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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주 교수 "한국교회 개혁의 과제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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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신ㆍ2019-01-17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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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개혁의 과제와 전망 

이덕주 (감리교신학대학교 은퇴교수), 한복협 1월 월례 발표문

 

“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성장이 멈추고, 젊은이들이 떠나가는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잇단 실수와 추문으로 목회자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한국교회에 과연 희망은 있는가?”

 

이런 고민과 질문에 답을 주는 것이 오늘을 사는 신학자의 근본 과제일 것이다. 신학 중에도 역사신학으로서 교회사는 ‘때를 분간하는 학문’이라 하겠다. 즉 “시대의 징조”(마 16:3)를 보고 그 시대를 사는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와 목표를 제시하는 학문이다. 다른 말로 ‘시대정신’(Zeitgeist)이라 할 수 있는데 성서신학은 그런 가치와 원리를 성서 본문에서 찾는다면 역사신학은 그것을 과거 역사에서 찾는다. 오늘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교훈을 과거 역사에서 찾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교회사, 그 중에도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는 나의 고민과 관심은 한국교회가 처한 오늘의 위기 상황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오늘 이 시대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한국 교회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과연 한국교회는 오늘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 이런 고민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것이 요즘 나의 학문적 관심과 주제가 되었다.

 

무너지는 교회, 세워지는 교회

 

그런 고민을 안고 성경을 읽다가 유독 눈에 들어온 대목이 있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하셨을 때 이를 항의하던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잘 아는 대로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48년 동안 헤롯 왕가의 주도 하에 추진되던 성전 건축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러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혈통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콤플렉스가 컸던 헤롯은 지나칠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는 것으로 백성들의 지지와 복종을 끌어내려 하였다. 그는 그 웅장했던 솔로몬 성전보다도 훨씬 크고 화려한 성전을 짓고 있었다. 그런 성전의 위용이 드러나면서 백성들은 ‘무너졌던 자존심’이 회복되는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그건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갈릴리 촌에서 올라온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보면서 “대단하지 않습니까?” 감탄하였다. 그런데 예수님 생각과 판단은 달랐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마 24:2, 막 13:2, 눅 21:6)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제자들은 세워져 올라가는 성전을 보았는데 주님은 무너져 내리는 건물을 보셨다(그리고 말씀대로 헤롯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완전 파괴되었다). 화려하고 성대한 성전 봉헌식을 준비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귀에 “무너지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거슬릴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던 것이고 그런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헐라, 내가 세우리라.”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에 두 가지 성전 모형이 제시되고 있다. ‘허물어지는 성전’과 ‘세워지는 성전’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허물고 무엇을 세울 것인가?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읽다보면 두 가지 성전, 곧 허물어지는 역사와 세워지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탐욕의 인간이 쌓으려던 명예의 바벨탑이 무너지고 순종하는 노아의 손에 의해 구원의 방주가 산 위에 만들어졌다. 기복의 제물을 바치던 모리아 산당이 허물어진 언덕에 희생의 제물을 바치는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다. 사치와 분쟁의 솔로몬 성전이 허물어진 뒤에 회개와 성결의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탐욕과 허영의 헤롯 성전이 무너질 때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작했다. 이후 전개된 2천년 기독교 역사도 마찬가지다. 560년 ‘새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로마가 롬바르드족과 프랑크족에게 함락되었을 때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로마가톨릭교회를 건설했으며 1054년 동·서 교회 분열로 교회의 권위와 명예가 크게 추락되었을 때 유럽에서는 클루니수도원을 중심으로 성직자들의 청빈과 순결, 복종을 회복하려는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타락을 극복하지 못했고 마침내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렇게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허물어지고 세어지는’ 성전(교회)의 역사를 추적해 보면 그것이 5백년 주기로 반복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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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년 주기로 반복되는 ‘무너짐과 세워짐’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너지는 교회와 세워지는 교회가 각각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즉 무너지는 교회가 기복적이고 물질적이며, 세속적인 교회로서 허영과 탐욕, 명예와 권력, 갈등과 분쟁을 추구한 반면에 세워지는 교회는 회개와 개혁, 청빈과 순종, 희생과 성결을 추구하였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이며 육적인 교회가 무너지면 성결하고 신령하며 영적인 교회가 세워진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과 기독교 역사가 증언하는 바이다.

