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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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108.♡.♡.226)ㆍ2019-01-04 09:50관련링크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
교회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믿음으로 비롯된 신앙의 고백이라면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행위로 칭찬하시고 행위로 책망하시며
행위로 판단하신 주님의 말씀을 보면
오늘날 교회라고 부르는 공동체가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인가 라는
물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심각하게 자신이 믿음이라 여겼던 신앙을 뒤돌아보아야 한다.
만약 그런 의문이 없다면
믿음의 실상은 허공을 치는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
소명 받아 임직 받은 자라 교회의 구성원이라 할지언정
결코 성경의 성도는 아니다.
사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중
교회에 대하여 몇 번의 언급도 하시지 않으시고
계시록에서 수없이 교회를 언급하시며
‘행위’를 강조하시고 강조하셨다는 사실이며
교회라 불리는 교회는 시대마다 달리한 정통성으로
어느 시대에는 칭찬받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가까웠고
다른 시대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책망만 받는 교회가 되었다 할 수 있으며
이 시대 교회라 부르는 교회는 어느 교회와 밀접 한지
행위로 드러난 교회라는 실상,
이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면 주님의 교회를 이해할 수 없음은
주님은 교회라는 건물과 제도나 조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지리적인 지역에 위치한 믿는 다는 자들의 공동체를 교회라 부르셨고
교회를 건물이나 제도의 조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교회를 인격을 갖춘 생명으로 보셨기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의의 행위를 보셔서
칭찬과 책망으로 교회의 공동체를 향하여 판단하시며
또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은
오늘날 교회라고 부르는 교회의 의의(意義)와는 확실히 다른 교회였다.
무엇이 주님의 말씀과 다른 이미지의 교회를 만들었는가?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보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And I say also unto thee, That thou art Peter,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gates of hell shall not prevail against it. 마태복음 16:18]
주님의 말씀을 초대교회는 비교적 잘 이해하고 실천하였다 할 수 있으나
이 주님의 한 말씀은 후대에 이르러 허다한 신학적인 논쟁을 일으켰으며
이 한 말씀으로 교회와 교파를 달리하였고
자기들의 교회의 정당성을 이 구절로 취하였기에
가톨릭은 베드로를 교황의 시조로 만들어 교권의 정당성을 부여하여
제왕적인 세상의 권력과 절대적인 교세를 취하였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교회를 성스러운 건물로 성당(聖堂, Catholic church)이라 부르며
건물을 성스런 성물로 간주하여 조직을 위한 제도를 만들었다.
가톨릭으로부터 건물과 제도와 조직의 부당성을 주장하여 혁명적이라는 개혁을 한
개신교도 시대를 달리하면서 변절하여 가톨릭 화 되어갔고
근본적으로 한국교회와 이민 교회 또한 이에 자유스러울 수 없으며
한국 대형 교회의 탄생은 ‘성전’ 이라
교회 건물에 성스러움을 부여하여 제도의 당위성을 가톨릭을 따라 부여하여
‘당회장’을 두었고 그 하위 조직으로 구역을 설치하여 ‘구역장’ 등 이라는 제도는
제도로서의 정당성을 떠나 조직을 위한 조직, 조직 유지를 위한 조직으로
세상의 관료화로 변절되어갔음은 당연한 결과였기에
교회 정통성의 정통을 내세우는 수단으로
교회가 베드로를 열두 제자 중 수제자라 불렀고 부르고 있음은 우연히 아니다.
생각해 보라.
성경 어디에 베드로를 수제자로 칭하였나.
왜 베드로를 수제자라는 권위를 부여하고 설정하였는가.
이는 조직의 체제를 상하의 복명(復命) 체제로 삼은 가톨릭과 무엇인 다른가.
