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목사 “이단 논란은 영적 살인이자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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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ㆍ2009-09-01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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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둘러싼 양화진 문제와 장로ㆍ권사 호칭 논란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가 급기야 이단 논란에까지 휘말렸다.
장로ㆍ권사 호칭제로 이재철 목사를 기소한 바 있는 예장통합 서울서노회는 지난달 ‘이단적 행위’로 또다시 고발하고, 오는 10일 이에 대한 조사에 출석할 것을 통보했다.
이재철 목사에 대한 논란이 급기야 ‘이단 시비’까지 불거진 상황에서 본지는 이재철 목사를 만나 그간의 과정과 이단 시비 논란이 된 성숙자반 강의 내용인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대한 이 목사의 견해를 들어봤다.
그동안 양화진 문제나 장로 호칭제 등의 논란이 불거질 당시 언론과의 접촉을 자제해 온 이재철 목사는 “더 이상 교인들의 명예까지 실추시킬 수 없었다”고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밝히면서도, 계속되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상대측에 대응하거나 싸울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 그간 유니온교회와의 갈등, 수평이동 논란, 예배차량으로 인한 묘원 훼손, 에 이어 이번엔 ‘이단적 행위’ 운운 해프닝 등 바람 잘 날 없었다.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어느 사회나 그렇겠지만 최근의 일들은 공익을 추구하고 바른 법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가의 대표적인 예인 것 같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해 소수의 몇몇 분들이 외국 선교사님들을 동원하거나 선교사님들이 세우신 기관 동원해 마포구청에 투서한다던가, 국무총리실 통해 감사를 하게 한다던가, 또 마포경찰서에 고소, 지방검찰청과 고등검찰청에 고소하고 그게 안 되니까 지방검찰청에 무조건 고소해 달라고 재정신청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제가 속해있는 노회까지 동원됐다.
그 과정을 거쳐 오면서 이해관계가 맞는 분들이 합쳐지게 된 것 같다. 어떤 문제든지 그렇지만 이것은 세월이 흘러가면 조만간에 명명백백히 밝혀지리라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이분들이 말로 한 것이 아니라 문서로 하기 때문이다. 다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록에 대한 역사의 물음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밝혀지리라는 것에 추호도 의심이 없다. 만약에 그런 자신이 없었더라면 한국교회 모두를 위한 성지로 이곳을 지키겠다고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도 없고, 포기했을 것이다.
- 그 동안 굉장히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해 오셨는데,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는 언젠가는 진실을 밝혀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제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제가 얘기했을 때, 제 억울함은 풀리더라도 교회가 욕을 먹게 되고, 그것이 주님의 영광을 가린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결국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 같이 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7월 16일 기소위원회에 가서도 ‘앞으로도 길에서 뵈면 웃으면서 반갑게 인사 드리겠다’고 나왔는데, 그게 제 마음이다. 저는 지금도 저를 공박하시는 목사님들을 길에서 일대일로 만나면 외면하지 않고 인사할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다. 그래서 자제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소통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우리 교인들의 명예를 제가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성도들이 헌금내고 땀 흘리고 수고해서 양화진을 지켜왔고, 우리를 반박하시는 분들로부터 오해를 받으면서도 저와 똑같은 심정으로 계셨다. 그런데 이제는 선을 넘었다. 저분들을 지켜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 이번 ‘이단 논란’에 이례적으로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셨는데, ‘이단’이라는 위험한 발언을 했기 때문인가.
물론 그런 것도 있다. 목사가 목사를 향해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이단일 때는 상관없지만 그렇지 아닌 사람한테 하는 것은 영적인 ‘살인’이다. 그 목사만 살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사가 목회하는 모든 교인들에 대한 학살이다. 한국교회는 이런 엄청난 영적 살인이나 학살이 태연히 이뤄지는 풍토다. 이런 건 고쳐져야 한다. 언제까지 한국교회에서 몇몇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자기네들이 무너뜨리기 원하는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이단’이라고 영적 살인하는 것이 언제까지 진행되야 되나.
