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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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96.♡.♡.163)ㆍ2017-02-10 10:30관련링크
본문
개인의 구원에 집착(執着)한 대부분의 설교는
언제나 구원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똑같이 반복된
새 신자를 위한 설교를 들어야 하는 오늘날의 설교는
구원 이후,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설교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 땅에 세우겠다는 의는
언제부터인지 사라졌고 어떻게 교회에 헌신하느냐의 강조를
성경의 다른 본문을 인용 할 뿐
복음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무시하거나 무지한 설교가
판을 치는 시대라 세상의 개인주의 적인 세태(世態)라
개교회주의에 머물고 그 교회에서도 신분인지 직분인지
계급적인 체제의 조직의 안위(安慰)를 위한 유지에 동분서주함을 보면서
늘 느끼는 생각은
교회가 세상의 관료주의에 물들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세상의 관료주의 조직은 위계서열에 엄격하고 권위주의에 빠져
합리적이지 못하여 전문성을 가진 분업화로 개선되고 발전해야 하는데
군대의 조직 같이 획일주의 적이 되면
어떠한 사건이 생겼을 때는 서로 책임을 전가하거나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어 혼란을 수습할 능력을 잃고 더구나 사회적 정의를 팽개친
정치판 같은 일들의 반복을 오래전부터 교회에서 보면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진정한 신앙의 모임인가 회의가 들었고
오늘날의 교회가 성경의 공동체와 멀어진 까닭은
‘개신(改新)교’ 라 끝없이 성경의 공동체가 되려는 개혁(reform)을 해야
하는데 현실은 조직의 유지에 머물고 조직의 외적이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成果)에 치중하면서
가톨릭의 제도적인 교회로 조직이 변형되었고 법제와 된 교리는
복음의 진정한 의를 변질시켰기에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을 세속화 하여
성령님이 공급하시는 힘, 그 동력(動力)을 잃고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한 까닭이다.
교회라는 인격적인 교제인 초대교회의 에클레시아가
이후 불과 몇 세기도 안 되어 제도적인 교회로 별질 변형되면서
교회가 제도화 되면서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고 작당하여
권력을 가졌으며 권력의 테두리가 커짐에 따라 권력의 강화와 욕심에
비례하여 교회는 세속화 되고 타락되었는데
그런 세속에 권력 화 된 전통과 관습은 오늘날의 교회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런 영향과 전통의 반동으로 종파적인 교파가 생겼고
각 교파는 개 교회주의를 탄생케 한 분열을 또 그 반동으로
개인주의가 생겨났다 할 수 있고
지난 교회사와 현재의 교권을 추구하는 자들은
개인주의 자 들이며 분리 자들이라서
이제 그 분리는 수많은 종류로 불리는 목사의 칭호
수석목사, 당회장, 담임목사, 전도목사, 선교목사, 기관목사, 공로목사,
음악목사, 명예목사, 은퇴목사 등 셀 수 없는 종류의 목사와 더불어
장로 권사 집사의 수많은 호칭은
이제 가톨릭과 닮아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과 분리를 제도화 하여
신분의 제도로 분리되었기에 신분이 바뀌었다 착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원인의 하나는
성경의 선생이 되어 삶으로 선생의 본이 되어야 할 자들이
권위를 탐하면서 알량한 권력을 탐하고 스스로 남종 여종이라 외치며
스스로 높아진 ‘지도자의 권위’를 떠벌리는 사람들은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들은 이미 신양 인이 아니라서 신앙을 종교로 세상적인 번영(繁榮)으로
자신의 노력의 보수로 여기기에 이미 자신을 삯을 받은 자들이면서
끝없이 삯을 탐하기에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
불법을 의롭다 여기며 복이라 우기는 자들이다.
성경은
개인의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그 후 구원받은 자의 도리,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도리에서
늘 개인인 아닌 ‘공동체’를 추구하며
공동체와 구성원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공의로, 정의를 공정을 공평의 빛이 되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도를 삶을 본으로 삼아 소금의 신앙인으로
신앙의 도덕과 윤리를 가슴의 중심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으로부터 진리의 양심(良心)을 받은 성도는
세상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성도의 공동체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의 모형임은
천국은, 종당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신앙생활은
개인의 신앙생활이면서 공동체의 생활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공동체인 구성원인 개인 개인은
너의 궁핍이 나의 궁핍이라
너의 궁핍에 내 것을 나누어 같아지는 공평을
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이라
나의 기쁨을 나누어 너의 힘이 되는 평안을
나의 잘못에 너의 아픔이 되어 일깨우는 공정(公正)이 됨을
자각(自覺)게 하시고 일깨워주시는 성령님의 교통하심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 합당한 자로
닿아오는 온전한 하늘나라를 바라고 기다리는
소망의 생활이 신앙생활이기에
신앙인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이름으로 다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서 복음의 의로 사는 자들이다.