루터의 종교개혁 주장처럼 사제를 목사라 부르며
사제복을 벗고 중보자의 교만한 중보 대리자를 버리자 했는데
어느새 ‘주의 종’ 이라는 특별히 소명을 받고 구약으로 돌아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주의 종’ 이 가운을 입고 ‘주의 종’ 에 거역하면 주님을 거역하는 일이라니
가톨릭과 무엇이 다르며
‘음부의 권세’ 인 사탄의 권세를 빙자하여 제도를 유지하고
이 핑계로 조직에 대항하는 세력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삼은 가톨릭을 닮아 갔고
‘중보자’ 라는 반 복음적인 가톨릭 용어는 ‘중보기도’ 로 변절되었고
‘영성’ 이란 가톨릭 용어가 보편화 되었고
언제 부터인지 ‘기도원’ 이 등장하더니 이제는 고상하게 ‘수도원’ 이라 부르지만
이 ‘수도원’ 이 가톨릭 사상을 생산 재생산하며 가톨릭의 조직의 재원을 위한
본거지 이었고 백성들을 종교로 통치하는 수단의 장소가 되었는데
복음의 어그러진 기로 간 변절된 자들이
가톨릭의 장점을 취한다고 수도원을 만들고 있으니
베드로가 통탄할 일이다.
베드로는 결코 자신이 교회의 기초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음 글은 이 신건 교수의 조직신학 책 중
-에밀 브루너 ‘교회에 대한 오해’ 중-에서 쓴 글을 참고로 옮겼다.
교회가 하나의 ‘건물’ 이라는 인상과 더불어
지금까지 우리의 의식을 강력하게 지배해 온 또 다른 인상은
교회가 하나의 굳건한 ‘제도’ 라는 사실이다.
교회는 거의 2천년 동안이나 지속되어온 가장 강력한 제도의 하나님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교회는 지금도 왕성하게 확장되고 번성해 나가는,
그리고 아마도 인류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존재하게 될 인류의 가장 강력한 제도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하나의 제도나 조직이라는 주장은
신학적으로는 결코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 온 주장, 곧 자명하고 절대적인 주장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제기되고 논쟁되었지만,
최근에 이르러 이 문제를 가장 예리하게 제기한 신학자는
바로 에밀 브루너(E Brunner)라고 할 수 있다.
브루너는 매우 논쟁적으로 저술한 자신의 저서 “교회에 대한 오해”에서
신약성서의 교회가 하나의 제도(Institution)가 아니라 에클레시아(Ekklesia)로서
하나의 인격적인 교제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에클레시아는 “그리스도의 교제” 또는 “성령의 교제” 다.
교제(Koinonia )란 함께 참여한다는 뜻이고, 함께 있다는 뜻이다.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에 참여함으로써 서로 결합 되었다.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그 어떤 것, 그 어떤 물건이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이다.
에클레시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조직이 아니며,
그러므로 제도적인 특성을 전혀 갖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놀랍고 일회적이며 독특한 에클레시아의 성경이다.
에클레시아 역사의 시초에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기적이 존재한다.
에클레시아는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생겨났다.
성령이 존재하는 곳에 공동체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바로 공동체에게 주어진 영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말씀과 영의 담지자로서 개인의 신앙보다 앞선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먼저 믿는 자가 된 다음에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믿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공동체는 모든 믿는 자 보다 앞선다.
바로 이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개신교적 개인주의와 가톨릭 적 집단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에클레시아는 선택된 자들의 무리(numerus electorum)도 아니며,
하나의 거룩한 제도도 아니기 때문이다.
에클레시아는 오직 인격으로만 구성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에클레시아는 자신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씀과 자신의 영을 통해 에클레시아 안에 현존한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영(요 16:13)이다.
성령은 에클레시아의 생명이기 때문에 에클레시아는 거룩하다.
에클레시아는 거룩한 것과 기적적인 것의 특징, 곧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기적이다.
그러므로 에클레시아는 ‘사회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 이다
에클레시아는 오직 자신 안에 현존하는, 그리고 자신을 형성하는 그리스도로 부터 만
이해될 수 있다.
