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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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108.♡.♡.226)ㆍ2018-02-26 10:2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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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라 하느냐’ 물어보시고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고
이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For whosoever will save his life shall lose it:
but whosoever will lose his life for my sake,
the same shall save it. 누가복음 9:24]
예수님은 여기서 또 ‘누구든지’ 로 또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 거듭 거듭 강조하신 말씀에는 ‘누구든지’가 포함되기에
‘누구든지’ 로 말씀하신 의미는 신약성경 전체에 녹아있는 복음의 기초,
복음의 근본을 이루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적인 역할을 하셨다는 사실로
말씀하신 깊은 뜻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관계성,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으로
인간과의 관계를 끝없이 함께 하시려는 계속성이 은혜이며 진리라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끝없이 사랑하시고
언제까지 함께 하시려는 ‘관계’ 는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없기에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서
다시 성경의 근본적인 기록의 목적에 이르면
성경으로 눈이 떠지고 밝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어
이는 모든 믿음의 선진(先進)들의 고백이었고
그러기에 ‘누구든지’ 는 ‘공평’으로
공평하지 않은 삶에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인정한 신앙고백이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는,
만군의 여호와(Lord Almighty)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義)로
공평, 공정하시기에 공의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사랑’ 하시고 ‘심판’ 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양면(兩面)적인 겉과 속이 다르시기에
사랑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그 분은 인간과 영원히 함께 하시길 원하셔서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 하신
이 모든 사랑의 역사와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신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명하시며
이제 다시 이를 성경으로 개입하시고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짐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의이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어
하나님의 의에 거역(拒逆)함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그러진 길이라
심판의 길이기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듯이
그리스도 예수님은 누구든지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셔서,
그러기에 예수님의 ‘누구든지’ 는,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시듯이
모든 인간을 포함하기에
모든 인간의 구세주이신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의 정의를 나타낸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구든지’ 로 시작의 말씀을 하셨고
‘목숨’ 은 구약의 ‘네페스’ 라는 단어를 의미하는 신약의 헬라어‘프쉬케라’ 는
인간의 인성 또는 생명을 뜻하며 ‘구원하다’ 는 단어와 관련되었다 전해지며
이는 ‘목숨’은 인간의 육체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육체의 구출이라는 구약의 영원한 구원을 뜻하는 신약은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지 않고 ‘목숨’ 으로 불리고
이 목숨의 의미로 예수님은 말씀하셨기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여기서 목숨은 육체적인 목숨인가?
육체를 위하여 이기적인 자기만족으로 편안과 사치와 일상의 안일에
만족하여 현재를 위해 세상과 결탁(結託)한 욕망으로 살면
영혼의 목숨을 잃는 다시는 말씀인가?
물론 성경은 ‘육(肉)’ 을 육체나 세상으로 하나님의 의의 분리나 떠남을
비유하지만 여기서는 목숨은 육체와 영혼을 분리한
영지주의 적인 분리를 아니라
영과 육으로 된 생명의 목숨을 말씀하셨고
‘구원’ 은 영혼의 구원만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만약 그렇다면 육체의 구원만을 말씀하셨다면
사두개인(Sadducees)을 두둔하셨을 것이다.
사두개인은 다윗, 솔로몬 시대에 제사장이었던 사독에게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며 귀족 지배 계층으로 예루살렘의 권력자들로 제사장도 포함되었던 집단이라 산헤드린의 많은 자리를 차지하였었고
그들은 내세와 부활, 영적 세계,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현세적 세계관을 가졌던 자들이라
그들은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경쟁적인 바리새파와
연합하여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에 참여 하였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마태복음 16:1]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그들을 비난하셨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삼가라,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며 그들을 떠나라 하셨음은
사람이 만든 종교적인 계명, 교훈, 규율은 이미 외식이라
그들의 외식에 저주를 하셨기에
‘목숨’ 에 이어 ‘구원’을 강조하셨다.
그러나 확실히 목숨과 구원을 분리하지 않으시고
관계상으로 일치, 같이 보셨다.