정말 밖에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이단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를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신천지나 통일교를 향해 얼마나 싸우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는 상황은 없어지고 정화돼야 하지 않겠는가. 서울서노회는 이단 관련 준비가 미흡해 이단 항목을 뺐다고 밝혔지만 이재철 목사 앞으로는 ‘이단적 행위와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행위에 대한 고발 건’에 대한 출석요구서가 도착한 상태다.
- ‘이단적 행위’에 대한 논란은 성숙자반 강의와 저서 내용인 ‘죽은 자를 위한 기도’로부터 시작됐다. 이것에 대한 입장은 어떤가.
가령 예를 들어서 ‘죽은 자를 위해서 우리가 기도할 때 구원받는다’라고 하면 이건 문제다. 제대로 된 목사님 중 믿지 않고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식에서 ‘예수님 이 영혼 구원받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할 목사가 어디 있느냐. 우리 교인의 가족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목사가 장례 집례를 안 하는 게 옳은 기독 정신이냐. 그건 아니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교인 가족 중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 원한다면 장례를 집례 할 수 있고, 영혼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죄를 지은 아들의 어머니가 판사에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런데 판사한테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하는 것을 것을 큰일 난다고 하면 월권이 아니겠는가.
저는 한경직 목사님께서 육영수 여사님을 위해 기도한 내용도 한마디로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는데 잘 하셨다고 본다. 강신명 목사님께서 박정희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한 것, 권오성 목사님, 명성교회 성가대가 조가 부른 것도 정말 잘 한 것이다. 제 책에도 죽은 분을 위해서 ‘하나님, 불쌍히 여겨 달라’고 썼다. 하나님 앞에서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얘기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참 모습인가.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도 못하는 하나님이 하나님인가.
저를 고발하신 차광호 목사님은 안 믿는 사람 장례식에서 당신은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한다고 했다. 긍휼이라는 한자를 풀어쓰면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이다. 그 분은 이재철 목사가 잘못한 것은 책으로 썼기 때문에 조장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그런데 제가 책을 써봐야 읽는 사람은 몇 만명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한경직 목사님, 강신명 목사님, 권오성 목사님의 경우에는 대한민국 전 국민이 보는 가운데 생중계 됐다. 그렇다면 그분들은 중죄를 지은 것인가. 저는 한국교회가 문제거리가 전혀 안 되는 문제거리를 가지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는 자체가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하는 자충수이고, 세상으로부터 기독교에 대해 문을 닫게 만드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관련 이정석 교수(국제신대원)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이재철 목사는 자신의 글이 일부 경솔했음을 인정하고 억울한 나머지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중단해야 하며…”라고 말한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저는 그 분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제 책을 안 읽고 기자의 질문만 듣고 말씀하신 것 같다. 이정석 박사님은 소극적이고 단순한 기원은 괜찮지만, 적극적인 간구는 안 된다고 했다. 적극적인 간구는 구원해 달라는 거고, 단순한 기원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거다. 제 책은 소극적인 기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도 동의하시리라고 생각한다. 제 이야기는 평상시에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자는 게 아니라, 장례식에 국한된 것이다.
- 사도신경에 ‘그리스도의 음부강하’ 구절이 빠진 것에 대한 문제도 이슈화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음부강하’ 구절을 사도신경에 되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 목사님의 입장이신데 그렇게 주장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신경에서 ‘음부에 내려가시고’라는 이 부분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시는 분들은 가톨릭을 제외한 모든 교회가 그 구절을 다 삭제했는데 유별나게 이재철 목사가 이 부분을 복원한다고 오해하신다. 사도신경을 받아들이지 않는 종파는 모르지만, 사도신경을 받아들이는 모든 교회는 교파와 신학을 초월해서 그 구절이 다 들어가 있다. 왜냐하면 원문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스위스에 있는 동안에 영어 사도신경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독일어, 스페인어, 이태리어 제가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사도신경은 다 확인했다. 그 구절이 다 들어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국의 사도신경만은 그 부분이 삭제됐다.
