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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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96.♡.♡.163)ㆍ2017-01-06 10:18관련링크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
들어가면서,
얼마 전 데살로니가 서를 읽는 중
‘하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 는 주장을 듣고
즉각적인 거부 반응은 이런 오만(傲慢)의 표현에 이내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시각이나 입장으로 성경을 본 다는가?
성경은 우리가 필요할 만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지만
올바른 지식을 배우고 깨달음은 성령님이 인도하시기에
더 깊은 믿음을 가지려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 지식을
얻어서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자신을 분별하고 믿음을 확정하는 길은
이미 복음을 받은 자로서 은혜의 길이라, 받은 은혜를 나누려 하기에
이 글이 온전하여 주님의 복음에 합당한 글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여 영광이 되고 그리고 영광에 참여하는 모두가 되자는 외침이길
간절히 바라기에 성경을 읽고
또 읽고 기도하고 글을 쓰지만 이 글이 완벽한 글이 될 수도 없고
그러나 완벽한 선이신 주님을 따라서 제자의 길을 가는 신앙의 삶에
이글의 고백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런 바람이지
혼자 옳다는 독선은 아니나 읽기에 조금 과한 표현이 있음은
나름 성경으로 이 시대를 바라보고 적용한 복음의 바른 길에서
어그러진 길로 향한 사람들과
복음을 맹신적으로 대하고 맹신적인 순종과 헌신 더 하여 광신에 절은
분별과 치우침에 대한 경고로 인함을 밝혀둔다.
지식,
지식에 지식을 더 하여야 하는데 이 지식의 앎을 막아버린 자들과
지식을 비틀어 버린 자들이 배교를 하였고 이런 집단이 사이비가 되어
이단이 됨을 구약과 신약 그리고 교회사와 현실에서 수 없이 보는데
이제는 능력이 지식에 있지 않고 무조건 적인 순종과 헌신에 있다고
가르치고 가리키고 강요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고 이런 일들은
이미 지난 역사 속에 수 없이 많았고 지금도 맹신과 광신자를 양성하여
신도를 조종하는 수단으로 삼고
주위의 교회에도 이런 사이비 지도자는 셀 수 없이 많은데
이런 주장이 이곳에서도 수 없이 일어났고 이에 동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 없이 믿음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망언으로 설교하고 글을 쓰는가.
이 지식에 대하여
지식에 능력이 있지 않고 지식의 순종과 헌신에 능력이 있다는 주장은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옳지 않다.
성경의 지식은 히브리어 빈(bin)으로 분별과 이해 그리고 판단을 의미하고
이는 앎만의 지식이 아니라 분별하고 더 깊게 이해하고 판단하여 실행하는 언행까지 전체적인 총체(總體)이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명령인 규례와 법도를 배우고 행하기까지가 지식이고 지혜라 한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명기 4:5-6]
자세히 보면
어디에 앎만이 지식이라 했는가.
더 자세히 보면 ‘기업’ 이라는 단어가 눈을 끈다.
그 당시의 기업으로 차지할 땅이 가나안 땅이 이었다면
가나안 땅에서도 지혜로 지식이 되어 본으로 보이는 백성,
지혜와 지식으로
가나안의 주된 신 ‘엘, 을 비롯한
다산(多産)과 비와 풍요의 신들인 바알과 하다드 신, 엘의 아내 ‘아세라(A serah), 기술의 신‘코타르’ 풍요의 여신‘아스타르테’ 재앙과 지옥을 주관하는 ‘레셰프’ 등 이방의 우상을 멀리해야 했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키지 못했고 가나안의 풍요한 생활은 점차 우상을
섬겼기에 하나님은 이방 족속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괴로움을 주고 선지자를 세워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셨다.
요즘의 표현으로
신자로 이 땅에 살면서
이곳이 가나안이며, 삶은 터전이 기업이 되어 불신자들에게 본이 되어
불신자들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로 삶을 보여주어야 하고
신자들이 모인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로 서로 형제와 자매로 말씀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는 하늘나라의 모형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가?
