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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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108.♡.♡.226)ㆍ2018-03-12 14:4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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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회
예수님은 그런 후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를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닥쳐오듯이 말씀하시며
‘누구든지’로 또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제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내가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신다며
현재와 미래를 한 선상(線上)에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와 네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For whosoever shall be ashamed of me and of my words,
of him shall the Son of man be ashamed,
when he shall come in his own glory,
and in his Father's, and of the holy angels. 누가복음 9:26]
‘누구든지’ 는 모든 사람들로 예외 없이
믿는 다는 모든 신자에게 경고 하셨기에 또 하나의 외식을 말씀하셨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세상의 사상에 발을 맞추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온전히 인정하지 않아 부끄러워한다면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인 정의를 외면한다면
그래서 명목뿐인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한다면
오늘날 그렇게 한다면
오늘의 연장인 내일
다가올 미래가 오늘 결정된다는 말씀이라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듯이
영원한 진리라 영생(永生)을 주시듯이
오늘은 내일과 같은 한 사건이 되는 천국의 비밀은 허락된 자들만 안다.
그러나 이 ‘부끄러움’을 어느 학자들은 복음을 대면하였을 때,
복음을 받아드리는 태도의 부끄러움을 말씀하셨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해는 하지만 이보다는 ‘외식’을 말씀하셨음이 타당하다.
같은 말씀으로 누가복음 12장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 를 보면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8-9]
마태복음 10장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라’를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32-33]
이 모든 말씀의 공통점은
‘누구든지’ 로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며
역설(逆說)적으로 하신 말씀이라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이 담겨있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경고를 하셨지만 경고의 깊은 뜻은
시인하라는 말씀이라 진리로 인도하시려는 의도시라
주님은 사랑의 말씀을 이렇게 역설적으로 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역설적인 뜻이 서로 반하는 것 같으나 같은 의미라
성경은 역설적인 뜻은 평행선(parallel lines)을 긋듯이 평행한 것 같으나
뜻과 의미가 같이 함께 어울려 강조하는 목적으로 많이 쓰여 있고
그 이면의 의도는 반하는 듯하나 아닌
반어법(反語法)으로 말씀하셨고 성경도 이 같은 기록이 많아
전체적인 내용으로 구절을 해석해야 하여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하기에
이해하기 어려움이 있는 것 같으나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생각하면,
‘그리스도’에서 ‘하나님’ 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로
이 땅의 복음이 천국으로 진행되고 연결되었기에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으로 기록된 주님의 말씀도 같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Verily I say unto you,
Whatsoever ye shall bind on earth shall be bound in heaven:
and whatsoever ye shall loose on earth shall be loosed in heaven.
마태복음 18:18]
‘땅에서’ ‘하늘에서’ 와 같이, 같은 사건으로, 같이 연결되어
같이 이루어지는 현상을 말씀하셨다.
분리가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깊은 의미로 이는 하나님 나라와 연관된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도의 응답에 대한 말씀으로 많이들 인용하지만
문맥상 엄격히 공동체 징계에 관한 내용인데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은
기도의 응답으로 가정해 맹신자의 헌신을 요구하는 구절로 인용한다.
그러나 20절을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단순히 신약교회의 구성을 가리키시거나
일반적인 기도를 가리키시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가 어떠한 죄로 인해 분리된 두 그리스도인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는
모임을 말씀하셨기에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리스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주님의 이름의 권위와
다른 한 편으로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여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주님은 나도 그 모인 곳에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라
그 당시의 유대인의 회당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의 몸으로 태어날 공동체를 가리키시기에
이 땅에서 부끄러워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부끄럽게 되고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하나님 앞에 시인되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는
이 땅과 하나님 나라의 분리가 아니라 진행이며 계속성에서 연결된
사건을 말씀하셨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 순종하는 삶으로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성도된 자의 도리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마침내 메시아가 주님이 오셨을 때는
오래된 종교적인 전통의 습성으로 인해 마음이 닫혀져서
신학적인 교조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기대와 신념에 기초한 종교적인 사고방식으로
메시아를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였음은
의가 사라진 사람이 만든 변절된 율법의 규범에 추종하여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던 백성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거부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입술로는 시인하지만 메시아로 거부한
이는 ‘외식’ 이었기에 외식에 대한 주님의 경고는
성령님을 통하여 성경으로 오늘도 계속된다.
