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 나눔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페이스 상패 제이미 제이미혜택


 

현재 이 게시판은 스팸때문에 본 글을 쓰기 위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처음으로 자유게시판에 본문이나 댓글을 올리시는 분은 반드시 글등록 버튼을 누르기 전에 아래 게시물 관리방침을 확인하여 주세요. 댓글을 올리기 위해서는 스팸방지 숫자를 입력해야 합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자유게시판 논객님들은 회원등록을 통해 자유로운 수정과 글쓰기를 이용하세요. 사이트 맨 위 오른쪽에 회원등록 링크가 있으며, 바른 이메일만 요구하며 익명을 유지하실 수 있습니다.

 

나눔게시판

88.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페이지 정보

짐보 (108.♡.♡.226)2018-08-20 09:57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He that hath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ith unto the churches”

*라오디게아 교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시록 3:15-16]

이 계시록의 말씀은
교회에 참석만 해도 직분이라고 받는 서리집사도 이 말씀을 수없이 설교로
들어보았을 것이다.
열심을 바라는 교인을 향한 설교와
특히 부흥회에서 적극적인 교회의 헌신과 순종 그리고 헌금 강조하는 말로
자주 사용한다.
주님은 진정 그런 의미로 말씀하셨을까?
그러한 의미가 부분적으로 있겠으나 본질은 헌신적인 열심히도 아니고
더구나 열정을 가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러기에 그런 주장은 이미 외식을 하는 자들이 자신의 외식을 모르면서
자신을 따르기를 위해 겁주는 구절로 사용하였기에
그런 자들은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했고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 또한 마찬가지라 그런 자들을 향한 말씀이기에
주님의 말씀은 복음의 의, 믿음의 의 인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래서 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그런 자들의 주장처럼 사도 요한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 실제로 존재하였던
역사적인 일곱의 지역 교회를 말하지만 일곱 교회의 상황만이 아니라
교회 역사의 어느 시점에 존재하는 세상의 교회와 교계의 일면을 보여주시며
교회의 전반적인 상태는 점차 쇠퇴해 가는 모습으로 기록되어
라오디게아 교회를 마지막으로 역사적으로 변절되어간 교회를 기록하고 있고
이 기록이 이 시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닮고 있다고
이 글을 쓰면서 주장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 교회로서 차지도 덥지도 않으며 배도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식으로 타락한 현대 교회를 묘사하고 있음은,
명목적으로 세상의 모든 교회가 하나 다는 주장을 하지만
연합하지도 못할뿐더러 교회사 역사상 오늘 날과 같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교파로
갈라지고도 개 교회주의가 팽창한 적이 없었고
한국교회와 이민 교회는
교파적으로 개 교회주의로 당당하게 선두(先頭)라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리, 분리로 거룩한 교회의 건물과 세상을 분리하고
성직자와 평신도로 교회를 분리하고
강대상과 회중석을 분리하고
근본적인 분리주의자가 되어 외치는 복음이 진정한 복음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한 몸을 이루는 복음이 얼마나 변절되었는가.
비난과 비판을 분별하지도 못하고
불의에 눈감은 교회
긍정의 사고에 함몰된 교회
그래서 철학적 사고와 심리학이 이끄는 교회
그리고도 세상에 아무 힘도 없으면서 선교를 지상의 과제로 삼으나
역으로 복음의 의를 전해야 할 교회
이것이 진정 주님께서 바라시던 교회 인가?

믿음의 실상을 바라보자.
자신이 믿음이라 여겼던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고
그리스도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고 무엇이 믿음인지
라오디게아 교회를 바라보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못해 자멸의 길인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했는지.
성령님께서 교회를 향한 말씀을 들어야 한다.
듣지 않는 다면, 듣지 못한 다면
그 책임은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의 책임이라
세상이 악하다고 핑계한 회피한 책임
교회가 복음의 의에서 멀어진 책임
그 모든 책임은
글 쓰는 사람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의 책임이라
교회가 복음의 힘을 잃은 원인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못한
복음의 정체성을 망각하여 외식으로 종교화된 오늘날의 현상은
라오디게아 교회 만 제외하고 모든 교회가 칭찬을 말씀을 받았지만
그 칭찬은 다른 죄를 용서하심이 아니며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개인이 아닌 교회를 판단하셨기에
주님은 언제나 “내가 아노니” 로
이미 마음의 동기를 아시기에, 믿음의 행위를 익히 아시기에
각 교회를 행위로 판단하셨기에
칭찬은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회에 책망하셨다.