믿는 자들끼리도 지식이 없어 분별이 없는데 어떻게 서로 본을 보이겠는가?
같이 합심하여도 모자란 시대인데
끼리끼리의 분열된 모임이 무슨 힘이 있겠고 열심을 낸들 자기들끼리의
열심인데 개혁까지 하겠다니 이런 만용이 없다.
목사는 목사 끼리, 은퇴하여도 은퇴목사 끼리
장로는 장로 끼리, 은퇴하여도 장로 끼리
이제 교회 안에서는 안수 집사끼리, 서리 집사를 나누고
높으신 회당 장 같은 당회의 당회장도 있고
중세적인 귀족과 평민을 나누는 평신도라니,
패를 나누는 패거리 교회와 교계가 되었다.
그리고도
‘평신도를 깨우라’
‘복음의 야성을 가지라’
‘교회 중심의 주인 의식을 가지라’
개혁을 외치든 모두 헛소리 일 뿐이다.
진실로 신앙의 작고 조그마한 믿음의 양심이 있다면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본을 바라보자 !
만일, 이 시간 예수님께서 교회에 오신다면 어떻게 말씀 하실까?
자신에게는 어떻게 말씀 하실까?
이제 글 쓰는 자신은 신앙 양심상, ‘주여! 어서 오십시오’
오래 기다린 반가움으로 영접하지 못함을 실토하고
평상시 수없이 절박한 순간과 고통의 시간에서도 도저히
‘마라나타 !’ ‘주님 어셔 오시옵소서!’
사실 그런 믿음이 없어 오히려 긍휼을 구하기에
내게는 남들처럼 ‘주님 이제 오시옵소서!’ 하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도 없고 강건하여 준비된 세월을 보내지도 못하여 준비된 오늘이 순간도 부족하지만
그래서 그런 투정을 할 수 있지도 못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공평하셔서 정의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사랑으로, 심판하실,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고 마음으로 확정하고 확정하였기에
더 의문을 갖는다.
하나님은 패거리 모임을 좋아하실까?
하나님은 ‘끼리 끼리’ 의모임을 좋게 보실까?
성경으로 하나님의 의(공의)를 구하려할수록
자꾸 자꾸 세례 요한의 외침이 들린다.
‘독사의 자식들아!’
신앙이 종교가 되어 의식에 매인 종교지도자와 종교인들을 향하여
왜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 했으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고 외쳤다면 무엇이라 했을까?
도대체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의 구조와 조직에 대하여 말은 풍성하고 이론적인 정의에 대하여
늘 듣고 말하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하여 고민하고 이를 교회가 실천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껍데기만 남은 교회의 건물에서 종교의식에 절은 현대의 교회는
전혀 성경이 추구하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만족과 위안을 삼는 종교이지
신앙이 아니라서 지도자까지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형식적인 성경공부를 하니, 이 이민교회와 한국교회의 수많은 목회자들은
어떻게 성경공부를 하였더니 지식에 머물러 성장이 없었다고
변명하는 목회자들의 헛소리를 셀 수 없이 들었는데
이는 자신의 무력한 진리의 깊이를 모면하려는 변명이며
자신들의 무식을 기피하려는 변명이라 이런 자들은 선생이 되면
안 될 자 들이었다.
신약에서
지식에 대하여 윗글의 신명기와 같은 구절을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For to one is given by the Spirit the word of wisdom; to another the word of knowledge by the same Spirit; 고린도 전서 12:8]
이는 성령의 은사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와 지식을 다른 은사로 보기도 하나 지혜와 지식은 같은 의미로 봐도 무방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았고 성령을 따라야 하며 그래서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같은 성령으로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지혜와 지식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따라서
일하는 직분은 다르나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은 같으며,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서리집사가 직분이 다르나 계급이 아니며
같은 신분으로 다 같은 성도로 직분이 다르며
목사나 세탁소 주인이나 직원이나 다 성도로 자기 삶의 터에서 성도로 합당한 삶을 살아가며 보여줄 의무가 있으며 특히 자칭 주의 종이라는 목사도 심판을 비켜 갈수도 없을뿐더러 결국은 판단하는 대로 판단 받고
종당에는 주님께서 판단함은 공정하시고 공평하신 하나님이신데,
목사와 교회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전혀 옳지 않은데도 오래 동안 교회를 다녔어도 이를 이해 못한 다면, 신학을 했다면서 이런 헛소리를 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라 지혜가 없는 삯꾼일 뿐이다.
