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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원 목사 "여성 안수에 대한 성경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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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ㆍ2022-09-13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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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안수에 대한 성경적 이해 
서창원 목사(현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장, 전 총신대신대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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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안수에 대한 찬반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서구교회에서 유입된 자유주의 신학 논조는 한국의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고 결국 1955년 가장 먼저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여성안수를 실시했다(전밀라, 명화용 두 여인을 목사로 세움). 그 이후 1995년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교단이 여성안수를 허락하였다. 그 이후로 대부분 한국의 교회에서 여성에게 안수를 허락하고 있고 많은 여성이 목회 일선에서 일하고 있다. 다만 대표적으로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합동측, 고신측 및 합신측만 여전히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교계 안팎에서 안수 허용해야 한다는 거센 요청이 매번 몰아치고 있어서 자칫 이 세 교단 중 어느 한쪽이 조만간에 무너질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는 분들도 증가하고 있다. 실지로 합동측 내에서도 여성 안수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상당히 많은 공을 들이는 상황이다. 

이미 보수적 교단의 신학적 입장은 분명하다.여성안수 불가는 시대적 정황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인간이 고안한 계율이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 장벽을 허물고자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거친 상황에서 여성안수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고찰하는 것은 매우 절실한 문제이다. 원래 진리는 시대마다 반복적으로 선포되고 가르쳐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지난 2000년 동안 시도하지도 않았던 여성 안수를 이제는 마음껏 허용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교회는 이에 대한 성경적 지침을 분명히 규정하고 제시할 책임이 있다. 그런 취지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평생 개혁주의 신학을 전수하고 옹호하는 한 사람으로서 여성 안수, 과연 비성경적인가? 혹은 성경적인가? 이에 대한 확실한 교훈을 제시하고자 본 논고를 작성한다. 독자들과 성도들의 이해를 돕고자 매우 단순하게 접근한다. 여성안수를 적극 주장하는 자들의 근거가 무엇인지, 그리고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강조하며 반대하는 자들의 주장을 통해서 성경적인 올바른 교훈을 확실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1. 찬성론자들의 견해 

일반적으로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은 현상은 남성 우월적인 가부장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성차별이요 여성에 대한 억압이라는 항의이다. 전통적으로 금녀의 영역에까지 여성들이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는 사회 현상을 앞세워서 이제는 교회도 여성들에게 안수의 문턱을 없애야 한다고 항변한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2:11-15 말씀이나 고린도전서 14:34-36의 말씀을 근거로 반대한다는 자들의 입장에 대해서 반박하는 찬성론자 중 한 사람인 한국염 목사는 "성서는 분명 여성을 사사로, 예언자로, 제자로 인정하고 있다. 바울의 글 앞뒤나 문화적 배경을 헤아리지 않고 일부만 보고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과 김세윤 목사는 사본학을 들어서 어떤 사본에는 없다고 하면서 바울의 글이 아니라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서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가부장제에 물들어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구절들만 들이댄다며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무줄처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될 수 있다’ 면서 ‘성경적’이라는 말이 꽤 위험하다고 말한다(이광우 목사, 뉴스엔조이, 7월 29일자). 

또 찬성론자들의 입장은 사회 현상에서 여성 지도자들의 두드러진 활약상, 심지어 과거 남성 전유물이었던 분야에 많은 여성이 진출하여 활약하고 있다는 점, 사회 정의 실현 차원에서 남녀 차별을 없애고 성직도 동등하게 여성에게 허락되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Church of Scotland), 스위스 개혁교회, 미국 연합 장로교회(PCUSA)나 2016년 화란의 개혁교회(NRC)가 여성안수를 허락한 사례 등을 앞세우고 있다. 그리고 교회 구성원들의 절반 이상, 심지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여성인데 교회의 모든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의견이 배제되어 실시되고 있는 것은 불평등의 구시대 악으로 규정하고 허용을 촉구한다. 여성 실천신학자인 K교수는 여성의 인권과 성인지 감수성에 비추어서 교회 직분과 교회 정치 이론을 주장하는 글에서 ‘교회법에 여성에게 동등 대표직과 교회 헌법 개정 권한 그리고 여성할당제 비율을 명시함으로써, 직분의 젠더 공평과 여성 대표자의 법 이론과 법 실행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뤄지도록 교회법 개정을’ 촉구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목회 리더십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신앙적 모범이 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권위가 부여된다는 특징을’ 갖는다면서 이 권위가 남성에 의해서 독점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세우고 섬기는 역할을 감당할 지도자의 자격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남녀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신학과 사회, 36권, 2022, 269-306 참조). 