목숨(생명)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된 상태가 아니듯이
구원은 육체와 영혼의 구원으로
목숨은 영혼의 ‘구원’ 만이 아니라
이 땅의 구원이 하나님 나라로 향하기에 구원이듯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랑이라 진리이기에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사망이나 권세 자들이나 사탄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이 관계의 사랑을, 생명의 구원을 끊을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끊음은 분리라(shall be able to separate)
분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상의 분리, 하나님 사랑에서의 분리 인
‘외식’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긋남을 의미하기에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변절(變節)된 겉모습의 종교의식은
그리스도의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서
입술로는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믿음은 거짓이라서
습관과 버릇으로 전통화된 외식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가르침이라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진리가 아니기에
외식은 거짓된 믿음을 믿음으로 여기는 자들의 겉모습으로
겉모습이 그리스도인 이라 하나님의 의 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기도하고
사람들에게 높임 받기를 원하며 남의 죄는 판단하면서
자신의 내면의 생각과 외면의 태도가 다른 모순된 믿음이라
믿음을 가장한 위선이라 외적으로 보여주기 연기하는 배우와 같음은
외식(hypocrisy)은
헬라어 휘포크리시스(hypokrisis)에서 유래한 단어로 본 뜻은 ‘대답하다’로
꿈의 해석자, 시를 낭송 하는 자 혹은 가면을 쓴 배우로
삶과 다른 이중적인 자들을 일컬었다 전해진다.
주위를 돌아보자.
어찌 수많은 선생들과 신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육과 영혼을 분리하고
육체를 위하여 살면서 구원받았다며 천국의 시민이라고 자화자찬(自畵自讚)하면서 예배드리며 찬양하고 기도하고 더하여 새벽기도라는 특이한 모임 등
수없이 많은 예배와 모임의 횟수는 일등일 텐데
왜 직분에 상관없이 정직하지 않아 공평하지 않아 정의롭지 않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가.
왜 교회라면서 세상보다도 더 불의 하여 세상에 손가락질을 당하는가.
왜 수없이 갈리진 수많은 교회는 서로 교통하지 못하는가.
교회 안에 진정한 교제라는 성령님의 교통이 이루어지는가.
신앙의 양심이 있다면 보라.
원인은 ‘외식’ 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없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 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성령님의 교통하심으로 하나 됨이 없는
모든 예배와 모임은 외식이기에,
외식으로 분리주의자들이 되어 현대판 영지주의가 누룩같이 번졌고
형식적인 예배와 교회의 관행이 전통이 되고 율법 화하여
조직이 관료화 되어 나서는 사람은 있으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데
분란이 생기면 회개하자 하지만 잠시면 또 없었던 일로 다 잊어버리고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서했다며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고 다시 언급함도
없이 지내다 다시 수면위로 문제가 생기면서 또 분란이 시작된다.
분란(紛亂) 그리고 다툼은 끝이 없어
서로가 편을 나누어 옳다고 주장하지만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듯이 시인하지 않는 회개가 없듯이
불의에 대한 항거(抗拒)라 면서 불의를 저지른 다면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 길래
세상의 정의보다 못하여
세상의 시류와 문화에 이리저리 흔들리는가.
인간은 시대의 이데 오르기와 문화 그리고 역사의 영향을 받지만
믿음이라는 의, 복음의 길은 이런 영향에서 자유로워야 하는데
지난 한국과 한인교회에서, 지금 교회에 일어나는 분란은 우연히 아니라
70년대 말에서 80년도에 극성을 부렸던 가짜 성령운동과
교회, 기도원 건축 등 그 당시의 악한 운동의 영향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의 목사였던 사역하였던 수많은 자들이 지난날 오늘날 은퇴하면서
챙길 수만 있다면 늦은 은퇴 연세에 물질을 많이도 챙기고도
은퇴 후의 소일거리로 명예를 탐하여 은퇴 목사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는 선교라는 명분을 내세워 실질적인 은퇴는 안중에도 없어 탈이 많고
여러 문제를 일으킴이 이것이 우연인가.
사람은 늙으면 분별력이 흐려져서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체력이 떨어져 활동력이 감소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은퇴 또한 당연한 일이거늘
그러나 은퇴를 부당함을 항변하는 자들은 구약의 제사장은 은퇴가
없었다며 어떻게 구약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는지 궁금하고
사도들은 은퇴가 없었다고 변명하지만 그럼 그들은 성령님의 감화를 받아
성령님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한 자들인가.
진정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자들이라면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우선순위로 성경을 가르쳐야 했는데
그 가르침을 남에게 미루고도 명예로운 담임목사라는 직분보다
당회장이라는 명예를 탐하였기에 강대상이 더 높아지고 화려해졌으리라.
진실로 이제라도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한 다면
은퇴 후 지난날 잘못된 공동체의 모든 외식을 조장한 일들을 회개하고
오늘을 있게 하신 자비에 감사하며 자신이 임명한 가장 낮은 서리집사가
되어 소소한 일을 하며 늦게라도 공동체의 질서를 지킴이
진리를 간직한 질서를 지키려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만약 그런 소식들 듣는 날이 온다면 한국교회가 한인교회가 낮아진 만큼
높아져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리라.