성경은 어느 특정인이나 집단에 해당하는 글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과거와 현제와 미래의 계시기에
마땅히 지혜와 지식으로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성령도 한분이시라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려는 지혜의 지식이
복음이고 이 복음은 하나님의 의로, 뜻으로 공의로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이 지식을 알아 감은 입술로 전해지며 입술에 머물지 않고
가슴의 복판, 중심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따라서 머리에 간직하고 손과 발로 온몸으로 행하기까지를
지식이라 한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입에 두지 않고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Wise men lay up knowledge: but the mouth of the foolish is near destruction 잠언 10:14]
믿음에 두어 삶의 생활에 실천하고,
따라서 지식이 행위까지 듯이 참 믿음도 행위까지 포함되며
행위의 그 공급하는 힘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소망에 두고
성령님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지식과 지혜는 은사이며
우리 모두가 선물로 받은 믿음의 분별이라
믿음이 성장하면 분별력도 성장하게 된다.
지식에 대하여 만큼은 다시 쓰겠지만
지식을 입에 대기만 한 자들을 대하면 더 놀라운 괴설과 괴변으로
복음을 설명하며 복음을 비틀고
복음의 능력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복음의 능력을 감소하고
종당에 시인하는 듯 하지만 자신의 의로 부인하고 재물의 욕심으로 온 몸과 온 생활로 부인하는 자들은
한국이나 이민교회에 넘쳐 남은
교회가 세상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이런 자들은 버릇같이 ‘주의 영광’을 외치지만
실은 자기만족과 자기 합리화에 늪에 빠져서 스스로 노력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몸을 위하여 매진하는 자들이라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But all these worketh that one and the selfsame Spirit,
dividing to every man severally as he will.]
자신의 뜻을 성경에 과녁에 맞춘
자신의 의지를 호응받기 원하기에 버릇처럼 ‘영광을 돌리자’ 한다.
이 지식은 근본은 예수님이시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에게 본을 보였으며
성령님께서 이를 증명하시기에 우리가 믿음의 지식을, 소망의 지식을
사랑의 지식으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 져야 하는데
어느 이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사이비가 되고 이단이 되어 어둠의 길로 간 사람들은 셀 수도 없고
유명한 목사, 부흥사, 은사로 사도가 되었다는 직통계시 파들 등
그들이 혼란한 교계를 만들었고 이런 자들의 공통점이 ‘하나님의 시각’이라는 교만으로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막은 어둠의 세력이라
시각의 보기에 아름다고 웅장한 교회를 짓는 자들임을 안다면,
간절히 그들의 실상을 알기 원한다.
흔히 원죄라는 죄도 그런 시각으로 시작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the LORD God to grow every tree
that is pleasant to the sight,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fe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세기 2:9]
시각으로 보면
아름다운 에덴동산 그 동산 가운데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그리고 뱀이 있었다.
and evil.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s, knowing good and evil. 3:5]
이렇게 유혹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shall be as gods,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For God doth know that ... knowing good and evil.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하나님의 시각이 된다는
하나님의 심정이 된다는.
‘하나님의 시각이나 입장’ 의 표현은 이미 믿는 성도로서의 처지를 떠난
본분을 망각한 교만하고 오만한 자세이다.
그냥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의가 무엇인지
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신앙에서 구하여야 할 것을
앞서간 표현은 성경보다 앞서간 성경의 해석을 하여
과대 해석 하여 어그러진 말로 선동하는, 어그러진 패역의 길로 간 수많은 사람들을 성경이 증거하고 우리 주위에 수없이 많다.