에클레시아는 성령의 전(고전 3:16, 6:9)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성전이며,
그래서 성전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에클레시아는 그리스도의 교제 또는 성령의 교제임과 동시에 서로 간의 교제다.
수직적인 것(하나님과의 결합)과 수평적인 것(인간들의 결합)의 이러한 결합은
에클레시아의 독특성으로서 유례(유비)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결합(함께 있음)은 이차적인 것,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본질에 속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결합은 그리스도와의 결합의 결과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를 하나의 더 큰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들의 결합은 그리스도와의 결합과 꼭 마찬가지로 그 차체로서 목적이다.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의 완전한 결합은 만물이 존재하기 전에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소유하고 있던 교제의 결과요, 그 모형이다.
공동체의 기적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된다.
교회 절기에서 성령 감림 절 다음에 삼위일체 주일이 오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사랑(아가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랑은 에클레시아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
그러므로 사랑은 에클레시아를 온전하게 하는 끈이다.
.......
그렇다면 제도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교회는
에클레시아와 무슨 관계를 갖고 있는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회는 에클레시아의 진정한 발전과 계승인가,
아니면 잘못된 변절이나 변형인가?
브루너에 따르면 교회는 길고 복합적인 역사 속에서 발전과 동시에 변형의 과정을 통해
신약성서의 에클레시아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어떤 역사적 형태를 띠고 있든, 교회는 순수한 인격의 교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의 제도다.
브루너에 따르면 신약성서의 에클레시아와 제도적 교회를 가장 분명하게 구분하고,
이 둘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에 가장 열렬하게 저항했던 사람은
마르틴 루터(M. Luther)였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Kirche)라는 단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이것은 “맹목적이고, 불명확한 단어” 이기 때문에 그는 성서를 번역할 때
신약성서의 에클레시아를 “공동체(Gemeinde)라고 옮겼다.
그는 신약성서의 에클레시아가 하나의 물체,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 일치, 하나의 백성, 하나의 모임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역사는 루터보다 더 강했다.
종교개혁 시대와 그 이후의 어법도 매우 강력해진 교회 개념과 타협했고,
그래서 “맹목적이고, 불명확한 단어” 에 붙어 있는 혼동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안으로 침투하고 말았다.
교회의 개념은 15세기 동안 인격적 교제인 에클레시아가
제도적인 교회로 변형되어온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특히 가톨릭교회의 모든 역사는 마지막 과정까지 일어난 철저하고 완전한 교회의 제도화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법제화의 역사다.
로마교회는 성례전적 교회법의 의미 안에서 자신을 이해한다.
바티칸 공의회 이래, 그리고 교회법전 이래 교회는
교회법에 종속되었으며, 교리의 제정도 교황의 사법권(potetas juridictionis)의
일부가 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인격적 교제가 법적제도로 대치되어간 역사다.
.......
지난 교회의 역사는
인격적 교제가 제도화 하고 조직화 하여 종교로 타락한 역사라
또한 그 역사에 대항한 신실한 성도들의 역사라,
주님은 사데 교회를 죽은 자라 했고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셨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의 진정한 교회는 어떠한 교회인가.
반석이신,
그리스도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은
주님의 진리의 반석위에 세운 교회라
교제라 하나님의 자녀의 모임이라
그리스도 주님을 닮아가는 자들의 모임이라
살아계신 성령님의 교통함이 함께 한 영원을 향한 교제의 모임이라
세상에 만들어진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시여 증인이 되신
그리스도 주님의 복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라
성령님은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서 올바로 서서 살아가는 삶을 인도하시기에
성령님은
끝이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와
한없는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의 진리로 이루어진 신앙의 공동체를 교회라
교회 같지 않은 교회에게
교회가 이 땅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모형임을 증거 하시고
그 증거가 믿음이라
그 증거가 마음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으로 인 치신 사랑이라
그리스도 주님은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시기 까지 사랑한 사랑이며
부활하셔서 소망이 되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완성이시라
그 사랑으로 말미암은 완성의 성취가 교회라
음부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나라 라
하나님 나라 다.
