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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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108.♡.♡.226)ㆍ2017-10-24 11:3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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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함으로서 성도가 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진 나라이기에
그러기에 이 땅의 성도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의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라
완벽하지 못하지만 완벽한 하나님 나라를 만들려는 소망,
그 소망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까지 연결된 믿음의 실상이며
하나님 사랑의 증거라
여전히 이 땅의 진정한 신앙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의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에
성령님의 이끎으로 만들어지고 보존되기에
그 근거(根據)가 초대교회이며
그 중 데살로니가 교회를 이글에서 피력하며
어떻게 몇 주 나 몇 달 만에 공동체가 만들어 지고 서로 사랑하여
소문이나 다른 지역의 공동체에 영향력을 미쳐 본이 되었는지
현대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 들,
오늘날 인간적인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일을 쓰고 있다.
그런데 신앙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면
교회라는 공동체는
지난날 교회의 역사는 부흥을 했어야 하는데
왜 하나님과 멀어져 타락되어 왔으며
오늘날의 현대 교회는 어떠한가.
또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이미 세상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이제 더욱 비난을 받을까.
누가 속 시원하게 대답할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의 의(義)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의 의(義)
성령님께서 진리로 이끄시는 의(義),
그 의를 잃어버리고 없어진 상실(喪失)된 진리,
그런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그런 부류(浮流)의 진리와 분리된 헛도는 외침은
사랑과 소망과 믿음은 껍데기만 남은 허상일 뿐이라
오늘 이 시간 신앙인으로 양심이 있다면
오늘날의 현상을 바라보라.
사랑을 잃고 사랑을 외치면서
헛된 소망을 부풀려
믿음이 도깨비 방망이가 되어 기도가 욕구를 충족하는 수단이 된
가증스런 복음의 어그러진 길에서
진정한 믿음의 실상과 누룩같이 번진 거짓 부흥의 실상을.
1970년대를 거처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한국교회는 외적인 부흥을 했다.
대형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그 대형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은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안정의 안주,
편안히 자리 잡고 편히 사는 현실의 안주는
세상 적이라 육체적인 행복의 추구의 욕망은
체감(體感)의 현상으로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대형교회를 따라 은사주의의 광풍과 함께 교회 건축의 열풍은
재원(財源)의 필요로 헌금의 종류가 수 없이 많아졌고
이를 충족하기 위하여
필수(必須)적으로 수많은 종류의 부흥회와 예배가 생겨났으며
특히 부흥회는 이 재원을 충당하는 수단이 되었고
성령님을 빙자한 부흥회는 그럴듯한 성령의 은사로 남발되었고
더하여 담임목사를 찬미하고 그 위상을 높이는 기회로 삼아 담임 목사라는 명예로운 직분을 넘어 당회장으로 불리면서
당회장에 위치에 걸맞게 화려한 가운을 걸친 희한한 성직자들이 생겨났고
이들과 분리하여 ‘평신도’ 라는 비 성경적인 단어가 등장하였고
조직의 직분이 직무의 책임인 직책(職責)을 도외시 하고
직분이 신분이 된, 신분의 분리가 된 수많은 분리주의자들이 생겼고
이 경향과 제도는 중세의 봉건 제도화 된 세상의 권력과 결탁(結託)한
가톨릭과 똑같이 닮아 권력과 야합(野合)한 욕망으로 한 통속이 되어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으로 인한 부흥인가?
의심하면서 부흥운동인지 예배인지 분별할 수 없는 요란의 광란을 보면서
그런 자들과 그런 무리와 겉돌다 이런 부흥은 진정한 부흥이 아니라고
결론지었으며
한국교회의 타락이라 단정했기에 그 당시 교단과 교회는 다르지만
신앙의 모임을 갖던 동지며 친구인 그들에게 내 주장을 펼칠 때 마다
핀잔을 들었기에 갈등을 하면서 외로웠고 (지금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한국교회가 타락했으며 더 타락하여 진정한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는
변절하여 교회라기보다 끼리끼리의 종교적인 모임으로 전락(轉落)하여
진정한 공동체의 의를 잃고 난파할거라 주장했고
오늘날에 내 주장이 틀렸다면 좋았을 텐데 틀리지 않았다.
