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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손양원 목사 장녀 손동희 권사..."오빠 죽인 원수를 오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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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09-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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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 역사의 진상은 어지러운 그 시대에는 잘 모른다. 많은 시간이 지난 이후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순 교자 손양원 목사의 장녀 손동희 권사(77)는 24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출범기자회견에 참석해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는다고 했을 때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3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난 손동희 권사는 광복 후 1948년 10월 21일 당시를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손 권사는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오빠 둘을 잃었다. “19일에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났고 사흘 후인 21일 손동인(당시 25세, 순천사범학교 4학년), 손동신(당시 19세, 순천중학교 2학년) 두 오빠가 좌익세력에 의해 끌려가 순천경찰서 뒤뜰에서 총살로 순교를 당했다. 큰 오빠가 그때 기독학생회 회장이어서 표적이 된 것”이라며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당시 여순반란은 딱 1주일 만에 끝났다. 1주일 동안 전남보건후생협이 밝힌 사망자 수만 3천5백여 명이었고 행방불명된 사람도 5백여 명이었다.”고 설명한 손 권사는 오빠의 순교 이후 심리적 공황 증상을 보였다고 고백했다.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배도 골아보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두 오빠의 죽음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며 “앉은 상태에서 총알이 날아오는 것 같아서 일어 설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손 권사는 “두 오빠의 장례식을 마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두 오빠를 죽인 범인이 잡혀 사형 집행 날짜만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다. 죽인 놈을 잡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내 손으로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다.”고 당시의 심경을 토로하고 “그때 아버지(손양원 목사) 생각은 내 생각과 전혀 달랐다. 범인 강철민(가명)을 양자로 삼겠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손 권사는 이어 “나는 설마 했다. 그런데 실제로 시행에 옮기려고 하셨고 나는 펄펄 뛰며 크게 반발했다. 그런 놈은 죽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나를 설득시키려고 했다.”고 회상했다.

 

손 권사는 아버지가 “하나님의 십계명 제일, 제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가서 고생을 했다. 강철민 그 학생을 안 잡았으면 모르지만 잡혔다니 이대로 모른 척 할 수는 없구나.”라며 “일, 이 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도 하나님의 명령이다. 두 계명은 지키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안 지키면 얼마나 모순이냐. 너희들도 나도 감옥에서 헛고생만 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어 “당시 나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강철민이 없어져야 내 한이 풀릴 것 만 같았다. 나는 그때 이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며 “나를 펄펄 뛰면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아버지, 용서하면 용서했지 아들 삼는 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나에게는 오빠가 되는 것인데, 내 오빠를 죽인 원수가 어떻게 오빠가 되겠습니까. 이렇게 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것입니까.’라고 항변했다.”고 말했다.

 

이에 손양원 목사는 “동희야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용서만으로는 안 된다.”고 말했고 결국 그를 양자로 삼았다고 말했다. 

 

손 동희 권사는 “손양원 목사님은 인간적으로 볼 때 파란만장한 생애를 사셨다. 농사꾼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돈을 벌어 야간학교를 다녔다. 결혼 후에는 나환자들과 일생을 같이하다.”며 “39세 때 신사참배 거부로 일본 경찰에 끌려간 후 다섯 번 감옥 신세를 지고 광복 후에 나왔다. 이후 1950년 9월 28일 48세 나이에 후퇴하는 공산당에 의해 총살 순교를 당했다.”고 말했다.

 

손 권사는 “두 오빠 죽음 이후 하나님을 거부했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왜 하필 나야’ 라고 방황했지만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그 뜻을 알게 됐다.”며 “하나님은 믿음의 표본을 만드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 두 오빠와 아버지 등 많은 순교자들은 죽은 것 같지만 죽은 게 아니다. 그 안에는 씨앗이 있었다. 무수한 영혼을 깨우치는 하나의 믿음의 모델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손 권사는 “사람은 누구나 역경을 많이 겪는다. 고난 없이는 신앙생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편안하고 안락할 때는 하나님을 잊고 기도도 안하고 기도제목도 없어진다.”며 “고난이 부딪혔을 때 고난 속에 빠지지 말고 그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야만 한다. 손 목사는 ‘기독교 신앙은 고난을 통해서만 단련된다. 감옥은 나에게 유익이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번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 출범과 관련해 손 권사는 “몇 년 전부터 시도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고 여러 어려움이 많았다.”며 “여러 의원들이 함께 협력해주셔서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다.”고 말했다.

 

최창민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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