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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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108.♡.♡.226)ㆍ2018-11-19 12:28관련링크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He that hath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ith unto the churches”
*라오디게아 교회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3:20]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면
이는 주님이 하신 말씀 요한복음 6장 54절이 연상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니]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믿음의 시작을 말씀하셨고
마지막 날에 살리신다는 말씀은 미래의 사건이라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신 같은 말씀이라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는
분명히 주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시작을 말씀하셨고
그래서 어느 신학자들은 이것이 마지막 때 있을 주님의 만찬을 가리킨다 하지만
다음절을 보면 “이기는 그에게는...” 이라 말씀하심은
문을 열고 주님과 함께 먹는 다는 말씀이 구원(영생)을 온전하게 이룸이 아니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1]
다시 살펴보면 요한복음을 보면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영생의 근거인 믿음을 가졌고)
그리고 마지막 날에 살리신다는 말씀은
(믿음을 지켜서 영생을 이룸)
한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믿음의 행위를 말씀하셨음은
그 다음 하신 말씀인 56절을 보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이는 계시록의 말씀과 같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러기에 한번 주님을 구주로 섬기는 결단이
단 한 번의 믿음의 결단으로 구원(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삶에서 계속적인 응답이어야 함은
구원은 단 한 번의 믿음으로 얻는 산물이 아니라
삶과 연결된 지속적인 주님을 향한 응답이라
이런 저런 형편과 사정의 삶에서 믿음을 간직한 자로
그리스도 주님의 고귀한 사랑을 간직한 자로
주님 앞에 있는 서있는 자로 살아가는
그래서 인내와 함께한 믿음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의 신앙은
실제로 계신 주님의 실존(實存)적인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행위가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라,
그러기에 이기는 그에게는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됨은,
이미 성령님과 함께 한 삶의 행위라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신 그리스도를 계명으로 살아
이 땅에서 인생의 여정(旅程)으로 하나님나라까지 동행하는 자를 성도라 한다.
이 이기는 말씀을 하시기전 하신 말씀은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미지근하여 너를 토하여 버리신다 하셨음은
첫째는,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의 사역의 상실이라
교회로서 교회를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경고라,
그 당시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으며
그리스도인의 생명인 복음대로 살려고 말씀과 물질을 나누며
목숨까지 버려야 했던 시대라
그 시대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충격적인 말씀이었고
둘째는, 경고는 교회의 구성원들인 교인들이
믿음에서 탈락의 경고라,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교회를 향한 주님의 경고를 듣지 않는다면
어찌될까.
신앙의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보라.
아는 만큼 타락한 분량을 볼 것이며
아는 만큼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라
오늘날 교회를 향한 성령님의 탄식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는
교회의 출석이, 또는 교회의 직분을 받음이 구원의 증거가 되었기에
열심을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차치도 아니한 상태’를 단지 ‘열심’ 이라 가르쳤기에
신앙생활을 교회에 한정시켜 교회 중심이 되었기에
교회에서만 교인 인 맹신자를 만들었고
열심인 교인은 광신자를 만들었음은
교회 중심의 중심에는 성직자라는 목사가 있어 목사교로 변질되어갔고
돌아보면 이 모든 교회법과 전통은 가톨릭을 닮아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했기에
그리스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의 사랑은 말뿐이라
절대적인 주님의 계명에 대하여 돌이킬 수 없는 만큼 외식이 되었기에
이제 이를 바로 바라보는 신앙인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라
이 외식이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면서 어떻게 바리새인들을 흉볼 수가 있는가.
(교회 안에서 수없이 의문을 가졌다.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 인가.
근본을 호도(糊塗)하면서
불의를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는 ‘사랑’ 이라는 변명으로
얼마나 많은 부패한 일과 사건을 덮었으며
얼마나 정의롭지 않은 행위를 감추었나.
사랑은 모든 불의를 감싸주어야 하나?
사랑은 모든 죄를 덮나?
성경을 문자적인 해석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부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는 말과 글로 비롯된 행위
고귀한 사랑의 그리스도 주님을 열심히 부르면서도
사랑에 정의가 사라진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사랑
온갖 불의를 덮어버리는 사랑
그것은 사랑이란 미명의 구실이라
진리와 함께 한 사랑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8]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어리석은 선생들은
이 구절로 자신의 변명으로 삼고 어리석은 자들은 그런가 한다.
이 장의 소제목은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이다.