 

이런 역사적 관점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읽을 필요가 있다. 2천년 동안 5백년 주기로 반복된 무너짐과 세워짐의 마지막 체험이 1517년의 종교개혁이었다면 그 후 5백년을 계산하면 2017년이 된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대교회의 모습은 5백년 주기로 일어나는 ‘무너지고 세워지는’ 과도기 현상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무너지는’ 교회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들을 목격하고 있다.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 물질적인 허영과 과시를 추구하다 무너지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건 한국교회 만의 현상이 아니다. 이미 반세기 전에 우리 보다 앞서 유럽과 미국 교회들이 경험하였고 이제 금세기 ‘선교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의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이룩한 한국교회가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교회의 타락과 몰락은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육적인 교회를 무너뜨리시고 신령한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무너지는 교회에 연연하거나 절망하기보다 세워지는 교회를 기대하며 거기에 희망을 두어야 한다. 허물 것은 헐고, 세울 것은 세워야 한다.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 기존의 낡은 건물을 헐어야 하는 것과 같다. 리모델링 정도로는 안 된다. 완전 철거하고 빈 터 위에 새 교회를 세워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회개, 혹은 개혁이라 말한다.

 

종교개혁 전야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다보니 주변으로부터, 특히 외국 신학자들로부터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과 부흥의 비결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급속한 성장을 이룩한 결과로서 부작용과 문제는 없는가?” 하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런 질문에 대해 나는 “압축 고도성장의 결과요 그 후유증이다.”라고 대답한다. 근현대 한국사회가 ‘압축 고도성장’(compressive rapid growth)의 경제부흥을 이룩하였듯, 한국교회도 한 세기 조금 넘는 짧은 역사에 서구 기독교 2천년 역사를 압축 경험하였다. 사도시대 기독교회가 수난과 박해의 역사로 시작되었듯이 한국교회는 복음 선교가 시작되면서부터 극심한 수난과 박해를 체험하였고 일제강점기와 전쟁 시기에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박해를 견뎌낸 서방교회가 부흥과 성장, 선교의 역사를 일궈냈듯이 한국교회도 ‘선교 기적’이라 불릴 정도의 폭발적인 부흥과 성장을 이룩하였으며 오늘날 인구대비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내는 선교국가가 되었다. 그 외에 종교 재판과 교회 분열, 정통과 이단의 역사,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 건축, 수도원과 사회구제, 십자군 같은 공세적 전도활동과 해외선교, 교회와 세속 권력 사이의 갈등과 타협 등등..... 서구 기독교 2천년 역사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건들을 한국교회는 120년에 체험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종교개혁’(reformation)이다. 한국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뿌리 채 뒤집혀’ 체질적으로 새롭게 된다는 의미에서 종교개혁을 아직 체험하지 못했다. 물론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 종교개혁에 대한 설교나 강연, 책이나 논문이 없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았다. 문제는 말과 주장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론이 아닌 행동으로, 주장이 아닌 실천으로, 형식적 집회가 아니라 영적 체험으로 전개되는 종교개혁 체험이 아직 없었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 체험으로서 종교개혁이 없었다는 말이다. 교단적으로, 초교파적으로 간혹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영적 추진력을 잃고 주저 물러앉았다. 이로써 보면 오늘 한국교회에 남겨진 한 가지 과제가 ‘종교개혁’일 것은 자명하다. 이제 그 시점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전야’(reformation eve)에 처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작금 한국교회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이 5백 년 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 중세 유럽의 가톨릭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현상들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에서 확인된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가장 큰 범죄는 성직매매와 면죄부 판매였다. 모두 돈과 관련 있는 범죄 행위였다. 오늘 한국교회의 성직매매 악습은 일부 대형교회의 ‘사유화’(私有化)와 변칙적인 교회세습, ‘돈 봉투’로 얼룩진 교단장 선거, 천문학적인 은퇴목회자 사례비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리고 사죄와 구원의 은총까지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면죄부 물질만능주의는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시행되는 각종 명목의 헌금봉투로 둔갑하여 가난한 교인들을 좌절시키고 있다. 그 외에 성직자의 윤리적 타락과 사치, 교인들의 도덕적 불감증,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과의 결탁, 과시적 성전 건축과 화려한 장식, 다른 문화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선교행태 등 중세교회의 폐해와 오류들을 한국교회가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모두가 무너지는 교회의 ‘말기 증상’들이다. 이런 ‘종교개혁 전야’ 현상은 창조 이전 상태, 곧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는”(창 1:2) 절망적인 상황과 다를 바 없다.