다시 성경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 자를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어 사람들에게 구걸하였고
어느 날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을 하기에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사도행전 3:7]
(12.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의 본문 중에서 다시 보면)
베드로는 은과 금이 없지만
내게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I have give I thee: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천한 나사렛에서
낮아지고 낮아지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진리를 전하여 주시고 참된 삶의 길을 보여주신
구세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하여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고귀하고 숭고한 사랑 ‘charity’ 의 이름,
그리고 부활하신 권능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베드로에게 은과 금은 없지만 베드로의 가슴에 간직한 사랑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인으로 가슴에 새겨진
사랑의 힘(power of charity)으로 베드로의 생명과 같은 이름,
그 이름, 생명과 같은 이름, 그 이름
그 이름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이 못 걷게 된 사람을 고치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
솔로몬의 행각에 모였을 때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도행전 3:11]
베드로와 요한은 개인의 권능과 경건, 개인의 힘으로 못 걷게 된 자를
고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 세상을 구원하고 자 오신 그 이름,
그리스도 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
그래서 하늘나라의 일원(一員)으로
못 걷게 된 자를 향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이 고침의 결과 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은사에 치우친 은사제일 주의자들은
자신의 권능과 경건을 자랑하며
오직 고침을 ‘신유’ 인 육체의 고침인
눈에 보이는 능력을 요란하게 자랑하여 성령님을 조종하는 능력자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妄靈)되게 부르는 자로
자신의 욕심의 더러운 치부(恥部)를 스스로 드러낸다.
믿는 자,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신앙인은 이미 개인이 아닌
성령님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 이라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평안을 누리며
평강을 끼치는 그리스도의 세계에 동참한 ‘공동체’ 의 일원이며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의 자녀로 모두가 같고 동등하기에
예수님은 수제자로 베드로만 삼으시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 전체 열두지파를 상징하는 열두제자를 두셨으며
열둘 제자에 바울을 더하여 제자로,
인류를 향한 복음의 신약 성경을 쓰게 하셨으리라.
그 제자 중 실족하게 된
의심하는 도마에게 오신 예수님은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와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And after eight days again his disciples were within,
and Thomas with them: then came Jesus, the doors being shut,
and stood in the midst, and said, Peace be unto you. 요한복음 20:26]
평강을 주셨다.
평강은 평안의 다른 말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보혜사, 성령께서 평안을
주시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But the Comforter, which is the Holy Ghos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he shall teach you all things,
and bring all things to your remembrance,
whatsoever I have said unto you.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unto you:
not as the world giveth, give I unto you.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neither let it be afraid. 요한복음 14:26-27]
평안은 세상이 주는, 세상에서 느끼는 안락(安樂), 안도(安堵),
무사(無事)함이 아니며 평안은 Peace 로 히브리어의 ‘샬롬’ 이며
샬롬의 어원적 의미는
온전함 완전함을 뜻하는 ‘completeness’ 이라
‘평안’은 하늘나라(Kingdom)의 완전함을 뜻한다.
성경의 평안(Peace)은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울 때에 처음 등장한다.
해가 지고 아브람은 깊은 잠에 들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들었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신 말씀이다.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And thou shalt go to thy fathers in peace;
thou shalt be buried in a good old age. 창세기 15:15]
죽음을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감으로
shalt go to thy fathers in peace’ 로 표현했다.
‘fathers in peace’ 온전한 평안을 하나님과 함께 한 평안이라서
그러므로 평안은 그리스도인으로 삶에 그리고 종당에 갖는
온전한 은혜이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갖는 특색이며 특권이고
평안을 주며 평안을 끼치는 공동체는 천국의 모형이 되며
공동체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지식의 나눔과 물질의 나눔은
평안을 끼치는 일이며 평안을 주는 일이라
평안은 공평하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공평을 이루는
공의로운 일이며
공평은 하나님의 공의이며 정의이라 우리가 이루려는
하나님의 공의 안에서 평안과 공평과 정의는 공의가 되면
공의는 사랑이 되며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심판까지 포함이 되는
합하여 선(善)이 되는, 하나 되는 ‘평안’ 은
온전하고 완벽한 ‘completeness’ 하늘나라에 속한 자들의 생명이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생명을 얻어
종당에 하나님의 나라(Kingdom)에 참여하기 위함이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공의)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먼저 구하여 평안을 누리기에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이라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생명을 얻게 함이라 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But these are written, that ye might believe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Son of God;
and that believing ye might have life through his name.