사실 교회의 분란의 대부분의 원인은 목사에게 있어 교회 건축 시
은퇴 시, 그 후임 등 거의라 할 만큼 돈과 연관되어 있어
또한 교회의 모든 직분을 맡은 자들의 책임도 여기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교회의 분쟁과 갈라짐이 유행처럼 된 오늘날의 현실은
외식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보면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5:7-9]
입술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면서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
입술로는 하나님을 영광을 돌린다 하면서
행위로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
입술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목에 걸고 살면서
행위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부적이 된 자들...
도대체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이란 하나님의 의(義)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대가없이 받았기에
그 은혜로 공의로운 자녀가 되었기에 믿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으로 대가 없이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부활로 확정하셨듯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복음의 길은 거듭난 길이라
그리스도의 고난의 흔적이 없는 신앙생활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라서 외식이 되며 죄가 되는 복음의 어그러진 길이라
그러기에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만큼의 분량이라
그 분량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만큼이 믿음의 분량이라
믿음이란 구실로 사랑을 외치지만
정의가 사라진 진리를 외침이 외식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과 받음이 외식이라
다시 이사야의 글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어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이사야 29:11-14]
입으로는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의(義)에서 멀리 떠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이 가려져서
사람의 가르침으로 외식하는 세대는
이사야 당시와 예수님 당시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찌 이리 똑같단 말인가!
보라.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소망이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영생이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시며 하신 말씀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He that loveth his life shall lose it;
and he that hateth his life in this world shall keep it unto life eternal.
요한복음 12:25]
우선 이 말씀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오늘날 교인이라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사는 자는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지 않기에
그리스도의 뜻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서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고 입술로는 공경한다 하지만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라서 삶의 우선순위를 자기 자신에게 두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생명을 잃는다.
이 생명은, 거듭난 자로 그리스도를 닮은 삶과 부활을
그리고 영생을 뜻하기에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라 부합된 의미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이라 또 이 말씀과 같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but whosoever will lose his life for my sake,
the same shall save it.” 는
예수님의 다른 말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와 같은 말씀이다.
그래서 같은 ‘누구든지’ 로
그래서 ‘제 목숨을 잃으면’ 은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청하셨고
오늘날도 똑 같이 청 하신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미 자신을 부인한 결과로
옛 사람의 근성(根性)인 생각의 사고와 습관과 기질을 죽인
자기 목숨까지도 부인한 새로운 삶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자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의, 정의를 인정하고 행위로 시인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생활로,
“나를 위하여(life for my sake)”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 ‘믿음’ 이고 ‘구원’ 이라
이를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갈라디아서 2:20]
마태복음은 누가복음의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가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로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For whosoever will save his life shall lose it:
and whosoever will lose his life for my sake shall find it. 마태복음 16:25]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는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같은 의미로 구원을 뜻하지만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말씀하셨을 때 하신 말씀으로 목숨(생명)을 거듭 말씀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며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For what is a man profited, if he shall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his own soul?
or what shall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26]
이 말씀의 목숨은 영혼을 말씀하셨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what shall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그 전 구절은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으로
주제는 같은 ‘목숨’ 이라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지 않으신 말씀이며
목숨(생명)을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현재 능동 명령으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와 같이
현재를 말씀하시며 계속적인 행위를, 계속적인 관계를 말씀하시기에
천국에 이르기 까지라,
또한 이 땅의 삶과 천국을 분리하지 않으신 말씀이다.
죽어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이 아니다.
만약 죽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면
이 땅의 삶은 천국을 들어가기 위한 담보(擔保)적인 생이라면
노예적인 삶이라
천국 복음이 아니다.
