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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페이지 정보

짐보 (96.♡.♡.163)2017-02-23 10:43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

정의(正義)가 무엇인가?
젊은 날 온갖 부조리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더하여 가족의 구성원 들와 헤어지는 슬픔과 아픔의 시간을 오래도록
보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분노가 일었고 원망이 가슴에 가득 차
주체하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져
하나님은 도대체 어떠한 분이신가, 정말 계신가.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부조리한 세상을 방관하시고
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나에게 감당치 못할
괴로움을 주셨으며 슬픔을 고통을 주셨고
이제 나를 모른 척 하신다 하더라도
세상에 믿는 인간들마저 부조리로 얼룩진 세상에서 인생이란
시간의 굴레에 매여 고통의 시간에 희망이라는 신기루 같은
소망이라는 환상으로 살은 듯,
세상을 바꿀 능력커녕 자신들이 만사에 잘되길 바람과 빌기에 바쁘고
어차피 부조리한 세상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듯이 앞으로도 변화가
없을 거고 고통 없는 인생도 없고 잠시의 기쁨과 즐거움에서 보람을
느낀다 하더라도 일시적인 보람은 이후 보다 큰 고통으로 끊임이 없어
참고 안간힘 써보았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 운명처럼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 한 일상의 연속에서
무슨 변화가 있겠으며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하나님의 손에 놀아나는
흔히들 위대한 신의 섭리라 한들
신이 위대한 만큼 신의 거대한 섭리의 수레바퀴 밑의 잡초 같은 인생은
짓밟히고 쓰러지고 다시 수 추려 일어나고 또 밟히고 일어서는
반복된 시간은
신의 섭리에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처지의 발버둥이 인생 인 것을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정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분노와 원망을 늘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괴롭혔으며
이윽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세뇌되어 왔고
속았다고 단정을 했으며 교회는 소망을 팔아먹는 사기업이며
종교집단이라 판단하고 성경책을 버리고 두 번째 하나님과 교회를 떠났다.
젊은 날 홍역을 앓았다.
죽음은 늘 내 곁에 있었으며 고통스러울 때마다 세상과 하나님을 조롱했고
비관하다 나름 이론을 겸비한 염세주의자가 되었고
어린나이에 집을 떠나서 세상의 밑바닥 더 밑바닥은 없을 것 같은
분류의 사람들과 어울렸고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스스로 천대하고 비관하는, 생각 보다 더 막장인 사람들과 같이 어둡고
암울한 시간을 보내며
차차 그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들은 실호라기 같은 가냘픈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며 나 같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 후 자신에게도 희망이 완전히 버리지 못했음을 자각했을 때
공평치 못한 세상이라 탄식의 언저리에서
희미한 빛 ‘공평’ 이라는 빛을 보았다.
내가 늘 바라보았던 눈에 비친 세상은 ‘불공평’ 과 ‘부조리’ 라 차별이었지만
그것의 실상은 ‘공평’을 이루려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빛이 곧고 밝듯이 이를 보여주시고 느끼어서 체감(體感)하고
체험(體驗)하는 믿음의 일정에서 막연한 깜깜함에서의 가냘픈 빛
‘공평’을 보았고 그 빛으로 은혜로 바라본 공평에서 ‘정의(正義)’를
하나님의 의(義)인 ‘공의’를 보았고
그 후 한 형제를 만나 그의 신앙이야기와 그의 신앙의 꿈을 듣고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를 수정하였고 오래 동안 방황하고
고민하였던 삶의 의미인 ‘정의’에 대하여
어렴풋하나마 나름 확신을 가졌고 그 확신의 본질이 ‘사랑’ 이었기에
사랑은, 외부의 환경과 자신의 집착에 매이지 아니한 ‘진리’와 함께 하며
진리는 ‘정의’와 함께 하며
정의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공평을 이루시려는 공의라
‘공평’과 함께 하는 자, 진리와 함께 하여
사랑의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는
이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의(義)가 공의 이며
하나님의 의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이 의인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라
하나님의 똑같은 자녀들이라
하나님은 공평하시듯 하나님의 자녀라면 공평해야 하며
공평을 떠난 진리는 진리가 아니듯이
신앙이 순수할수록 공평한 삶의 신앙이 되듯이
순수한 신앙의 틀이 정의를 만들어 갈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신자라는 신앙인이 ‘정의’ 라는 개념이 없음에 개탄하고
공동체라는 의식(意識)에 결여된 사회적 역사적 사명감을 잃은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구차한 변명의 여지도 없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기에 턱도 없는 맹신이며 광신이라 자기도취이며
수치를 잃은 자신을 위한 자신의 믿음의 도취일 뿐이며
정의를 잃은 오늘날의 공동체는
성경의 공동체와 전혀 다른 실체의 공동체이며
공동체라 부르기에 민망한데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하실까.

