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럽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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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규 (121.♡.♡.53)ㆍ2018-09-19 07:1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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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럽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2-14)
많은 그리스도 인들은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선한 행위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C.S. 루이스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논한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입장이 다른 그리스도 인들은 두 가지 패러디(parody : 잘 알려진 표현이나 인물 등을 우습고 과장되게 모방하는 것)를 만들어 서로를 비난했습니다.
한 편의 그리스도 인 들은 “오로지 중요한 것은 선한 행위다. 최고로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한편의 그리스도 인 들은 “오직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따라서 믿기만 하면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무조건 구원 받을 뿐 아니라 한번 받은 구원은 절대로 취소 대는 일이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성경은 한 놀라운 구절 안에 이 두 가지를 통합함으로서 문제를 마무리짓습니다.
“두럽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것만 보면 마치 모든 것이 우리와 우리의 선행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 시니”(빌2:13)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모순되게 보이는 구절들이야 말로 기독교에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당황스럽긴 해도 전혀 의외로 느껴지진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일할 때 정확히 어디까지 가 하나님의 일이고 어디까지 가 인간의 일인지 칼로 자르듯 철저하게 구분하려 들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처럼 “그는 이 일을 하고 나는 저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지요. 그러나 이런 생각은 금방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는 어러분 밖에 계실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도 계시는 분입니다. 설사 하나님의 몫과 인간의 몫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그 내용을 인간의 언어로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것을 억지로 표현하려다 보니 교파마다 제각기 다른 주장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선행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는 교회도 믿음의 필요성을 말하며, 믿음을 크게 강조하는 교회 또한 선행을 권면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처음에는 온통 도덕 얘기만 하고 의무와 규칙과 죄와 덕(德)에 관한 말만 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이 모든 것을 통해 도덕 넘어의 것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데에는 모든 그리스도인 들이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순전한 기독교”에서 발취한 글)
모든 종교인들은 선을 행함으로(적선 : 積善) 낙원에서 영생(극락 : 極樂)을 누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 들은 사람이 선을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가 없다는 사실(롬3:10-12)에 부딭치게 됩니다. 즉 자기의 노력과 선행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 임을 깨닫고 두 손들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이 절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믿음으로부터 반드시 선한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 때 선한 행동이 나오지 않는 다면 그 믿음이 잘 못된 믿음입니다. 즉 죽은 믿음입니다.(약2:17)
원로 Essay 중에서
성도교회 원로목사 예종규
http://café.daum.net/y9144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2-14)
많은 그리스도 인들은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선한 행위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C.S. 루이스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논한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입장이 다른 그리스도 인들은 두 가지 패러디(parody : 잘 알려진 표현이나 인물 등을 우습고 과장되게 모방하는 것)를 만들어 서로를 비난했습니다.
한 편의 그리스도 인 들은 “오로지 중요한 것은 선한 행위다. 최고로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한편의 그리스도 인 들은 “오직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따라서 믿기만 하면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무조건 구원 받을 뿐 아니라 한번 받은 구원은 절대로 취소 대는 일이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성경은 한 놀라운 구절 안에 이 두 가지를 통합함으로서 문제를 마무리짓습니다.
“두럽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것만 보면 마치 모든 것이 우리와 우리의 선행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 시니”(빌2:13)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모순되게 보이는 구절들이야 말로 기독교에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당황스럽긴 해도 전혀 의외로 느껴지진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일할 때 정확히 어디까지 가 하나님의 일이고 어디까지 가 인간의 일인지 칼로 자르듯 철저하게 구분하려 들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처럼 “그는 이 일을 하고 나는 저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지요. 그러나 이런 생각은 금방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는 어러분 밖에 계실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도 계시는 분입니다. 설사 하나님의 몫과 인간의 몫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그 내용을 인간의 언어로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것을 억지로 표현하려다 보니 교파마다 제각기 다른 주장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선행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는 교회도 믿음의 필요성을 말하며, 믿음을 크게 강조하는 교회 또한 선행을 권면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처음에는 온통 도덕 얘기만 하고 의무와 규칙과 죄와 덕(德)에 관한 말만 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이 모든 것을 통해 도덕 넘어의 것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데에는 모든 그리스도인 들이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순전한 기독교”에서 발취한 글)
모든 종교인들은 선을 행함으로(적선 : 積善) 낙원에서 영생(극락 : 極樂)을 누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 들은 사람이 선을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가 없다는 사실(롬3:10-12)에 부딭치게 됩니다. 즉 자기의 노력과 선행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 임을 깨닫고 두 손들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이 절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믿음으로부터 반드시 선한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 때 선한 행동이 나오지 않는 다면 그 믿음이 잘 못된 믿음입니다. 즉 죽은 믿음입니다.(약2:17)
원로 Essay 중에서
성도교회 원로목사 예종규
http://café.daum.net/y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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