명확한 사실은
모든 교회가 세상에서 완벽한 교회가 아니었지만
행위로 칭찬을 받았고 행위로 책망을 받아
행위로 주님의 판단을 받았지만
주님은 올바른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라시기에
영원한 생명을 간직한 그리스도 주님의 진리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기에
모든 교회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으며 그 기회가 은혜라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시며
그리고 또 행위로 판단하실 것이라
‘나’ 로 인해 교회를 판단하신다는 말씀이라
‘나’ 는 ‘나’를 부인하고 ‘우리’ 라는 공동체에 그리스도의 본이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고 공동체에서
미지근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여
침묵하거나 방관하거나 같이 휩쓸린다면
그 책임은 ‘너’ 에게 있다는 말씀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교회라
명목만 남은 교회라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온전한 교회라기에 거짓된 믿음의 행위를 갖고 있었기에
한쪽 발은 세상에, 다른 발은 교회에 담고
교회라 우기는 진리에 무지한 교회라
오늘날처럼 말로는 ‘영광’ 과 ‘할렐루야’를 노래하며
교회사 역사상 전무후무한 새벽예배를 비롯하여 수많은 명목의 예배를 드리고
더하여 부흥회를 비롯한 특별한 예배를 드리지만
교회가 세상보다 정의로워 정직 해졌나?
세상 사람들 보다 자신을 인정하고 솔직한가?
수많은 명목의 헌금종류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 헌신이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교회에서만 교인이 인, 의롭지 못한 행위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실상은 자기만족의 종교가 되어 자기도취로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이미 믿음에 떠난 외식이라
하나님 앞에 교만하기에
세상에 안주한 교회였기에
세상을 바꿀 복음의 의가 사라져 오히려 세상에 휩쓸리고
세상에 지탄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겉모습은 세상에서 규모가 큰 대형교회가 여럿 교회가 있지만
그런 교회가 모범적인 교회도 아니며
그런 교회를 쫓아가며 닮아간들 성경의 본보기 교회가 될 수 있을까.
말로는 선교를 위해 대형교회가 필요하다고들 하나
규모 이전에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먼저라
그리스도 주님 섬김의 본이 먼저라
그런 교회의 규모와 비례하여 예산이 풍성할 수는 있겠으나
그 규모에 비례하여 교회의 참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도리어 대형교회는 개 교회주의를 지향하는 원인이 되었고
교회사는 이와 같이 비례하여
교회가 커지고 화려해 지면 건물을 성전이라 불렀고
그런 교회가 화려해 진만큼 타락했었기에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많은 예배와 헌금의 종류로 인하여 부패하여 세상에 지탄을 받았다.

마치 중세시대 교황을 빗대어
백성들 자신이 교황의 젖소라고 한탄하였듯이
오늘날 교회는 이런 비유에 자유로운가?
대형 교회의 탄생과 유지의 명목으로 헌금을 거둔 불의한 헌금으로
세상 사람들은 착취로 보았고 반기독교 정서를 만들었으며
‘교회’ 가 ‘주식회사’ 라는 말이 저절로 생겼는가?
목사가 회사의 CEO(chief executive officer)라 주장했던 대형교회의 목사나
그런 목회를 추종하고
그를 추종하였던 자들
그런 자들이 사이비 인 것을.
그런 자들이 교회를 성전이라 불렀고 부르고 있음이 우연인가.

그 때마다 교회를 성전이라 불렀고
그 때의 교회의 조직은 직분을 분리하여
직분이 신분이 되었기에 세상 적으로 변하였으면서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여 교회를 성전이라 했다.
교회가 성전인가.
아직도 교회를 성전이라 부르는 자들이 넘치면서
그런 자들이 교회의 갱신을 외치는
어처구니없는 파렴치한 형태를 어찌하면 좋을까.