요한복음 20:31]
나의 꿈이 너를 슬프게 하는가.
하늘,
뭉게구름 둥실 둥실떠다니는 구름처럼 꿈처럼
자유로이 떠돌고 싶었던 날들은
나날이 꿈이었지.
비바람 부는 언덕위에서
눈보라 몰아치는 산위에서
꿈을 꾸었지.
나의 꿈이 너를 울리는 꿈이 아니라
내가
네가 어울려
만들어가는 세상다운 꿈
그런 꿈은
고통(苦痛)의 시간과 함께 하는 줄
철이 들어서야 알았지.
그 꿈이 사랑인 것을
중년이 되서야
꿈의 실상을 보았지.
사랑이 진리인 것을
진리가 사랑인 것을
어둡고 기나긴 터널을 지나서
괴로움과 절망이란 인고(忍苦)의 세월을 지나서
깨닫기 시작했지.
진리는 사랑을 동반하고
사랑은 진리와 함께 한다는
친구의 우정도
부부의 사랑도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할 진데
삶속에 적응하기에
쉽고도 어려운 꿈같은 이야기들...
나의 꿈이 너를 슬프게 하는가.
나의 꿈이 너를 울리게 하는가.
누군가 그랬지
[태양이 없으면
우리는 무지개를 가질 수 없지
비가 없어도
우리는 무지개를 가질 수 없지
아! 태양과 비, 웃음과 고통,
그것들이 함께 어울려
무지개를 만드는 거지]
나의 꿈이 너를 슬프게 하는가.
그건 내 꿈이 아니지.
내 꿈은,
내 소중한 꿈은,
너와 더불어
진리라는 사랑과 더불어
사랑하는 꿈이지.
댓글목록
별똥별님의 댓글
별똥별 24.♡.♡.100
짐보님의 외침이...
나를 포함한 많은 분들에게
경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직분에 연연하거나
권위로 생각한다면...
나의 꿈이 너를 울게 하는가?
오래전에 칼럼 제목으로 쓴 기억이 납니다.
나의 꿈이 너를 슬프게 하는가?
나의 꿈이 너를 울리게 하는가?
많은 생각을 하면서 돌아갑니다!
짐보님의 댓글
짐보 96.♡.♡.163
오래전에 쓰신 칼럼의 제목이 생각 나신다니
그 글에 제가 쓴 댓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짐보
2010-10-23 16:52
96.xxx.163
나의 꿈이 너를 울리게 한다 면
슬픔이지요.
확신에 찬 진리의 말로도
상대의 어린 믿음에 걸림돌이 된다면
나의 표현이든
내가 네게 닿아가는 진리의 덕이 부족함이 아닐까요?
무엇보다 확실한건
너와 나 사이의 진리는 사랑을 동반한다!
너와 나 사이의 사랑은 진리를 동반한다! 아닐까요?
부부든 친구사이든 누구든.
샘 없이 헤아림 없는 은혜에 빚진 사랑.
어느덧 중년이 되어보니
진리의 띠를 두른 진정한 신앙인의 생활을 하려는 고민 중에
화려함을 회피합니다.
화려함 보다는 소박함
집도, 교회의 건물도, 크고 화려한 장식보단 단출한 단순함
구호가 없는 순수한 치장
마치 성형수술 하지 않은 본 얼굴처럼 있는 그대로가 청순한 아름다움 같이 진한 화장을 하듯 화려함을 꿈꾸는 세대...
말과 말, 말 찬치 보다는
때로는 침묵하며 기다리며 성급히 결정하지 않는
의 뜻을 헤아려 진리를 바라보는 믿음
그런 믿음은, 과거에 이어진 현재가 오늘이듯이
오늘은, 닿아오는 미래가 믿음의 끈으로 이어진 소망 날
오늘은, 믿음으로 바라본 미래의 소망이 연결된 축복의 날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도의 끈으로 연결하듯.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8:38-39]
자연은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입니다.
