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열 교수 "교회성장주의, 십자가정신 망각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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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신ㆍ2013-04-09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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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주제로 강의
한국교회역사연구소(소장 이덕주 교수)는 8일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담임 이재철 목사)에서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주제로 이만열 교수의 역사강좌를 개최했다.
이만열 교수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한국기독교가 유래없는 양적 성장을 이룩한 시기”라고 말하면서 “이 시기의 성장은 무엇보다 교회와 교인의 수가 급증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체적으로 보아서 1960년대부터 1990년 사이의 30년 동안한국의 교회 수가 7배이상 증가한 것”이라고 말했다.
1993년도 한국종교사회연구소 통계에 의하면 1950년에 3,114개였던 교회가 1960년대에는 5,011개로 증가했고, 1970년대에는 12,866개, 1980년대에는 21,243개, 1990년대에는 35,819개로 각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교수는 “6.25전쟁 이후 지속된 한국기독교의 양적 성장세는 1960년대에 크게 증가, 1970년대 후반에 정점, 1980년대에는 둔화,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중단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다른 교단에 비해서 오순절교회가 가장 괄목할만한 성장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1950년대까지 교인 수가 1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던 오순절교회는 1980년대 들어 여의도순복음교회만 20만명의 교인을 가진 교단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또한 “성결교회도 1950년대 말 10만명에서 1970년대 말 3배 넘게 증가해 1990년대에는 기독교성결회(기성)만 60만명이 넘게 됐다.”면서 “이는 장로교 통합, 장로교 합동, 그리고 감리교 다음 가는 교세였다.”고 말했다.
특히 “장로교는 교단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합동과 통합 두 교단은 1970년대 들어 급성장해 이 기간에 각각 두 배이상 증가해 교인수가 1백만명을 넘어섰다.”면서 “고신도 1970년대에 교세가 배로 증가해 20만명을 넘게 됐다.”고 말했다.
그에 반해 기장은 양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 이유로 이 교수는 “개인구원보다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원칙에 입각해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노동운동 등을 통해 사회의 구조악과 싸우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감리교는 ‘하나님의 선교’를 선교의 신학적 기초로 받아들이고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를 존중하는 토착화 신학을 전개”했다고 말하면서 “1970년대의 성장이 두드러졌는데 1970년부터 1978년 사이 약 29만명에서 약 60만명으로 200% 가량 교인수가 증가했다.”고 말했다.
이어 “감리교와 오순절계교회, 성결교, 침례교 등 여러 교단들의 괄목한만한 성장은 장로교가 차지하는 비중을 상대적으로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교회성장의 사회적 배경으로 ▲군사독재와 자유의 억압, ▲경제성장제일주의와 극심한 빈부차,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개인 정체성의 혼란 등으로 분석했다.
이 교수는 도시화에 따른 기독교의 성장 사례로 침례교를 들었다. 그는 “한국 침례교회는 전통적으로 농촌에 기반을 두었다.”면서 “산업화, 도시화에 따라 농촌지향적인 전도사업이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는데 이는 1958년 208개이던 침례교회의 수가 10년후 겨우 16개 증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같은 문제를 인식한 침례교회는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남침례회 해외선교부와 공동으로 도시중심의 전도대회를 개최해 괄목한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순복음교회의 사례를 들면서 “유신독재 후 더욱 강압적인 신군부독재로 대치되고, 국제적인 경제위기로 암울했던 10년 동안, 여의도는 20배 이상 교세가 증가했다.”면서 “이런 현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 시기에 크게 성장한 거대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적인 경향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1965년 개신교 선교 80주년을 맞아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아래 연합적으로 대대적인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했다.”면서 “이 운동은 신학과 교리의 차이를 초월해 모든 교파와 교단이 동참했고 이후의 초교파 운동 및 교세 확장 운동의 기초를 놓았다.”고 말했다.
이어 70~80년대 이루어진 대규모 부흥전도집회를 설명하면서 “1973.5.16~6.3일까지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 1974.8월에 CCC주최의 엑스플로‘74, 1977.8월에 32개교단연합 77’민족복음화성회 등은 참가자가 연인원 수백만명에 달한 대규모 집회들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1970년대의 대규모 부흥전도집회는 유신체제가 가동되던 암울한 시기로 사람들의 정치사회적 불만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이런 집회에 참여한 젊은이들의 집단적 ‘황홀과 도취감’속에서 과연 ‘신음하는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역사의 방향을 뚜렷이 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전국에 걸친 부흥운동은 한편으로는 방언, 신앙 치유, 이적을 통한 성령체험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복을 약속하는 민중의 신앙욕구와 잘 어울렸다.”면서 “부흥운동은 신도들의 초월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서도 물질적, 육체적 축복을 신앙과 연계시키는 통로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각 교단의 급격한 물량적 성장은 교단차원에서의 결속력과 협력관계를 약화시켰을뿐 아니라 이기적인 개교회주의를 낳게 됐다.”면서 “결과적으로 개교회주의는 같은 교단의 교회들끼리도 치열하게 경쟁하게 만들고, 교단보다는 개별 교회가 중심이 되는 구조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또한 “1970년대 이후의 한국교회는 맥가브란과 와그너의 풀러 교회성장이론과 적극적 사고, 성공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면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들과 그들 외에도 많은 교역자나 부흥사들이 긍정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도들에게 자기 일에 대한 열의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자했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성장이론은 목표설정, 평신도 교육 강화, 교회 프로그램의 개발 등 결과적으로 전도와 선교에 큰 자극이 되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교회성장주의는 상업적 방식의 교회성장, 물량주의와 경쟁 조장, 외형적 성공을 이상화시켜 십자가의 정신을 망각시켰다.”고 비판했다. 또한 “교회성장이론과 그것을 이용하여 교세 확장에 성공한 교회들은 큰 영적부담을 안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학원선교단체들의 유입과 조직에 대해 설명하면서 “1948년에 에큐메니칼 운동단체인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을 시작으로 1950년대에 외국에서 들어온 한국기독학생회(IVF), 한국대학생선교회(CCC), 1960년대 네비게이토 1970년대 초에는 예수전도단(YWAM)이 국내에서 활동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서 자생한 학원선교단체들로 “1950년대에 장로교 고신 계열의 학생신앙운동(SFC)과 죠이선교회(JOY), 1960년대에는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가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학원선교단체들을 통해서 많은 젊은이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고 다수의 교역자, 평신도 지도자, 선교사를 배출한 건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대부분 보수적인 신학에 개인 구원과 경건에 집착하여 사회의 제반 문제들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하고 군사독재나 경제개발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고민과 대답이 거의 없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자기들만의 세계에 살면서 졸업 후에도 역동적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웠다.”면서 “학원에 선교단체가 난립하면서 경쟁적, 양적인 팽창 추구는 선교단체간의 갈등이나 교회와의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국교회의 외형적 성장은 자연스럽게 선교사 파송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졌다.”면서 “1979~1996년에 해외선교사가 47배 이상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선교의 문제점과 성과를 말하면서 “선교사들간의 경쟁으로 선교지에서조차 협조가 어려워지고 효율적 선교가 불가하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식 교회 이식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현지인 교회 건설이 힘들어지거나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과거 서구 선교사들이 보였던 제국주의적 태도를 답습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방식은 비판 받았지만, 해외선교는 한국기독교가 세계를 경험하고 더 성숙한 기독교로 발전하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김준수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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