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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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108.♡.♡.226)ㆍ2019-03-01 11:3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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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회
주님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말씀을 하시고
다시 하신 말씀은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복음 18:15-17]
왜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이란 말씀을 하셨을까.
주님은 죄를 범한 형제까지 포함하여 모두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함께 하시길 원하셨기에
죄를 범한 자와 그렇지 아니한 자를 편애하지 않으셨고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속하기를 원하셨고,
게다가 주님은 어느 국가나 어느 한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시지 않으셨고
주님은 인류(人類),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기에
편애하시는 주님이 아니시라 공평하시고 공정하신 주님이시라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공평한 나라 라,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처럼 하늘의 상으로
또는 세상의 삶은 천국을 얻기 위한 방편의 상으로
세상의 교회는 천국을 가기 위한 수단의 상으로
절대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이 땅에서부터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기에
소위 말하는 소행을 행위를 가르치셨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하시기전 하신 말씀과 연관하여 보면
‘천국에서 큰 사람’ 으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고
‘작은 자’를 비유하여 행위를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다시 보면 오늘 날과 같이 천국을 이해하지 못하는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처럼
수많은 사이비들처럼
당시의 제자들도 천국을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주님께 물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1]
주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고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4]
주님은 제자들이 천국을 이해하지 못하고 큰 자가 누구인지 묻는 의도를 아시고
어린 아이를 통하여 어른을, 제자들을 교육하셨음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길 원하심을 이미 알고 계셨기에
마가복음 9:33-34절 보면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누가 복음 9:46-47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이는 오늘날과 같이 큰 자가 누구인지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일과 똑 같다.
교회에서 누가 큰 자 인가?
누가 교회에서 큰 사람인지를 논하니
초대 교회 이후 교회가 변절하여 직분이 세상의 신분이 되었고 계급이 되어
오늘 날도 자유롭지 못한 변질된 교회가 전통이 되어 전통을 정통(正統)으로 말하며
이를 일깨우는 자들은 소수라 교회사의 비극이면서 오늘날의 슬픔이다.
그런 불의한 자들이 천국에서 큰 상을 받을 사람이 누구인지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수많은 자들이 바울의 말을 빗대어 설교하고 말하나 바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4]
‘부르심의 상’ 이란
제자들이 주님께 물은 ‘누가 큰 자’ 인가를 말함이 아니라, 큰 상을 말함이 아니라
이 말을 하기 전 바울이 한 말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라디아서 5:13]
서로 섬기라 하였기에 이 말을 하기 전 바울의 첫 마디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
바울은 예수님께 잡힌바 된 상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상,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목적, 그 구원의 목적이 바울의 상이라, 푯대라
아직 얻어다 함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닌,
그리스도 주님을 온전히 닮았다 함도 아니요
그리스도 주님을 복음을 온전히 전했다 함도 아니지만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인생의 끝 인 푯대, 그리고 하나님 나라인 푯대를 위해 달려가기에
그래서 로마서에서 첫 서두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름을 받음은
하나님의 택함이라 은혜라 의를 전하는 종이라, 실천하는 종이라
바울은 복음의 의에 대하여 그리고 주님의 말씀 섬김에 대하여 순종하였기에
극히 짧은 시간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생겼다고 성경에 기록되었지만
오늘날 이 시대에 가능한 일일까?
무엇이 혼란스러운 교회 상을 만들었는가?
주님은 제자들 앞에 어린 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3-4]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 하셨고
낮추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이 작은 자, 소자를 업신여기는 않는 자 임을 말씀하셨고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0]
천국은 어린 아이를 하나 영접하면 주님을 영접함이라 하셨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
어떻게 어린 아이를, 소자를 영접함이 주님을 영접함이라 하셨을까?
누구나 이 말씀을 설교로 듣고 수없이 들어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고 순수하여
무조건 순종하여야 한다고 알고 또 믿지만
주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자들은 많지 않음이
오늘날 타락한 개신교의 원인이기도 하다.
보라.
주님은 어린아이를 빗대어 내적인, 실재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다.
천국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죽어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세상에서 시작하여 영원으로 연결된 나라를 말씀하셨기에
세례요한이 잡혔을 때 ‘천국’을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4:17]
이 말씀은 세례요한의 외침과 같은 말씀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1]
천국이 가까이 왔나?
천국은 예수님 당시부터 오늘날 까지 회자되어 널리 알려졌지만
천국은 육체의 주검으로만 갈 수 있는 나라인가.
왜 주님은 천국이 가까이 오셨다 하셨는가.