다시 복음이 무엇이고 복음의 받은 자들의 신앙의 길이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하여 나누어 보고자 한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잠언 23:19]
들어가면서,
얼마 전 데살로니가 서를 읽는 중
‘하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 는 주장을 듣고
즉각적인 거부 반응은 이런 오만(傲慢)의 표현에 이내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시각이나 입장으로 성경을 본 다는가?
성경은 우리가 필요할 만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지만
올바른 지식을 배우고 깨달음은 성령님이 인도하시기에
더 깊은 믿음을 가지려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 지식을
얻어서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자신을 분별하고 믿음을 확정하는 길은
이미 복음을 받은 자로서 은혜의 길이라, 받은 은혜를 나누려 하기에
이 글이 온전하여 주님의 복음에 합당한 글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여 영광이 되고 그리고 영광에 참여하는 모두가 되자는 외침이길
간절히 바라기에 성경을 읽고
또 읽고 기도하고 글을 쓰지만 이 글이 완벽한 글이 될 수도 없고
그러나 완벽한 선이신 주님을 따라서 제자의 길을 가는 신앙의 삶에
이글의 고백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런 바람이지
혼자 옳다는 독선은 아니나 읽기에 조금 과한 표현이 있음은
나름 성경으로 이 시대를 바라보고 적용한 복음의 바른 길에서
어그러진 길로 향한 사람들과
복음을 맹신적으로 대하고 맹신적인 순종과 헌신 더 하여 광신에 절은
분별과 치우침에 대한 경고로 인함을 밝혀둔다.
지식,
지식에 지식을 더 하여야 하는데 이 지식의 앎을 막아버린 자들과
지식을 비틀어 버린 자들이 배교를 하였고 이런 집단이 사이비가 되어
이단이 됨을 구약과 신약 그리고 교회사와 현실에서 수 없이 보는데
이제는 능력이 지식에 있지 않고 무조건 적인 순종과 헌신에 있다고
가르치고 가리키고 강요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고 이런 일들은
이미 지난 역사 속에 수 없이 많았고 지금도 맹신과 광신자를 양성하여
신도를 조종하는 수단으로 삼고
주위의 교회에도 이런 사이비 지도자는 셀 수 없이 많은데
이런 주장이 이곳에서도 수 없이 일어났고 이에 동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 없이 믿음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망언으로 설교하고 글을 쓰는가.
이 지식에 대하여
지식에 능력이 있지 않고 지식의 순종과 헌신에 능력이 있다는 주장은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옳지 않다.
성경의 지식은 히브리어 빈(bin)으로 분별과 이해 그리고 판단을 의미하고
이는 앎만의 지식이 아니라 분별하고 더 깊게 이해하고 판단하여 실행하는 언행까지 전체적인 총체(總體)이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명령인 규례와 법도를 배우고 행하기까지가 지식이고 지혜라 한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명기 4:5-6]
자세히 보면
어디에 앎만이 지식이라 했는가.
더 자세히 보면 ‘기업’ 이라는 단어가 눈을 끈다.
그 당시의 기업으로 차지할 땅이 가나안 땅이 이었다면
가나안 땅에서도 지혜로 지식이 되어 본으로 보이는 백성,
지혜와 지식으로
가나안의 주된 신 ‘엘, 을 비롯한
다산(多産)과 비와 풍요의 신들인 바알과 하다드 신, 엘의 아내 ‘아세라(A serah), 기술의 신‘코타르’ 풍요의 여신‘아스타르테’ 재앙과 지옥을 주관하는 ‘레셰프’ 등 이방의 우상을 멀리해야 했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키지 못했고 가나안의 풍요한 생활은 점차 우상을
섬겼기에 하나님은 이방 족속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괴로움을 주고 선지자를 세워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셨다.
요즘의 표현으로
신자로 이 땅에 살면서
이곳이 가나안이며, 삶은 터전이 기업이 되어 불신자들에게 본이 되어
불신자들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로 삶을 보여주어야 하고
신자들이 모인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로 서로 형제와 자매로 말씀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는 하늘나라의 모형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가?
믿는 자들끼리도 지식이 없어 분별이 없는데 어떻게 서로 본을 보이겠는가?