찬성론자들이 내세우는 또 다른 근거로 구약시대에 눈부신 활동을 했던 특별 여성 일군들이다. 예를 들어서 선지자라는 칭호를 가진 미리암, 훌다, 사사 칭호를 받은 드보라, 신약의 선지자 안나와 빌립의 네 딸에 대한 근거를 내세워서 여성들도 사역의 길을 허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신약에서 부활을 처음 목격하고 알려준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들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은 유니아, 성경에 능한 아볼로를 가르친 브리스길라 등의 사례를 들어서 여성에게도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공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그들은 만인 제사장 제도를 언급한다. 만인 제사장 원리를 가지고 반드시 목사만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다 설교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런 주장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쓴 서신에서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12:29-30)고 피력하며 은사의 구별이 있음을 언급한 것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부적절한 논리이다. 그리고 특수한 환경에서 허용된 것을 보편적 원리로 규정하자는 주장이다. 

교회 질서는 구별을 차별로 오해하고 오역함에서 무너지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통한 남녀 차별의 근거로 삼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 역시 무지한 까닭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위는 지위와 권능에 있는 동등하나 역할 분담이 분명한 구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성부가 성자는 아니다. 성자가 성령도 아니고 성부도 아니다. 성부는 성부요 성자는 성자이며 성령도 성령이다. 루터가 주장한 만인 제사장은 성직자와 평신도 계급으로 차별시킨 로마가톨릭의 사제우월주의를 배격하고 남녀 차별이 없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직접 아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누구나 다 제사장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다 목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은사의 구분은 명백하게 존재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마리아를 물리치지도 않고 동석하게 한 것과 12제자의 수에 가입하는 것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여성이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안수를 받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또 찬성론 자들은 교회 내의 실용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며 주장한다. 일단 신학교를 졸업하는 학생 중 10%~15%가 여학생들이고 이들은 같은 등록금을 내고 같은 교수들 밑에서 같은 과목들을 이수하고 있고, 종종 남학생들에 비해 월등한 성적으로 수업을 마쳤어도 졸업 후 대우는 천지 차이가 난다면서 같은 직급에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길은 여성들에게도 안수를 줘야 해결된다는 견해다. 이러한 주장들은 단순 비교만 놓고서 현실적 상황에 적응하는 유연성을 가지는 것이며 이는 성경의 교훈을 헤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화하는 것이라고 피력하는 것이다. 특히 우수한 여학생들을 배출해 놓고서 안수를 주지 않음으로 군대의 특수 상황에 요구되는 여성 군목을 배출하지 못하여 군 선교에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과 다른 군소 교단으로 이적하여 안수받고 활발하게 일하고 있는 보수 교단 출신의 여성 목사들을 열거하며 공들여 양육해 놓은 일군 뺏기지 말고 우리 안에서 활동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매우 일리 있고 타당한 논리를 펼친다. 그리하여 그러한 실용적 대안에 수긍하는 목회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다 일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는 것은 반대하지만 강도권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군 선교와 해외 선교 현장에서의 필요성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사도나 장로로 임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브리스길라, 뵈뵈, 유오디게와 순두게, 유니아 같은 여인들은 사역자로서 ‘활동했을 수도’ 있다는 추정을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역사적 증거를 가지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 있는 칼빈대학교의 Y 교수가 펼치는 것은 사사기에 등장하는 드보라의 경우 그녀는 ‘정치지도자요 영적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강도권이 있는 사역자’라는 것이다. 그는 필자의 ‘여성 사역에 대한 성경적 조망’이라는 글에 언급한 것을 인용하면서 필자도 ‘예외적인 상황에서 여성 사역자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바울이 언급한 유니아(롬 16:7)를 크리쏘스톰이 ‘사도라 불릴 가치가 있었다’고 평가한 것과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았다’(개역성경),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개역개정)를 사도들 그룹의 회원을 뜻한다는 어느 학자의 설명을 근거로 유니아가 사도였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Y교수의 성경 해석은 보편적이지도 않고 잘못되었다. 특히 디모데전서 2:13을 남성이 여성보다 먼저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주장하면서 짐승들이 먼저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느냐라고 비아냥대는 비약적 추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주관적이고 미리 정해진 결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아전인수식의 논리전개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주장은 무엇인가? 

2. 여성안수 반대 주장의 근거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자들이 주로 제기하는 근거는 첫째 여성안수는 창조 질서에 위배 된다는 견해이다. 찬성자들이 공격하는 차별 문제가 아니라 구별 문제로 보아야 하고 우열을 가리는 문제가 아니라 창조의 질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 서신에서나 디모데 서신에서 여성에게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은 옛날의 시대 상황에 주어진 시대 제약적인 말씀으로 돌릴 수 없다고 하면서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그 후에 하와를 만드셨다는 것을 예로 든다. 한마디로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당시 문화적 상황이 남성우월주의가 강력한 시대였기 때문도 아니라 인간이 타락하기 전, 하나님의 창조 질서 때문이라는 것이다. 먼저 지음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여성보다 월등한 특권을 지녔다고 아무도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창조된 재질로 따지면 여성이 남성보다 월등하다. 남자는 흙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여성은 남성의 갈비뼈로 지음을 받았다. 고신대 변종길 교수는 ‘이러한 바울의 교훈은 여성을 무시하거나 차별해서가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음을 이미 분명히 밝혔다(갈 3:28; 고전 12:13, 11:11, 롬 3:22).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정하신 남성과 여성의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가정을 보호하고 가정에 평화를 주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여성 안수는 창조질서에 위배’, 작성자 패인초). 