왜 주님은 어린아이를 영접함이 주님을 영접함이라 하셨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시대와 그 이전 시대는
어린 아이는 여자들과 함께 그 집의 재산 목록이었고 결코 사람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으나
예수님은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띈 남자 어른과 똑같이 소중한 생명임을 인정하셨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특성, 여자들과 같이 하찮은 신분이 천국의 자격이 없음이 아니라
하찮은 생명 하나하나에게 까지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신 사랑이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이라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자,
돌이키는 자,
그런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자라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3]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 말씀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은 같은 말씀이라,
‘돌이켜’ 란 ‘회개’ 라 행위와 함께 한 마음의 변화,
이 변화가 믿음이라 하나님의 은혜로 만 가능한 전인적인 변화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돌이키지 못하면 그래서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 라, 믿음이 없는 자라
베드로는 이를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 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사도행전 2:38]
성령님의 선물, 회개함이라
그리고 성령님과 동행함이라,
어린 아이와 같이 순결함이나 천진함이라는 믿음만이 아니라
낮춤으로 사회적인 지위나 환경을 뛰어넘는 겸손이라
이 겸손은 어린아이가 연약하여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어 부모의 품 안에서 평안하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고 하나님의 의로 살고자
그 분의 보호아래에서 살고자 하는 겸손이 믿음이라
‘믿음’ 은 바탕은 겸손이라
주님께서 겸손하듯이 약한 자들에게 겸손하여 그들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주님을 향한 신뢰라 믿음이라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이 믿음이라,
주님의 말씀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같은 말씀으로 강조한 말씀이라, 이 강조가 주님의 사랑이라
주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다시 기회를 주시고 더하여 강조하시는 사랑이라, 은혜라,
“결단코 ...못하리라” 라는 천국 시민의 자격을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천국에서 누가 크냐’ 는 관심과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키셨다.
여기서 ‘겸손’ 이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의미의 겸손만이 아니라
멸시, 천대. 굴욕 등을 당하면서 까지 겸손한 의미로
마치 고난 받는 종의 의미로서 주님 자신께서 보여 주신 겸손이라, 믿음 이라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시고 전하시며 증인이 되신 주님처럼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멸시를 당하면서 기뻐하는 상태라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길이라,
그러기에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라 말씀하셨고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하셨다.
주님의 말씀은 이러할 진데
오늘날 자기 자신이 그러하며
오늘날 교회가 그런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베드로전서 2:21-25]
주님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말씀을 하시고
다시 하신 말씀은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복음 18:15-17]
왜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이란 말씀을 하셨을까.
주님은 죄를 범한 형제까지 포함하여 모두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함께 하시길 원하셨기에
죄를 범한 자와 그렇지 아니한 자를 편애하지 않으셨고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속하기를 원하셨고,
게다가 주님은 어느 국가나 어느 한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시지 않으셨고
주님은 인류(人類),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기에
편애하시는 주님이 아니시라 공평하시고 공정하신 주님이시라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공평한 나라 라,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처럼 하늘의 상으로
또는 세상의 삶은 천국을 얻기 위한 방편의 상으로
세상의 교회는 천국을 가기 위한 수단의 상으로
절대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이 땅에서부터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기에
소위 말하는 소행을 행위를 가르치셨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하시기전 하신 말씀과 연관하여 보면
‘천국에서 큰 사람’ 으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고
‘작은 자’를 비유하여 행위를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다시 보면 오늘 날과 같이 천국을 이해하지 못하는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처럼
수많은 사이비들처럼
당시의 제자들도 천국을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주님께 물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1]
주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고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4]
주님은 제자들이 천국을 이해하지 못하고 큰 자가 누구인지 묻는 의도를 아시고
어린 아이를 통하여 어른을, 제자들을 교육하셨음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길 원하심을 이미 알고 계셨기에
마가복음 9:33-34절 보면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누가 복음 9:46-47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이는 오늘날과 같이 큰 자가 누구인지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일과 똑 같다.
교회에서 누가 큰 자 인가?
누가 교회에서 큰 사람인지를 논하니
초대 교회 이후 교회가 변절하여 직분이 세상의 신분이 되었고 계급이 되어
오늘 날도 자유롭지 못한 변질된 교회가 전통이 되어 전통을 정통(正統)으로 말하며
이를 일깨우는 자들은 소수라 교회사의 비극이면서 오늘날의 슬픔이다.
