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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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108.♡.♡.226)ㆍ2018-12-01 10:26관련링크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He that hath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ith unto the churches”
*라오디게아 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이긴다는 주님의 말씀을 요한일서 5장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5:4-5]
이기는 자는 세상을 이기는 자를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이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낳으신 분이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 마다 하나님께 난 자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Whosoever believeth that Jesus is the Christ is born of God:
and every one that loveth him that begat loveth him also that is begotten of him. 1:1]
그리스도 주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하나님의 증인 인
하나님의 의(義)의 증인이시라 복음의 증인이시라
이를 증거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
그리스도 주님의 계명을 증거 하는 분이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녀임을 아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로 만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義)의 계명을 지킬 때에,
신명기의 기록처럼 하나님의 의(공의)를 지킬 때에
하나님의 자녀라
주님은 이를 계명이라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
마음을 다하는 감정적이고 이성적인 사랑
목숨을 다하는 의지적이고 육체적인 행위의 사랑
뜻을 다하는 지성적인 사랑
이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믿음을 의미한다.
믿음은 행위까지 포함된 믿음이라
믿음은 하나님께서 부르심이라 은혜라
이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삶으로의 응답이 예배라.
둘째,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는 계명
네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시는 계명은
네가 무엇을 먹고 입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근본적인 삶의 의미는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의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의문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주님을 따르는 거듭난 자만
부르심에 응답한 자만
알 수 있고, 행 할 수 있는 믿음이라
인간의 능력으로 알고 행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면
알 수도 없고, 행 할 수 없기에
주님은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모든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듣지 않는 다면, 못한다면
자칭 신자이지 결코 성도가 아니라 시는 말씀이라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형제자매와 이웃을 사랑하는
그 만큼의 분량이라,
예배가 그러하다.
그러기에 성도라면
계명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어
말씀이 분별로 판단과 의지의 마음이 되도록.
손목에 매여
마음의 생각이 손과 발의 행위가 되도록.
미간에 붙여 표로 삼아
모든 사고의 기준으로 삼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너와 너의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네가 속한 집단에서 온전히 이루어져서
네가 속한 신앙의 공동체에서 온전히 이루어져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부름을 받은, 소명 받은
선택 받은 자가 성도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한복음 14:23-24]
주님의 말씀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응답이라
주님의 말씀은 “나를 사랑한다면”
오늘 이 시간,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 시간의 때이며 조건이라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현제 분사로
현제, 이제, 지금 “나를 사랑한다면” 으로 표현했고
이것이 신명기의 ‘쉐마’ 라 들으라는 뜻으로
이 뜻이 주님의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
유대인들은 모든 예배를 시작할 때 기도의 시작은 ‘쉐마’ 로
행하기 위하여 들으라는 의미의 ‘쉐마’ 로 시작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지 사랑의 말이 아니라, 단지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지킴이 사랑이라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이 말씀을 지킨 자들이 빌라델비아 교회였기에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비록 작은 능력을 가졌지만 주님의 계명을 지켜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아니하였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작은 능력이나마 행하는 믿음을 가졌기에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셨지만
빌라델비아 교회와 반대로
오늘날과 같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그 이유를 주님은 친절히 말씀하셨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물질적인 부자라 할지라도
주님의 계명에 대하여, 주님의 복음의 의(義)에 가난하기에,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부요하든 그렇지 않든
부(富)를 추구하기에
부가 부족한 물질의 궁핍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어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없음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선은 의(義)라
사랑의 근원(根源)은, 근본이 의(義)라
사랑은 의(義)인 진리와 함께 하기에
십일조를 하든, 십에 2조를 하든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 도다]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또 무엇으로 구제를 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 주님의 의(義)에서 비롯된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 유익이 없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 전서 13:3-7]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라 하나
행위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수치가 된 교회라
교회의 이름만 있는 교회라 책망하셨고
라오디게아 교회로 부터 오늘날 이 시대에 대한 교회의 현실을 직시(直視)하면,
물질적으로 풍부한 시대에 살아가면서
교회가 더 많은 풍요를 향해 질주하지만
그에 반해 복음의 의를 알지 못하여
교회의 건물을 웅장하게 짓고 강대상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조명과 음향시설이 세상의 방송국을 따라 가나
그러나 교회가 화려해 질수록, 부요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교회는 타락하였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지만
거룩히 보이려 교인과 신분적인 차별된 자가 되어 가운을 입고
이것저것 예화로 자기 자신의 신앙의 고백이 없이 설교하는 자의 행위를 아시며
성가대 가운을 입고 가성의 목소리 내는 자의 행위를 아시기에
그 행위는 믿음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라
외식이 되어 제도화 되고 종교화 한 행위를 보시는 주님은,
곤고한 종교생활로
가엾고 불쌍하여 믿음이라는 위선된 믿음을 가련히 보시며
부요든 그렇지 않든 부를 추구하는 의(義)에 가난한 실상을 보시기에
진리에 눈 먼 것과 벌거벗은 수치를 책망하실 것이다.