세상의 정의(正義)는 시대마다 달리했고 사회마다 달리 했기에
정의의 기준은 늘 변화하였기에 정의는 권력의 힘이었으며
이제는 다수의 의견이라 할 수 있는 여론이며
법이며 윤리이며 도덕이라 할 수 있기에
늘 변화는 세상의 정의의 개념과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길이 다르기에 끝이 같을 수도 없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He is the Rock, his work is perfect: for all his ways are judgment:
a God of truth and without iniquity, just and right is he. 신명기 32:4]
하나님은 변함없으신 반석이시라 완전하시기에
믿음의 반석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하나님은 모든 길이 정의롭고
정의로우셔서 공의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며
진실하셔서 신실하셔서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으로 오셔서
부정과 불의가 없으신 공평과 공명정대한 공의의 빛의 하나님이시기에
성경에서 신앙인의 정의(正義)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길을 가는 자의 마땅한 자세와 행함 까지가
‘정의(正義)’이라 명백히 정의(定義)를 내린다.

정의는, 하나님 앞으로 부르심에 나아가는 올바름을 의미하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거룩하신 이름을 거룩하여 여기는 성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의 ‘거룩’ 을 닮아
하나님의 의(공의)로 사는 삶이 예배가 되는 ‘거룩’ 이라
하나님의 의(공의)로 모인 모임이 ‘거룩’ 한 모임임은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이 하나가 되었듯이
거룩한 하늘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는 일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니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And now I am no more in the world, but these are in the world,
and I come to thee. Holy Father,
keep through thine own name those whom thou hast given me,
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요한복음 17:11]
예수님은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보전되기를 기도하셨기에,
예수님은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가 보전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였고
지난 교회사는 믿음으로 믿음을 보전하려는 성도들의 이야기 이며
그 소망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 대(代)에 와 있고 또 물려주어야 할 소명이며
그 소명을 받았기에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인도 하시며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른 자들,
거룩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른 자들,
거룩한 성령님의 이름으로 부른 자들이 성도이며
성도는 거룩하신 하나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공의)로 정의의 세계가 되게 부름 받은 자들이라
정의와 공의는 늘 함께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정의(Righteousness)가 공의(Righteousness)이며
공의는 더 포괄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뜻’ 이며
하나님의 이름이신 ‘거룩’ 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이신 ‘거룩’ 의 이름으로 공의로 행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지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처럼
영광, 영광 한다고 ‘영광’ 의 실체도 없이 비는 주문(呪文)은
그것은 가톨릭의 심령을 닦게 비는 글귀의 주문이며
만약 기도라 할지라도 공의가 사라진 ‘하나님의 영광’ 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妄靈)되의 부르는 믿음이 혼미한 자들이거나
아직 투정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떼를 쓰는 자들이다.
기도는 부정한일을 억지로 요구하거나 고집하는 떼가 아니다.

기억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시는 말씀을.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But as he which hath called you is holy,
so be ye holy in all manner of conversation; Because it is written,
Be ye holy; for I am holy. 베드로전서 1:15-16

