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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 목사는 한국의 사도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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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ㆍ2019-02-2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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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목사•강승삼 목사, '한국 최초 선교사 이기풍 목사' 특별대담

 

김명혁 목사(전 합동신학교 교장, 강변교회 원로)와 강승삼 목사(KWMA 공동회장, 전 총신대 선교대학원장)은 지난 21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도곡동 강변교회(담임목사 이수환)에서 “이기풍 목사의 회개의 기도와 사랑과 섬김의 영성을 염원하며”를 주제로 특별대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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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측부터 강승삼 목사, 김명혁 목사, 김철영 목사     ©뉴스파워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의 진행으로 열린 대담에 앞서 김 목사와 강 목사는 이기풍 목사의 삶과 사역에 대해 소개했다.

 

강승삼 목사는 “이기풍은 1868년 11월 2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기풍은 어려서부터 재치와 슬기가 특출하여 여섯 살 때 사서삼경을 외우고 12살 때에는 붓글씨로 백일장 장원에 뽑힌 바 있다.”며 “반면 그의 성품은 그의 조부의 직설적인 성품을 닮아 그는 어렸을 적부터 거세고 괄괄하고 적극적인 성품이어서 자기의 비위에 거슬려 보이면 참지 못하여 일을 내고 마는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다.”고 소개했다.

 

강 목사는 “이기풍이 24살 되던 해에 “생전 구경한 적도 없는 코 큰 사람”을 보았다. 신기한 생각으로 코 크고 체구가 큰 서양 사람이 자신의 눈에 거만한 몸짓으로 걸어가는 꼴을 보고 비위가 거슬려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가는데 그가 바로 Samuel A. Moffett 선교사였다는 것“이다.

 

이기풍은 마펫 선교사의 집을 확인하고 돌아가 석전의 명수인 친구 대여섯 명을 이끌고 마펫 선교사의 집 대문을 걷어차고 모아온 돌을 마펫 선교사의 집으로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고 기왓장을 부수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그가 우연히 장터로 지나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군중을 헤치고 가까이 갔더니 서투른 조선말로 복음을 전하고 있던 마펫 선교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돌을 던져 마펫 선교사의 턱에 맞췄고, 마펫 선교사는 피를 흘리며 거꾸러졌다.

 

이 이외에도 이기풍은 건축 중인 장대현 교회를 때려 부수고, 삼일 밤 예배를 인도하러 가던 마펫 선교사의 턱을 날카로운 돌로 상처를 내 흉터가 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강 목사는 “이기풍의 마펫 선교사 박해와 건축 중인 장대현 교회를 때려 부수고, 거리낌 없이 횡포를 부리고 폭력을 일삼던 중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기가 던진 돌을 맞고 쓰러진 마펫 선교사의 모습이 마음에 상처가 되고 뉘우치는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밥맛까지 잃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박해의 방식으로 성령께서 이기풍을 회심시켜 사용하시기 위하여 마펫 선교사와 만나게 하시고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인데 성령께서 그의 꿈속에 마펫 선교사의 돌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여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셨다.”며 “그리고 이기풍의 마음속에 마펫 선교사에게 사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품게 하셨다고 생각한다.”며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이기풍에 쓴 기록을 소개했다.

 

“이기풍은 1891년 평양 거리에서 나에게 돌을 던지며 박해하던 사람이다. 그는 그때에 영문의 아전(衙前)이었는데 원산으로 이사 가서 그곳에서 회개하고 1896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예수를 믿은 후 소안론 목사의 밥 짓는 사람이 되어 그와 함께 지방으로 순회 하고 열심을 다하여 전도에 힘썼다.”

 

이기풍 목사의 딸 이사례 권사가 이기풍의 회심 증언은 마치 사도 바울의 극적인 회심사건과 유사하다.

 

“갑자기 방 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다.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 이다.“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생전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아버지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콧물과 뒤범벅 되어 한없이 흘러내렸다. 과거에 지은 수많은 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나서 아 무리 가슴을 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통곡을 해도 이 죄는 누구에게도 사함을 받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강 목사는 “성령께서는 이기풍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셨다. 성령께서 그의 세계관을 변화시켰고 그의 삶 또한 변화시키셨다고 믿는다.”며 “성령께서는 그의 적극적이고 진격적인 성격과 기질까지도 사용하셨다. 마치 다메섹 도상의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자마자 증인이 된 것처럼 말이다.”고 밝혔다.

