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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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96.♡.♡.163)ㆍ2017-01-26 09:5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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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없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면 할수록
이름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을 했고
실천을 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마음가짐을 가지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생이 알려지지 않은 생애미상의
찰스 F. 버틀러(Charles F. Butler)로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의 작사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으로
그는 누가복음 17장 20-21절을 읽고
[바리세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And when he was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찬송시를 썼다.
Where Jesus Is, ’Tis Heaven
Since Christ my soul from sin set free,
This world has been a Heav’n to me;
And ’mid earth’s sorrows and its woe,
’Tis Heav’n my Jesus here to know.
Oh, hallelujah, yes, ’tis Heav’n,
’Tis Heav’n to know my sins forgiv’n;
On land or sea, what matters where?—
Where Jesus is, ’tis Heaven there.
Once Heaven seemed a far-off place,
Till Jesus showed His smiling face;
Now it’s begun within my soul,
’Twill last while endless ages roll.
What matters where on earth we dwell?
On mountaintop, or in the dell,
In cottage, or a mansion fair,
Where Jesus is, ’tis Heaven there.
이 찬송 시는 James M black(1856-1938,감리교 찬양인도자, 주일학교 교사,
감리교 찬송가 위원)의 작곡으로
찬송가의 ‘내 영혼이 은총 입어’ 가 되었다.
1.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3.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찰스 F. 버틀러는
이 성경을 읽고 어느 때에 임하고 어디에 천국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우리 누구나 같은 물음을 가졌을 것이고
나도 젊은 날 똑 같은 물음을 갖았고 이리 저리 성경을 보며 답을 찾으려 했고
답의 확신이 없기에 신학서적과 본문의 설교 등 찾고 읽고 들어도
확실한 대답을 들을 수 없어 이 구절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고
골몰한 적도 있었다.
버틀러는 어떻게 성경을 읽었고 어떻게 하늘나라(천국)가 임하였다 하였으며
그의 고백이 성경의 뜻과 의미의 의에 합당한가?
나는 분명히 버틀러와 내가 똑같이 똑같은 성경을 읽으면서 같은 마음이 되었고
나도 그와 같이 하늘나라를 체험하였고 보았다.
그는 그의 영혼이 죄 사함을 받고 죄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되니,
그의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Since Christ my soul from sin set free’
그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죄의 사함이며
성령님의 함께 하시는 은총이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서 사랑이며
‘This world has been a Heav’n to me
이 세상은 그에게 천국이 되었다’
죄와 악이 넘치고 슬픔과 고통이 끝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이 그와 나에게는 천국(하늘나라)이 되었을까.
물론 어리석고 미련한 까닭에 나는 죄가 넘쳐서 고민과 괴로운 순간이 많아
천국(하늘나라)을 순간 잊고 살 때가 많지만 그런 순간과 시간이 되더라도
끊어지지 않는 소망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천국과 닿아오는 천국은
소망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무엇이라도 누구도 이 소망을 끊을 수 없음을
성경을 통하여 확신하고 확증하기에
또 이 자리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보면서,
그들의 신앙의 공동체를 보면서,
그들과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같이 연결되었고
그들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며,
(세상의 시간의 개념이 아니며)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었고 하늘나라에 있으며
버틀러도 그렇고 나도 이 땅의 하나님 나라에 있으며 이제 온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시간의 사건에 거하기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사건의 시간에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임함을 안다.
다시 바라보면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너희 안, within you, 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답이 있으며 우리의 대답(고백)이 되어야 하고
그 대답을 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사이비 공동체이며
그 대답의 고백이 없는 개인은
신앙인이 아니라서 세상의 사조에 물든 세속화한 종교인 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너‘ 안이 아니고 ’너희‘ 안이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성경의 한결같은 말씀을 상고하면서
구약으로 돌아가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시며 에스겔에게 한 말씀을 보면
에스겔 11:19-20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And I will give them one heart, and I will put a new spirit within you;
and I will take the stony heart out of their flesh,
and will give them an heart of flesh:
That they may walk in my statutes, and keep mine ordinances,
and do them: and they shall be my people, and I will be their God.]