사랑으로 모든 죄를 덮는 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의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 서로 형제자매로
다른 형제자매의 실수나 약점을 감싸주며 보호하여 더 장성한 분량의 믿음으로
성장하기 위해 사랑으로 감싸주라는 뜻이지
사랑으로 모든 죄를 감싸주어라 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다음절을 보면 이해된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9-10]
이를 또 잠언 10장 12절에 적용하여 변명하는 자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린다고 변명을 삼으나 이 잠언은 지혜를 가리킨다.
허물없는 자가 있는가.
모든 사람은 완벽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기에
사랑은 부족한 상대의 허물을 감싸 같이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을 간직한 자들의 지혜라
그렇다고 불의한 일과 부정한 사건에 눈을 감는 회피가 아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믿음의 근본적인 의(義)의 행위라
주님의 계명에 대한 응답의 행위라
근본 중에 근본인 계명이라
마태복음의 주님의 계명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4-9절을 인용하셨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는 하나님의 의(공의)로,
명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어
말씀이 의지의 마음이 되도록,
손목에 매여
마음의 생각이 행위가 되도록,
미간에 붙여 표로 삼아
모든 사고와 분별의 기준으로 삼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가정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도록.
(주님의 말씀은 복음의 의(정의)로 삼아 신앙관이 되었기에
이글에 이 주님의 이 말씀을 몇 차례 썼고 또 같은 의미나 다른 시각으로 읽고
생활에 적용하려 했기에 자신이 얼마나 외식적인 사람인가 회개도 했으며
신앙관이 되었기에 인생관이 되어 이 글로 자신의 치부(恥部)를 보았고
교회를 바라보며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자들을 보았고 이런 자들이 사이비라
이런 자들과 더불어 다수결이 된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한 세대를 유지하지도 못하고 사라질 수많은 교회
그 이유는 복음의 정의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 주님의 복음의 의(義) 없이 주님과 동행할 수 없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믿음의 근본 된 계명을 비틀고 굴절되게 바라보아
분별이 사라진 열심 으로 분별력 없는 교회를
교회라 부르기에 어림도 없어
교회의 부흥을 크기로만 바라보는 오늘날의 시대는
성령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컴컴한 세대라
빛이신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고
빛의 자녀들이라 면서 침묵 하는 세대라
의에 대한 침묵은 불의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함이라
성령님의 침묵이라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못함이라,
믿음의 시작인 주님과의 동행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신을 계속적으로 부인하는, 부인을 못하기에
그리스도 주님을 닮아가는 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He that hath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ith unto the churches”
*라오디게아 교회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3:20]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면
이는 주님이 하신 말씀 요한복음 6장 54절이 연상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니]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믿음의 시작을 말씀하셨고
마지막 날에 살리신다는 말씀은 미래의 사건이라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신 같은 말씀이라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는
분명히 주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시작을 말씀하셨고
그래서 어느 신학자들은 이것이 마지막 때 있을 주님의 만찬을 가리킨다 하지만
다음절을 보면 “이기는 그에게는...” 이라 말씀하심은
문을 열고 주님과 함께 먹는 다는 말씀이 구원(영생)을 온전하게 이룸이 아니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1]
다시 살펴보면 요한복음을 보면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영생의 근거인 믿음을 가졌고)
그리고 마지막 날에 살리신다는 말씀은
(믿음을 지켜서 영생을 이룸)
한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믿음의 행위를 말씀하셨음은
그 다음 하신 말씀인 56절을 보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이는 계시록의 말씀과 같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러기에 한번 주님을 구주로 섬기는 결단이
단 한 번의 믿음의 결단으로 구원(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삶에서 계속적인 응답이어야 함은
구원은 단 한 번의 믿음으로 얻는 산물이 아니라
삶과 연결된 지속적인 주님을 향한 응답이라
이런 저런 형편과 사정의 삶에서 믿음을 간직한 자로
그리스도 주님의 고귀한 사랑을 간직한 자로
주님 앞에 있는 서있는 자로 살아가는
그래서 인내와 함께한 믿음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의 신앙은
실제로 계신 주님의 실존(實存)적인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행위가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라,
그러기에 이기는 그에게는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됨은,
이미 성령님과 함께 한 삶의 행위라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신 그리스도를 계명으로 살아
이 땅에서 인생의 여정(旅程)으로 하나님나라까지 동행하는 자를 성도라 한다.
이 이기는 말씀을 하시기전 하신 말씀은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미지근하여 너를 토하여 버리신다 하셨음은
첫째는,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의 사역의 상실이라
교회로서 교회를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경고라,
그 당시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으며
그리스도인의 생명인 복음대로 살려고 말씀과 물질을 나누며
목숨까지 버려야 했던 시대라
그 시대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충격적인 말씀이었고
둘째는, 경고는 교회의 구성원들인 교인들이
믿음에서 탈락의 경고라,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교회를 향한 주님의 경고를 듣지 않는다면
어찌될까.