누가복음 9장은
함축적으로 구약 성경이 드러내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수면위로 나타나듯이
하나님 나라를 다이내믹(dynamic)하여 폭발하듯이 힘차고 활발한 역동적인
파노라마(panorama)로 펼쳐 놓았고
9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구약을 덧붙이자면
시제(時制)로 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미래를 현재의 연장으로 보았고
미래는 이스라엘이 지리적으로 회복되어지고 백성들의 해방으로
그리고 다른 창조의 의미로 새 날로 보았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이사야 65:17-19]
이를 한 분류의 성경학자는 천년왕국으로 보아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스도의 지상왕국으로 보아 이사야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여전히 죄와
사망이 존재하지만 계시록 21장은 죄와 사망이 사라졌다 보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참고로 새 하늘과 새 땅은 신구약의 중간 시기에 써진 묵시성경(묵시 문학, 문학적인 표현)과 사상은 다가올 의의 시대와 현재 사탄이 주장하는 세대로 두 세대를 구별하여
현재에서 다가올 의의 나라로 점진적 발전(점진적 계시)으로
시간적인 이중성의 계시를 묵시로
장차 창세기의 에덴동산의 회복으로 보며
이에 더하여 세대주의자들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자들은
천년을 하루 같이 계산하여 성경을 자신들의 시간적인 세대로 계산하고
문자적인 해석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지만
이는 절대적으로 복음의 의에 어긋남은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지 어찌 이스라엘의 회복자로 오셨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의 회복의 완성이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옹졸한 성경의 해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해(沮害)하여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이라
이런 자들은 늘 음모론으로 자신의 믿음의 텅 빈 바탕을 드러낸다.
어찌되었든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오심으로 새로운 세대가 도래하여
구약의 심판자와 정복자로 오실 예언은 성취되었고 하나님 나라는
현제 임했고 앞으로 완전히 이루어지기에 이 장은 이미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으로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기초와 근본을 적용하고
점검하는 장으로 보면
구원은,
개인은 넘어 공동체로 하나님 나라로 누룩과 같이 번짐이라
그래서 구원은 생명과 생명을 연결하기에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
구원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 공동체를
시간의 개념을 넘어 세대와 세대를 의미하기에
성경의 ‘구원’ 의 의미는 ‘개인’ 과 ‘세대와 세대’를 같이 묶어 하나로 보기에
‘구원’ 의 깊은 뜻은 세대와 세대의 연결이고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기에
개인의 구원에 머무른 개인주의적인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지 못하면
외식이 되어 타락한다고 성경은 경고하는데
오늘날의 십자가를 치장한 무늬만 남은 겉모습만의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닮음이 사라진 교회중심의 교회는
사람의 교훈과 규칙과 교리에 빠져 외식을 하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등한시하고 직분의 놀음에 관료화 되어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고 생명력을 잃어가기에 능동적이지 못하여
구원이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지 못함은
수동(受動)적이라 복음의 운동력이 아닌 피동(被動)적으로 변해
복음의 의가 외식으로 변해가는 오늘날
누가복음 9장은 다시 보면
1절은 하나님 나라의 전파자들로 열두제자를 불러 모우고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Then he called his twelve disciples together,
and gave them power and authority over all devils,
and to cure diseases. :1]
자세히 보면 여기서 귀신과 병을 구별하셨으며
이 일을 위하여 능력(power)과 권위(authority)를 주셨다.
이 제자들의 파송은 처음이 아니었으며 마태복음 10:5-8을 보면
먼저 이스라엘의 복음의 전파가 먼저였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아직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에 전함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이스라엘로 예정하신 성경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이라
누가복음의 기록이 간결함은
주제가 하나님 나라에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이라
또 다른 점은 마태복음은 더 자세히 기록하였고
더하여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주셨다.