그래서 제가 이 건과 관련해서 보도자료를 언론에 보낼 때 이정석 교수님의 글도 보내드렸다. 그분의 글을 보고 저는 감명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사도신경에서 그 부분이 왜 삭제돼었는가 이유가 담겨 있고, 또 사도신경을 복원해야 할 필요성을 잘 밝히셨기 때문이다. 그 동안에 사도신경 ‘음부에 내려가시고’라는 부분과 관련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를 꺼려했는데, 이처럼 이 부분을 정확하게 밝혀주신 신학자가 있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음부에 내려가시고’에 대한 이 교수님과 저의 해석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음부에 내려가시고’가 빠진 것이 한국교회의 오류라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밝힌 소신있는 학자라는 것에 존경심을 표한다. 이 교수님도 표현하셨지만 ‘음부에 내려가시고’라는 부분은 타협이거나 협의의 대상이 아니고,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조항이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전 세계교회에서 고백하는 내용을 한국교회만 초기 선교사 몇분들과 당시 소수 지도자들이 모여서 뺐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가. 그렇지 않다. 모든 세계교회의 신학자들과 모든 교파의 신학이 그 부분이 난해하다고 함에도 그대로 두는 부분을 몇 분이 뺐다고 해서 복원시키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 교인들이 지나간 세월동안 기독교 역사상 교회가 고백한 신앙 고백 내에 그런 구절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불행인거다. 그 구절에 해석의 의미는 각자에 따라 달라지더라도 그런 구절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전혀 다르다. 어떤 분들은 사도신경은 가톨릭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분도 있는데, 사도신경 원문이 확정되는 750년에 이 땅의 교회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나서 동방교회가 분리됐다. 1517년에 개혁교회가 생겼으니 모든 교회가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개혁주의자들도 한 글자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교회는 그 글자를 삭제하고도 아무도 복원시키려고 하지 않는가. 저는 신학교 다닐 때에 그 사실을 알고, 누군가 하지 않으면 저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년 동안 사도신경 강의 할 때는 그 부분을 언급했다. 누군가는 이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성숙자반에서 글로 표현했다. 이것은 협의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이유막론하고 세계 교회가 고백하는 대로 복원해야한다. 그 이후 해석은 다양하게 해야 할 일이다.
- 성경 해석과 관련 벧전 4장 6절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라는 구절에 대한 목사님의 해석은 무엇인가.
성경이 기록될 때는 장과 절이 없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성경은 장으로 나눠져 있지만, 당시는 파피루스에 다 붙어있다. 벧전 3:18에 육체로는 죽었지만 영으로는 살림을 받아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는데, 그 영들은 노아 때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로 규정돼 있다. 첫 번째 심판 때에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인데, 거기에서 선포한 내용이 뭔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다고 연결되면서, 예수님께서 천상천하음부까지를 다 장악하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그러면서 벧전 4:6 죽은 자들 가운데도 복음이 전해졌다고 나온다. 붙어있는 파피루스를 생각한다면 그 죽은 자가 누군지는 간단히 나타난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됐다고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구원받았느냐 그건 모른다. 그걸 저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 구절이 있기 때문에 장례식에 갔을 때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게도 따뜻하게 기도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연결시킨 것이다.
-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느끼신 소회에 대해 한 말씀 해 달라.
저는 주님의교회, 제네바한인교회, 지금까지도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위해서 모든 저를 다 바쳤다. 지금 이 양화진에서도 마찬가지다. 제 소명은 백주년기념교회의 독립성을 지키고 외부에서 사사로운 목적으로 백주년 기념교회의 독립성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성지인 양화진을 특정 개인이나 특정 교파가 좌지우지 못하도록 공평무사하게 지키는 것이 저의 소명이다. 그 소명을 다하는데 있어서 지금까지도 많은 값을 치러왔지만, 더 치러야 할 값이 있다면 소명을 맡기신 동안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충실할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2천년 전에 끝나지 않았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성경에 있는 모든 이야기는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 내가 어떻게 주님의 빛을 쫓아가고 내가 어떻게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멜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 스스로 주님 앞에서 겸허해야 함을 절감하게 된다.
이동희 기자 ⓒ뉴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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