에스겔에게 한 말씀도 한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 이라는 ‘공동체’ 이다.
하나님은 한사람의 구원의 구성원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는 개념으로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 전체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길 원하셨고
모두의 하나님이시길 원하셨다.
이 말씀의 의미를
시간의 개념을 넘어서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 이 시간 읽고 듣는 다면
교회는,
믿는 자가 된 다음에 그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는 모임이 아니며
주어진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서 비로소 믿는 자가 된다는 말씀이라
개인은,
돌 같은 마음으로 굳어진 구성원인 개인은
말씀으로 깨어지지 못한 개인은
진정한 신앙의 공동체를 바라보지도 못하기에
스데반이 구약의 공동체를 언급하며 외치기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This is he, that was in the church in the wilderness with the angel which spake to him in the mount Sina, and with our fathers:
who received the lively oracles to give unto us: 사도행전 7:38]
살아있는 말씀, the lively oracles
을 우리에게 준 이 자, 모세가 조상들에게 주었으며
우리에게 주었던 말씀이라 했고 광야의 공동체의 무리를 ‘광야 교회’ 라 했고
이는 신약의 교회의 모형이었으며
살아있는 말씀(the lively oracles)은 오늘도 변함없으셔서
신약 성경도 언제나 공동체를 언급하였고
진정한 교회(에클레시아)는 오순절 성령 강림과 더불어 생겨났으며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기에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셨고
이 말씀에서도 ‘너’ 가 아니고 ‘너희’ 이며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Now ye are the body of Christ, and members in particular.
고린도전서 12:27]
‘너희’ 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 부분이, 세세하고 상세하고 각별한 각 부분이, 각 사람이 지체를 이룬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에 두셨으니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니라 12:18-20]
그래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인 신앙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삶이 이미 성령님께서 인도하셨고 인도하시기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지 개인이 개인이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교제, 성령의 교제로서의 인격적인 모임인 ‘공동체’ 는
하나의 건물, 한 제도가 아니라 ‘생명의 공동체로서의 모임’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이 모임은 이미 온전한 천국을 향한 하나의 모임이기에
이 땅에서 천국의 모형이며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함으로서 참된 믿는 자, 성도가 되며
성도들의 모임은 이미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 나라는
직분과 계급적인 조직이 아니며 공평하시고 공정하신 공의의 하나님의 자녀로
동등하며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오래전 저명한 신학자의 글을 읽었다.
천국에 상(賞)으로 인한 차별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차별이 있을 지라도 느끼지 못하는 차별이 있을 뿐이다’
라 는 글을 읽고 솔직한 답변이지만 답으로 구차한 답변으로 느꼈다.
천국에도 차별이 있을까.
없다. 나는 확신한다.
공동체는 교회는
믿는 자 들이 모여서 만든 공동체이기 이전
믿는 자 들이 모여서 만든 교회이기 이전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공동체,
완벽한 하나님 나라(천국)와 연결되었고, 향하기에,
이 공동체에 참석함으로서 성도가 되며,
이를 개인의 구원으로 만 받아드리면 개신교의 ‘개인주의’ ‘개 교회주의’를
극복하지 못하여 개인의 구원에 머문, 구원을 얻은 자의 마땅한 도리에도
미치지 못하고 이를 전하는 자들도 개인의 구원에서 멈춘 설교가
오늘날의 현실이며
가톨릭의 제도적인 교회로 변형, 변질된 제도화, 법제화가 같이
공동체의 인격적인 교제가 법적 제도로 대치된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세속화하여 동력(動力)을 잃은 오늘날은 모습은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고귀한 사랑을 잃어 능력(power of charity)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능력(power of charity)으로
영원한 위로와 참된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으며
마음의 평안을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여서
서로가 서로의 위로가 되며 서로의 기쁨이 되어
서로 평강을 끼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공동체 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Now our Lord Jesus Christ himself, and God, even our Father,
which hath loved us, and hath given us everlasting consolation
and good hope through grace,
Comfort your hearts, and stablish you in every good word and work.