예수님은 친히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셨으나
그 능력과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셨음은
그 당시 기록된 형태의 완전한 성경도 없었기에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를 증명하기 위하여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음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천국이 가까이 왔다(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라 전파하고
천국의 도래의 증거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천국의 복음을 외치기를 분부하셨음은
이 천국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루어지는 능력과 권위의 실상이라
또한 능력과 권위는 제자들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시는 분부를 하셨다.
거저 받았으니, 이 의미를 에베소서 1:4-6절을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으니
거룩하신 하나님은 완벽하시듯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저 주시는 은혜로 거저 믿음을 주셨음은
하나님 은혜의 영광을 높이려 함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기에
오직 그 길은, 삶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리스도의 제자로 제자의 길로 능력과 권위를 주심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안에 모두 하나 되는 복음을 위함이며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하나 되게 하시는
때가 찬 경륜이라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하나님 나라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That in the dispensation of the fulness of times
he might gather together in one all things in Christ,
both which are in heaven, and which are on earth; even in him: :10]
그리스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을 통일되어
주님의 완전한 통치를 받기에
온 세상에서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And he sent them to preach the kingdom of God,
and to heal the sick. :2]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전파하며,
복음을 외치고 설교한다고 하나님 나라를 이해되어
알 수 있고 보이는 나라인가.
같은 누가복음 17:20-21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 주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바리새인들은 큰 능력과 영광으로 이스라엘에 임할 왕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었기에 표적으로 정치적인 혁명 같이 로마의 구속과 억압에서 해방될 격변을 고대하였기에 표적같이 볼 수 있는 가시(可視)적이고
지상(地上)적인 나라의 형태를 기대하고 주님께 물어보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런 일시적인 나라가 아니기에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씀을
바리새인들이 이해 할 수 없었음은 이들은 종교적인 위선자들,
외식하는 자들이라
완고한 마음에 메시아시인 주님을 모실 준비도 그럴 여유도 없어
메시아로서 기적을 행하시며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를 제시하셨을 때
그 곳에 항상 있었으면서 그들은 간파하지 못하였고
사후의 삶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현대판 바리새인들도 당시의 바리새인과 같아 표적을 구하며
삶을 위하여 그리고 사후의 세계를 나름 이해한 것 같으나
똑같이 하나님 나라를 보기를 원하고
이 땅의 삶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고대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어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는
선동의 집회에 참여하여 입신과 쓰러짐, 키가 커지고 다리가 길어지는
기적과 금가루와 금이빨 등의 표적을 구하여 미혹 되여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알았더라면 종교적인 위선인 외식을 버려서
인생관이 변하였을 것이고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본질적으로 같은 질문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주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보며 앉으셨을 때 조용히 물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마가복음 13:4-6]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종말에 있을 일이 이 13장에 있고
바리새인들의 외식, 사람의 미혹을, 기만을, 속임을 주의하라 하셨다.
이 재난의 징조를 마태복음 24장에 같이 기록되어 있고 4절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And Jesus answered and said unto them,
Take heed that no man deceive you.]
사람의 미혹(man deceive)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강조하셨을까.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미혹할 것을 말씀하셨다.
물론 이 말씀은 환란 때에 일어날 일이나
그러나 그 일이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전에
이미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고 미혹하는 외식에 대하여 말씀하셨기에
‘외식’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를 이르는 말이 절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다는 자들의 속과 겉이 다름이라
외식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기만이며 속임이라 이를 강조하셨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체하는 자들이 미혹을 하기에,
이 미혹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부터, 오신 다음에 끝없이 일어났기에,
의(義)에 대하여 무감각 해진 신앙은 이미 위선된 믿음이라
그리스도를 핑계로 자기를 위로하는 자위(自慰)적 인
감정의 높낮이에 널뛰기 하듯 감정에 취하고 자신에 도취하여
유지한 믿음이라는 빙자(憑藉)는 이미 신앙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종교가 되었기에 이것이 외식이 되었기에
많은 사람이 미혹하였고, 미혹하고, 미혹할 것은
오직 환란 때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일이라
주님은 수 없이 경고하고 강조하였기에
이제 그 책임은 각자의 몫이며 공동체의 책임이라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난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義)가 사라진
개인과 공동체는 성령님께서 교통하시지 않으시기에
위선에 함몰(陷沒)하여 세상의 시류에 떠내려가는 믿음으로
세상의 세속화를 타령하는 위선이 외식이다.
