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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목사는 대부흥가요 대성경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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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9-01-28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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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목사-이상규 교수, 길선주 목사의 신앙과 삶을 주제로 특별대담 

 

“길선주 목사의 회개의 기도와 부흥과 재림의 영성을 염원하며”를 주제로 특별대담이 지난 25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도곡동 강변교회(담임목사 이수환)에서 열렸다. 

 

이날 대담은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합동신학교 교장 역임)와 이상규 교수(고신대 명예교수, 교회사)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불씨 역할을 감당했던 길선주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해 발표를 한 후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의 진행으로 질의 응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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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측부터 이상규 교수, 김명혁 목사, 김철영 목사     ©뉴스파워

 

김명혁 목사는 “길선주 목사는 한국교회를 태동케 한 1907년 ‘회개운동’과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다.“며 ”길선주 목사는 이기풍 목사와 함께 한국 최초의 일곱 분 목사 중의 한 분이셨다.“고 소개했다.

 

이어 “길선주는 본래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는데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29세 때 예수님을 믿은 다음부터 40여 년 동안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는데, 380여 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고, 3천 여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8백 여 명을 목사와 전도사와 장로로 세웠고, 6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길선주 목사의 두 아들도 목사가 되었는데 두 아들 중 한 사람은 저의 아버지와 함께 평양에서 목회하다가 함께 순교한 김화식 목사”라고 개인적인 인연도 소개했다.

 

김 목사는 길선주 목사의 신앙의 강조점으로 “회개, 기도, 말씀, 전도, 재림”이라며 “길선주 조사는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 지역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 그것이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드디어 1906년부터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06년 황해도 재령에서 길선주 조사가 사경회를 인도하는데 회개운동과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며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다. 전국 각처에서 1,500여명의 신자들이 장대현교회에 모여 10일 동안 사경회를 가졌다. 그 사경회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길선주 목사는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다가 2년간 옥고를 치렀다.옥중에서는 기도와 성경 읽기와 전도에 전념하셨다.”며 “출옥 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국을 누비며 사경회를 인도하셨는데 십자가의 복음 전파와 민족 복음화에 남은 생애를 전부 바치셨다.”고 말했다.

 

특히 “어떤 무식한 학자는 길선주 목사가 ‘천국 소망’에 치우치다가 현세적인 삶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잘못을 범했다고 비판을 했는데 그런 비판은 정신 나간 잘못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며 “길선주 목사는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33인의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다.”고 말했다.

 

길선주 목사님는 1935년 11월 26일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폐회 축도를 마치고 뇌출혈로 쓰러져서 35 곳의 집회를 남겨두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으로 옮겨갔다.

 