이광우는 성경을 ‘그 시대의 문화 역사적 바탕 위에서’ 진리의 말씀을 주셨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라는 것을 시대적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폄훼함으로 얼마든지 시대적 정신과 흐름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 그가 안수 허용이 성경적이고 안수 불허 역시 성경적이라는 상반된 주장을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한 마디로 성경이 전혀 상반된 두 이론을 제시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이 서로 모순된 주장을 한다고 비약할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원리는 누구도 변경할 수 없다. 성경에서 우호적인 입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떤 부분을 옳다고 입증하려면 성경의 다른 곳에서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개연성을 확실한 이론으로 말하려면 성경의 다른 사례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어야 한다. 특수한 상황에서 여성 리더십이 허용된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되려면 신약성경, 특히 바울의 목회서신에서 여성들이 교회 직분자로(office?bearer) 세움을 받는다는 근거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안수의 허용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못해 아예 없다고 해야 한다. 특수한 상황에서 허락된 것을 보편화시켜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1:5에 있는 것을 잠시 보자: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이광우의 주장에 따르면 여기서 ‘예언한다’는 것은 곧 설교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말씀과 완전히 모순되는 주장을 성경이 하고 있다는 말이다. 머리에 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여성의 머리가 남성이라는 고린도전서 11:3의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머리에 쓴 것을 벗는다는 것은 누구의 권위 아래에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 즉 여성의 머리로 세우신 남성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의미는 여성이 기도하든 예언을 하든 교회의 남성 지도력의 권위 아래에서 수행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강조점은 여성이 교회에서 기도나 예언을 하는 그 행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남성 지도력의 권위 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디에서도 남성우월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가르침도(엡 5:22)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말씀하는 것이며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하나님이 규정하신 원리이지 남성우월주의 집단 지성에 의한 여성 폄훼 혹은 여성 굴종이나 하대를 깔고서 언급한 것이 아니다. 성경 저자는 비록 인간 저자의 손을 빌려서 작성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이다. 오류나 모순이 있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더욱이 정경은 어느 특정인 학자의 주장에 의해서 변경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경 자체는 정경으로서의 권위가 있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 66권이 잘못된 것이고 나중에 발견된 사본에 따라서 수정되어야 할 명백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최영숙 교수에 의하면 사본학에서도 고린도전서 14장의 텍스트는 바울의 원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신현우 교수는 이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언급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교회의 주장과 가르침이 오류가 있는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다 이단이라고 생각해 왔고 앞으로도 그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3. 성경적 근거와 대안 

여성 안수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공통적 오류는 첫째 교회가 세상과 다른 존재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신률(jure divino)로 다스려진다. 반면에 세상은 국법으로 통치된다.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임이다. 이 교회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적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영적 가치와 기준이 교회 제도와 근간이다. 국법은 통치권자의 의지와 국민의 열망에 의한 민주적 결정으로 변경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은 교인의 총의(總意)로 혹은 교단의 총회에서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법과 신률이 충돌될 때 교회는 성경의 우선권에 따른다. 교회 제도 변경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둘째는 성경은 시대적 문화의 흐름과 사상에 의해서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이 가능한 책이 아니다. 성경은 시대를 초월한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도 없으시기에 구약에서 약속한 것을 신약에서는 완전히 뒤바뀌게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안식일이 주일로 변경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창조의 완성을 기념하는 안식일과 구원의 완성을 기념하는 주의 날 차이에서 이해하지만, 안식일 준수의 원리는 주일 성수의 원리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교회는 구약과 신약에 이어지는 연속선상에 있는 것은 맞아도 신약시대에 와서 비로소 출범한 것이기 때문에 사도들의 규정이 신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 제도도 지금의 시대하고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배척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수정안을 삽입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시대, 모든 족속에게 적용하는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을 파괴하는 심각한 죄악이다. 이것은 곧 성경의 충족성을 믿지 아니하는 증거가 된다. 인간 누구도 성경을 기록할 주도권이나 마무리할 결정권도 없다. 기록된 말씀 밖을 넘어갈 수 없다(고전 4:6). 