주님의 말씀을 보자.
오늘날 교회를 향한 성령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주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성전을 파괴될 것을 예언하셨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태복음24:1]
그래서 24장의 시작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로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시작된다.
이는 이전 장 23장의 연결된 말씀으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님은 예루살렘을 두 번이나 부르셨기에
이 장의 소제목의 개역개정은 ‘예루살렘을 두고 이르시다’ 라 기록되었지만
주님은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씀하셨을까.
어느 학자는 눈물로 말씀하셨을 것이라 본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이스라엘의 거룩한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집결지인 예루살렘의 성전
그 예루살렘은 선지자를 죽이고
그들에게 파송된 하나님의 사람을 돌로 쳤으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사랑하였으며
마치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과 같이 그 자녀를 보호하고
사랑의 손길로 모으고자 하셨으나 예루살렘이 원치 않았기에
주님은 안타까움을 거두시고 냉정하게 말씀하셨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너희 집’ 은 성전이지만
성전을 신앙의 상징으로 삼았던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민족까지 포함하여
버려진바 되고
주님을 믿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부활하시고 오셨을 때 어찌 되었는가.

주님은 오직 성도들 만 만나셨다!

그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셨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주님께서 영접을 받을 실 때에
그 때에,
그리스도 주님을 믿지 않은 자들
그리스도 주님을 죽인 자들
외식으로 신앙이 종교가 되어 그리스도 주님을 믿음의 행위로 영접하지 못한 자들
믿음의 행위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자들
그런 자들을 가리켜
주님은 예루살렘을 가리키셨고
그리고 은유를 통해 예루살렘이 애곡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 애곡은 독자를 잃은 부모의 애통과 같이 될 것이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무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스가랴 12:1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그때 제자들은 주님께서 화려하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의 건물을 보시기를
원하였지만 그 화려하고 웅장한 만큼 타락된 성전을 무너트린다 하실 것을
알지 못했다.
아직 제자들은 영원한 것 보다 일시적인 건물에 사로잡혀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의 상황이라
구세주이신 주님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상적인 일시적인
그림자에 관심이 있었으나
주님은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셨다.
이는 성전에서 떠나는 영광이라
에스겔 9장의 소제목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다” 이다.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9:3-4]
이는 성전에서 떠나는 영광이라
이는 행위의 심판이라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로
하나님의 분노로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에 대한 사랑의 배반으로
“이마에 표를 그리라” 라는
계시록의 이마의 표와 같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요한계시록 13:16-17]
성도들이 하나님께 인침을 받듯이,
이는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을 마음의 중심에 도장을 새기듯 인치 듯이
사탄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흉내 내어 자신에게 속한 자를 표를 하기에
동물들에게 소유의 표로 낙인을 찍듯이
로마 문화에서 노예에게 주인의 이름을 낙인 하듯이.
그러나 성도는 이미 성령님께 인침을 받았다.
다시 표를 받는 사람을 보면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모든 자다.
작은 자나 큰 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이는 주님의 말씀 “누구든지” 로 공평하시며 공정하신 주님이시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50]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7:23]
누구든 지라, 공정하시고 공평하시여, 어떠한 이유라도 변명 없이
믿음의 행위로 판단하시는 주님은
성전 꼭대기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 분이라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누가복음4:9]
왜 하필 사탄은 성전의 꼭대기에서 주님을 시험을 시험하셨을까.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을 소유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미 사탄은 주님을 알고 있었기에 주님의 실체를 인정하고
시험하였기에 성전의 꼭대기로,
이는 유혹의 시험은 믿는다는 자들에게 언제든 어디서든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거든,
그리스도 주님의 제자거든,
욕심과 욕망으로 유혹의 높아진 교만으로 시험에 들기에
이기지 못하면
자신의 의에, 자신의 믿음에 도취하여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한다.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성전에 갑자기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라기 3:1절을 언급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그러나 주님은 성전보다 큰 분이라 선언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태복음12:6]
“성전보다 더 큰 이” 는
성전법이 안식일의 법에 우선하듯이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의 활동(행위)은 성전법보다 우선한다.
그러기에 성전의 건물은 일시적인 예수님의 모형, 예표이었기에,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건물로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顯現)을 이제 나타내실 필요가 없으시기에
하나님은 온전하신 성전 인 주님 안에서 임재 하시기에
이제 성전의 건물은 성전으로서의 의미가 사라졌다.
더구나 온갖 외식의 근거지가 된 성전 건물이라.