같이 합심하여도 모자란 시대인데
끼리끼리의 분열된 모임이 무슨 힘이 있겠고 열심을 낸들 자기들끼리의
열심인데 개혁까지 하겠다니 이런 만용이 없다.
목사는 목사 끼리, 은퇴하여도 은퇴목사 끼리
장로는 장로 끼리, 은퇴하여도 장로 끼리
이제 교회 안에서는 안수 집사끼리, 서리 집사를 나누고
높으신 회당 장 같은 당회의 당회장도 있고
중세적인 귀족과 평민을 나누는 평신도라니,
패를 나누는 패거리 교회와 교계가 되었다.
그리고도
‘평신도를 깨우라’
‘복음의 야성을 가지라’
‘교회 중심의 주인 의식을 가지라’
개혁을 외치든 모두 헛소리 일 뿐이다.
진실로 신앙의 작고 조그마한 믿음의 양심이 있다면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본을 바라보자 !
만일, 이 시간 예수님께서 교회에 오신다면 어떻게 말씀 하실까?
자신에게는 어떻게 말씀 하실까?
이제 글 쓰는 자신은 신앙 양심상, ‘주여! 어서 오십시오’
오래 기다린 반가움으로 영접하지 못함을 실토하고
평상시 수없이 절박한 순간과 고통의 시간에서도 도저히
‘마라나타 !’ ‘주님 어셔 오시옵소서!’
사실 그런 믿음이 없어 오히려 긍휼을 구하기에
내게는 남들처럼 ‘주님 이제 오시옵소서!’ 하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도 없고 강건하여 준비된 세월을 보내지도 못하여 준비된 오늘이 순간도 부족하지만
그래서 그런 투정을 할 수 있지도 못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공평하셔서 정의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사랑으로, 심판하실,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고 마음으로 확정하고 확정하였기에
더 의문을 갖는다.
하나님은 패거리 모임을 좋아하실까?
하나님은 ‘끼리 끼리’ 의모임을 좋게 보실까?
성경으로 하나님의 의(공의)를 구하려할수록
자꾸 자꾸 세례 요한의 외침이 들린다.
‘독사의 자식들아!’
신앙이 종교가 되어 의식에 매인 종교지도자와 종교인들을 향하여
왜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 했으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고 외쳤다면 무엇이라 했을까?
도대체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의 구조와 조직에 대하여 말은 풍성하고 이론적인 정의에 대하여
늘 듣고 말하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하여 고민하고 이를 교회가 실천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껍데기만 남은 교회의 건물에서 종교의식에 절은 현대의 교회는
전혀 성경이 추구하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만족과 위안을 삼는 종교이지
신앙이 아니라서 지도자까지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형식적인 성경공부를 하니, 이 이민교회와 한국교회의 수많은 목회자들은
어떻게 성경공부를 하였더니 지식에 머물러 성장이 없었다고
변명하는 목회자들의 헛소리를 셀 수 없이 들었는데
이는 자신의 무력한 진리의 깊이를 모면하려는 변명이며
자신들의 무식을 기피하려는 변명이라 이런 자들은 선생이 되면
안 될 자 들이었다.
신약에서
지식에 대하여 윗글의 신명기와 같은 구절을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For to one is given by the Spirit the word of wisdom; to another the word of knowledge by the same Spirit; 고린도 전서 12:8]
이는 성령의 은사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와 지식을 다른 은사로 보기도 하나 지혜와 지식은 같은 의미로 봐도 무방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았고 성령을 따라야 하며 그래서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같은 성령으로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지혜와 지식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따라서
일하는 직분은 다르나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은 같으며,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서리집사가 직분이 다르나 계급이 아니며
같은 신분으로 다 같은 성도로 직분이 다르며
목사나 세탁소 주인이나 직원이나 다 성도로 자기 삶의 터에서 성도로 합당한 삶을 살아가며 보여줄 의무가 있으며 특히 자칭 주의 종이라는 목사도 심판을 비켜 갈수도 없을뿐더러 결국은 판단하는 대로 판단 받고
종당에는 주님께서 판단함은 공정하시고 공평하신 하나님이신데,
목사와 교회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전혀 옳지 않은데도 오래 동안 교회를 다녔어도 이를 이해 못한 다면, 신학을 했다면서 이런 헛소리를 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라 지혜가 없는 삯꾼일 뿐이다.