신앙의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보라.
아는 만큼 타락한 분량을 볼 것이며
아는 만큼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라
오늘날 교회를 향한 성령님의 탄식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는
교회의 출석이, 또는 교회의 직분을 받음이 구원의 증거가 되었기에
열심을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차치도 아니한 상태’를 단지 ‘열심’ 이라 가르쳤기에
신앙생활을 교회에 한정시켜 교회 중심이 되었기에
교회에서만 교인 인 맹신자를 만들었고
열심인 교인은 광신자를 만들었음은
교회 중심의 중심에는 성직자라는 목사가 있어 목사교로 변질되어갔고
돌아보면 이 모든 교회법과 전통은 가톨릭을 닮아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했기에
그리스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의 사랑은 말뿐이라
절대적인 주님의 계명에 대하여 돌이킬 수 없는 만큼 외식이 되었기에
이제 이를 바로 바라보는 신앙인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라
이 외식이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면서 어떻게 바리새인들을 흉볼 수가 있는가.
(교회 안에서 수없이 의문을 가졌다.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 인가.
근본을 호도(糊塗)하면서
불의를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는 ‘사랑’ 이라는 변명으로
얼마나 많은 부패한 일과 사건을 덮었으며
얼마나 정의롭지 않은 행위를 감추었나.
사랑은 모든 불의를 감싸주어야 하나?
사랑은 모든 죄를 덮나?
성경을 문자적인 해석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부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는 말과 글로 비롯된 행위
고귀한 사랑의 그리스도 주님을 열심히 부르면서도
사랑에 정의가 사라진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사랑
온갖 불의를 덮어버리는 사랑
그것은 사랑이란 미명의 구실이라
진리와 함께 한 사랑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8]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어리석은 선생들은
이 구절로 자신의 변명으로 삼고 어리석은 자들은 그런가 한다.
이 장의 소제목은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이다.
사랑으로 모든 죄를 덮는 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의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 서로 형제자매로
다른 형제자매의 실수나 약점을 감싸주며 보호하여 더 장성한 분량의 믿음으로
성장하기 위해 사랑으로 감싸주라는 뜻이지
사랑으로 모든 죄를 감싸주어라 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다음절을 보면 이해된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9-10]
이를 또 잠언 10장 12절에 적용하여 변명하는 자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린다고 변명을 삼으나 이 잠언은 지혜를 가리킨다.
허물없는 자가 있는가.
모든 사람은 완벽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기에
사랑은 부족한 상대의 허물을 감싸 같이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을 간직한 자들의 지혜라
그렇다고 불의한 일과 부정한 사건에 눈을 감는 회피가 아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믿음의 근본적인 의(義)의 행위라
주님의 계명에 대한 응답의 행위라
근본 중에 근본인 계명이라
마태복음의 주님의 계명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4-9절을 인용하셨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는 하나님의 의(공의)로,
명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어
말씀이 의지의 마음이 되도록,
손목에 매여
마음의 생각이 행위가 되도록,
미간에 붙여 표로 삼아
모든 사고와 분별의 기준으로 삼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가정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도록.
(주님의 말씀은 복음의 의(정의)로 삼아 신앙관이 되었기에
이글에 이 주님의 이 말씀을 몇 차례 썼고 또 같은 의미나 다른 시각으로 읽고
생활에 적용하려 했기에 자신이 얼마나 외식적인 사람인가 회개도 했으며
신앙관이 되었기에 인생관이 되어 이 글로 자신의 치부(恥部)를 보았고
교회를 바라보며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자들을 보았고 이런 자들이 사이비라
이런 자들과 더불어 다수결이 된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한 세대를 유지하지도 못하고 사라질 수많은 교회
그 이유는 복음의 정의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 주님의 복음의 의(義) 없이 주님과 동행할 수 없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믿음의 근본 된 계명을 비틀고 굴절되게 바라보아
분별이 사라진 열심 으로 분별력 없는 교회를
교회라 부르기에 어림도 없어
교회의 부흥을 크기로만 바라보는 오늘날의 시대는
성령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컴컴한 세대라
빛이신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고
빛의 자녀들이라 면서 침묵 하는 세대라
의에 대한 침묵은 불의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함이라
성령님의 침묵이라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못함이라,
믿음의 시작인 주님과의 동행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신을 계속적으로 부인하는, 부인을 못하기에
그리스도 주님을 닮아가는 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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