 

번영의 신학에서 십자가 신학으로

 

그렇다고 무너지는 교회의 혼돈 상황을 바라보며 분노하고 실망만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역사의 주인,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혼돈과 공허, 흑암과 절망의 현실 너머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창 1:2)을 보고 거기에 희망을 건다. 무너지는 교회와 함께 세워지는 교회도 보아야 한다. 무너지는 교회에 대하여 분노하고 질책하면서 동시에 세워질 교회에 대한 희망을 선포해야 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러했고 신약의 사도와 제자들이 그러했으며 기독교와 인류 역사에서 교회가 타락하고 몰락할 때마나 나타난 종교개혁자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개혁자들의 신학사상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십자가 은총’이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로마가톨릭교회를 세우면서 내걸었던 ‘하나님의 도성’ 신학이 어거스틴의 ‘십자가 은총’에서 출발하였음은 물론이고 중세 클루니수도원 개혁운동의 신학적 배경이 되었던 버나드와 안셀무스, 프란체스코의 신학과 수도생활도 십자가의 은총과 겸비, 그 실천이었다. 그리고 중세를 끝장 낸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의 신학도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재발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교회가 타락하고 몰락할 때마다 ‘십자가’가 재등장하였다. 교회의 근거이자 존재 이유인 ‘십자가’를 재발견한 개혁자들의 메시지와 실천을 통해 교회는 다시 세워지는 역사를 반복하였다. 부자와 권력자를 위해 물질적 풍요와 성공을 빌어주는 ‘번영의 신학’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신학이라면 자발적 청빈과 순결, 고난과 희생을 실천하는 ‘십자가 신학’은 교회를 세우는 신학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어느 신학에 집중하고 있는가? 가진 자에게 편안한 교회인가? 가난한 자에게 희망을, 갇히고 억눌린 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안겨주는 그런 교회인가? 한 세기 전, 처음 기독교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교회는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는, 말 그대로 ‘복음’(glad tiding)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가 바뀌었다. 강단의 메시지도 바뀌었다. 십자가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축복이 차지했다.

 

결국 오늘 붕괴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다시 세워진다면 그것은 십자가 신앙에서 출발해야 한다. 쳐다보는 십자가, 걸고 다니는 십자가 말고 지고 가는 십자가를 체험하는 신앙이다. 그리하여 십자가 은총에 근거하여 무너지는 교회에 대해 경고하고 세워지는 교회를 기대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시작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 속의 개혁자들은 자기 시대에 교회를 향하여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였다(마 5:37). 무너지는 교회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아니오.” 하였고, 세워지는 교회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예.” 하였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당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로마교황이 파견한 추기경과 주교, 당대의 유명한 신학자들 앞에 선 종교개혁자 루터. 그는 혼자였다. 그러나 당당했다. 추방(사형)을 위협하면서 마지막 회유를 하는 황제 앞에서 토해낸 말은 간단하면서도 분명했다.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s anderes. Gott, helfe mir.”

(나, 여기 섰습니다. 나 달리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그 순간, 그는 황제나 교황 앞에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coram Deo). 그래서 담대하였고 두려울 것이 없었다.