보라.
이 같은 외식이 똑같은 외식이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란 공동체에
끝임 없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음을 보라.
만약 보지 못한다면 분별력이 흐려진 믿음이라
그런 자들은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초보라
보이지 않아 분별력이 없는 자들이라서
자신이 외식을 하는 자들을 따라 같이 외식을 하는 자들이라
자신의 외식을 모르는 현상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당시나 오늘날이나 똑같다.
보라.
예수님 당시에 외식하는 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종교지도자 서기관 등을 외식하는 자들이라 수없이 듣고 경멸하며 말하지만
오늘날 외식 즉 위선이 없었다면 이렇게 신앙이 종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인이란 공동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조롱거리가 되지 않았으리라.
마치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을 비웃고 종교개혁을 외치지만
믿음이라 우기는 위선에 대하여는 분별력을 잃고 직시하지 못하기에
현세(現世)적이 되어서 세상에서 명예와 부를 쫓아
세상의 권력이 되려할 수록 세상에서 힘을 잃어 영향력이 없으면서
전도를 외치지만 전도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고
세력(勢力)이 되려하지만 세상에서도 겉모습만 공동체인 모임에서도
능력을 잃고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면서 말뿐인 ‘영광’을 외치며
영광을 가리는 일이 허다한 일들이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다시 보면 제자들도
감람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은밀히
주님께 물음(asked him privately)은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Tell us, when shall these things be?
and what shall be the sign when all these things shall be fulfilled?”
그들은 세 가지 질문을 하였다.
언제 일어나며 언제 성전이 파괴될 것인지.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세우기 위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어떤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나며 임하시는 징조로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영광으로 오셔서 통치하실 때 세상의 끝의 징조는 무엇인지.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알지 못하여
주님께서 세상을 대적하여 멸하고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권능과 영광 중에 강림하시기를 고대하였기에
영광스러운 메시야의 지상에서 이루어질 시대를 알기를 원하여
그들은 ‘세상’ 끝이 아닌 ‘시대’의 끝에 대하여 물었기에
자신들의 인생에 일어날 일에 관심이 있었기에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해 강림하실지 알지 못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안 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때 까지
수 없이 부인을 했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님께서 오셨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체감(體感)하였기에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랐기에
그들의 이 땅의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라 하나님의 은혜라
마음을 높이지 않았으며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았기에
자족하는 마음에 경건의 이익을 얻으며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기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아 믿음의 선한 싸움에 부르심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한 알의 밀알 같이
내가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이루어짐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누리며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을 받으며
그 고난이 남겨진 자들의 소망으로 인도함을
그리스도를 본받아 익히 알았기에 그들은 그들이 바라고 원했던
영광의 권위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하여,
문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복음의 문으로 정진했고
하나님 나라는 생명으로 생명에 인도하고 이르는 나라라
자신의 생명을 바쳐 삶으로 예배했기에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모두가 받기를 원하여
에베소서 5:3-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은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헛된 사람의 말로 속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에게 임하리니,
사람의 계명이란 신앙을 종교화한 인간 자신들의 방법에 의한
인위적인 인본주의적인 발상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전통적 종교생활의
실천적 모든 규칙은 하나님의 의와 복음의 의를 떠난 직분적인 권위로
자기 영광과 만족을 위하기에 믿음의 위선이라
하나님의 의와 멀어짐이라
아무리 외형적인 화려한 예배와 경배를 드리고 아무리 많은 헌신,
헌금을 하더라도 경외가 아니기에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신 주님의 말씀은 열매가 없는 신앙,
주님의 십자가를 지지 않은, 주님의 정의의 진리를 지키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서 외식이라 사람의 말을 따르는 종교라서
그런 자들의 미혹을 받고 속임에 넘어간 자들 또한 같은 자들이라
그 누구라도 어떠한 직분자라도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없음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 ‘너의 마음’에서
마음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 치신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시작하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
하나 되는 복음으로
현재 ‘너희 중에’ ‘너희 한 가운데’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됨으로 이루어지고
장차 온 땅위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 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9-10]
예수님은 그런 후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를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닥쳐오듯이 말씀하시며
‘누구든지’로 또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제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내가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신다며
현재와 미래를 한 선상(線上)에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와 네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For whosoever shall be ashamed of me and of my words,
of him shall the Son of man be ashamed,
when he shall come in his own glory,
and in his Father's, and of the holy angels. 누가복음 9:26]
‘누구든지’ 는 모든 사람들로 예외 없이
믿는 다는 모든 신자에게 경고 하셨기에 또 하나의 외식을 말씀하셨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세상의 사상에 발을 맞추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온전히 인정하지 않아 부끄러워한다면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인 정의를 외면한다면
그래서 명목뿐인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한다면
오늘날 그렇게 한다면
오늘의 연장인 내일
다가올 미래가 오늘 결정된다는 말씀이라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듯이
영원한 진리라 영생(永生)을 주시듯이
오늘은 내일과 같은 한 사건이 되는 천국의 비밀은 허락된 자들만 안다.
