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번제 (1)
페이지 정보
대장쟁이 (72.♡.♡.208)ㆍ2019-04-27 20:33관련링크
본문
(창 22: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네 후손이 저 밤하늘별처럼 되리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100세에 낳은 하나 뿐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니요? 이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지시입니다. “하나님,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그렇게는 못 합니다. 차라리 저의 목숨을 거두어 가십시오.” 이래야 맞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하나님의 명을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지시하셨다는 사실을 아내 사라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이른 아침, 나귀에 나뭇짐을 지우고 아들과 하인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하여 사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하인들을 산 아래 남겨놓고 아들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워서 데리고 산을 오릅니다.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와 칼은 여기 있는데 번제에 쓸 양은 어디 있어요?”
아비의 가슴을 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실 거야.”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은 함께 죽음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자신을 태울 나뭇짐을 지고 모리아산을 오르는 이삭의 모습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결박하여 나뭇단 위에 눕혔습니다.
성경에는 이삭이 반항하거나 소리 지르거나 도망치려 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사흘 길을 걸어가서 나뭇짐을 지고 산을 오를 정도의 사내아이가 만일 저항하거나 도망쳤다면 100세를 훨씬 넘긴 아브라함이 감당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설마 진짜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겠어? 이러다 마시겠지.’ 하고 생각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말만 하다 마는 하나님, 쇼 하는 하나님”으로 여긴 것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대로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은 황급히 아브라함을 두 번이나 불러 제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풀에 걸린 숫양을 잡아 대신 번제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다시금 하나님은 후손과 땅의 약속을 재확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이 사건에 관하여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 11:19)
아브라함과 이삭은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리면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에 나눈 말씀에서는 밤하늘 가득한 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었고 이를 믿었으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로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과연 하나님을 생명의 하나님,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는가, 곧 부활신앙을 가졌는가를 친히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으로 믿지 못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믿음이 없다면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에게 하나님 노릇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죽어도 다시 살릴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두려워서, 죽음이 무서워서 도저히 죽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생명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온전히 그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부활절이 지났습니다. 만물이 새 생명의 환희로 가득한 계절입니다.
자신의 부활신앙을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으니 당신도 시험하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부활신앙이 있는지, 당신 안에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 영생의 주님이 계신지 확인하십시오. 이것이 없이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의 하나님, 부활의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죽어도 살 것이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네 후손이 저 밤하늘별처럼 되리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100세에 낳은 하나 뿐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니요? 이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지시입니다. “하나님,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그렇게는 못 합니다. 차라리 저의 목숨을 거두어 가십시오.” 이래야 맞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하나님의 명을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지시하셨다는 사실을 아내 사라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이른 아침, 나귀에 나뭇짐을 지우고 아들과 하인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하여 사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하인들을 산 아래 남겨놓고 아들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워서 데리고 산을 오릅니다.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와 칼은 여기 있는데 번제에 쓸 양은 어디 있어요?”
아비의 가슴을 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실 거야.”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은 함께 죽음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자신을 태울 나뭇짐을 지고 모리아산을 오르는 이삭의 모습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결박하여 나뭇단 위에 눕혔습니다.
성경에는 이삭이 반항하거나 소리 지르거나 도망치려 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사흘 길을 걸어가서 나뭇짐을 지고 산을 오를 정도의 사내아이가 만일 저항하거나 도망쳤다면 100세를 훨씬 넘긴 아브라함이 감당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설마 진짜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겠어? 이러다 마시겠지.’ 하고 생각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말만 하다 마는 하나님, 쇼 하는 하나님”으로 여긴 것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대로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은 황급히 아브라함을 두 번이나 불러 제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풀에 걸린 숫양을 잡아 대신 번제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다시금 하나님은 후손과 땅의 약속을 재확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이 사건에 관하여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 11:19)
아브라함과 이삭은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리면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에 나눈 말씀에서는 밤하늘 가득한 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었고 이를 믿었으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로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과연 하나님을 생명의 하나님,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는가, 곧 부활신앙을 가졌는가를 친히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으로 믿지 못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믿음이 없다면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에게 하나님 노릇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죽어도 다시 살릴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두려워서, 죽음이 무서워서 도저히 죽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생명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온전히 그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부활절이 지났습니다. 만물이 새 생명의 환희로 가득한 계절입니다.
자신의 부활신앙을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으니 당신도 시험하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부활신앙이 있는지, 당신 안에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 영생의 주님이 계신지 확인하십시오. 이것이 없이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의 하나님, 부활의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죽어도 살 것이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