다시 요한계시록의 심판을 이해하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보면
사랑의 주님은 세상을 심판 하시러 오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요한복음 12:44-78]
그리스도 주님은
낮고 낮아지셔서 인간의 신분으로 오셔서
온갖 고초를 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한
고귀한 사랑의 주님이시라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하려 오셨기에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향하여
성령님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하시며 기회를 주시고
죄에서 뉘우쳐 믿음의 행위로 온전 하라 시는 말씀이라
이 말씀이 오늘날 교인이라는 신앙인이 되지 못한 모든 자들을 향한
구원의 말씀이라

일곱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셨듯이 오늘날도 이와 같기에
그리스도인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굳게 믿음의 윤리관으로 살아있어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고난을 두려워 말고 올바른 행위로 살며
미지근한 근성을 버리라 하셨고
이 모든 말씀은
믿는 다는 자들을 향한 말씀이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하나님 나라에 함께 하시기 위한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사랑의 말씀이라
다시 기회를 주신 그리스도 주님의 은혜라
구원을 주시기 위함이라
아직도 복음의 어그러진 길에서 돌아서길 바라시는
주님의 거룩하고 고귀한 사랑의 말씀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을 포함한 공의로운 사랑이라
그리스도 주님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언제까지 함께 하시길 원하시는 사랑으로
성령님을 보내 주셨고
그러기에 성령님께서 교회를 향한 말씀을 듣기를
주님은 매 교회마다 간절히 원하셨고
오늘날도 간절히 원하시며
서로 사랑하기를
주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듯이
그토록 사랑하셨듯이
내 몸같이 형제자매를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이웃을 사랑하기 원하심이 복음이며 하나님의 의이기에
성령님께서 그렇게 사랑하기를 원하시기에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고귀한 사랑을
너와 나와 우리의 가슴에 도장을 새기듯 인 치셔서
그 위대한 사랑으로 인해 믿음의 온전한 행위가 되어
어지러운 세상에 빛이 되고
썩어지지 아니할 세상이 되게 녹은 소금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요한 계시록이 심판의 책이라고?
아니다!
요한 계시록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리고 은혜라,
그리스도 주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그리스도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길 바라시기에
교회다운 공동체가 되길 기회를 주신 사랑의 책이라
주님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하시며
오늘도 기다리시며
성령님은 내 음성을 들으라, 하시며
오늘 이 시간에도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서기를
기다리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나눔게시판 목록

Total 554건 17 페이지
나눔게시판 목록
제목 날짜
김정한 ㆍ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네 가지 확신을 주신다. 댓글(4) 2017-04-15
짐보 ㆍ 42.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2017-04-14
소명순례자 ㆍ 진리의 인격적인 힘 댓글(1) 2017-04-14
대장쟁이 ㆍ (창 50) 천년을 하룻밤 같이 댓글(4) 2017-04-14
해처럼달처럼 ㆍ 글이 너무 좋아서.... 뉴욕의 어느 택시 기사 이야기 댓글(1) 2017-04-11
해처럼달처럼 ㆍ 교회와 정치 2017-04-11
별똥별 ㆍ 십자가 안에서 내 고백 댓글(3) 2017-04-11
바두기 ㆍ 목사들이 정치적 견해를 밝히면 안되는 이유 - 2 댓글(3) 2017-04-11
해처럼달처럼 ㆍ 시선을 한곳에만 두지마 댓글(2) 2017-04-11
이성은 ㆍ 목회자님과 사모님께서는 절대로 중절수술이나 피임수술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댓글(1) 2017-04-07
예종규 목사 ㆍ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 댓글(2) 2017-04-06
바두기 ㆍ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목사님들이 안되는 이유 - 1 댓글(7) 2017-04-06
짐보 ㆍ 41.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댓글(4) 2017-04-06
해처럼달처럼 ㆍ 사랑은 가슴으로 말하는거야 댓글(2) 2017-04-06
해처럼달처럼 ㆍ '그리스도인' 댓글(2) 2017-04-06
대장쟁이 ㆍ (창 49) 아버지의 축복 댓글(18) 2017-04-01
김정한 ㆍ 천국기업 얻을 자들이 싸워야 할 싸움들(4) 댓글(18) 2017-04-01
해처럼달처럼 ㆍ 사순절 묵상/ 용서해 줄 수 없겠니? 댓글(6) 2017-03-30
짐보 ㆍ 40.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댓글(4) 2017-03-30
예종규목사 ㆍ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2017-03-29
강춘수 ㆍ 더이상은 아니다 댓글(1) 2017-03-29
김원기 ㆍ 공개 건의 2017-03-29
별똥별 ㆍ 사순절에 드리는 기도 댓글(7) 2017-03-25
짐보 ㆍ 39.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댓글(2) 2017-03-23
해처럼달처럼 ㆍ 봄이 왔어요 댓글(4) 2017-03-23
게시물 검색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연락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