교회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믿음으로 비롯된 신앙의 고백이라면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행위로 칭찬하시고 행위로 책망하시며
행위로 판단하신 주님의 말씀을 보면
오늘날 교회라고 부르는 공동체가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인가 라는
물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심각하게 자신이 믿음이라 여겼던 신앙을 뒤돌아보아야 한다.
만약 그런 의문이 없다면
믿음의 실상은 허공을 치는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
소명 받아 임직 받은 자라 교회의 구성원이라 할지언정
결코 성경의 성도는 아니다.
사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중
교회에 대하여 몇 번의 언급도 하시지 않으시고
계시록에서 수없이 교회를 언급하시며
‘행위’를 강조하시고 강조하셨다는 사실이며
교회라 불리는 교회는 시대마다 달리한 정통성으로
어느 시대에는 칭찬받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가까웠고
다른 시대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책망만 받는 교회가 되었다 할 수 있으며
이 시대 교회라 부르는 교회는 어느 교회와 밀접 한지
행위로 드러난 교회라는 실상,
이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면 주님의 교회를 이해할 수 없음은
주님은 교회라는 건물과 제도나 조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지리적인 지역에 위치한 믿는 다는 자들의 공동체를 교회라 부르셨고
교회를 건물이나 제도의 조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교회를 인격을 갖춘 생명으로 보셨기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의의 행위를 보셔서
칭찬과 책망으로 교회의 공동체를 향하여 판단하시며
또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은
오늘날 교회라고 부르는 교회의 의의(意義)와는 확실히 다른 교회였다.
무엇이 주님의 말씀과 다른 이미지의 교회를 만들었는가?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보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And I say also unto thee, That thou art Peter,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gates of hell shall not prevail against it. 마태복음 16:18]
주님의 말씀을 초대교회는 비교적 잘 이해하고 실천하였다 할 수 있으나
이 주님의 한 말씀은 후대에 이르러 허다한 신학적인 논쟁을 일으켰으며
이 한 말씀으로 교회와 교파를 달리하였고
자기들의 교회의 정당성을 이 구절로 취하였기에
가톨릭은 베드로를 교황의 시조로 만들어 교권의 정당성을 부여하여
제왕적인 세상의 권력과 절대적인 교세를 취하였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교회를 성스러운 건물로 성당(聖堂, Catholic church)이라 부르며
건물을 성스런 성물로 간주하여 조직을 위한 제도를 만들었다.
가톨릭으로부터 건물과 제도와 조직의 부당성을 주장하여 혁명적이라는 개혁을 한
개신교도 시대를 달리하면서 변절하여 가톨릭 화 되어갔고
근본적으로 한국교회와 이민 교회 또한 이에 자유스러울 수 없으며
한국 대형 교회의 탄생은 ‘성전’ 이라
교회 건물에 성스러움을 부여하여 제도의 당위성을 가톨릭을 따라 부여하여
‘당회장’을 두었고 그 하위 조직으로 구역을 설치하여 ‘구역장’ 등 이라는 제도는
제도로서의 정당성을 떠나 조직을 위한 조직, 조직 유지를 위한 조직으로
세상의 관료화로 변절되어갔음은 당연한 결과였기에
교회 정통성의 정통을 내세우는 수단으로
교회가 베드로를 열두 제자 중 수제자라 불렀고 부르고 있음은 우연히 아니다.
생각해 보라.
성경 어디에 베드로를 수제자로 칭하였나.
왜 베드로를 수제자라는 권위를 부여하고 설정하였는가.
이는 조직의 체제를 상하의 복명(復命) 체제로 삼은 가톨릭과 무엇인 다른가.