 

작년 가을, 루터의 종교개혁 유적지를 탐방하는 중에 독일 보름스에 들렸다. 그가 제국의회 심문을 받았던 건물은 사라져 없어졌지만 보름스 시내 곳곳에서 종교개혁자 루터의 숨결과 흔적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 중에도 보름스 외곽에 조성되어 있는 아담한 ‘루터 공원’(Lutherdenkmal)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전 세계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성원으로 1868년 조성된 종교개혁 기념 공원에는 거대한 청동 조각상들이 성채 모양으로 세워져 있었다. 왼손에 성경을 들고 오른 손으로 성경을 짚은 채 한 발짝 앞서 나간 자세로 눈을 하늘로 향하여 서 있는 루터의 동상을 가운데로 하여 주변에 그의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후원자들의 동상이 서 있었는데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을 이끌었고 개혁주의 신학 수립에 참여한 멜랑히톤과 로이힐린, 교황에 맞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도왔던 정치적 후원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헤센 방백 필립의 동상이 그것이다. 독일 종교개혁이 루터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개혁은 ‘시대정신’에 동감하여 힘을 모은 공동체의 투쟁 결과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눈을 끈 것은 루터 동상의 좌대, 모퉁이를 장식한 네 명의 종교개혁자 동상이었다. 모두 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1184년 화형당한 프랑스의 피터 발도, 1378년 옥스퍼드대학 교수직에서 추방된 영국의 위클리프, 1415년 참수당한 체코의 얀 후스, 1497년 화형당한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루터에 앞서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메시지를 선포하며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번역했다가 그 때문에 로마교황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죽임을 당했던 순교자들이었다. 이들 순교자들의 메시지는 루터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죽었고 루터는 살았다. 이들은 이단으로 낙인찍혀 공개처형 당했지만 루터는 종교개혁의 성공자로서 영광과 명예를 얻었다. 어찌 보면 루터는 ‘행운아’라 할 수 있다. “때를 잘 만났다.” 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 앞선 개혁자들의 외로운 외침과 시련, 수난과 박해 역사가 있었기에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비텐베르크를 방문 했을 때 더욱 분명해졌다. 엘베강 중류에 위치한 비텐베르크에서 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반박하는 <95개조 논제>를 발표하기 정확하게 1백 년 앞선 1415년 엘베강 상류, 체코의 프라하에서는 루터와 같은 개혁 메시지를 설교한 이유로 후스가 화형 당했다. 후스는 처형되었지만 그가 전한 메시지는 살아남아 엘베강 물줄기를 따라 비텐베르크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 걸렸던 것이다. 또한 후스도 그보다 반세기 앞선 위클리프의 개혁 메시지에서 영향을 받았고 라틴어 성경을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 역시 2세기 앞서 프랑스어로 성경을 번역했던 발도의 개혁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로써 보면 종교개혁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특출한 인물의 ‘단독 플레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암흑과 절망의 현실 속에서 “이건 아니다.” 하며 피어오른 양심의 작은 촛불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마침내 ‘때가 이르면’ 교회와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개혁의 횃불로 타오르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개혁 징조

 

독일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요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비텐베르크와 보름스를 다녀온 후 한국교회 현실을 다시 살펴보았다. 누가 뭐라 해도 내 눈에는 ‘종교개혁 전야’의 무너지는 교회 모습이자 현상이었다. 특히 내가 속한 감리교단이 5년 넘게 감독회장 선거 문제로 내홍을 빚으며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음은 실로 부끄럽고 암담할 뿐이다. 그저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렇다고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무너지는 교회 저 편에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교회사를 다시 읽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한국교회 1백년 역사 속에 적지 않은 ‘개혁의 촛불’들이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교리와 제도를 앞세우며 진리와 진실을 외면하였던 한국교회에 대하여 “아니오.” 외치다가 기득권, 교권주의 세력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고 제도권교회 밖으로 쫓겨났다. 바로 한국교회의 후스였고 사보나롤라였으며 위클리프였고 발도였다.

 

한국교회에 그런 개혁의 메시지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1930년대였다. 몇 사람 예를 들어 본다. 우선 1930년대 초반 ‘무언 겸비 기도’를 좌표로 삼아 오직 예수만을 전하며, 예수처럼 살기 원했던 ‘예수주의자’ 이용도의 메시지(1930년)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한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肉의 예수, 榮의 예수, 富의 예수, 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靈의 예수, 賤의 예수, 貧의 예수, 卑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라.