그리고도 전도와 선교를 지상명령으로 삼으나
이 또한 자기만족을 합리화한 종교적인 의무라 자랑을 하지만
진정한 교회에 대한 정체성에 고민이 없다면
그런 회개의 몸부림이 없다면 토하여 버려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과 상관없어
교회로서의 사명과 교회로서의 허울뿐인 교회를 거두시겠다는
경고의 말씀이라
왜 오늘날 교회라면서 교회 내에서 불의가 만연하고
교회라면서 세상에 영향력이 없고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는지,
왜 교인의 감소를 외부의 환경에서 찾는가?
이제 한 세대도 못돼 소멸될 수많은 교회들
원인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시기에 주님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하시며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셨고
이 기회가 그리스도 주님의 은혜라
아직도 모두가 구원받기 원하시는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채찍의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시고
영혼의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며 사랑한
고귀한 사랑의 말씀이라
부활하시어 소망의 첫 열매가 되신 소망을 주시려는 말씀이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He that hath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ith unto the churches”
*라오디게아 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이긴다는 주님의 말씀을 요한일서 5장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5:4-5]
이기는 자는 세상을 이기는 자를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이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낳으신 분이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 마다 하나님께 난 자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Whosoever believeth that Jesus is the Christ is born of God:
and every one that loveth him that begat loveth him also that is begotten of him. 1:1]
그리스도 주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하나님의 증인 인
하나님의 의(義)의 증인이시라 복음의 증인이시라
이를 증거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
그리스도 주님의 계명을 증거 하는 분이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녀임을 아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로 만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義)의 계명을 지킬 때에,
신명기의 기록처럼 하나님의 의(공의)를 지킬 때에
하나님의 자녀라
주님은 이를 계명이라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
마음을 다하는 감정적이고 이성적인 사랑
목숨을 다하는 의지적이고 육체적인 행위의 사랑
뜻을 다하는 지성적인 사랑
이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믿음을 의미한다.
믿음은 행위까지 포함된 믿음이라
믿음은 하나님께서 부르심이라 은혜라
이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삶으로의 응답이 예배라.
둘째,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는 계명
네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시는 계명은
네가 무엇을 먹고 입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근본적인 삶의 의미는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의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의문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주님을 따르는 거듭난 자만
부르심에 응답한 자만
알 수 있고, 행 할 수 있는 믿음이라
인간의 능력으로 알고 행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면
알 수도 없고, 행 할 수 없기에
주님은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모든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듣지 않는 다면, 못한다면
자칭 신자이지 결코 성도가 아니라 시는 말씀이라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형제자매와 이웃을 사랑하는
그 만큼의 분량이라,
예배가 그러하다.
그러기에 성도라면
계명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어
말씀이 분별로 판단과 의지의 마음이 되도록.
손목에 매여
마음의 생각이 손과 발의 행위가 되도록.