이상규 교수는 “길선주 목사는 비록 시인으로서는 한국교회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어릴 때부터 한학에 입문했던 그는 한시에 관심을 가진 풍류시인이기도 했다.”며 “초기 장로교 인물인 그는 한국장로교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포삼열은 그를 ‘한국의 스펄젼’이라고 불렀다. 김양선은 길선주를 ‘대 전도자이며, 대부흥가요, 대 성경학자’라고 평가했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영계 길선주 목사는 한국 최초의 칠인 목사 중의 일인으로서 일찍 유(儒),불(佛), 선(仙) 삼교(三敎)를 모두 신봉하여 보았으나 만족을 얻지 못하다가 기독교에 개종한 후에 비로서 인생문제의 해결을 보았고, 구도심(求道心)의 만족을 얻는 동시에 희열과 영력에 넘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어 한국교회 건설의 개척자가 되었다.”며 “그의 달식(達識)은 심오한 성경 연구에 경주(傾注)되어 마침내 저명한 성경학자가 되었으니 그의 묵시록 강해는 가장 저문(著聞)된 바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어떤 의미에서 선교사들보다도 앞서는 대 전도자요, 대부흥가요, 대성경학자였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기독교에 입신하면서부터 조사가 되기까지 신구약성경을 20회 통독했고, 성경의 교훈을 연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일생동안 구약성경은 30회, 창세기에서 에스더서 까지는 540회 통독했다. 신약성경을 100회 이상 읽었고, 요한 일서는 500독, 요한 계시록은 1만 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이런 이유에서 그는 ‘독경의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구약의 예언서, 시편, 신약의 복음서, 로마인서, 계시록을 포함한 요한 서신 등은 거의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또한 “길선주는 개종과 함께 기도생활에도 열중하게 되는데, 아침 5시 혹은 밤 10시 등 일정한 시간을 정해두고 기도했고, 정오기도, 그리고 철야 기도를 처음으로 실시했다. 특히 1906년 공개적으로 시작한 새벽기도가 한국교회의 독특한 기도관행이 되었다.”며 “그는 새벽마다 묵시록 전체를 20분 동안 암송하고 기도하면서 성경 연구에 심취하였으며, 하루 2-3시간씩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인 목사로는 처음으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두 차례에 걸쳐 20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때가 1908년 3월이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길선주 목사가 종말신앙을 강조했지만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길선주 목사는 ‘105인 사건’ 때는 맏아들 진형(鎭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가담하했고, 이 일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10월 출옥했다.”며 “그에게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함께 민족의 현실에 대해서도 동일한 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1897년 안창호와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조직하고 사법부장으로 일한 경우나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의 한사람으로 가담한 점이 구체적인 사례가 된다. 그는 목회활동과 함께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예수학당’을 열었는데 이것이 후일 숭덕(崇德)학교와 숭현(崇賢)여학교로 발전하였다. 그 외에도 남여성경학교와 여러 야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길선주 목사는 40여 년간 1만 7천여 회 설교하였고, 380~500여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고, 3천여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알려져 있다.”며 “ 휫필드는 일생동안 1만 8천번 설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길선주는 1만 7천여회 설교했고, 삼천리반도는 물론 남북만주에 이르기까지 그가 순회한 거리는 이수(里數)로는 연6천리, 곧 20만 리(약 8만km)에 달했다. 이 거리는 부산-서울 간을 100여회 왕복한 거리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어 김철영 목사의 진행으로 질의 응답이 이어졌다.

 

길선주가 여러 종교를 섭렵한 후 기독교로 개종한 것과 관련 이상규 교수는 “본인에게 무엇이 참된 종교임을 확신시킨 여정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길선주 목사는 1906년 새벽기도를 시작해 한국교회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며 “타종교에서 새벽에 목욕 재개하는 것 등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기독교에 귀의한지 오래 된 상황이었다. 타종교에서도 좋은 점은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인에게 맞도록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목사는 “1906년 9월 새벽기도를 시작했고, 1907년 1월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길선주 목사는 새벽기도회, 예배당 건물과 예배 형식의 한국화, 남녀 따로 구분해 앉는 것도 폐지했다. 한국적인 토착화를 시도한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이상규 교수는 “토착화라는 표현은 안 썼지만 서양에서 기독교 복음이 들어왔지만 우리의 그릇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던 것 같다.”며 “전통 건물에도 교회를 짓고, 남녀 좌석 구분을 철폐했다. 예배에서 서양 음악과 우리 음악을 함께했다. 형식에 있어서는 우리의 것을 사용했다. 한국적 기독교를 모색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명혁 목사는 “본래 지니고 있던 타문화 타종교를 승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경전 읽고 금식하던 것을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으로 대체했다.”고 밝혔다.

 

길선주 목사는 “한국의 스펄전”으로 평가한 김명혁 목사는 “‘하나님이 진짜입니까?’라고 기도할 때 ‘길선주야! 길선주야!’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뜨거운 불로 가득했다고 했다. 하나님 성령님을 만나고 받아들이는 체험을 했다.”며 “어떤 인위적 방법이 아니라 정말 하늘 향해 호소하며 기도하다 불이 떨어지는 역사를 체험하고 회개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만나고 성령님 체험한 분”이라고 말했다.