여기서 이단과 사이비들의 주장이 난무(亂舞)하고
오늘날 외식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천국이 생의 보상의 성격으로 볼 수는 있겠으나
엄격히 보상(報償)이 아니며 보상이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며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 인간의 의(義)의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공로(功勞)나 그 무엇이라도 개입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시기에
하나님의 긍휼이며 자비며 사랑이기에
인간이 하나님께 손을 내미는 구원의 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셔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무조건적인 사랑과 혜택의 은총이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신 분이시라
복음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確證)하였기에,
하나님 사랑을 증거하며 증명하신 분이 그리스도로,
사도 요한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위하여
요한복음의 시작은 천지창조 이전에서 시작하며
태조에 계셨던 말씀 곧 하나님을 증거 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1:1]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The sam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2]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이 인간의 육체가 되어 우리에게 오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1:14]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사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시매,
인간을 향한 사랑의 확증이며 증거며 증명이라
인간의 삶에 직접 개입하신 은혜며 사랑이라
우리의 소망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gospel’ 이라 ‘Good news’ 라 좋은 소식이라
‘good tidings’ 로 같은 기쁜 소식으로 표현 하고
이는 ‘a reward for good tidings’ 의 짧은 구원의 표현으로
문자적으로 상을 주시겠다는 기쁜 소식으로
그 ‘상’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라 하나님 나라의 ‘평안’이기에
평안의 복음이라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your feet shod with the preparation of the gospel of peace;”
평안의 복음(the gospel of peace)은
천국 복음(the gospel of the kingdom)으로
다시 인간을 사랑하심을 확증하시며 구원을 표현하기에
마가복음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마가복음 1:1]
마태는 이 복음을 인간의 계보(系譜)에서 시작하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 1:1]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의 주제라 그분의 복음이지만
인간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복음이 되기에
마태는 천국 복음이라 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음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And Jesus went about all the citie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sickness and every disease among the people.
마태복음 9:35]
그러기에 신약은 그리스도의 통한 구원의 천국 복음을 이야기 하며
복음을 받은 자로 그리스도를 닮아 천국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의 삶은
이미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의 행위가 포함한
‘믿음’ 은 하나님 은혜의 증거로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기에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정의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한 삶이라
완전한 천국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천국의 모형이 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다가오는 천국을 향한 시간의 선상에 있기에
이는 마치 예수님의 ‘죽음’ 과 ‘부활’을 한 선상에서, 한 흐름으로
장래 이루어질 사건과 같은 한 사건으로, 하나님 나라와 분리가 아니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But I tell you of a truth, there be some standing here,
which shall not taste of death, till they see the kingdom of God.
누가복음 9:27]
베드로의 고백위에, 제자들의 고백위에
그리스도를 닮은 공동체가 세워지기 이전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도 있다 하셨다.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여기 서 있는 제자들 중에 죽기 전에 볼 자도 있다 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라라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그런 자들을 ‘성도’ 라 함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성도(聖徒)라 함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성도(every saint in Christ Jesus)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To the end he may stablish your hearts unblameable in holiness
before God, even our Father,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with all his saints.
데살로니가전서 3:1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라 하느냐’ 물어보시고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고
이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For whosoever will save his life shall lose it:
but whosoever will lose his life for my sake,
the same shall save it. 누가복음 9:24]
예수님은 여기서 또 ‘누구든지’ 로 또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 거듭 거듭 강조하신 말씀에는 ‘누구든지’가 포함되기에
‘누구든지’ 로 말씀하신 의미는 신약성경 전체에 녹아있는 복음의 기초,
복음의 근본을 이루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적인 역할을 하셨다는 사실로
말씀하신 깊은 뜻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관계성,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으로
인간과의 관계를 끝없이 함께 하시려는 계속성이 은혜이며 진리라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끝없이 사랑하시고
언제까지 함께 하시려는 ‘관계’ 는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없기에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서
다시 성경의 근본적인 기록의 목적에 이르면
성경으로 눈이 떠지고 밝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어
이는 모든 믿음의 선진(先進)들의 고백이었고
그러기에 ‘누구든지’ 는 ‘공평’으로
공평하지 않은 삶에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인정한 신앙고백이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는,
만군의 여호와(Lord Almighty)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義)로
공평, 공정하시기에 공의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사랑’ 하시고 ‘심판’ 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양면(兩面)적인 겉과 속이 다르시기에
사랑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그 분은 인간과 영원히 함께 하시길 원하셔서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 하신
이 모든 사랑의 역사와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신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명하시며
이제 다시 이를 성경으로 개입하시고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짐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의이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어
하나님의 의에 거역(拒逆)함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그러진 길이라
심판의 길이기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듯이
그리스도 예수님은 누구든지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셔서,
그러기에 예수님의 ‘누구든지’ 는,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시듯이
모든 인간을 포함하기에
모든 인간의 구세주이신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의 정의를 나타낸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구든지’ 로 시작의 말씀을 하셨고
‘목숨’ 은 구약의 ‘네페스’ 라는 단어를 의미하는 신약의 헬라어‘프쉬케라’ 는
인간의 인성 또는 생명을 뜻하며 ‘구원하다’ 는 단어와 관련되었다 전해지며
이는 ‘목숨’은 인간의 육체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육체의 구출이라는 구약의 영원한 구원을 뜻하는 신약은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지 않고 ‘목숨’ 으로 불리고
이 목숨의 의미로 예수님은 말씀하셨기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여기서 목숨은 육체적인 목숨인가?