미간에 붙여 표로 삼아
모든 사고의 기준으로 삼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너와 너의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네가 속한 집단에서 온전히 이루어져서
네가 속한 신앙의 공동체에서 온전히 이루어져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부름을 받은, 소명 받은
선택 받은 자가 성도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한복음 14:23-24]
주님의 말씀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응답이라
주님의 말씀은 “나를 사랑한다면”
오늘 이 시간,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 시간의 때이며 조건이라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현제 분사로
현제, 이제, 지금 “나를 사랑한다면” 으로 표현했고
이것이 신명기의 ‘쉐마’ 라 들으라는 뜻으로
이 뜻이 주님의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
유대인들은 모든 예배를 시작할 때 기도의 시작은 ‘쉐마’ 로
행하기 위하여 들으라는 의미의 ‘쉐마’ 로 시작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지 사랑의 말이 아니라, 단지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지킴이 사랑이라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이 말씀을 지킨 자들이 빌라델비아 교회였기에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비록 작은 능력을 가졌지만 주님의 계명을 지켜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아니하였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작은 능력이나마 행하는 믿음을 가졌기에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셨지만
빌라델비아 교회와 반대로
오늘날과 같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그 이유를 주님은 친절히 말씀하셨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물질적인 부자라 할지라도
주님의 계명에 대하여, 주님의 복음의 의(義)에 가난하기에,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부요하든 그렇지 않든
부(富)를 추구하기에
부가 부족한 물질의 궁핍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어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없음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선은 의(義)라
사랑의 근원(根源)은, 근본이 의(義)라
사랑은 의(義)인 진리와 함께 하기에
십일조를 하든, 십에 2조를 하든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 도다]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또 무엇으로 구제를 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 주님의 의(義)에서 비롯된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 유익이 없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 전서 13:3-7]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라 하나
행위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수치가 된 교회라
교회의 이름만 있는 교회라 책망하셨고
라오디게아 교회로 부터 오늘날 이 시대에 대한 교회의 현실을 직시(直視)하면,
물질적으로 풍부한 시대에 살아가면서
교회가 더 많은 풍요를 향해 질주하지만
그에 반해 복음의 의를 알지 못하여
교회의 건물을 웅장하게 짓고 강대상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조명과 음향시설이 세상의 방송국을 따라 가나
그러나 교회가 화려해 질수록, 부요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교회는 타락하였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지만
거룩히 보이려 교인과 신분적인 차별된 자가 되어 가운을 입고
이것저것 예화로 자기 자신의 신앙의 고백이 없이 설교하는 자의 행위를 아시며
성가대 가운을 입고 가성의 목소리 내는 자의 행위를 아시기에
그 행위는 믿음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라
외식이 되어 제도화 되고 종교화 한 행위를 보시는 주님은,
곤고한 종교생활로
가엾고 불쌍하여 믿음이라는 위선된 믿음을 가련히 보시며
부요든 그렇지 않든 부를 추구하는 의(義)에 가난한 실상을 보시기에
진리에 눈 먼 것과 벌거벗은 수치를 책망하실 것이다.
그리고도 전도와 선교를 지상명령으로 삼으나
이 또한 자기만족을 합리화한 종교적인 의무라 자랑을 하지만
진정한 교회에 대한 정체성에 고민이 없다면
그런 회개의 몸부림이 없다면 토하여 버려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과 상관없어
교회로서의 사명과 교회로서의 허울뿐인 교회를 거두시겠다는
경고의 말씀이라
왜 오늘날 교회라면서 교회 내에서 불의가 만연하고
교회라면서 세상에 영향력이 없고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는지,
왜 교인의 감소를 외부의 환경에서 찾는가?
이제 한 세대도 못돼 소멸될 수많은 교회들
원인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시기에 주님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하시며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셨고
이 기회가 그리스도 주님의 은혜라
아직도 모두가 구원받기 원하시는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채찍의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시고
영혼의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며 사랑한
고귀한 사랑의 말씀이라
부활하시어 소망의 첫 열매가 되신 소망을 주시려는 말씀이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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