 

특히 “얼마 후 제자들이 간증하고 떠들면 성령 받을 수 있다며 인위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만들려고 했더니 길선주 목사는 ‘시끄럽다 집어 치워라.’고 했다.”며 “조나단 에드워즈도 그랬다고 한다. 정말 순수하게 회개하고 말씀 붙잡아야 성령을 받지 시끄럽게 음악을 하고 그런 건 집어 치우라고 했다. 그런 건 본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김철영 목사는 “길선주 목사는 구약을 30회 이상, 신약 100독, 창세기부터 에스더까지 540회, 요한일서 500독, 요한계시록 1만 독을 했다고 한다. 강력한 회개는 말씀과 함께하는 성령의 역사였다. 말씀의 능력이 성령의 역사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상규 교수는 “서양의 부흥운동의 특징이 있는데 첫째가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다. 길 목사의 독특성은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사모했다.”며 “부흥이 가능했던 첫째 요인은 말씀, 둘째 요인은 성령이다. 천주교는 부흥의 흔적이 없다. 성령에 대한 사모가 없으니까 부흥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길선주 목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대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부흥의 셋째 요인은 기도”라며 “농부가 씨를 뿌리고 결실을 기대하듯, 우리는 우리대로 노력해야 한다. 기도로 준비해야한다. 반드시 기도한다고 부흥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며 “마지막은 회개다. 회개가 회중 앞에서 죄 고백을 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부흥이 일어나는 중요한 시작이 되었다.”며 길 목사는 한국교회 부흥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김명혁 목사는 “길선주 목사의 부훙운동은 회개가 먼저고 기도가 둘째다. 마지막이 말씀이다. 회개하면서 기도를 하고 말씀을 읽은 것이다. 박윤선 목사도 기도와 말씀, 회개와 기도와 말씀을 강조하셨다. 그것이 정말 기초”라고 말했다.

 

김철영 목사는 “요즘 ‘포스트처치시대’라는 용어까지 나왔다.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되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으로 돌아가 회개와 기도하는 것이고 그를 통한 영적 각성이라고 생각한다. 기록을 보니 1905년 길선주 전도사가 경남 함안 칠원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셨다고 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가 1902년 함안 칠원에서 태어난 곳이자 아버지 손종일 장로가 신앙 생활했던 곳이다. 길 목사가 손종일 장로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라고 질문했다.

 

이상규 교수는 “길선주 목사가 그곳에서 부흥집회를 했다는 건 알려져 있지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남아있지 않다.”며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 길선주 목사는 전국에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때 손종일은 집사였다. 3.1 만세운동도 주도했다. 그 사람의 인생을 추적해 보면 된다. 그 집회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길선주 목사는 보수적이고 비타협적인 분”이라며 “물론 내용은 훼손하거나 타협할 수 없지만 형식은 얼마든지 바꿨다. 그 영향이 손양원 목사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손종일 장로가 본인은 물론 자식들에게 신사참배 반대를 천명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김철영 목사는 “평양대부흥운동의 강력한 역사가 6개월 만에 약화됐다고 한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의 여파가 미치지 않은 곳이 부산 경남과 제주도였다고 한다 그 요인이 무엇인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도 이상규 교수가 답을 했다.

 

이 교수는 “흥미롭게도 부산 경남에서는 부흥의 흔적이 없다.”며 “왜 그랬을까. 부산에 있던 호주 선교사들이 1907년 집회 참석 위해 서울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부산 지역에는 다른 기록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성령께서 왜 부산경남 지방에 역사하지 않으셨을까. 나중에 평양대부흥운동이 만주로 확산됐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부산경남에는 없다.”며 “영적 리더십의 문제다. 부산경남 지방은 교세도 약했다. 서부경남 지역은 특히 불교세가 강하고 보수적이다. 이런 지형적 요소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철영 목사는 “정부가 2009년 길선주 목사가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늦게 수여한 이유가 삼일운동에 이름 올렸지만 현장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명혁 목사는 “그런 비판은 받아들일 수 없다. 33인이 같이 모인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겨 “이후에도 민족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하셨다.”고 말했다.

 

특히 “천국과 재림을 강조한 것을 비판하는 것은 정신 나간 귀신들린 소리”라고 비판하면서 “신앙의 선배들은 주님의 재림을 늘 고대했다. 이런 걸 어떻게 비판할 수 있나.”고 일갈했다.