그러나 이 ‘부끄러움’을 어느 학자들은 복음을 대면하였을 때,
복음을 받아드리는 태도의 부끄러움을 말씀하셨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해는 하지만 이보다는 ‘외식’을 말씀하셨음이 타당하다.
같은 말씀으로 누가복음 12장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 를 보면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8-9]
마태복음 10장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라’를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32-33]
이 모든 말씀의 공통점은
‘누구든지’ 로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며
역설(逆說)적으로 하신 말씀이라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이 담겨있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경고를 하셨지만 경고의 깊은 뜻은
시인하라는 말씀이라 진리로 인도하시려는 의도시라
주님은 사랑의 말씀을 이렇게 역설적으로 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역설적인 뜻이 서로 반하는 것 같으나 같은 의미라
성경은 역설적인 뜻은 평행선(parallel lines)을 긋듯이 평행한 것 같으나
뜻과 의미가 같이 함께 어울려 강조하는 목적으로 많이 쓰여 있고
그 이면의 의도는 반하는 듯하나 아닌
반어법(反語法)으로 말씀하셨고 성경도 이 같은 기록이 많아
전체적인 내용으로 구절을 해석해야 하여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하기에
이해하기 어려움이 있는 것 같으나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생각하면,
‘그리스도’에서 ‘하나님’ 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로
이 땅의 복음이 천국으로 진행되고 연결되었기에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으로 기록된 주님의 말씀도 같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Verily I say unto you,
Whatsoever ye shall bind on earth shall be bound in heaven:
and whatsoever ye shall loose on earth shall be loosed in heaven.
마태복음 18:18]
‘땅에서’ ‘하늘에서’ 와 같이, 같은 사건으로, 같이 연결되어
같이 이루어지는 현상을 말씀하셨다.
분리가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깊은 의미로 이는 하나님 나라와 연관된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도의 응답에 대한 말씀으로 많이들 인용하지만
문맥상 엄격히 공동체 징계에 관한 내용인데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은
기도의 응답으로 가정해 맹신자의 헌신을 요구하는 구절로 인용한다.
그러나 20절을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단순히 신약교회의 구성을 가리키시거나
일반적인 기도를 가리키시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가 어떠한 죄로 인해 분리된 두 그리스도인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는
모임을 말씀하셨기에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리스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주님의 이름의 권위와
다른 한 편으로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여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주님은 나도 그 모인 곳에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라
그 당시의 유대인의 회당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의 몸으로 태어날 공동체를 가리키시기에
이 땅에서 부끄러워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부끄럽게 되고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하나님 앞에 시인되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는
이 땅과 하나님 나라의 분리가 아니라 진행이며 계속성에서 연결된
사건을 말씀하셨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 순종하는 삶으로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성도된 자의 도리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마침내 메시아가 주님이 오셨을 때는
오래된 종교적인 전통의 습성으로 인해 마음이 닫혀져서
신학적인 교조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기대와 신념에 기초한 종교적인 사고방식으로
메시아를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였음은
의가 사라진 사람이 만든 변절된 율법의 규범에 추종하여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던 백성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거부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입술로는 시인하지만 메시아로 거부한
이는 ‘외식’ 이었기에 외식에 대한 주님의 경고는
성령님을 통하여 성경으로 오늘도 계속된다.