 

이기풍은 해가 뜨면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체력이 왕성한 그는 (30세) 피곤한 줄도 모르고 미친 듯이 예수를 증거했다. 그의 전도의 열정은 대단하여 잠시 머물고 있던 집에서 쫓겨날 만큼 극심했다. 성령의 특별역사가 아니면 어떻게 이러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강 목사는 “이기풍은 전도를 위해 이북의 여러 지역을 두루 다녔다. 해주에 머물며 전도하던 이기풍은 교인이었던 김구(金九, 1876~1949)의 모친을 알게 된 계기로 김구와도 친밀한 사이가 되어 김구 선생의 연락원 역할을 한때도 있었고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에 잠시나마 참여한 때도 있었다.”며 “그들은 같은 신앙을 가진 교인이요, 서로가 신뢰하는 관계였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강 목사는 "그래서 이기풍은 독립운동을 위해서 상해로 망명하려고 김구와 안창호를 따라 인천에서 배를 타고 몽금포까지 갔으나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이 너무나 심해 사경을 헤멜 정도가 되어 어쩔 수 없이 홀로 인천으로 돌아와 그들과 이별하게 되었다고 (딸)이사례가 증언하고 있다.”며 이는 성령께서 그를 전도자로, 그리고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셨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말했다.

 

강 목사는 “이기풍은 1899년에는 평양으로 돌아와 스왈론 선교사를 도우며 관북지방의 전도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901년에는 장대현 교회 장로 임직을 받고, 동시에 신학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마침내 1903년 봄, 조선 최초로 세워진 평양신학교에 입학한다.”며 “그의 적극적인 성품과 복음에 대한 열정은 신학교 4년 동안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는데 전 힘을 기울이게 했다. 드디어 제1차 한국교회 부흥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해 갔을 무렵, 1907년 6월 10일 장대현 교회의 뜰에서 역사적인 제1회 평양신학교 졸업식이 거행되어 7명이 졸업했다.”고 밝혔다.

 

특히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는 노회 3일째 되던 날, 전도위원회는 7인의 목사가 탄생한 기념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정했다.”며 “이기풍 선교사는 1908년 2월경 제주도에 도착하여 1915년까지 제주도에서 17년간 선교사역을 했다.”고 밝혔다.

 

강 목사는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선교전략을 NEVIUS 방법을 적용해 6가지 형태로 섬겼다.”며 “첫째, 이기풍 선교사는 인간관계를 중요시하여 그들의 필요(Felt-needs)를 채우는 섬김의 사역을 통해서 그들에게 진정한 필요인 예수그리스도의 복음(Real-need)을 제시했다. 그는 농번기에는 항상 그들의 농촌의 일을 도왔다.”고 밝혔다.

 

또한 “이기풍 선교사는 제주도 미신의 문화적인 인식을 이용하여 전도의 도구로 삼았다.”며 “청년들은 엽전을 돌려 뺑뺑 돌리다가 어느 쪽으로 넘어지면 운수대통, 또는 재수 없음이라는 일종의 점치는 게임을 했는데 그는 엽전을 돌려 ‘이쪽으로 넘어지면 그곳은 천국이요, 저쪽으로 넘어지면 지옥이다.’ 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설명해 홍순홍이 예수를 믿게 됐다.”고 밝혔다.