특히 여성안수를 불허해야 한다는 전통적 입장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근거 구절로 즐겨 사용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에 대해 최영숙 교수는 자기 논문에서 여성만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14:28에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잠잠하라’(σιγ?τωσαν)는 것과 30절에 계시를 말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계시를 말하게 되면 먼저 하던 자가 ‘잠잠하라’는 말씀, 그리고 34절에서 여성들이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처럼 잠잠해야 할 대상이 각각 세 부류이다. 즉 방언을 말하는 남성과 여성, 예언하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여성이다. 그런데 앞의 두 부류가 교회에서 침묵해야 할 상황이 분명하나 34절은 어떤 상황에서 잠잠해야 할지 말하고 있지 않다. 34절의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면 여성이 교회에서(공적 모임에서) 잠잠해야 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최영숙은 이것은 ‘바울이 방언과 예언하는 사람들에게 주었던 교회의 지침을 말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이 방언이나 예언을 할 때 교회의 지침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서 최영숙은 여성이 방언 특히 예언(설교로 이해하고 있음)을 거부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교회의 세움을 위한 긍정적인 참여’를 권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이 글에서 분명한 것은 문화적 명령에 의한 권면이 아니고 바울의 주관적 여성 편력에 의한 지침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서 후세에 어떤 필사자에 의해서 첨가된 것이 아닌 바울의 서신 원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질서를 위하여 여성도 얼마든지 교회의 지도력의 권위 아래에서 기도나 예언을 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런 맥락에서 35절의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는 말씀도 여자가 교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 기도나 예언 자체를 말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고 적용할 때 고린도 교회 여성 ‘모두’가 무질서하게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언한 것이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질서대로, 남성 지도력의 권위 아래에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방언도 예언도 한 여성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본문은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도”’라고 하지 않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디모데전서 2:12과 연계시켜서 해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자도”라고 했으면 여성 사역자의 은사 활용이 교회 안에서 질서 있게 실천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이라고 한 것은 헬라어 α? γυνα?κε?는 영어로 the women, 즉 그 여성들로 번역이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방언과 예언을 서슴없이 사용한 그 여인들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35절의 ‘여자’는 γυναικ?로 단수로서 영어의 a woman, 여자이다. 그런데 헬라어 용법상 뒤에 남편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와 짝을 이루어 ‘구나이키’를 여자가 아닌 ‘아내’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보편적으로 남편을 둔 아내는 남편에게 물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한편 고린도전서 14:34-35은 교회에서 기도와 예언을 허용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1:5과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현우 교수의 관찰은 서로 모순이 없기에 14장의 본문은 필사자의 삽입으로는 본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14장은 ‘기도나 예언을 금하는 구절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여인(부인)들이 (성경 강론 시간에, 또는 방언이나 예언 시간에) 질문하는 것을 금하는 것임이 35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여기에서 사용한 헬라어 λαλε?ν(말하다)는 방언이나 예언을 말하는 것으로 적용할 수도 있겠으나 35절에서 여성들이 질문할 것이 있으면 그들의 남편에게 ‘물을찌니’(?περωτ?τωσαν)라는 것을 보면 34절의 ‘저희의 말하는 것’은 방언이든 예언이든 질문할 것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다.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의 지도력에 들어가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 성경을 해석하고 전파하는 일을 금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디모데전서 2:12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διδ?σκειν δ? γυναικ?)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라”는 말씀과 일관성이 있는 것이며, 여기에서도 가르치는 일은 그다음 3:2에서 장로(감독)의 자격 중 ‘가르치기를 잘하며’(διδακτικ?ν)라는 자격 규정으로 설명한다면 여성은 어떤 경우에도 교회 직분(직책)을 맡음이 없는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셋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 총회에서 목사를 안수받을 때 서약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교단을 탈퇴하거나 안수 때에 아니라고 분명히 대답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교단 내에서 버젓이 목회하면서 교단 내 중요한 직책까지 맡아서 서약한 내용과 정반대되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자기가 속해 있는 단체의 근간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짓이다. 이는 반드시 교단적 차원에서 성경과 교회법을 위반한 권징의 대상이 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는 말이 있듯이 교단의 신학적 기조 자체가 오류라고 확신한다면 목사 임직을 받을 때 한 서약을 깨고 교단에 사직서를 내는 것이 옳다.그리고 허용하고 있는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낫다. 

물론 이렇게 주장하는 것도 사실 공격받을 구멍은 있다. 교단의 헌법적 가치와 교리적 교훈, 및 예배 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승낙한다고 서약만 했지, 실질적으로 지교회에서 행하는 가르침과 예배 및 기타 여러 일에 있어서 서약한 내용을 파기하는 일들은 여러 방면에서 벌어지고 있음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그에 대해 어떤 제재도 하지 않으면서 왜 여성안수만 성경적이지 않다고 문제로 삼느냐는 항의에 솔직히 얼굴만 화끈거린다. 솔직히 말해서 사문화된 것과 다름이 없는 목사 안수식과 교회 임직식에서 서약하는 부분은 앞에서 지적한 K교수의 주장처럼 수정하든지 아니면 변경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적이기에 반드시 지키도록 강화하여 개혁교회의 특성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여성안수를 금하고 있다는 것이 교단의 자랑이 아니라 임직식에서 서약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또한 여성이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는 경우도 이는 명백한 현대교회의 잘못이다. 나는 이것이 당대 고린도 지역의 문화였기 때문에 현대 문화에 맞지 않아서 강조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 본 적이 없다. 과거에는 절대다수가 다 결혼하였다. 그래서 남편의 권위 아래에 있는 여성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머리에 두건을 쓰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세속주의 영향을 받아 현대교회가 하지 않을 뿐이지 당대의 문화적 요소였기 때문에 안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지금도 머리에 두건을 쓰게 한다. 그런 면은 천주교가 더 성경에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성이 머리에 두건(모자)을 쓰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영국의 개혁교회 여성도들은 지금도 주일 예배 시간에 모자를 쓰고 나온다. 