지난날 그리고 오늘도 많은 이들이 내게 이의를 제기 했고 반론한다.
세계에서 몇 번째 큰 교회가 몇 개며 70년대 보다 교인이 늘어났으며
몇 개의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얼마나 많은 교회가 생겼으며
근대사에 유래 없는 부흥이었고
교회가 대형화 된 만큼 선교의 능력이 생겼다 주장하지만
그럴까.
아니다.
눈에 보이게 교회의 숫자가 많아지고 화려해 졌지만
그에 비례하여 교회의 수준은 바닥을 치고 있고
더 이상의 바닥이 있을까 하는 요즘이다.
이제는 내적으로 그 많던 교인들도 줄어들고
교회 출석을 하지 않는 교인들이 많아졌으며
무엇보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교회가 세상보다 정의롭지 못함은
투명하지 못한 내부 체제로
믿음의 근본인 공의를 헌 신짝처럼 버렸기에
세상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오래전에 이미 자생적인 반기독교 모임이 인터넷에 생겼다.
왜 그럴까.
또 세상 탓이고 음모론을 탓하고 이단을 탓해야 하나...
교인과 세상 사람의 구별이 되어야 할 텐데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긴다는 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거나
못하여 불의에 눈감고도 허다한 변명과 탓에 습관이 된 자들이 넘쳐나
분별을 잃은 믿음에 복음을 외치고 전도 선교를 한다지만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가 사라진 전함이 전도며
믿음의 근본인 진리를 외치지만 정의가 사라진 진리,
그런 진리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보라.
예수님은 항상 우리 인생의 답이시며 말씀에 길이 있기에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Jesus saith unto him,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no man cometh unto the Father, but by me.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If ye had known me, ye should have known my Father also:
and from henceforth ye know him, and have seen him. 요한복음 14:6-7]
이 ‘길의 말씀’ 은 도마의 물음인 길에 대한 대답의 말씀이고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5]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기에 제자들은 그 길을
알고 있었지만 도마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로 가는 길은
그 길은
예비하는 길이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비를 마치는 길이며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And whither I go ye know, and the way ye know.:4]
그 길은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라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믿음은
길이며 진리시며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길(the way)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진리(the truth)라서
현실에 나타난 사실이라서 삶의 실제라서
듣고 행하는 자,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을 간직한 자
그래서 계명을 지키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the life)을 소유하기에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 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예비하고
마치는 날까지 진리의 성령님과 동행하는 생명의 길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사랑하신 계명을
지켜야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길이며 이것이 진리이며 생명의 길이다.
도마에 이어 빌립이 하나님 뵙기를 원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Philip saith unto him, Lord, shew us the Father,
and it sufficeth us. :8]
빌립은 하나님을 보면 믿겠다는 말을
“it sufficeth us” 로
우리가 하나님을 뵈면 만족하여 믿겠다고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라는 말로
예수님의 말씀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예수님 말씀으로 부족하여
하나님을 뵙기를 원했다.
사실 하나님을 뵙기를 원하는 자들은 어느 시대나 많았다.
자신의 삶에 기적으로 임재 하여 자신의 필요한 만족을 채워주시기를
원했고 또는 꿈에서라도 뵙기를 원하여 자신의 믿음을 확신 하고 싶었지만
믿음의 실체는 마치 희미한 거울을 보듯 희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알고 하던 것이 폐하는
진리의 길이라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For we know in part, and we prophesy in part.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But when that which is perfect is come,
then that which is in part shall be done away. 고린도전서 13:9-10]
복음의 길도 이와 같아
부분적으로 성경을 알고 이해하였던 것이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온전 하려는 마음으로 갖게 하심으로
성경을 읽고
온전 하려고 몸부림 치고 발버둥 치는 신앙인을 만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우리 주를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됨이
온전한 믿음을 이루는 길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13-14]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은
복음의 어그러진 길에서 믿음이 난파한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그럴듯한 교훈과 세상의 풍조에 담합한 자들에게 요동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과 그 모든 사건이
오늘날 자신의 사건이 됨이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치 신 결과라
믿음의 확증이 된다.