 

강 목사는 “이기풍 선교사는 홍수피해 지역에 구제 사역과 난민 섬기는 사역을 통해서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다.”며 “홍수로 떠내려가는 사람들 5명을 구조하고 난민구제 사역을 통해 제주도민들에게 칭찬이 자자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또 한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강 목사는 “이기풍 선교사는 조롱 말을 타고 순회 전도사역을 하며 그들의 일손의 필요를 섬기며 복음을 전하여 곳곳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제주도 사역 1년 내 11명의 회심자를 얻게 되었고, 제2회 독노회 보고에 따르면 원입 9명, 주일 출석 20명이 되었다.”며 “그리고 이기풍 선교사는 팀 사역과 남녀 연합 전도사역의 섬김을 통해서 선교의 결실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기풍 선교사는 성령의 치유 사역과 영적 능력사역으로 주님을 섬겼다.”며 “한 예로서 11세의 다리 장애인 제주 소년(의학적으로 치료 불가능 판정)을 이기풍 선교사가 7일간 기도 후 걷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교회는 환자들이 많이 찾아 왔다. 그는 성령의 능력과 기도로 축사사역도 섬겼다. 그 결과는 교회부흥의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김명혁 목사는 “이기풍 목사를 한국형 사도 바울”이라고 칭했다. 김 목사는 “이기풍은 선교사를 때려 눕힌 핍박자였다.”며 “그는 평양에서 유명한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1865년 12월 23일 평양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어릴 때부터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을 미워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이기풍은 서양사람들에 대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음흉한 계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미워했다.”며 “서양 사람의 한 사람인 쌤 마펫 선교사가 이기풍이 지배하고 있던 평양 거리에 들어와서 날마다 복음을 전하자 깡패 두목인 이기풍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기풍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마포 삼열 선교사의 말이 너무나 듣기가 싫어 그런 말을 못하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그의 턱을 부서뜨렸다.”고 밝혔다.

 

이어 “그러나 마포 삼열 선교사는 수 많은 핍박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끈질기게 전해서 그 이듬해인 1894년에는 22명에게 학습을 베풀었고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소개했다.

 

김 목사는 “마포 삼열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은인이었다.”며 “그는 턱에 돌을 맞고서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십자가와 사랑의 복음을 전한 결과 그는 한국에 이기풍 목사를 탄생하게 했고 길선주 목사를 탄생하게 했으며 나중에는 한경직 목사를 탄생하게 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이기풍 목사는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경험을 모조리 경험한 것 같았다.”며 “이기풍 목사님은 13년 동안의 제주도 사역을 통해 제주도에서 사탄 마귀의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비추게 했다. 3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1934년에는 제주도 독노회를 조직하게 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이기풍 목사는 13년 동안 제주도 성내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새벽마다 자기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면서 회개의 기도를 처절하게 드렸는데 새벽기도를 마친 다음 거의 한 시간 동안 울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고 그의 딸 이사례 권사가 간증을 했다. 이기풍 목사는 정말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경험을 모조리 경험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특히 “이기풍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순교자가 되었다. 그는 제주도 복음 사역을 마친 후에도 한국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 특히 전라도 복음화를 위해서 그의 남은 생애를 바쳤다. 광주에서, 순천에서, 고흥에서, 벌교에서, 여수군 남면에서,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에서 복음을 전했고 1927년에는 다시 제주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며 “평양 출신으로 이방과 같은 제주도와 전라도에 가서 평생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사도 바울과 같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고 하겠다.”고 평가했다.

 

이기풍은 일제가 1936년을 기점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정면으로 맞서서 투쟁했으며, 일제는 그를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1938년 체포해서 순천 감옥에 투옥했다. 그리고 그에게 갖은 고문을 가했다. 칠순의 노구로 당한 일경의 취조와 고문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순천에서 광주형무소로 이감되는 도중에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이기풍 목사는 1942년 6월 20일 77세를 일기로 사도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그의 마지막 생명을 순교의 제물로 주님께 드렸다.

 

김 목사는 “이기풍 목사님의 삶을 돌아보면서 한 사람의 생애와 운명이 예수님을 믿으므로 완전히 바꾸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 한다.”며 “기질도 습관도 운명도 완전히 바꾸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고 밝혔다.

 

이어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사회로 질의 응답이 진행됐다.

 

김 목사는 “마포삼열처럼 우리나라에서 파송한 선교사들도 선교지에서 박해와 핍박 가운데 맺어진 변화나 열매의 기록들이 있는가”를 물었다.