‘정의’는 올바른 마음을 뜻함은
부르심을 받은 의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며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시편 37:30-31]
그 법은 하나님의 자녀로 지혜로운 정의의 법이
공의의 하나님 의(義)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라는 히브리어 ‘체다카(tsedakah)’ 는 ‘진실을 말하다’에서
파생된 동사(動詞)로 진리의 마음으로 행함까지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도를 지키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로 오셨기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정의를 실행하신 것처럼
[그 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In those days, and at that time,
will I cause the Branch of righteousness to grow up unto David;
and he shall execute judgment and righteousness in the land.
예레미야 33:15]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 인, 정의로 정의로운 세계를 만드는 일이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몫이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실천이 믿음의 정의(正義)이라,
세상의 역사에서
세상의 불의에서
교회의 분쟁에서 하나님의 도움과 개입이 없다는 한탄은
아직 초보적인 믿음에 머물러
그리스도로 복음이 시작된 것은 믿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 1:1]
복음이 그저 기쁜 소식과 전도라는 협착(狹窄)한 좁은 의미의 매여
복음이
교회의 예배와 처소라는 건물의 건축과
전도, 선교의 사명에 매인 제약(制約)으로
열심의 사명은 있으나 가치관은 여전히 옛사람의 인생관에 머물러
교회에서만 교인이 된 현실은
복음을 외치면서 세상커녕 교회의 문제도 해결할 능력이 없어
눈만 뜨면 다툼과 분규의 소식이 일상이 된 이 현실은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해결책 일까?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라?
진리를, 긍정에 매여 긍정과 부정의 사고의 한계로 제약하면
세상을 이기는 힘커녕 위안의 심리(학)도 못 된다.
사랑하고 사랑으로 감싸라?
불의까지 사랑하는 사랑은 개인적인 관계와 의식의 세상적인 사랑이지
하나님의 공의와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은
임시방편으로 책임의 모면이나 회피를 가르친 적도 없으시고
사랑은 모든 불의 까지를 감싸는 사랑이 아니라
오직 진리와 함께 하는 사랑이기에
복음을 외치면서
복음에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진 현실은
믿음 믿음을 강조하고 노래하면서
믿음에 정의가 사라진 현실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생각해 보자.
교회가 신앙의 진정한 공동체라면
교회의 구성원이 그리스도의 몸 된 진정한 지체라면
한 지체인
목사로 장로 등으로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교회가 깨어져야 하는가?

다시 한 번 보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For therein is the righteousness of God revealed from faith to faith:
as it is written,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로마서 1:17]
이 구절은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전 이미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기에
감사하며 이제 세상의 중심인 로마로 가기를 계획하면서
믿음의 실상에 대한 그의 간절한 외침이며 피 끓는 그의 고백의 시작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하시려는 의(意)가, 계획하신 의지(意志)가
공의로 나타나서, 공의로 행하시기에
믿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은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주셨으며
그 믿음에는 하나님의 정의(正義)와 함께 하기에
사람을 통하여, 전도되어, 믿음이 들음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그 믿음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음은
성령님께서 인도한 다른 형제와 연합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기에
한 지체이기에
한 공동체이기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기에
전도로 선교로 복음을 전파함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만을 위함이 아니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삶이 예배가 되어 모두가 하나님의 공의로 같아지는 공평을, 정의를
이 세상에 구현(具現)하는,
하나님의 자비를, 긍휼을, 은혜를, 사랑을, 구현하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으로 시작된 복음으로
그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공의의 세상을 이룸을 의미이기에
온전한 복음으로 복음화 된 온전한 세상을 이룸이 하나님의 뜻(공의)이기에
부름을 받은 우리는 서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권면하고 위로하여 평강을 끼치다
영광의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자녀로 부름을 받았기에,
called you unto his kingdom and glory,

부르심을 받은 성도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데살로니가 성도를 통하여
이 글을 부름 받은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 남겼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As ye know how we exhorted and comforted and charged every one of you,
as a father doth his children, That ye would walk worthy of God,
who hath called you unto his kingdom and glory.
데살로니가 전서 2:11-12]

댓글목록

별똥별님의 댓글

별똥별 24.♡.♡.100

고민과 방황의 젊은 시기를 지나...
다시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셨군요.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짐보님의 댓글

짐보 댓글의 댓글 96.♡.♡.163

20대 도 채 안된 날
그 전에 그 후에도 누군가
하나님의 뜻, 공의(정의)에 대한 정의를 성경으로 뚜렷하게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개념의 정립한 글이나 책을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고
지금도 신앙인이 ‘정의’ 라는 개념이 없음에 개탄하기는 마찬가지라
공동체라는 의식(意識)에 결여된 사회적 역사적 사명감을 잃은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구차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말이 통할 사람같으면
(오래 신앙생활한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 일이 많으니
교제가 될지) 물어 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만족한 대답 듣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무지하니,
시대가 그렇습니다.

누지문서님의 댓글

누지문서 108.♡.♡.18

짐보님
제가 요사이 '정의'에 대하여 여러 생각이 많은 차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짐보님의 댓글

짐보 댓글의 댓글 96.♡.♡.163

저는 오래 동안 하나님의 공의, 정의에 대하여 고민하였고
바라보고 바랬고 바라기에, 제 교회생활은 순탄치 않아
외로운 신앙의 시간 이었기에 누지문서님을 이해 합니다.