누가복음 9장은
함축적으로 구약 성경이 드러내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수면위로 나타나듯이
하나님 나라를 다이내믹(dynamic)하여 폭발하듯이 힘차고 활발한 역동적인
파노라마(panorama)로 펼쳐 놓았고
9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구약을 덧붙이자면
시제(時制)로 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미래를 현재의 연장으로 보았고
미래는 이스라엘이 지리적으로 회복되어지고 백성들의 해방으로
그리고 다른 창조의 의미로 새 날로 보았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이사야 65:17-19]
이를 한 분류의 성경학자는 천년왕국으로 보아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스도의 지상왕국으로 보아 이사야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여전히 죄와
사망이 존재하지만 계시록 21장은 죄와 사망이 사라졌다 보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참고로 새 하늘과 새 땅은 신구약의 중간 시기에 써진 묵시성경(묵시 문학, 문학적인 표현)과 사상은 다가올 의의 시대와 현재 사탄이 주장하는 세대로 두 세대를 구별하여
현재에서 다가올 의의 나라로 점진적 발전(점진적 계시)으로
시간적인 이중성의 계시를 묵시로
장차 창세기의 에덴동산의 회복으로 보며
이에 더하여 세대주의자들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자들은
천년을 하루 같이 계산하여 성경을 자신들의 시간적인 세대로 계산하고
문자적인 해석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지만
이는 절대적으로 복음의 의에 어긋남은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지 어찌 이스라엘의 회복자로 오셨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의 회복의 완성이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옹졸한 성경의 해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해(沮害)하여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이라
이런 자들은 늘 음모론으로 자신의 믿음의 텅 빈 바탕을 드러낸다.
어찌되었든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오심으로 새로운 세대가 도래하여
구약의 심판자와 정복자로 오실 예언은 성취되었고 하나님 나라는
현제 임했고 앞으로 완전히 이루어지기에 이 장은 이미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으로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기초와 근본을 적용하고
점검하는 장으로 보면
구원은,
개인은 넘어 공동체로 하나님 나라로 누룩과 같이 번짐이라
그래서 구원은 생명과 생명을 연결하기에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
구원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 공동체를
시간의 개념을 넘어 세대와 세대를 의미하기에
성경의 ‘구원’ 의 의미는 ‘개인’ 과 ‘세대와 세대’를 같이 묶어 하나로 보기에
‘구원’ 의 깊은 뜻은 세대와 세대의 연결이고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기에
개인의 구원에 머무른 개인주의적인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지 못하면
외식이 되어 타락한다고 성경은 경고하는데
오늘날의 십자가를 치장한 무늬만 남은 겉모습만의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닮음이 사라진 교회중심의 교회는
사람의 교훈과 규칙과 교리에 빠져 외식을 하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등한시하고 직분의 놀음에 관료화 되어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고 생명력을 잃어가기에 능동적이지 못하여
구원이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지 못함은
수동(受動)적이라 복음의 운동력이 아닌 피동(被動)적으로 변해
복음의 의가 외식으로 변해가는 오늘날
누가복음 9장은 다시 보면
1절은 하나님 나라의 전파자들로 열두제자를 불러 모우고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Then he called his twelve disciples together,
and gave them power and authority over all devils,
and to cure diseases. :1]
자세히 보면 여기서 귀신과 병을 구별하셨으며
이 일을 위하여 능력(power)과 권위(authority)를 주셨다.
이 제자들의 파송은 처음이 아니었으며 마태복음 10:5-8을 보면
먼저 이스라엘의 복음의 전파가 먼저였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아직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에 전함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이스라엘로 예정하신 성경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이라
누가복음의 기록이 간결함은
주제가 하나님 나라에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이라
또 다른 점은 마태복음은 더 자세히 기록하였고
더하여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주셨다.