그러기에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와
고린도전서 13:11절 은 같은 의미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이 온갖 간사한 유혹과 세상의 교훈과
시대에 따라 변하는 세태로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풍조(風潮)와
시류와 유행을 따름은 그리스도의 초보라
그리스도의 초보 된 자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어떻게 변화시키겠으며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정의의 문화를 만들겠는가.
이것이 오늘날의 공동체라 부르는 상태의 현실인 것을...
빌립도 사심 없이 하나님 뵙기를 원하였고
하나님을 뵙는다면 우리 모두가 족하겠다 했듯이
더하여 하나님을 보았다는 자들이
역사상 수없이 많았고 주위에서도 수없이 많아
아직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영광을 보여준다는
엉터리 부흥사와 선생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자들은 믿음이 파산하여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하였기에
말로는 예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자들로
그러기에 이적과 기적을 보려고 모인 부흥회는 늘 설교가, 기도가,
신유(치료)로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자들로 넘치고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려 듯 통성기도와 울고불고 부르짖으며
찬송가를 부르며 손뼉치고 발을 구르지만 그곳에는 기적을 바라는
모질은 마음과 황폐한 영혼으로 감성에 사로잡힌 거칠고 메마름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실 거라는 착각으로 더 외친다.
"성령이여 임 하사 내 영혼에 소원을 만족하게 하소서..."
그 만족은 빌립이 원하였던 만족,
어린아이와 같은 만족이었고
부흥사와 선생이라는 자들이 그런 불안한 심리를 믿음이라는 미명으로
성령님의 의를 도용(盜用)하여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라’ 는
‘성령의 불을 받으라’
‘병 나음을 체험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 는 거짓 유혹으로 순종을 강요하고
그 사악한 거래로
자신들의 만족을 채우고 그리스도의 도를 부인하는 결과인 것을.
그러기에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9]
빌립은 오래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눈에 보이는 이적과 기적을 보면 믿겠다는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의(義) 보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현실로 임재하기를 원했다.
그런 빌립에게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or else believe me for the very works' sake. :11]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겠거든
행하시는 그 일로 말미암아 믿으라 하셨다.
“else believe me for the very works' sake”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의 어떠한 동기와 무엇을 위함인 목적을 보고
믿으라 하셨지만
그러나 눈으로 보고 감정으로 느끼어 체감하면 믿겠다는 자들은
육체적인 욕구에 머물러 육체적인 경험을 격어도
그래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에
이사야는 불의한 백성이라 했다.
[네가 많을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 도다
Seeing many things, but thou observest not;
opening the ears, but he heareth not.
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하게 하려 하셨으나
The LORD is well pleased for his righteousness' sake;
he will magnify the law, and make it honourable. 이사야 42:20-21]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his righteousness)로
공의의 법으로, 기쁨으로 존귀하여 여겨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데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익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어도 듣지 아니함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
이는 하나님의 의(his righteousness)를
공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시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1-4]
이 이사야의 기록은
오늘날 정의가 사라진 교회라는 공동체를 위하여
그리고 예수님의 행하신 그 일로 말미암아 진정한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면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오늘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소망이 없는 믿음과 사랑은 거짓이라
그 복음의 교훈이 일상생활에 사라졌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였기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지 못하시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정하여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못함이 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패악한 세상의 풍조와 시류를 따라
세상에 그리스도의 정의를 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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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gpo님의 댓글
kjgpo 218.♡.♡.212
덕이라는것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터 주어진 일입니다.
실제적으로 덕을 베풀기위한것은 사람을 돕는것이 우선입니다.
주위의 사람들 주위의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시작을 하세요
덕이라는것은 스스로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냐에 따라서
그것이 선행이 될수도 있고 악행이 될수도 있는것이니까요
가장큰 미덕은 죽을 위기에 있는 사람을 살리는일이죠
이천지안에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이예요
왜냐하면 천지도 인간이 없으면 그 존재의미를 잃어버리니까요
그러니까 사람을 살리는 일은 가장 의미있는 덕행이죠
그런 말이 있잖아요 말은 마음의 소리요 행동은 마음의 자취라는 말이요
그러니까 덕을 어떻게 쌓느냐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행동으로 부터 시작이 되는것이여요 그러니 지금 나아가서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진 마음을 행동으로 털어놓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