데살로니가후서 2:16-17]
댓글목록
별똥별님의 댓글
별똥별 24.♡.♡.100
"돌 같은 마음으로 굳어진 구성원인 개인은
말씀으로 깨어지지 못한 개인은
진정한 신앙의 공동체를 바라보지도 못하기에"
맞습니다.
공동체란 먼저 말씀으로 깨어진 자의 모임일진데...
자아가 살아 움직이는 때문에
주님의 통치함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고
그런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본다는 데 아픔이 있겠지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구하면서...
많이 생각하게 하는 글 감사합니다.
짐보님의 댓글
짐보 96.♡.♡.163
공동체란 이미 하나님께서 만든 공동체로
주님께서 초청하신 공동체로
그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서
옛사람의 모습을 벗은 새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본받겠다는 결단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님과 함께 함으로
세상을 움직일, 변화 화 할 동력을 갖춘 공동체
그런 공동체인가...
자아(ego) 라는 철학적인 '자기'가 아니라
그런 깨어짐이라기 보다 성령님과 함께 한,
세상적으로 어리숙하고 보잘것 없는 겉 모습이더라도
서로가 하나된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
현실에 꿈같더라도 꿈같은 공동체,
그런 공동체를 성경은 이룸을 보고 있습니다.
아주 세상적으로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세계를.
김정한님의 댓글
김정한 114.♡.♡.146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공동체 더 나가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가
사랑으로 관통하기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짐보님 생각을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차별은 없으나 구별은 있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천국(하나님나라)은 영적 질서가 있는 나라이기에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천국은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것 이상으로
온전하고 완전한 나라이기에
모든 것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며 기대하며 마라나타 하고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롬~
짐보님의 댓글
짐보 96.♡.♡.163
차별과 구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의도를 이해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사회든 공동체이든 차별이 없는 곳이 어디 있으며
구별된 구성원이 있지만, 신앙의 공동체의 직분은 차별도 아니고
구별도 아닌 한 지체로서의 역할을 예수님도 말씀하셨고 이를 바울도 수 없이 강조하기에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것과 저것으로 비교하지 않고 한 몸으로 하나로 단정하고 '질서'를 주장하고 책망하고 칭찬합니다.
질서가 없으면 진리가 아니듯 우리가 믿는 ‘진리’ 는 이미 세상의 질서를 제시하고 그 질서를 넘어서, 차별과 구별을 넘어서 공평이기에,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심을 성령님께서 증거하심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이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부활하시고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신 그 ‘심판’ 까지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사랑’ 에 속하기에, 공평, 공정, 정의 등이 사라진 ‘사랑’ 은 사랑이 아니기에,
오늘날의 개신교의 현실은 겉모양만 다르지 가톨릭과 거의 다를 바 없기에 윗 본문 중에서
“가톨릭의 제도적인 교회로 변형, 변질된 제도화, 법제화가 같이
공동체의 인격적인 교제가 법적 제도로 대치된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세속화하여 동력(動力)을 잃은 오늘날은 모습은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고귀한 사랑을 잃어 능력(power of charity)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주장했고 근본적인 성경의 공동체를 역설적으로 주장하며 예수님께서 헐으신다 하신 예루살렘 성전의 구성원과 제도의 변형, 변질은 똑같이 중세시대의 사제와 평민을 차별하고 구별하였던 종교개혁의 역사를 외면하거나 모르거나 무시하고 신약과 구약의 성경에서 목사와 평신도의 제도를 찾으면서 개혁을 하겠다는 허황된 주장이 차별이고 구별입니다.
‘하늘나라’ 는 나름 더 쓸 예정이라 생략하겠습니다.
한국은 구정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