예수님은 친히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셨으나
그 능력과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셨음은
그 당시 기록된 형태의 완전한 성경도 없었기에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를 증명하기 위하여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음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천국이 가까이 왔다(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라 전파하고
천국의 도래의 증거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천국의 복음을 외치기를 분부하셨음은
이 천국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루어지는 능력과 권위의 실상이라
또한 능력과 권위는 제자들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시는 분부를 하셨다.
거저 받았으니, 이 의미를 에베소서 1:4-6절을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으니
거룩하신 하나님은 완벽하시듯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저 주시는 은혜로 거저 믿음을 주셨음은
하나님 은혜의 영광을 높이려 함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기에
오직 그 길은, 삶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리스도의 제자로 제자의 길로 능력과 권위를 주심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안에 모두 하나 되는 복음을 위함이며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하나 되게 하시는
때가 찬 경륜이라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하나님 나라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That in the dispensation of the fulness of times
he might gather together in one all things in Christ,
both which are in heaven, and which are on earth; even in him: :10]
그리스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을 통일되어
주님의 완전한 통치를 받기에
온 세상에서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And he sent them to preach the kingdom of God,
and to heal the sick. :2]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전파하며,
복음을 외치고 설교한다고 하나님 나라를 이해되어
알 수 있고 보이는 나라인가.
같은 누가복음 17:20-21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 주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바리새인들은 큰 능력과 영광으로 이스라엘에 임할 왕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었기에 표적으로 정치적인 혁명 같이 로마의 구속과 억압에서 해방될 격변을 고대하였기에 표적같이 볼 수 있는 가시(可視)적이고
지상(地上)적인 나라의 형태를 기대하고 주님께 물어보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런 일시적인 나라가 아니기에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씀을
바리새인들이 이해 할 수 없었음은 이들은 종교적인 위선자들,
외식하는 자들이라
완고한 마음에 메시아시인 주님을 모실 준비도 그럴 여유도 없어
메시아로서 기적을 행하시며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를 제시하셨을 때
그 곳에 항상 있었으면서 그들은 간파하지 못하였고
사후의 삶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현대판 바리새인들도 당시의 바리새인과 같아 표적을 구하며
삶을 위하여 그리고 사후의 세계를 나름 이해한 것 같으나
똑같이 하나님 나라를 보기를 원하고
이 땅의 삶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고대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어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는
선동의 집회에 참여하여 입신과 쓰러짐, 키가 커지고 다리가 길어지는
기적과 금가루와 금이빨 등의 표적을 구하여 미혹 되여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알았더라면 종교적인 위선인 외식을 버려서
인생관이 변하였을 것이고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본질적으로 같은 질문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주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보며 앉으셨을 때 조용히 물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마가복음 13:4-6]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종말에 있을 일이 이 13장에 있고
바리새인들의 외식, 사람의 미혹을, 기만을, 속임을 주의하라 하셨다.
이 재난의 징조를 마태복음 24장에 같이 기록되어 있고 4절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And Jesus answered and said unto them,
Take heed that no man deceive you.]
사람의 미혹(man deceive)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강조하셨을까.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미혹할 것을 말씀하셨다.
물론 이 말씀은 환란 때에 일어날 일이나
그러나 그 일이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전에
이미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고 미혹하는 외식에 대하여 말씀하셨기에
‘외식’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를 이르는 말이 절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다는 자들의 속과 겉이 다름이라
외식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기만이며 속임이라 이를 강조하셨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체하는 자들이 미혹을 하기에,
이 미혹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부터, 오신 다음에 끝없이 일어났기에,
의(義)에 대하여 무감각 해진 신앙은 이미 위선된 믿음이라
그리스도를 핑계로 자기를 위로하는 자위(自慰)적 인
감정의 높낮이에 널뛰기 하듯 감정에 취하고 자신에 도취하여
유지한 믿음이라는 빙자(憑藉)는 이미 신앙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종교가 되었기에 이것이 외식이 되었기에
많은 사람이 미혹하였고, 미혹하고, 미혹할 것은
오직 환란 때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일이라
주님은 수 없이 경고하고 강조하였기에
이제 그 책임은 각자의 몫이며 공동체의 책임이라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난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義)가 사라진
개인과 공동체는 성령님께서 교통하시지 않으시기에
위선에 함몰(陷沒)하여 세상의 시류에 떠내려가는 믿음으로
세상의 세속화를 타령하는 위선이 외식이다.