루터의 종교개혁 주장처럼 사제를 목사라 부르며
사제복을 벗고 중보자의 교만한 중보 대리자를 버리자 했는데
어느새 ‘주의 종’ 이라는 특별히 소명을 받고 구약으로 돌아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주의 종’ 이 가운을 입고 ‘주의 종’ 에 거역하면 주님을 거역하는 일이라니
가톨릭과 무엇이 다르며
‘음부의 권세’ 인 사탄의 권세를 빙자하여 제도를 유지하고
이 핑계로 조직에 대항하는 세력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삼은 가톨릭을 닮아 갔고
‘중보자’ 라는 반 복음적인 가톨릭 용어는 ‘중보기도’ 로 변절되었고
‘영성’ 이란 가톨릭 용어가 보편화 되었고
언제 부터인지 ‘기도원’ 이 등장하더니 이제는 고상하게 ‘수도원’ 이라 부르지만
이 ‘수도원’ 이 가톨릭 사상을 생산 재생산하며 가톨릭의 조직의 재원을 위한
본거지 이었고 백성들을 종교로 통치하는 수단의 장소가 되었는데
복음의 어그러진 기로 간 변절된 자들이
가톨릭의 장점을 취한다고 수도원을 만들고 있으니
베드로가 통탄할 일이다.
베드로는 결코 자신이 교회의 기초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음 글은 이 신건 교수의 조직신학 책 중
-에밀 브루너 ‘교회에 대한 오해’ 중-에서 쓴 글을 참고로 옮겼다.
교회가 하나의 ‘건물’ 이라는 인상과 더불어
지금까지 우리의 의식을 강력하게 지배해 온 또 다른 인상은
교회가 하나의 굳건한 ‘제도’ 라는 사실이다.
교회는 거의 2천년 동안이나 지속되어온 가장 강력한 제도의 하나님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교회는 지금도 왕성하게 확장되고 번성해 나가는,
그리고 아마도 인류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존재하게 될 인류의 가장 강력한 제도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하나의 제도나 조직이라는 주장은
신학적으로는 결코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 온 주장, 곧 자명하고 절대적인 주장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제기되고 논쟁되었지만,
최근에 이르러 이 문제를 가장 예리하게 제기한 신학자는
바로 에밀 브루너(E Brunner)라고 할 수 있다.
브루너는 매우 논쟁적으로 저술한 자신의 저서 “교회에 대한 오해”에서
신약성서의 교회가 하나의 제도(Institution)가 아니라 에클레시아(Ekklesia)로서
하나의 인격적인 교제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에클레시아는 “그리스도의 교제” 또는 “성령의 교제” 다.
교제(Koinonia )란 함께 참여한다는 뜻이고, 함께 있다는 뜻이다.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에 참여함으로써 서로 결합 되었다.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그 어떤 것, 그 어떤 물건이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이다.
에클레시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조직이 아니며,
그러므로 제도적인 특성을 전혀 갖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놀랍고 일회적이며 독특한 에클레시아의 성경이다.
에클레시아 역사의 시초에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기적이 존재한다.
에클레시아는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생겨났다.
성령이 존재하는 곳에 공동체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바로 공동체에게 주어진 영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말씀과 영의 담지자로서 개인의 신앙보다 앞선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먼저 믿는 자가 된 다음에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믿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공동체는 모든 믿는 자 보다 앞선다.
바로 이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개신교적 개인주의와 가톨릭 적 집단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에클레시아는 선택된 자들의 무리(numerus electorum)도 아니며,
하나의 거룩한 제도도 아니기 때문이다.
에클레시아는 오직 인격으로만 구성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에클레시아는 자신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씀과 자신의 영을 통해 에클레시아 안에 현존한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영(요 16:13)이다.
성령은 에클레시아의 생명이기 때문에 에클레시아는 거룩하다.
에클레시아는 거룩한 것과 기적적인 것의 특징, 곧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기적이다.
그러므로 에클레시아는 ‘사회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 이다
에클레시아는 오직 자신 안에 현존하는, 그리고 자신을 형성하는 그리스도로 부터 만
이해될 수 있다.
에클레시아는 성령의 전(고전 3:16, 6:9)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성전이며,
그래서 성전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에클레시아는 그리스도의 교제 또는 성령의 교제임과 동시에 서로 간의 교제다.