쓰신 글도 전부 읽었고 이번글에 제가 댓글을 달까 하다
너무 나대는것 같아 지나 갑니다.
정의가 실종된 교계와 교회가 현실 정치에 나선 들
이쪽이나 저쪽이나 복음의 걸림돌이 되는 현상은 또 시작되고
피 할수도 없고 결국 스스로 신랄하게 자신들의 수치를 드러내는
어리석은 자들 이라 자기 편의 정치 논리로 예수님을 팔아 먹을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의 공동체라면서 순수를 잃고 순결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었으니(아니 알지도 못했으니) 복음의 능력이 사라진 세대가
어떻게 시대를 분별하겠습니까.
이념, 세대, 이데오르기도 극복 못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서
자신의 위안도 못되는 종교라고 늘 주장하잖습니까.
덩치만 컸지 힘이 없는, 능력을 소멸하고도 자신의 의로 덧칠한
종교인들이 권력과 작당하면 암흑의 혼란한 역사는 반복 반복 됩니다. 이제라도 최소한 교인이라면 정직해야 할 텐데,
교회가 정의와 담을 쌓았으니
눈과 귀를 막은 시간이 세월이 되었기에
제 글도 길게 늘어집니다.

누지문서님의 댓글

누지문서 댓글의 댓글 172.♡.♡.123

사실 탄핵에 대한 짐보님의 의견이
무척이나 궁금했었는데
아쉽군요.

짐보님의 댓글

짐보 댓글의 댓글 96.♡.♡.163

누지문서님과 별 다를 바 없을 겁니다.
디테일에서 우리 모두가 같을 수는 없더라도
비슷해야 하는데...

김정한님의 댓글

김정한 114.♡.♡.146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의로운 사회에서의 사랑도 포함하는 것일 텐데도
정의를 구현하려는 대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만 즐기는 세대이기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어찌 이 세대만의 일이겠습니까? 

너무 탄식만 하지 말고
알고 있는 바를 내가 처한 현장에서
예수님을 닮도록 하면 된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한 줌도 안되며  한 참이나 모자란 인생인 제가
그래도 이만큼이나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 것이
너무나 큰 은혜를 입은 것이지요.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그랬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럴 땐 나도 별사모님이나
해달처럼님처럼 시인 가객이 되어
높으신 분께 영광돌리고 싶은 마음인데
그런 점에서 부럽습니다.

짐보님의 댓글

짐보 96.♡.♡.163

저는 복음이 기쁜 소식 만 전하는 전도만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공정을 정의를 공평한 세상의 이루기 위하여
정신적인 그리스도인의 문화와 사회적인 문화를 정립하자는
주장이고요,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공의가 사라지는 시기가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의 부흥의 시작 시기로 엉터리 부흥사가 판치고
방언, 예언, 신유 등 은사주의에 치우치고 교회건물을 짓기 위하여
십일조 등 헌금에 복을 감미하여 복음의 순수성이 희석된 혼합 개신교가
되어 감을 바라보았고 무분별하여 진리가 왜곡되어지는 현상에 반대하였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저항도 했습니다.
감당할 수도 방관할 수도 없는 사이비 거대한 물결,
(물론 전도도 잘되었고 신자의 질을 낮추어 놓았지만
전도 받아 구원되었다는 구원은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
저는 한국교회의 타락의 서막으로 보았기에 한국교회의 타락을 예상했고
지금까지 올바른 판단이었다 생각하고, 그 후유증으로 한국이나 이곳에서
앓고 있다 보기에
그래서 탄식이 아니라 안타까움이며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을 쓰는 요인도 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아니라 나름 성경을 대안을 쓰고 있습니다.

도봉옥님의 댓글

도봉옥 115.♡.♡.173

짐보님의 고뇌를 조금은 공감합니다
이단에서 나와서 교회들을 보니 정말 눈물밖에 흐르지않았습니다
조국의 교회안에 만연된 이단사상과 변질은 절망으로 다가왔습니다
한없이 흐르는 눈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땅의 교회들을 구해달라고 말입니다"
그것의 응답은 타락하고 변질된 교회일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으로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이 소수지만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조금씩 알아가며 그 깊고 높은 뜻을 결코 헤아릴수없는
피조물이기에 오늘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시시때때로 근신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넘어지지 않고 완주하기위해서
낮은 마음으로 내안에 죄성이 꿈틀대는 소망없는 죄인임을
애통해 하고 감당하기 힘든죄의 유혹앞에서 구해달라고 간구하며
하루하루를 벅차게 살아가는 죄인 입니다
어느 순간 스스로 일어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단은 기다렸다는듯이
우리의 영혼을 유린하고 지옥으로 끌고갈것입니다
늘 깨어서 근신하고 기도하여서 이 영적인 싸움에서 우리모두
승리하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함께하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언제나 함께 하시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근심시키는 일은 지금 당장 멈춰야합니다
짐보님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짐보님의 댓글