그런 불의한 자들이 천국에서 큰 상을 받을 사람이 누구인지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수많은 자들이 바울의 말을 빗대어 설교하고 말하나 바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4]
‘부르심의 상’ 이란
제자들이 주님께 물은 ‘누가 큰 자’ 인가를 말함이 아니라, 큰 상을 말함이 아니라
이 말을 하기 전 바울이 한 말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라디아서 5:13]
서로 섬기라 하였기에 이 말을 하기 전 바울의 첫 마디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
바울은 예수님께 잡힌바 된 상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상,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목적, 그 구원의 목적이 바울의 상이라, 푯대라
아직 얻어다 함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닌,
그리스도 주님을 온전히 닮았다 함도 아니요
그리스도 주님을 복음을 온전히 전했다 함도 아니지만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인생의 끝 인 푯대, 그리고 하나님 나라인 푯대를 위해 달려가기에
그래서 로마서에서 첫 서두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름을 받음은
하나님의 택함이라 은혜라 의를 전하는 종이라, 실천하는 종이라
바울은 복음의 의에 대하여 그리고 주님의 말씀 섬김에 대하여 순종하였기에
극히 짧은 시간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생겼다고 성경에 기록되었지만
오늘날 이 시대에 가능한 일일까?
무엇이 혼란스러운 교회 상을 만들었는가?
주님은 제자들 앞에 어린 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3-4]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 하셨고
낮추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이 작은 자, 소자를 업신여기는 않는 자 임을 말씀하셨고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0]
천국은 어린 아이를 하나 영접하면 주님을 영접함이라 하셨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
어떻게 어린 아이를, 소자를 영접함이 주님을 영접함이라 하셨을까?
누구나 이 말씀을 설교로 듣고 수없이 들어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고 순수하여
무조건 순종하여야 한다고 알고 또 믿지만
주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자들은 많지 않음이
오늘날 타락한 개신교의 원인이기도 하다.
보라.
주님은 어린아이를 빗대어 내적인, 실재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다.
천국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죽어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세상에서 시작하여 영원으로 연결된 나라를 말씀하셨기에
세례요한이 잡혔을 때 ‘천국’을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4:17]
이 말씀은 세례요한의 외침과 같은 말씀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1]
천국이 가까이 왔나?
천국은 예수님 당시부터 오늘날 까지 회자되어 널리 알려졌지만
천국은 육체의 주검으로만 갈 수 있는 나라인가.
왜 주님은 천국이 가까이 오셨다 하셨는가.
왜 주님은 어린아이를 영접함이 주님을 영접함이라 하셨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시대와 그 이전 시대는
어린 아이는 여자들과 함께 그 집의 재산 목록이었고 결코 사람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으나
예수님은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띈 남자 어른과 똑같이 소중한 생명임을 인정하셨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특성, 여자들과 같이 하찮은 신분이 천국의 자격이 없음이 아니라
하찮은 생명 하나하나에게 까지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신 사랑이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이라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자,
돌이키는 자,
그런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자라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3]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 말씀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은 같은 말씀이라,
‘돌이켜’ 란 ‘회개’ 라 행위와 함께 한 마음의 변화,
이 변화가 믿음이라 하나님의 은혜로 만 가능한 전인적인 변화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돌이키지 못하면 그래서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 라, 믿음이 없는 자라
베드로는 이를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 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사도행전 2:38]
성령님의 선물, 회개함이라
그리고 성령님과 동행함이라,
어린 아이와 같이 순결함이나 천진함이라는 믿음만이 아니라
낮춤으로 사회적인 지위나 환경을 뛰어넘는 겸손이라
이 겸손은 어린아이가 연약하여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어 부모의 품 안에서 평안하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고 하나님의 의로 살고자
그 분의 보호아래에서 살고자 하는 겸손이 믿음이라
‘믿음’ 은 바탕은 겸손이라
주님께서 겸손하듯이 약한 자들에게 겸손하여 그들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주님을 향한 신뢰라 믿음이라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이 믿음이라,
주님의 말씀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같은 말씀으로 강조한 말씀이라, 이 강조가 주님의 사랑이라
주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다시 기회를 주시고 더하여 강조하시는 사랑이라, 은혜라,
“결단코 ...못하리라” 라는 천국 시민의 자격을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천국에서 누가 크냐’ 는 관심과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키셨다.
여기서 ‘겸손’ 이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의미의 겸손만이 아니라
멸시, 천대. 굴욕 등을 당하면서 까지 겸손한 의미로
마치 고난 받는 종의 의미로서 주님 자신께서 보여 주신 겸손이라, 믿음 이라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시고 전하시며 증인이 되신 주님처럼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멸시를 당하면서 기뻐하는 상태라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길이라,
그러기에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라 말씀하셨고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하셨다.
주님의 말씀은 이러할 진데
오늘날 자기 자신이 그러하며
오늘날 교회가 그런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베드로전서 2: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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