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나를 위하여 죽으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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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142.♡.♡.150)ㆍ2021-04-06 04:2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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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은혜롭게 보내셨습니까?
이제 두 번째 의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의문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온 인류를 합친 것 보다 훨씬 고귀하신 분이 대신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천년 전에 죽으셨는데 어째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이었습니다. 2천 년 전 단 한 번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수십억, 수백억 인류의 죄를 도매금으로 한꺼번에 해결하고 통째로 구원하신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천년 뒤의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창조주요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시간과 공간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문제가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다 그 손에 있습니다.
여러분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시지요.
인간의 역사는 기껏 만년인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으시고 만날 때까지 텅 빈 우주공간, 원시지구에서 까마득한 수십억 년 세월을 어떻게 기다리셨을까? 정말, 정말 지겨우셨겠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을 시간의 틀 안에 집어넣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수백억년의 시간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기다리실 필요도 없습니다.
우주를 만드시고 태양을 만드시고 지구를 만드시고,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감브리아기, 쥬라기......., 그 아득한 시간을 하나님은 필요하신대로 그냥 쓰시면 되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아무리 긴 시간도 하나님을 기다리게 할 수 없고, 아무리 짧은 시간, 아무리 큰 공간, 아무리 작은 공간도 하나님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광활한 우주공간 보다 더 크시고 동시에 원자, 미립자 보다 더 작은 공간에도 들어가실 수 있으며 수억분의 1초, 수조분의 1초도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나 계실 수 있고, 동시에 지구상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 수 있고 모든 기도를 들으실 수 있고 응답하실 수 있으십니다.
말이 안 된다고요?
그럼 시간과 공간이 하나님을 통제하고 제한한다는 말입니까?
시간과 공간이 진짜 우주만유의 지배자요 하나님을 지은 진짜 창조주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하나님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시간님, 공간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우주도 만들고 하나님도 만드셨나요?”
그럴 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가 없습니다.
우주도, 우주의 모든 법칙도, 시간과 공간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모든 시간이 현재입니다.
과거나 현재, 미래가 주님께는 다 “현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현재형 시제로 “I am"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기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희미해질 수 없습니다.
“I am(헬라어 에고 에이미)" 되시는 주님께는 항상 모든 시간이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 고통도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내가 십자가 아래 엎드려 나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주님은 생생하게 2000년 전 그 십자가의 고통을, 하나도 줄이거나 빼지 아니하고, 그대로 기억하식 느끼실 것입니다. 현재형이신 주님은 그 쓰라린 십자가 고통 속에서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산고(産苦)보다도 더 혹독한 고통일 것입니다. 매번 한 사람의 죄인이 돌아올 때마다 가슴을 찢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고통은 재현되고 그 거친 십자가의 못에 살을 찢는 참혹한 주님의 고통은 다시 기억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죽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13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children born not of natural descent, nor of human decision or a husband's will, but born of God.(NIV)"
"born of God, 하나님이 낳으신 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2천 년 전 한 번 있은 십자가 사건으로 한꺼번에 무더기로 구원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제 두 번째 의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의문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온 인류를 합친 것 보다 훨씬 고귀하신 분이 대신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천년 전에 죽으셨는데 어째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이었습니다. 2천 년 전 단 한 번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수십억, 수백억 인류의 죄를 도매금으로 한꺼번에 해결하고 통째로 구원하신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천년 뒤의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창조주요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시간과 공간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문제가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다 그 손에 있습니다.
여러분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시지요.
인간의 역사는 기껏 만년인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으시고 만날 때까지 텅 빈 우주공간, 원시지구에서 까마득한 수십억 년 세월을 어떻게 기다리셨을까? 정말, 정말 지겨우셨겠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을 시간의 틀 안에 집어넣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수백억년의 시간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기다리실 필요도 없습니다.
우주를 만드시고 태양을 만드시고 지구를 만드시고,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감브리아기, 쥬라기......., 그 아득한 시간을 하나님은 필요하신대로 그냥 쓰시면 되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아무리 긴 시간도 하나님을 기다리게 할 수 없고, 아무리 짧은 시간, 아무리 큰 공간, 아무리 작은 공간도 하나님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광활한 우주공간 보다 더 크시고 동시에 원자, 미립자 보다 더 작은 공간에도 들어가실 수 있으며 수억분의 1초, 수조분의 1초도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나 계실 수 있고, 동시에 지구상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 수 있고 모든 기도를 들으실 수 있고 응답하실 수 있으십니다.
말이 안 된다고요?
그럼 시간과 공간이 하나님을 통제하고 제한한다는 말입니까?
시간과 공간이 진짜 우주만유의 지배자요 하나님을 지은 진짜 창조주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하나님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시간님, 공간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우주도 만들고 하나님도 만드셨나요?”
그럴 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가 없습니다.
우주도, 우주의 모든 법칙도, 시간과 공간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모든 시간이 현재입니다.
과거나 현재, 미래가 주님께는 다 “현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현재형 시제로 “I am"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기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희미해질 수 없습니다.
“I am(헬라어 에고 에이미)" 되시는 주님께는 항상 모든 시간이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 고통도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내가 십자가 아래 엎드려 나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주님은 생생하게 2000년 전 그 십자가의 고통을, 하나도 줄이거나 빼지 아니하고, 그대로 기억하식 느끼실 것입니다. 현재형이신 주님은 그 쓰라린 십자가 고통 속에서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산고(産苦)보다도 더 혹독한 고통일 것입니다. 매번 한 사람의 죄인이 돌아올 때마다 가슴을 찢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고통은 재현되고 그 거친 십자가의 못에 살을 찢는 참혹한 주님의 고통은 다시 기억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죽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13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children born not of natural descent, nor of human decision or a husband's will, but born of God.(NIV)"
"born of God, 하나님이 낳으신 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2천 년 전 한 번 있은 십자가 사건으로 한꺼번에 무더기로 구원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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