보라.
이 같은 외식이 똑같은 외식이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란 공동체에
끝임 없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음을 보라.
만약 보지 못한다면 분별력이 흐려진 믿음이라
그런 자들은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초보라
보이지 않아 분별력이 없는 자들이라서
자신이 외식을 하는 자들을 따라 같이 외식을 하는 자들이라
자신의 외식을 모르는 현상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당시나 오늘날이나 똑같다.
보라.
예수님 당시에 외식하는 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종교지도자 서기관 등을 외식하는 자들이라 수없이 듣고 경멸하며 말하지만
오늘날 외식 즉 위선이 없었다면 이렇게 신앙이 종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인이란 공동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조롱거리가 되지 않았으리라.
마치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을 비웃고 종교개혁을 외치지만
믿음이라 우기는 위선에 대하여는 분별력을 잃고 직시하지 못하기에
현세(現世)적이 되어서 세상에서 명예와 부를 쫓아
세상의 권력이 되려할 수록 세상에서 힘을 잃어 영향력이 없으면서
전도를 외치지만 전도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고
세력(勢力)이 되려하지만 세상에서도 겉모습만 공동체인 모임에서도
능력을 잃고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면서 말뿐인 ‘영광’을 외치며
영광을 가리는 일이 허다한 일들이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다시 보면 제자들도
감람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은밀히
주님께 물음(asked him privately)은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Tell us, when shall these things be?
and what shall be the sign when all these things shall be fulfilled?”
그들은 세 가지 질문을 하였다.
언제 일어나며 언제 성전이 파괴될 것인지.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세우기 위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어떤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나며 임하시는 징조로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영광으로 오셔서 통치하실 때 세상의 끝의 징조는 무엇인지.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알지 못하여
주님께서 세상을 대적하여 멸하고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권능과 영광 중에 강림하시기를 고대하였기에
영광스러운 메시야의 지상에서 이루어질 시대를 알기를 원하여
그들은 ‘세상’ 끝이 아닌 ‘시대’의 끝에 대하여 물었기에
자신들의 인생에 일어날 일에 관심이 있었기에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해 강림하실지 알지 못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안 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때 까지
수 없이 부인을 했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님께서 오셨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체감(體感)하였기에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랐기에
그들의 이 땅의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라 하나님의 은혜라
마음을 높이지 않았으며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았기에
자족하는 마음에 경건의 이익을 얻으며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기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아 믿음의 선한 싸움에 부르심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한 알의 밀알 같이
내가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이루어짐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누리며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을 받으며
그 고난이 남겨진 자들의 소망으로 인도함을
그리스도를 본받아 익히 알았기에 그들은 그들이 바라고 원했던
영광의 권위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하여,
문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복음의 문으로 정진했고
하나님 나라는 생명으로 생명에 인도하고 이르는 나라라
자신의 생명을 바쳐 삶으로 예배했기에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모두가 받기를 원하여
에베소서 5:3-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은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헛된 사람의 말로 속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에게 임하리니,
사람의 계명이란 신앙을 종교화한 인간 자신들의 방법에 의한
인위적인 인본주의적인 발상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전통적 종교생활의
실천적 모든 규칙은 하나님의 의와 복음의 의를 떠난 직분적인 권위로
자기 영광과 만족을 위하기에 믿음의 위선이라
하나님의 의와 멀어짐이라
아무리 외형적인 화려한 예배와 경배를 드리고 아무리 많은 헌신,
헌금을 하더라도 경외가 아니기에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신 주님의 말씀은 열매가 없는 신앙,
주님의 십자가를 지지 않은, 주님의 정의의 진리를 지키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서 외식이라 사람의 말을 따르는 종교라서
그런 자들의 미혹을 받고 속임에 넘어간 자들 또한 같은 자들이라
그 누구라도 어떠한 직분자라도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없음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 ‘너의 마음’에서
마음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 치신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시작하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
하나 되는 복음으로
현재 ‘너희 중에’ ‘너희 한 가운데’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됨으로 이루어지고
장차 온 땅위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 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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