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의 제사, 아벨의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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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100.♡.♡.223)ㆍ2018-02-23 02:2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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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 장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
창세기 4장,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입니다.
형제가 같이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는 인류최초의 형제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우리말 성경 7절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가인의 행실이 좋지 못 하고 아벨의 행실이 착했기 때문이라고 흔히 해석되곤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만일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을 골라서 받으신 이유가 ‘착한 행실’ 때문이었다면 4장 앞머리에 가인과 아벨의 행실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사실은 우리말 성경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 ‘토브’는 ‘착하다, 선하다’라는 뜻과 아울러 ‘옳다, 맞다’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라는 해석도 원어의 뜻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즉, 이 대목은 “바른 제물을 드렸다면 왜 그 제사가 들려지지 않았겠느냐?”라고 해석해야 보다 원뜻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가인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는 가인의 행실의 문제가 아니라 가인이 드린 제물이 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이 대목의 주제는 "행실"이 아니라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드린 제물은 땅의 소산이었고 아벨이 드린 제사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었습니다.
제물에 들여진 노력과 정성으로 보자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헤치고 피땀 흘려 농사를 지어 그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가인의 제물이 빈둥빈둥 양떼를 치다가 자기도 덩달아 어린양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물에 비하여 훨씬 값지고 받아들여질 만한 것일 것입니다. 가인이 분노하였던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가인은 자신의 피땀을 흘려 거둔 땅의 소산이 하나님께 기쁘게 열납될 것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습니다.
형 가인이 제사를 드린다니까 자기도 덩달아 드린 (4절) 제물인데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어린양이었던 것입니다.
그 어린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豫表)였던 것입니다.
제사가 죄인 된 인간이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의식(儀式)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오직 어린양 제물이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과 공로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가시덤불을 헤친 수고도, 지극한 정성도, 간절한 열망도 아닙니다.
우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어린양 예수님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성이나 공로나 봉사나 헌금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님으로, 예수님의 공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것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다면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문에 죄가 엎드릴 것입니다. (7절 참조)
그렇게 되면 세상에 나가면서 바로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다스리는(이기는) 길은 오직 바른 제물, 곧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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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장,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입니다.
형제가 같이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는 인류최초의 형제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우리말 성경 7절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가인의 행실이 좋지 못 하고 아벨의 행실이 착했기 때문이라고 흔히 해석되곤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만일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을 골라서 받으신 이유가 ‘착한 행실’ 때문이었다면 4장 앞머리에 가인과 아벨의 행실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사실은 우리말 성경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 ‘토브’는 ‘착하다, 선하다’라는 뜻과 아울러 ‘옳다, 맞다’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라는 해석도 원어의 뜻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즉, 이 대목은 “바른 제물을 드렸다면 왜 그 제사가 들려지지 않았겠느냐?”라고 해석해야 보다 원뜻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가인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는 가인의 행실의 문제가 아니라 가인이 드린 제물이 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이 대목의 주제는 "행실"이 아니라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드린 제물은 땅의 소산이었고 아벨이 드린 제사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었습니다.
제물에 들여진 노력과 정성으로 보자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헤치고 피땀 흘려 농사를 지어 그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가인의 제물이 빈둥빈둥 양떼를 치다가 자기도 덩달아 어린양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물에 비하여 훨씬 값지고 받아들여질 만한 것일 것입니다. 가인이 분노하였던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가인은 자신의 피땀을 흘려 거둔 땅의 소산이 하나님께 기쁘게 열납될 것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습니다.
형 가인이 제사를 드린다니까 자기도 덩달아 드린 (4절) 제물인데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어린양이었던 것입니다.
그 어린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豫表)였던 것입니다.
제사가 죄인 된 인간이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의식(儀式)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오직 어린양 제물이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과 공로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가시덤불을 헤친 수고도, 지극한 정성도, 간절한 열망도 아닙니다.
우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어린양 예수님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성이나 공로나 봉사나 헌금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님으로, 예수님의 공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것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다면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문에 죄가 엎드릴 것입니다. (7절 참조)
그렇게 되면 세상에 나가면서 바로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다스리는(이기는) 길은 오직 바른 제물, 곧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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