人의 예수,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희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었느니라.”

 

같은 시대, 신앙잡지 <천래지성>과 <영과 진리>를 통해 한국교회의 ‘신앙혁명’과 영적 갱신을 촉구했던 복음교회 창설자 최태용의 메시지(1931년)다.

 

“신학은 많고 신앙은 적고

기도회는 많고 기도는 적고

단체로서의 수는 많고 신앙의 개인은 적고

사람의 지혜로 하는 운동은 많고

하나님 자신의 권능으로 되는 일은 적다.

이 많은 일이 적게 되고

이 적은 일이 많게 되어야

세상은 바른 세상이니

그러면

세상이 그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지금 세상은 한번 뒤집혀야 한다.

아! 세상은 역시 한 혁명을 요한다.”

 

해방 후 혼탁한 중에도 개혁의 메시지는 계속 들렸다.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들을 통해서도 들렸지만 지방교회의 평범한 평신도들을 통해서도 들렸다. 최근 입수한 류제경 장로(1917-2012)의 일기를 읽다가 ‘망치로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류제경 장로는 두 살 때 고모인 류관순 열사의 등에 업혀 천안 아오내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최연소(?) 만세운동 경력자로서 일제말기 초등학교 교사시절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한 혐의로 3년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였다. 그는 해방 후 공주사범대학(현 공주대학교) 불문과 창설 교수가 되어 한평생 ‘올곧은’ 교육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평신도였다. 그는 70년 동안 매일 일기를 썼는데, 깊은 사색과 진솔한 신앙에서 우러난 지혜와 교훈으로 가득 찬 일기였다. 그 가운데 무심코 꺼내 읽은 것이 1989년 10월 22일자 일기다. 그 무렵 한국교회는 선교1백주년을 기하여 ‘폭발적인’ 부흥과 성장의 위세를 대내외에 과시한 후 여세를 몰아 각종 대중집회와 전도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 때 쓴 일기다.

 

“인간이란 참으로 동물이하의 짓을 진리와 정의를 내세워 부끄럼 없이 뻔뻔스럽게 행하는 존재다. 예수의 이름을 내세우고 십자가를 높이 들어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질러 왔던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긴 했으나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교는 어떠한가? 천주교회가 유럽 천지를 손아귀에 넣고 그 권세를 휘둘렀을 때 예수 진리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그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산 속에 숨어야 했다. 정치건 종교건 손에 쥔 힘을 선용한 일이란 아주 드물다. 프로테스탄트교도 이제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과연 그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가. 우리나라의 농협이 잘 돼야 농민이 잘 산다는 그 이론을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교회가 번영해야 교인이 잘 산다. 하나님, 예수를 내걸고 교회는 어디서나 번영하고 있다. 어떻게 교회가 그렇게 번영하는가. 교인을 뜯고 사정없이 갈퀴 질 하기 때문이다. 공주 OOO 목사는 <성령폭발대성회>라는 플래카드를 교회 문 앞에 내걸고 대성회를 하는데, 시작하는 날부터 매번 그날 그 때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감사헌금을 내라고 봉투를 한 묶음씩 신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끝날 때 한꺼번에 하지 말고 그 시간 그 시간 봉투에 넣어 내라고 훈련시켰다. 뻔뻔스럽게도 돈 봉투 난에는 <기도제목>을 마련했다. 돈 봉투에 돈을 내면 그 기도 제목이 이루어진다는 것인지, 목사가 그 기도제목을 한 묶음 놓고 도매금으로 기도를 해준다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교회란 봉투 만드는 곳이다. 세계적으로 잘 긁어모으는 한국 세무서가 이런 교회에 대해선 아주 무력하다. 그래서 마음 놓고 긁어 들이는 것이다.”