마지막으로 여성 안수 허용론자들의 주장과 관련하여 단 한 가지만 그들이 분명하게 대답해 준다면 나도 여성에게 안수의 문을 열어주자는데 동의할 것이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인가? 디모데전서 3장 2절과 디도서 1:6절 말씀에 등장하는 감독 혹은 장로의 자격이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μι?? γυναικ?? ?νδρα)라고 규정한 것을 누가 무슨 권위로 ‘한 남편의 아내여야 하며’라고 변경할 수 있느냐? 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여성 안수 허용을 주장하는 자들의 글을 접할 때 단 한 사람도 이 구절을 언급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친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의 성경에는 이 구절이 없는가 보다.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하고자 인용한 성경 구절들에 대한 재해석 및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났던 일들, 단지 교회 지도자로 활약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서 여성 안수 허용을 앞세우지만 왜 안 되는지 자격 규정에 대한 바울의 목회서신에서의 지적은 함구하고 있다. 

안수하여 교회 일군으로(office bearer) 세운다는 것은 남녀 성별 차별이나 은사의 보편성이나 요엘서에 있는 남녀 종들과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에 대한 것을 앞세워 여성에게도 안수해서 교회의 일군으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별개의 문제이다. 솔직히 성경 해석에 대한 자신들의 무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교회 직분자를 설명하는 문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수 허용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말씀도 아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유대인의 국수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범우주적 기독교임을 확증하는 것과 구원의 적용과 확신에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왔다가 오순절 성령 체험을 한 모든 사람, 베드로의 한 번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은 3천여 명의 사람이 다 목사나 장로가 된 것이 아니다. 구원의 은총은 국적과 피부색을 초월하여 온 땅에 미칠 큰 기쁨의 소식임을 확증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는 하나님의 왕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에는 탁월한 여성 그리스도인이었을지라도 안수하여 교회 일군으로 세웠다든지 사도들에 의해서 특별히 사도나 선지자나 장로나 집사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20세기에 벌어진 여성 안수에 대한 논의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여서 인간에게 인권과 평등사상 및 성인지나 여성 해방 차원의 세속적 가치관으로 성경 해석과 적용을 얼마든지 수정 보완할 수 있다고 허락하신다고 생각하는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뜻은 일정하시어 누구도 변경할 수 없다. 아들의 보배로운 피로 값주고 산 교회를 위한 일군을 세우심에 있어서 교회의 필요가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이 여성의 자질과 능력을 완전히 무시하고 왕성한 활동을 억압하시고 있는가? 그래서 시대 조류에 발맞춰가고 선도하는 선각자들의 열렬한 활동으로 지금까지 억누르고 있는 그 억압을 풀어줌이 여성에게도 목사 안수를 허용하자는 이유인가?

진짜 자유는 참 진리를 아는 것이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목양의 무거운 짐을 연약한 그릇에게(벧전 3:7) 얹혀줌이 여성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여성이지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주님의 명령은 교회의 직분자로 세움을 입은 감독 혹은 장로에게 주어진 직무이다.

그런데도 여성 사역자 위원회가 2019년 5월 목장 기도회 때 “목사 340명, 장로 228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질문서에서, “목사 92.9%와 장로 92.85%가 ‘여성 군목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으며, 여성 강도권 부여에 대해서도 “목사 82.6%와 장로 82.34%가 찬성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성경에 없는 것을 여론조사로 결정한다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큰 죄악이다. 찬성한 분들의 성경관과 교회론에 심각한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곳에서는 들을 귀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이다. 

한편 여성안수를 주지 않음으로 자질이 뛰어난 여성 일군들을 빼앗긴다는 것과 교회 성장을 위축시킨다는 논리는 타당한가? 1995년부터 여성 안수를 허락한 통합측 교단이 합동측 교단보다 교회 수가 더 많고 성도 수도 더 많은가? 서로가 장자 교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 수나 교인 수를 비교해보아도 1995년 이후로 통합측이 합동측을 능가하였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여 군목이 없어서 군 선교에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다는 현실적 상황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 군목을 배출하고 있는 감리교나 통합측과 같은 교단이 군 선교에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 지엽적인 측면에서 분명 단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시적인 차원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인 것이다(시 25:10). 주님의 인자하심과 진리를 맛보는 길을 택하는 것이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가 갈 길이다. 

나는 이참에 여성 사역자들, 특히 군 선교와 관련하여 교단적 차원에서 해결할 방안을 하나 제시한다. 현재 해외 여러 선교지에서 여성 선교사들의 활발한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목사 안수 없어도 아이들이나 젊은이들, 혹은 여성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들에 사명감으로 종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과 교단의 헌법적 가치를 소중히 지켜가며 군 선교에도 일정한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군 선교사>로서 여성 사역자를 파송하는 것이다. 그들도 군목들이 가는 과정을 거쳐서 임관하는 길을 열어주되 교단적으로 목사가 아닌 ‘군 선교사’로서 군인들을 돌아보는 군목(軍牧)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자. 군 선교사라는 직책으로 타교단의 군목들과 얼마든지 협력하며 군 선교에 이바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는 결코 여성을 억압하거나 차별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합동측 교회 안에서 실질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억압과 차별(대우와 지위 면에서)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몇 가지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본다. 