성경은 어느 특정인이나 집단에 해당하는 글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과거와 현제와 미래의 계시기에
마땅히 지혜와 지식으로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성령도 한분이시라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려는 지혜의 지식이
복음이고 이 복음은 하나님의 의로, 뜻으로 공의로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이 지식을 알아 감은 입술로 전해지며 입술에 머물지 않고
가슴의 복판, 중심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따라서 머리에 간직하고 손과 발로 온몸으로 행하기까지를
지식이라 한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입에 두지 않고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Wise men lay up knowledge: but the mouth of the foolish is near destruction 잠언 10:14]
믿음에 두어 삶의 생활에 실천하고,
따라서 지식이 행위까지 듯이 참 믿음도 행위까지 포함되며
행위의 그 공급하는 힘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소망에 두고
성령님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지식과 지혜는 은사이며
우리 모두가 선물로 받은 믿음의 분별이라
믿음이 성장하면 분별력도 성장하게 된다.
지식에 대하여 만큼은 다시 쓰겠지만
지식을 입에 대기만 한 자들을 대하면 더 놀라운 괴설과 괴변으로
복음을 설명하며 복음을 비틀고
복음의 능력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복음의 능력을 감소하고
종당에 시인하는 듯 하지만 자신의 의로 부인하고 재물의 욕심으로 온 몸과 온 생활로 부인하는 자들은
한국이나 이민교회에 넘쳐 남은
교회가 세상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이런 자들은 버릇같이 ‘주의 영광’을 외치지만
실은 자기만족과 자기 합리화에 늪에 빠져서 스스로 노력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몸을 위하여 매진하는 자들이라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But all these worketh that one and the selfsame Spirit,
dividing to every man severally as he will.]
자신의 뜻을 성경에 과녁에 맞춘
자신의 의지를 호응받기 원하기에 버릇처럼 ‘영광을 돌리자’ 한다.
이 지식은 근본은 예수님이시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에게 본을 보였으며
성령님께서 이를 증명하시기에 우리가 믿음의 지식을, 소망의 지식을
사랑의 지식으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 져야 하는데
어느 이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사이비가 되고 이단이 되어 어둠의 길로 간 사람들은 셀 수도 없고
유명한 목사, 부흥사, 은사로 사도가 되었다는 직통계시 파들 등
그들이 혼란한 교계를 만들었고 이런 자들의 공통점이 ‘하나님의 시각’이라는 교만으로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막은 어둠의 세력이라
시각의 보기에 아름다고 웅장한 교회를 짓는 자들임을 안다면,
간절히 그들의 실상을 알기 원한다.
흔히 원죄라는 죄도 그런 시각으로 시작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the LORD God to grow every tree
that is pleasant to the sight,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fe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세기 2:9]
시각으로 보면
아름다운 에덴동산 그 동산 가운데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그리고 뱀이 있었다.
and evil.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s, knowing good and evil. 3:5]
이렇게 유혹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shall be as gods,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For God doth know that ... knowing good and evil.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하나님의 시각이 된다는
하나님의 심정이 된다는.
‘하나님의 시각이나 입장’ 의 표현은 이미 믿는 성도로서의 처지를 떠난
본분을 망각한 교만하고 오만한 자세이다.
그냥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의가 무엇인지
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신앙에서 구하여야 할 것을
앞서간 표현은 성경보다 앞서간 성경의 해석을 하여
과대 해석 하여 어그러진 말로 선동하는, 어그러진 패역의 길로 간 수많은 사람들을 성경이 증거하고 우리 주위에 수없이 많다.
다시 복음이 무엇이고 복음의 받은 자들의 신앙의 길이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하여 나누어 보고자 한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잠언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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