 

종교개혁주일을 한 주일 앞둔 그 날 일기장에 류제경 장로는 교회에서 나눠주었다는 <성령폭발대성회 헌금봉투>를 잘라 붙여놓았다. 루터시대 면죄부처럼 말이다. 24년 세월이 지난 후 그걸 보고, 그날 일기를 읽으면서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내 얼굴이 얼마나 뜨거워졌는지 모른다.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런데 부끄러운 한편 쾌감도 느꼈다. 그것은 오염되지 않은 신앙양심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왜곡되고 훼손된 교회 현실 속에서 ‘참 진리’를 추구하며 ‘바른 신앙’을 실천하려 애썼던 신앙인들이 있었기에 한국교회가 망하지 않고 유지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한국교회사 속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예수로만 만족하며 출세와 명예 대신 기도와 헌신, 희생으로 일관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들이 희망의 근거다.

 

한국교회 희망의 근거

 

그러했다. 한국교회 종교개혁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한국교회 역사 속에 후스도 있었고 위클리프도 있었다. 사보나롤라도 있었고 발도도 있었다. 이제 루터만 나오면 된다. 작은 촛불들이 모여 거대한 횃불을 만들 때다. 골방에서 드리던 은밀한 기도가 교회의 비리와 부정을 고발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성전 문에 붙이는 망치소리로 바뀔 때다. 무너지는 교회의 굉음 대신 세워지는 교회의 망치소리가 들릴 때다. 교회의 잘못된 관행과 습관에 대하여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아니오.” 할 수 있는 ‘작은 루터’들이 나올 때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우선할 것이 있다. 밖을 향하여 개혁과 혁신을 외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가 증언하는 바, 참된 회개와 갱신은 언제나 나로부터 출발한다. 루터와 칼빈, 후스와 위클리프, 사보나롤라와 발도 등 개혁자들은 교회를 향하여 개혁을 외치기 전에 긴 기간 진솔한 회심과 영적 갱신, 극기의 경건 훈련으로 자기 정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들은 강단에서 선포한 말씀을 실천해 보임으로 삶에서 말씀의 권위를 증명하였다. 설교 따로 행동 따로가 아니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는’ 성육신의 삶을 살았다. 루터의 묘소는 그가 <95개조 논제>를 붙였던 비텐베르크성채교회 설교대 바로 아래 있다. 설교 자리가 무덤 자리가 된 것이다. 전하는 말씀에 목숨을 담보하였던 설교자의 권위, 그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이었다.

 

나는 이 글을 “오늘 한국교회에 희망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였다. 이런 질문과 고민을 안고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읽고 한국교회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희망은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5백년 주기로 반복되는 ‘무너지는 교회’와 ‘세워지는 교회’의 교차 패턴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와 함께 무너지면서 세워지는 교회의 과도기를 맞고 있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무너지는 교회를 보고 절망하거나 분노하기보다 세워지는 교회에 희망을 품고 기대할 것이다. 언뜻 보면 눈앞에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과 물질적 세속화로 무너지는 교회의 실망스런 모습이 판을 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노인들만 남은 시골 작은 교회에서, 사회적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소외된 지역에서, 견디기 힘든 열악한 목회와 선교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예수 진리’만 붙잡고 매일매일 공급되는 하늘의 만나로 얻은 감동과 감격으로 사역하고 있는 ‘작은 예수’ 목회자들이 있기에 그들로 인해 세워지는 교회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는 처음 세워질 때부터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사람의 조직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교회였다. 가끔 사람(목회자와 교인)이 교회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교회는 영원하다. 그러하기에 설혹 사람의 실수와 잘못으로 교회가 훼손되고 오염될지라도 아주 멸망시키기보다 심판하신(무너뜨린) 후 구원하시는(세우시는) 은총의 하나님인 것을 믿는다. 그런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믿기에 무너지는 교회 현실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세워지는 교회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무너뜨리는 것이 우리 몫이라면 세우는 것은 주님 몫이다. 이런 믿음 안에서 혼돈과 공허, 무질서와 절망에 사로잡힌 오늘 한국교회의 허상을 철저하게 허물고 신령과 진정의 새로운 교회로 다시 세우시는 창조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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