첫째 교회에서 여 교역자에 대한 처우개선이다. 여 교역자를 남 교역자와 대등하게 대우해야 한다. 학교에서 대체로 남자 신학생들보다 여학생들이 공부를 잘한다. 그런데 졸업 후에는 자기보다 실력이 뒤처졌던 남성 사역자가 목사가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더 나은 대우를 받으며 그 밑에서 조력하는 정도의 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여성 사역자에게는 불만이 가득 쌓여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의롭지도 못한 그러한 불공평한 차별을 없애고 교역자로서의 동등한 대우(사례비 포함), 그리고 동등한 권위를 지닌 일군으로 세워주는 것이 필요하다.신학훈련이 없는 여성도 중 사회적 신분이나 경력을 가지고 교회의 여성들을 인도하는 일군으로 세우는 현상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보다는 신학훈련을 전문으로 받은 여 교역자를 충분히 활용하여 교회를 온전히 세워가는 일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함이 효율적일 수 있다.

안수 행위와 남성 사역자가 하는 업무 상당한 양을 여성에게 하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역할 문제가 아니라 직분 문제는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것에 한정되고 더욱이 안수 행위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임하는 도구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직분자를 세우는 방식의 일환이었다면 성경에서 사도들과 늘 동행했던 여인들, 그들이 누구든 안수하여 세운 증거는 없지만, 남성 사역자가 하는 업무와 중복되는 일들을 감당했다. 이 부분은 성경에서 말하는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다룰 때 언급할 것이다. 

둘째, 목회 비서 역이나 교회 심방 사역에 남성 사역자들의 수행원으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지위와 권위를 지닌 동역자라는 인식을 교역자들만이 아니라 교인들도 새길 수 있어야 한다.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대상이라거나 목회 전반에 걸쳐 어떤 의견도 개진할 수 없는 침묵 수행원이 아니라 교회의 당당한 일군이라는 자의식과 공동체 인식 개진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상당수의 여성 사역자들이 학교 졸업 후에 영적인 것만 아니라 지성적인 측면에서 자기 수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여성 사역자를 열등한 위치에 서게 하는 일을 방지하고 그들에게도 남성 사역자들 못지않게 필요한 신학훈련과 영적 자질을 고취해 나가도록 교회가 충분히 배려해 줌이 필요하다. 

셋째, 신학대학원에서 여학생들을 선발할 때 목사 안수를 받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는 것이 좋다. 물론 이것이 타교단으로 이적을 방지하는 대책은 아니지만 성경적이지도 않고 교단의 헌법적 기준에 맞지 않는 여성안수에 대한 문제 제기를 방지하는 방안은 될 수 있다. 그리고 첫째 제안에 이어 동시에 학교를 졸업한 여성 중 교회 사역에 전념하는 사역자에게는 전임사역자로서의(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원) 법적 지위를 보장해 줘야 한다. 이를 위하여 최소한의 총회 고시부에서 실시하는 강도사 고시에 준하는 자격시험을 거치게 하고 이에 합격한 자만이 전임사역자로 임명되도록 하자. 이는 양질의 학습을 거치지 않고도 지방신학교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졸업한 여성들도 여전도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과 구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역하는 동안 교역자로서의 신분을 보장해 주고 은퇴 이후에도 연금이나 퇴직금을 통해서 노후를 염려하는 일이 없도록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할 것이다. 여성 사역자에게는 임직식이 없어서 교단이 목사에게 요구하는, 심지어 여성직분자(예, 권사취임)에게까지 요구하는 정치 15장 10조에 서약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총신에서 수학했어도 교단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보수하며 계승해나갈 의무가 없다. 타 교단으로 이적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제재할 근거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나 교단이 인준하는 신학교를 졸업한 여성 사역자들에게도 의무적으로 임직식 서약을 하게 함으로 훗날 신학적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에 합당한 권징을 시행하는 것이 옳다. 남성 사역자와 비교하면 교단을 넘나드는 일이 매우 자유스러운 여성 사역자는 신학적 규례에 매이는 것도 없고 목회 윤리적 책임으로부터도 자유인으로 살기 쉽다. 무조건 여성 사역자의 지위와 신분 보장 및 처우개선을 마련하기보다는 그에 맞는 자격을 갖추는 객관적 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4. 성경에서 언급하는 여성의 역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원리에 비추어보면 교회의 덕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할 때 성립된다. ‘은혜나 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인간의 위안을 위해서 역사하는 예외적인 은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좋게 하려는 편리적인 발상을 교회가 한다면 주님이 피 흘려 세우신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적인 사교 집단이 되고 말 것이다.’ 여권신장운동은 여성의 권익 찾기와 보호를 가장한 세속주의 운동이요 주님의 거룩한 말씀의 교훈과는 다른 것이다. 개혁교회는 단 한 번도 여성 차별한다든지 여성을 억압하는 비난을 받는 가르침을 한 적이 없다. 여성 편력증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구든지 다 하나임을 굳게 믿는다. 우월적인 존재도 열등한 존재도 없다. 다만 교회를 섬기려고 주신 은사가 다를 뿐이다. 즉 역할이 다른 것이다. 갈라디아서 3:28 말씀은 남녀동등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평등권, 종족이나 피부색에 따른 차별이 아니라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여성은 창조의 정상이며 끝이며 완성이다. 그래서 사단이 여성을 먼저 시험한 것이다. 바울이 여성 혐오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자들도 존재하지만, 그는 고린도전서 11:7에서 여성을 남성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여성이 남성을 드러내고 여성이 남성의 참모습을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여자 없이 남자가 존재할 수 없고 남자 없이 여자도 존재할 수 없듯이 여성이 없는 교회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남성보다 더 우월적인 물질에서 창조된 여성도(남자는 생명이 없는 흙에서, 여자는 이미 살아 있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남녀가 평등한 것이다. 