 

김철영 목사는 “길선주 목사가 종말론에 심취했고 재림신앙을 강조했다. 길선주 목사는 후천년설을 지지했다. 일종의 가설로 1974년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했고, 2002년에 천년왕국이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상규 교수는 “길선주 목사는 천국에 대한 소망과 재림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당시 일제하에서 탄압받고 삶이 녹록치 못한 가운데 소망을 주고 싶었던 것”이라며 “그 소망의 원천이 복음이었고 결국 종말신앙이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당시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 등 대부분 사람들은 전천년설을 지지했다. 그런데 길선주는 목사는 독특하게 후천년설을 지지했다. 신앙입국을 꿈꾼 것”이라며 “기독교 신앙에 입각해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높다 보니 (예수님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가설을 세운 것”이라며 “그것을 공표하고 다른 이득을 누렸다면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개인의 생각이었다. 당시 탄압받고 억압받던 시대에 가질 수 있는 소망이었다.”고 말했다.

 

김철영 목사는 “길선주 목사는 민족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회개와 기도와 말씀과 전도 그리고 재림신앙을 강조했다. 특히 1907년 평양대부흥 이후 1909년 100만인 구령운동 주창했다.”며 “남북관계 등 국가적, 사회적 현안들이 있다. 한국 교회 안에 정교분리와 정치참여 등 논란이 있다. 길선주 목사의 신앙 활동이 한국교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김명혁 목사는 “요한계시록이 마지막 책인데 ‘내가 보니’ ‘내가 보니’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천국을 바라본다. 이것이 기독교인데 지금 세상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며 “교회가 천국 같고 내 사역이 천국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어거스틴은 『신국론』을 썼다. 정말 행복과 기쁨이 세상에서 이뤄진다고 말하는 것들은 정신 나간 것이다. 그분처럼 (어느 한쪽으로)치우치지 않는 신학자도 없다.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현세는 풀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는 것을 강조했다. 모세와 다윗 다 그렇다. 현세를 무시하면 이상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실 아닌가. 천국을 바라보는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규 교수는 “보수적일수록 사회 현상과 민족의 현실에 무관심하다. 그 해석이 옳지 않다는 것이 길선주 목사의 삶에서 드러난다.”며 “길 목사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지만 민족 현실 외면하지 않았다. 한쪽 발은 교회, 한쪽 발은 민족에 딛고 살았다.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을 소망했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이면서 민족 현실에 관심을 가진 독특한 삶을 사셨다.”고 말했다.

 

이어 현실에 대해서 신앙을 지키면서 민족 공통의 문제에 대해 함께 협력하고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길선주 목사가 1919년 3.1운동 때 33인이었다. (길 목사가 현장에 없었던 것은) 평양에 있었고 시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2월 21일부터 장대현교회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갈 수 없었고 도장만 찍어서 줬다.”고 말했다.

 

이어 “집회 마치고 바로 자수하러 서울 내려갔다. 1년 7개월간 미결수로 구금됐다. 결국 무죄를 받았다. 그것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았다.”며 “김인서 장로가 해석을 했다. 의도적으로 일제가 정치적 목표를 갖고 기독교 분열을 위해 매장시키려는 의도로 무죄를 내린 것이라고 김인서 장로는 해석을 했다. 길 목사는 1920년 이후에도 체포당했다. 그러므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민족 현실에 무관심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김철영 목사는 한국 교회에 던지는 길선주 목사의 신앙과 부흥 운동이 주는 메시지에 대해 질문을 했다.

 

이상규 교수는 “길선주 목사는 신앙은 보수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며 “자기 종교를 지키면서도 타종교와 상호 협력할 필요가 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가 천도교와 손을 잡았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도 각자의 신앙이 다를지라도 민족 현실에 있어서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명혁 목사는 “길선주 목사의 회개, 기도, 말씀, 전도, 재림신앙 등 다섯 가지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며 “그러나 현실에 무관심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민족의 장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재림을 강조하면서도 현실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어거스틴도 그랬다. 이 양면성을 배웠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철영  ⓒ 데일리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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