자연은 우리의 지친 육체와 마음을 치료합니다.
저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기를 좋아합니다.
산과들 바닷가에서
제게 갇힌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내 기도의 응답에 갇힌 하나님
내 가정의 축복에 갇힌 하나님
내 교회의 건물에 갇힌 하나님
내 얄팍한 지식에 갇힌 하나님
나만의 하나님...
틀로 모형을 짜듯이 제게 묶어 매인
제가 만든 하나님의 허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오! 하나님!
제가...
저 같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니요?
이보다 큰 기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교회,교단, 사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언더우드의 기도로 알려진 글을 옮겨 놓습니다.
그의 기도에 비쳐진 모습과 지금 우리의 모습이 무엇이 다른지
몇 단어를 바꾸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면서.
오! 주님,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오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넘어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리려 놓으신 듯 한 이곳에는 지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고집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이 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생명,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이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 주소서.
6년이 넘은 제 댓글입니다.
김정한님의 댓글
김정한 114.♡.♡.146
짐보님의 외로운 외침이 혼자만의 외침이 아니라
이미 공명된 외침인 것을 재확인하게 하시는군요
세대는 어두워도 남은 자들은 있는 것이니
그 어디서나 있는 곳에서 고고한 나팔수가 됩시다
짐보님의 댓글
짐보 96.♡.♡.163
저는 제일 답답한 현상은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단절 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로 대화가 단절되었으니
신앙은 말하면 무엇하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과 상황을 넘어
세대의 신앙의 단절을 초래한 기성세대가 회개하고 울어야 하는데
온통 정치적인 일들만 바라보니...
한국의 신자들이 2천만이라 되더라도
세상을 움직일 동력을 잃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
별똥별님의 댓글
별똥별 24.♡.♡.100
네,
맞습니다.
지난 칼럼 글을 옮길 때
기억할 만한 코멘트는 본글처럼
함께 삽입해도 좋다는 대표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돌이켜 보던 시간들....
교제님, 토마스님, 아침이슬님, 은하수님,
누지문서님, 기자석 목사님, 대장쟁이 목사님,
해달님도 계시고 나무 목사님, 김성훈 팀장님,
여야님, 서재생 목사님, 홀리강 형제님
교회사랑님, 김승민 목사님, 안승백 목사님,
승리인 님, G2U 형제님, 그리고
먼저 천국 가신, 고 김오동 목사님,
고 장달윤 목사님 그 외 너무 많은 분들...
지금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 별들....
그리운 분들도 많고,
모두 너무도 귀하고 아름답고 순수하였던 시간들...
모두 기억하고 싶어서...
몇 날 며칠 쉬지 않고 다 옮겼네요.
그때 짐보형제님의 이 댓글도 보았지요.
해처럼달처럼님의 댓글
해처럼달처럼 68.♡.♡.116
김오동 목사님도 별세하셨군요...
여기서 봅니다.
별똥별님의 댓글
별똥별 24.♡.♡.100
네,
그렇게 들었어요.
그리고 또 많은 분들이 잠수하셨는지
믿음은 님, 요나 님, 비둘기 님, 성령의 열매 님,
anna 님, D=1 님, the true 님, 김수영 님도 계셨고,
또 많은 분들이 더 계셨는데...
김수영 님은 지금 바나바님으로 열심히
참여해 주시는 것 같고....
암튼, 그때가 좋았던 것같아요.
짐보님의 댓글
짐보 96.♡.♡.163
모든 분들이 그립다는 말씀은 이해 오지만
그때는 순수하고 이젠 안 순수?
아직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추억에 사시면 늙습니다.
아! 자연을 사랑하시던 김오동 목사님...
별똥별님의 댓글
별똥별 24.♡.♡.100
ㅎㅎ
10년 세월입니다.
여전히 순수하다고 하기에는....
아, 저만 늙고 있는지도 모르죠.^^
김정한님의 댓글
김정한 114.♡.♡.146
별사모님이
언급하신 고참님들
회자정리를 어떻하겠습니까?
저 같은 사람이 죽 치고
앉아 있는 것이 수준을 떨어뜨리는 것
아닌지 겁나는군요
목회길로 나선지가 40년이 되다보니
추억거리가 숱하게 많아도
짐보님처럼 늙지 않으려고 해 봅니다만
세월을 이길 장사가 없다더니
이제는 나이를 생각지 않을 수 없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