먼저 생각할 것은 교회를 섬기기 위해 성령께서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각각의 몸에 둔 은사는 남녀 동등하게 허락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녀 성도가 다 교회의 구성원이기에 차별이 없다. 남성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교회 회원이 되고 여성도 똑같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가 되는 것이다. 지체로서 역할을 감당하면서 어떤 은사는 직분자로 세워지는 호칭이 있지만, 나머지는 직분 혹은 호칭이 없이 단지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지체로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교회의 일군으로 호칭이 주어진 것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및 교사’라는 에베소서 4:11 말씀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로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던 권한을 행사하던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신학적 논란이 많이 있지만, 필자는 성경 계시와 관련된 초자연적 은사의 종결성을 믿는다. 특히 ‘목사와 교사’라는 칭호는 디모데전서 5:17을 근거해서 보면 ‘치리 장로’(ruling elder)와 ‘강도 장로’(teaching elder)로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 사도 베드로도 자신을 같은 장로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벧전 5:1). 그리고 목회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감독(장로)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을 언급하고 있다(딤전 3장, 딛 1장). 그 외에 신약성경 어디에도 교회 직분을 가진 은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의 항존직에 장로와 집사로만 규정하고 있다. 

교회에 주신 은사를 언급한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에 보면 호칭이 아니라 기능을 강조하는 은사를 언급한다. 사도와 선지자 및 교사를 제외하고는 ‘능력이요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 12:28). 그리고 로마서에서도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 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직분을 받음이 없이도 받은 은사에 따라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섬기는 자들을 지적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 중에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아니라고 배제된 것이 있는가? 성령께서 거듭난 사람에게 주신 은사는 ‘교회 안에서 지위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문제이기 때문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섬김의 자세로’ 일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가르치는 일도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인이 감당했다(행 18:26). 그것도 성경에 능한 아볼로를 개인적으로 사사할 정도였다. 다스리는 일도 겐그레아 교회 자매 뵈뵈가 감당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녀를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했는데(롬 16:1) 보호자에 해당하는 헬라어(προστ?τι?)가 일반적으로 남성형으로 쓰이는 단어로써 어떤 공동체의 합법적인 우두머리나 대변인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러나 본문에 쓰인 단어는 여성형 명사이다. 위급할 때나 어려울 때 도와주는 후견인이나 구원자 혹은 조력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일에 다스림의 영역은 배제되었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에는 여성이 직분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남성에게만 주어졌던 직분의 직임 여러 부분을 수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 한국의 교회가 여성 사역자들에게 가르치는 일(교사나 구역장)과 다스리는 일(전도회장, 구역장, 위원회 활동 등)을 포함하여 구제와 섬김의 일, 권위 하는 일,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일들을 하는 것은 매우 성경적이라고 본다. 지난 2천년 동안 교회에서 여성은 교회의 직분자로 세움을 받음이 없이 성실하게 주님의 교회를 세워감에 적극적으로 종사해 왔다. 이는 교회의 직분이 계급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목사나 장로, 혹은 집사가 교회에서 가지는 계급으로 여겨졌다면 이는 분명 우열을 나누는 차별을 말할 수 있다. 직급이 다르기에 직급에 따라 대우도 달라야 한다는 논리는 한국의 교회에서 계급으로 인식하고 있는 잘못된 통념이다. 한국의 전통 문화적 관습에 맞게 직책을 주어서 은사에 따라 섬김을 감당하게 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어떤 직책도 비록 임시직이라 하더라도 처음 출발은 바르다고 하더라도 남발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지금 서리 집사처럼). 따라서 직책을 창의적으로 만들어서 직분자를 세우자는 것은 반대한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장로와 집사직에 한하는 것이 옳다. 