 

이에 대해 나이지리아 선교사를 역임한 강승삼 목사는 “한국 선교사님들의 경우 해외에 나가서 순직하신 분들이 많이 있다.”며 “순직과 순교 사이에 혼돈을 일으킬 수 있는데, 직접적으로 예수를 전하다 핍박을 받고 죽게 되면 순교이다. 하지만 선교하러 갔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은 순교가 아니라 순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기풍 선교사의 경우 순교로 보는 것이 맞다. 질병과 고령에도 전도를 계속 하다 일제에 의해 감옥살이를 하다 돌아가셨기 때문”이라며 “ 그의 믿음과 신사참배 거부 운동 등을 고려한다면 순교가 맞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명혁 목사는 “선교사들이 선교에 그치지 않고 모두를 끌어안는 사랑을 전했다. 이기풍 청년이 깡패들을 데려와 마포삼열이 건축하고 있던 장대현교회를 때려 부쉈을 때, 이기풍을 온유하게 대했다. 그랬더니 평양 시민들이 마포 선교사님을 존경하게 됐다. 선교사들은 교회를 세우기보다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가르쳐 주고 병원을 세운 다음에야 교회를 세웠다.” 며 “한국 선교사들도 선교지에서 진리만 외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끌어안고 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철영 목사는 네비우스 선교 전략이 한국 선교에서 구체적으로 채택되고 시행된 계기가 있었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강승삼 목사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중국에서 시작됐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네비우스가 한국 선교사 수련회에 초청받아 자신의 정책을 2주간 나누면서 선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 목사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교회 자립을 위해 적극 참여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했다.

 

강승삼 목사는 “성미 제도를 보면 목회자나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며 “여전도회에서 자발적으로 십시일반으로 ‘우리 목회자들 굶겨선 안 되겠다’며 집에서 밥을 지으면서 한 줌씩 떼어놨다가 교회로 가져온 것이다. 이런 제도들이 한국교회 자립에 큰 공헌을 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이기풍 목사님은 안창호 선생님을 존경해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려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국인 최초 7인 목사 중 한 분이고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인 길선주 목사는 3.1운동 때 33인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기풍 목사는 왜 참여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김명혁 목사는 “이기풍 목사는 독립운동 대신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라며 “요즘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이스라엘주의 등은 문제가 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회복보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더 중시했다. 민족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승훈 장로와 조만식 장로는 나중에 ‘예전에는 민족주의자였지만, 지금은 아니다’고 고백했다.”며 “해방 후에도 ‘일본놈이라고 하지 말고 잘 보내드려라’고 했다. 민족주의를 초월하신 분들이다. 우리 강승삼 박사도 이기풍 목사님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아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나셨다.”고 말했다.

 

강승삼 목사는 “공군에서 8년3개월 근무한 후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10년을 교편생활을 한 후 총신에서 공부를 했다. 그 때 김명혁 목사님으로부터 선교학을 배웠다. 그리고 졸업 후 나이지리아 선교사로 나갔다. 당시 한국에서 파송한 해외 선교사가 23명밖에 되지 않을 때였다. 선교사 사역 후 돌아와서 총신대에서 선교학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강 목사는 “이기풍 목사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것은 전적인 성령의 간섭이었을 것”이라며 “이기풍은 김구·안창호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떠나려다, 배에서 복통이 심해 중간 몽금포에서 내렸다. 독립운동보다는 ‘복음운동’을 하라는 섭리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철영 목사는 “이기풍 목사가 개척한 제주성내교회의 기록에 의하면 1915년 12월 성탄절에 주민 3천여명이 모였다고 한다.”며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청년들의 미신적인 놀이 방식을 오히려 역으로 천국과 지옥의 실존을 설명한 것은 ‘문화 선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강승삼 목사는 “이기풍 목사님은 선교 훈련을 하거나 관련 선교 과목을 수강하지 못했지만 훌륭한 선교 방법을 사용했다.”면서 “(제주도의 여자들이 바다로 일하러 나갔을 때) 남자들이 밭에 나가 일하고 있을 때 농기구를 들고 같이 일을 도우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선교를 했다.”고 말했다.