짐보 댓글의 댓글 96.♡.♡.163

도봉옥님도 이단에서 나오니
현실의 교회라는 수많은 간판에서 사이비와 이단성을 보았고
그리고 자신을 보듯이,
우리는 자신이 처한 한 현상과  일상의 사건 속에서
신앙이란 공동체에서 폭넓게 사회에서 국가와 세상에서
진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보고 알 수 있는 능력,
분별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능력의 차이는 같을 수 없지만, 직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받아야 할
분별의 능력을 권능이라 성경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을 이해하고 깊은 뜻을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지식도 신학조차도 진리 찾는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진리를 길을 인도하시고 아는 지식을 주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기에 주시는 분별, 이 분별력이 권능이며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 = 지식(acknowledge)이 되면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의 사랑이 복음임을 알게 되어
복음은 단지 전하는 복음에서
깊이를 더하는 지식이 쌓일수록
하나님의 뜻하시는 봐 공의가 정의로 뚜렷이 보여
신앙인의 힘이 되기에
그러기에 성경을 알수록 분별의 능력이 생긴다는 의미와 같은데
성경을 자기의 입맛대로 편리하게 해석하는 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그런 자들이 공동체를 이끌면 종교집단이 되어
그런 자들은 자신을 특별히 소명 받은 사람으로 인식시켜
진리를 분리, 격리시켜 복음의 능력을 감소시킵니다.
그런 자들이 분리주의 자들이라 우선 자신을 택함 받은 사명자로
지배 계급으로 분리하여 자신의 의로 자신의 명예와 욕망의 도구로
성경을 이용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종’ 이라는 어설픈 겸손으로
변장합니다.
보십시오.
사이비와 이단 우두머리들 중
자신이 특별히 선택받았다 하지 그렇지 않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 제자 중 누가 자신만이 선택 되었다는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비슷하게 사이비 믿음에 물든 사람들은 한결 같이 분리주의 자들입니다.
자신은 세속에 물들었으면서
세상의 부와 명예를 탐하며
구원을 단지 천국에 들어가는 증거의 표인 증표(證票)로
자신의 욕구의 대상으로 삼아 거룩과 분리된 자들
이런 자들은 중세의 면죄부를 팔았던 가톨릭처럼
똑같이 면죄부를 파는 자들이라
(면죄부는 라틴어의 ‘Indulgentia' 로 ’은혜’ ‘관용’을 뜻한다니
은혜를 파나 관용을 파나 똑같다는)
현실을 도외시한 신앙을 믿음으로 분리하며
천국의 상을 팔아먹는 자들의 성전건축, 작정 헌금...
묘하지요.
마치 예수님의 열 므나 비유를
천국에서 열 고을 권세,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로 천국의 상을 파는 자들이 아직도 한국과 이곳에 많이 남아 있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런 자들의 주장을 읽고 들어도 외면하는 자들과
아예 자신이 모르는 자들...
슬픔입니다.

도봉옥님의 댓글

도봉옥 댓글의 댓글 115.♡.♡.173

짐보님 지금 여기 한국은 새벽 4시 반을 넘고 있네요~
많은 지도들이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의 욕망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반면교사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의 완악함으로 인해서 성령께서 근심하시다가
결국 떠나시므로 회개할 기회도 얻지못하는 세상에
버려두는 유기를 당하는 형벌을 받는것을 봅니다
그럼에도 더욱 안타까운것은 정작 본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망각한체
육신의 욕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가야할곳을 생각하게 됩니다

짐보님의 댓글

짐보 댓글의 댓글 96.♡.♡.163

일찍도 일어나셨네요.
저는 새벽잠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정작 본인  자신을 상태를 모르니,
제가 좀 아는 분은
능력이 있어 보인다고 장로교, 순복음식 교회를 표방하고
온갖 신유, 금가루 금니 키크기 온갖 기적 은사 부흥회를 하더니 이제 은퇴하고 이제 길을 보았다는데
그 교회 교인들이 불쌍하더이다.

섰다고 생각하면 쓰러질까 조심해야 하기에
성경을 붙잡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방법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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