‘교회 정치는 세속의 정치와는 달리 잘 다스리기 보다 잘 인도하는 것이라야 한다.’ 주님의 진리 가운데로 잘 인도해야 한다. 푸른 초장으로, 시원한 물가로 인도해야 한다. 목사는 주의 기록된 말씀으로 양을 먹이고 돌보고 살피는 일을 하며 성도들은 선포되는 말씀으로 필요한 양분을 공급받아서 자신이 받은 은사의 활용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세워가는 것이다. 여성도 복음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었다. 복음을 전할 의무도 있는 것이다. 성도라면 모두가 다 전도자여야 한다.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직접 메시아를 증언하였다(요 4:39). 부활의 첫 소식도 사실 여성이 전하였다(눅 24:9-10). 나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쟈크 엘룰은 이 여성들을 “계시의 전도자들”로 묘사하면서 이들이야말로 ‘영생에 대한 최초의 증거를 받은 이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이브라는 이름의 완성이요 뱀에 대한 약속의 성취라면서 창조의 최고 절정인 여성으로부터 이제 계시의 완성이 그들의 입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는 것이라’라고 하였다.주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하고 제자들에게 알려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누가 주장할 수 있겠는가?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여성들에게도 제자들이 받은 동일한 성령을 받았고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동일한 성령에 의하여 다른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였다(행 2:4, 11). 구제 사역에 앞장섰던 욥바의 다비다(행 9:36-43), 그리고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에게 음식 접대와 숙박 제공의 일을 한 유럽에서 최초의 크리스천 여성이자 빌립보 교회의 태동이 된 루디아(행 16장, 빌 4:15), 신약성경에 6번이나 등장하는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자신의 목이라도 내어주기까지(롬 16:4) 헌신한 교회 개척자들이요 성경에 능한 아볼로에게 신학적 교훈을 지도해 줄만큼의 탁월한 능력이 있는 여성이었다. 자유주의 학자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하르낙은 브리스길라가 남편 아굴라의 도움을 힘입어서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라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만큼 브리스길라의 공헌은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빼놓고 설명이 안 되는 부분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 지위로도 로마 귀족 출신인 브리스길라를 고린도 교회에서도 에베소 교회에서도 심지어 로마교회에서까지도 바울이 장로로 혹은 집사로 안수해서 교회 직분자로 세운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교회가 그 부부에게 감사할 정도로 탁월한 존재였다. 그런데도 직분을 받음이 없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마음껏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긴 것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말씀이나 디모데전서 2:12절 말씀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보아서 잘못된 것이라거나 시대의 문화적 산물로 여긴 것이라는 주장은 맞지 않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자가 아니라 교회의 일군들로 섬기는 일, 구제하는 일, 전도하는 일, 가르치는 일, 봉사하는 일들에 여성들에게 다 허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가는 글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논의는 저명한 교수들과 목사들이 발표한 논문이나 글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찬성 쪽이든 반대편이든 자신들의 논리가 우월하다는 인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대편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필자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만고불변의 진리요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이 뭐라고 하느냐에 의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즉 성경이 말하는 것과 지난 기독교 역사 2천 년이 금지해 온 이유는 여성안수 허용을 촉구하고 있는 자들의 시대변화를 반영하자는 것보다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안수는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호소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하나님의 뜻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인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교회를 섬기도록 부르시고 감당할 은사를 부여하시는 성령의 뜻이 시대의 조류에 따라 변화무쌍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함부로 여성안수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여성 안수를 허용하고 안 하고의 결정권은 인간에게 있지 않다. 교회는 노회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총회가 설립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것 외에는 누구도 그 역할을 대신할 중보자가 없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도 유일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교회에서 법령을 규정하고 반포하고 실행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분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따라서 그가 제정한 적이 없는 것을 가지고 여호와 섬긴다고 최선을 다했어도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판단은 기록된 말씀 밖을 넘어가지 않는다.

교회법 역시 성경에 위반되어서 제정될 수 없다. 성경에 위배 된 결정은 사도들이 공회 석상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무엇이 더 옳은가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행 4:19-20)라는 말씀이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라고 선언한 것은 지금도 진리이다. 필자는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철영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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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세례교인·다음세대 줄고, 교회 늘었다 2021-09-10
한국 최초 목사 안수 120주년…헌신적 생애를 들여다보… 2021-09-07
9월 교단 정기총회 잇달아 개최...주목할 점은? 2021-08-31
성도 5명 중 1명, 코로나19 이후 교회 한번도 안가 2021-08-27
한국교회 연합기관 통합 논의, 시작부터 '삐걱' 2021-08-27
출석교인 50인 이하 교회 목회자 48.6% “이중직 … 2021-08-25
AI로 예배하는 시대…한국교회, 위기인가 기회인가 2021-08-20
“교회예산 감소한 목회자, 교인과의 관계 '나빠졌다'” 2021-08-18
8개 신학대, 역량평가서 탈락…국고 지원 못 받아 2021-08-18
예장백석, 코로나 극복 목회 간증수기 '눈길' 2021-08-18
총신대 신대원 교수들, WEA문제로 대립 2021-08-17
한교총, 광복 76주년 한국교회 기념예배 드려 2021-08-15
성도 10명 중 7명 "현장예배 안 드려도 돼" 충격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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