 

강 목사는 “아프리카 선교 당시 물이 없는 지역에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우물을 파 주면서 마음 문을 열게 했다.”며 “사람들의 필요를 제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가교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명혁 목사도 “미국에서 8개월간 안식월을 보낸 적이 있는데, NGO와 함께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우물의 필요를 보고 전 세계에 편지를 보내 우물을 많이 파 줬다.”며 “직접적으로 전도를 하진 않았지만, 그들 마음에 감동이 있었다. 필요를 채워주면 마음이 자연스럽게 주님께로 돌아오게 된다.”고 말했다.

 

김철영 목사는 “이기풍 목사의 제주 선교 모델을 보면서, 오늘날 목회자들이 어떻게 지역 주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친구가 되어주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를 질문했다.

 

이에 대해 강승삼 목사는 “선교사 훈련에 있어 강조하는 것은, 어디에 가서도 계속 선교할 수 있도록 기술 하나씩은 익혀서 나가는 것”이라며 “성경과 제자 양육에 전문가가 됐지만, 만약 교회에서 후원이 끊어지더라도 계속 선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며 사도 바울과 같은 텐트메이커로서의 준비를 당부했다.

 

김철영 목사는 “이기풍 목사에게 마포삼열과 스왈른 선교사가 있었듯 두 분의 신앙에 있어서도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신 분은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다.

 

김명혁 목사는 부친이자 순교자인 김관주 목사를 제일 먼저 꼽았다. 김 목사는 “아버지는 신의주와 평양에서 목회하시며 감옥을 오가다 순교하셨다.”며 “평양에서 배웠던 주일학교 선생님 세 분도 저를 기특하게 보시며 주일성수와 새벽기도, 순교신앙 3가지를 배웠다. 월남 후에는 이성봉 목사님 부흥회에 중학교 3년간 12번이나 참석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후에는 김치선 박사님에게서 매일 눈물로 기도하는 회개와 은혜의 삶을 배웠다. 멀리는 주기철·손양원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신 박윤선 목사님을 들 수 있다. 박 목사님은 타교단 목사도 강단에 세우신 폭이 넓으신 분이었다. 이밖에도 부드럽고 따뜻하신 정진경·방지일 목사님 같은 분들로부터 배웠다.”고 말했다.

 

강승삼 목사는 신앙을 도전 받은 인물은 아버지라고 말했다. “저는 할아버지, 아버지로 이어지는 3대째 신앙이었다. 지금은 손자들까지 5대째 신앙이 됐다.”며 “제가 1960년대 군대에 입대해서 첫 휴가를 나왔는데 아버지가 저를 꿇어앉혔다. ‘엄마랑 내가 셋째 너를 하나님께 바쳤으니,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하필이면 왜 저냐고 하면서 다른 길(공군, 교사)로 갔지만, 결국 ‘내가 요나다’라는 마음에 부담을 주셔서 신학을 하게 되었고, 선교사로 나가게 됐다.”고 밝혔다.

 

강 목사는 “조동진 목사님의 동서선교연구센터에서 훈련을 받았다. 당시 가장 감동을 준 책이 <선교의 횃불을 밝힌 사람>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순교하신 분의 이야기였다. 귀족 출신으로서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거리에서 전도하다 스데반처럼 순교하신 것”이라며 “그 내용을 읽으면서 무슬림 선교를 꿈꾸게 됐고, 결국 서부 아프리카 무슬림 지역으로 가게 됐다.”고 고백했다.

 

김철영 목사는 “제주 성내교회 마당에는 이기풍 목사, 김재원 장로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며 “제주도 이호리에 사는 김재원이라는 청년이 1903년 몸이 아프자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서울 제중원에 왔다. 거기에서 치료를 받고 회복되었고 에비슨이라는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었다. 그리고 성경을 공부했다.”고 밝혔다.

 

이어 “김재원 청년은 1905년 제주도로 내려와서 자신의 집에서 신앙공동체를 시작했다.”며 “그리고 모이는 숫자가 늘어나자 에비슨 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내서 지도 목회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제주 선교는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도착하기 전에 김재원 청년을 중심으로 한 이호리공동체가 시작”이라고 밝혔다.

 

김 목사는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사역에 김재원 장로가 함께했다.”며 “오늘날도 목회자와 장로들이 이기풍 목사와 김재원 장로와 같은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현성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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