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영 목사, 재건교회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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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7-02-20 11:1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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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영 목사, 재건교회를 말하다
“순수성을 가진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성서대학교 김대영 교수(교회사/ 평생교육원 주임교수) © 뉴스파워 윤지숙 기자
2005년 8월 국가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만열 교수를 중심으로 한,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친일 인사 3,090명의 명단을 발표해 세간의 화재가 된 적이 있었다.
친일적 행위에 대한 각성의 목소리는 한국 교회에도 영향을 주어, 1930년대의 한국 교회가 일제의 강요에 의해 신사참배에 순응했던 문제를 교회를 교회의 과오로 인정하는 자성과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도록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재건운동’은 신사참배를 성경적 가르침의 위반으로 간주하고, 교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신앙 갱신 운동이었다.”는 제보를 듣고, 《뉴스파워》가 한국성서대학교 평생교육원 김대영 교수(교회사/주임) 중를 찾은 것은 17일 오후 7시 서울시 노원구의 모 카페에서였다.
▲교회 재건 운동이 무엇인지?
재건운동은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신사참배 사건에 그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교회 재건운동은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로 죄를 범했기에 모두 무너졌으니 이 무너진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로 재건(再建)’이라 규명할 수 있다.
재건운동가들은 신사참배의 범죄와 싸웠고, 일제의 탄압과 투쟁을 했으며, 공산주의에 대항했다. 즉, 불의와 불신앙에 침묵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 것을 강변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총독부는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라며, 횡포와 강요로 한국 교회를 거세게 압박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정책에 맞선 교회지도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주기철, 한상동, 최덕지 , 김린희, 이기선 등이다. 특히 북한재건교회 이기선 목사는 주기철 목사(1897-1944, 산정현교회 담임)에게 신앙적 영향을 끼쳤다. 주 목사는 1938년부터 세 번이나 검속 당했고, 1940년 4월 네 번째 검거되어 평양 감옥에서 혹독한 옥고를 치르다 1944년 4월 21일 옥중 순교를 했다.
▲신사참배에 대한 당시 교회들의 반응은?
결국 신사참배를 참배하며 끝까지 버티던 장로교회도 총독부의 회유와 강압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1938년 2월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9월 총회 전까지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고 말았다.
신사참배를 통해 한국 교회의 손발을 꽁꽁 묶은 총독부는 1939년 3월 제74회 일본국제 의회에서 ‘종교단체법안’을 통과시켜 한국 교회를 일본의 법아래 귀속시켰다. 이후 한국 교회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야욕을 선전하는 후원단체로 전락해 점차 교회의 참된 본질을 상실하게 됐다.
▲신사참배에 대한 교회의 반성과 재건운동의 역할은?
해방 후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에 순응했던 사람들과 거부했던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심해지면서 이것이 교회 분열로 이어졌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신사참배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한국 교회의 당면한 최대 현안이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옥고를 치르다 해방을 맞이한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감리교회와 성결교회 그리고 장로교회 내에 교회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20여명의 성도들이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오랜 숙의 끝에 1945년 9월 20일 재건 운동 5대 원칙을 발표했다. 그 첫 번째 조항은 “교회의 지도자(목사 및 장로)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했으니 권징의 길을 취해 통회 정화한 후 교역에 나갈 것”을 명시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했던 기성 교회 지도자들은 참회에 대한 진정성 결여와 교권을 현상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난관에 봉착했다.
기성 교회와 더불어 재건운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재건교회 교인들은 1946년 북한에서는 평양과 선천을 중심으로 김린희, 고흥봉이, 남한에서는 최덕지, 강상은이 중심이 되어 독자적인 재건교회가 조직됐다. 하나의 이름으로 되어있던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신사참배를 한 교회와 하지 않은 재건교회로 나눠지게 되었고, 최초로 교단이름을 사용한 것은 재건교회였다. 그 뒤 우리가 알고 있듯 고신과 합동, 통합 등 교단 등이 생겨났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2017년, 재건운동과의 연관성이 있다면?
재건운동은 믿음이 성화적 행위를 수반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그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초창기의 개혁적 운동이었다. 청교도 언약신학을 따라 교회의 거룩성과 구별성 그리고 순수성을 교회의 본질로 보고, 교회가 오직 하나님께 속해 하나님께만 충성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자는 목적과 목표가 있었다.
여기서 “우상을 타파하자”라는 실천적 요강이 나온다. 이런 교회의 본질 유지를 위해 재건교회는 독자적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론에서 교회의 본질인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 회개하지 않는 교회에서 대항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종교개혁도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거짓 교회였던 로마 가톨릭으로 분리된 것이 아닌가?
돌이켜 보면, 해방 후 신사참배를 범 교회적으로 통절히 참회하는 결단과 의지가 부족했음을 한국 교회는 반성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자성이 없었기에 재건교회와 고신교회 등을 세움으로써 교파교회의 분리현상으로 한국교회사에 기록된 책임은 면할 수 없다.
이 시대에도 세속주의에 빠져있는 한국교회가 교회의 본질인 거룩성을 회복하자는 것이 성별이며 궁극적으로는 참 교회의 회복운동일 것이다.
한편 김대영 교수는 한국성서대학교에서 신학부 B.A., 일반대학원 역사신학 M.A., 신학대학원 M.DIV.를 거쳐 안양대학교에서 교회사로 Ph.D.를 수료하고 성서대와 안양대,웨신대, 재건총회신학교에서 강의를 해왔다. 오는 4월에는 재건교회사가 총회주관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윤지숙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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