한 겨울을 보낸다. 하지만 교회는 자본주의의 훌륭한 파트너가 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성탄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거룩한 소비'를 넘어선 '거룩한 낭비'다. 보답받을 계산 없이 밥을 사고, 나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시간을 쓰는 것. 시장의 효율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비효율적인 사랑이야말로,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구유로 내려오신 '성육신'의 진짜 신비가 아닐까.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청구서'를 보낸 날이 아니다. '자신'을 보낸 날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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