수직적인 것(하나님과의 결합)과 수평적인 것(인간들의 결합)의 이러한 결합은
에클레시아의 독특성으로서 유례(유비)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결합(함께 있음)은 이차적인 것,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본질에 속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결합은 그리스도와의 결합의 결과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를 하나의 더 큰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들의 결합은 그리스도와의 결합과 꼭 마찬가지로 그 차체로서 목적이다.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의 완전한 결합은 만물이 존재하기 전에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소유하고 있던 교제의 결과요, 그 모형이다.
공동체의 기적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된다.
교회 절기에서 성령 감림 절 다음에 삼위일체 주일이 오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사랑(아가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랑은 에클레시아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
그러므로 사랑은 에클레시아를 온전하게 하는 끈이다.
.......
그렇다면 제도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교회는
에클레시아와 무슨 관계를 갖고 있는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회는 에클레시아의 진정한 발전과 계승인가,
아니면 잘못된 변절이나 변형인가?
브루너에 따르면 교회는 길고 복합적인 역사 속에서 발전과 동시에 변형의 과정을 통해
신약성서의 에클레시아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어떤 역사적 형태를 띠고 있든, 교회는 순수한 인격의 교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의 제도다.
브루너에 따르면 신약성서의 에클레시아와 제도적 교회를 가장 분명하게 구분하고,
이 둘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에 가장 열렬하게 저항했던 사람은
마르틴 루터(M. Luther)였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Kirche)라는 단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이것은 “맹목적이고, 불명확한 단어” 이기 때문에 그는 성서를 번역할 때
신약성서의 에클레시아를 “공동체(Gemeinde)라고 옮겼다.
그는 신약성서의 에클레시아가 하나의 물체,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 일치, 하나의 백성, 하나의 모임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역사는 루터보다 더 강했다.
종교개혁 시대와 그 이후의 어법도 매우 강력해진 교회 개념과 타협했고,
그래서 “맹목적이고, 불명확한 단어” 에 붙어 있는 혼동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안으로 침투하고 말았다.
교회의 개념은 15세기 동안 인격적 교제인 에클레시아가
제도적인 교회로 변형되어온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특히 가톨릭교회의 모든 역사는 마지막 과정까지 일어난 철저하고 완전한 교회의 제도화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법제화의 역사다.
로마교회는 성례전적 교회법의 의미 안에서 자신을 이해한다.
바티칸 공의회 이래, 그리고 교회법전 이래 교회는
교회법에 종속되었으며, 교리의 제정도 교황의 사법권(potetas juridictionis)의
일부가 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인격적 교제가 법적제도로 대치되어간 역사다.
.......
지난 교회의 역사는
인격적 교제가 제도화 하고 조직화 하여 종교로 타락한 역사라
또한 그 역사에 대항한 신실한 성도들의 역사라,
주님은 사데 교회를 죽은 자라 했고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셨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의 진정한 교회는 어떠한 교회인가.
반석이신,
그리스도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은
주님의 진리의 반석위에 세운 교회라
교제라 하나님의 자녀의 모임이라
그리스도 주님을 닮아가는 자들의 모임이라
살아계신 성령님의 교통함이 함께 한 영원을 향한 교제의 모임이라
세상에 만들어진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시여 증인이 되신
그리스도 주님의 복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라
성령님은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서 올바로 서서 살아가는 삶을 인도하시기에
성령님은
끝이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와
한없는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의 진리로 이루어진 신앙의 공동체를 교회라
교회 같지 않은 교회에게
교회가 이 땅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모형임을 증거 하시고
그 증거가 믿음이라
그 증거가 마음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으로 인 치신 사랑이라
그리스도 주님은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시기 까지 사랑한 사랑이며
부활하셔서 소망이 되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완성이시라
그 사랑으로 말미암은 완성의 성취가 교회라
음부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나라 라
하나님 나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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