육체를 위하여 이기적인 자기만족으로 편안과 사치와 일상의 안일에
만족하여 현재를 위해 세상과 결탁(結託)한 욕망으로 살면
영혼의 목숨을 잃는 다시는 말씀인가?
물론 성경은 ‘육(肉)’ 을 육체나 세상으로 하나님의 의의 분리나 떠남을
비유하지만 여기서는 목숨은 육체와 영혼을 분리한
영지주의 적인 분리를 아니라
영과 육으로 된 생명의 목숨을 말씀하셨고
‘구원’ 은 영혼의 구원만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만약 그렇다면 육체의 구원만을 말씀하셨다면
사두개인(Sadducees)을 두둔하셨을 것이다.
사두개인은 다윗, 솔로몬 시대에 제사장이었던 사독에게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며 귀족 지배 계층으로 예루살렘의 권력자들로 제사장도 포함되었던 집단이라 산헤드린의 많은 자리를 차지하였었고
그들은 내세와 부활, 영적 세계,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현세적 세계관을 가졌던 자들이라
그들은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경쟁적인 바리새파와
연합하여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에 참여 하였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마태복음 16:1]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그들을 비난하셨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삼가라,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며 그들을 떠나라 하셨음은
사람이 만든 종교적인 계명, 교훈, 규율은 이미 외식이라
그들의 외식에 저주를 하셨기에
‘목숨’ 에 이어 ‘구원’을 강조하셨다.
그러나 확실히 목숨과 구원을 분리하지 않으시고
관계상으로 일치, 같이 보셨다.
목숨(생명)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된 상태가 아니듯이
구원은 육체와 영혼의 구원으로
목숨은 영혼의 ‘구원’ 만이 아니라
이 땅의 구원이 하나님 나라로 향하기에 구원이듯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랑이라 진리이기에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사망이나 권세 자들이나 사탄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이 관계의 사랑을, 생명의 구원을 끊을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끊음은 분리라(shall be able to separate)
분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상의 분리, 하나님 사랑에서의 분리 인
‘외식’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긋남을 의미하기에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변절(變節)된 겉모습의 종교의식은
그리스도의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서
입술로는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믿음은 거짓이라서
습관과 버릇으로 전통화된 외식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가르침이라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진리가 아니기에
외식은 거짓된 믿음을 믿음으로 여기는 자들의 겉모습으로
겉모습이 그리스도인 이라 하나님의 의 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기도하고
사람들에게 높임 받기를 원하며 남의 죄는 판단하면서
자신의 내면의 생각과 외면의 태도가 다른 모순된 믿음이라
믿음을 가장한 위선이라 외적으로 보여주기 연기하는 배우와 같음은
외식(hypocrisy)은
헬라어 휘포크리시스(hypokrisis)에서 유래한 단어로 본 뜻은 ‘대답하다’로
꿈의 해석자, 시를 낭송 하는 자 혹은 가면을 쓴 배우로
삶과 다른 이중적인 자들을 일컬었다 전해진다.
주위를 돌아보자.
어찌 수많은 선생들과 신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육과 영혼을 분리하고
육체를 위하여 살면서 구원받았다며 천국의 시민이라고 자화자찬(自畵自讚)하면서 예배드리며 찬양하고 기도하고 더하여 새벽기도라는 특이한 모임 등
수없이 많은 예배와 모임의 횟수는 일등일 텐데
왜 직분에 상관없이 정직하지 않아 공평하지 않아 정의롭지 않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가.
왜 교회라면서 세상보다도 더 불의 하여 세상에 손가락질을 당하는가.
왜 수없이 갈리진 수많은 교회는 서로 교통하지 못하는가.
교회 안에 진정한 교제라는 성령님의 교통이 이루어지는가.
신앙의 양심이 있다면 보라.
원인은 ‘외식’ 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없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 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성령님의 교통하심으로 하나 됨이 없는
모든 예배와 모임은 외식이기에,
외식으로 분리주의자들이 되어 현대판 영지주의가 누룩같이 번졌고
형식적인 예배와 교회의 관행이 전통이 되고 율법 화하여
조직이 관료화 되어 나서는 사람은 있으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데
분란이 생기면 회개하자 하지만 잠시면 또 없었던 일로 다 잊어버리고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서했다며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고 다시 언급함도
없이 지내다 다시 수면위로 문제가 생기면서 또 분란이 시작된다.
분란(紛亂) 그리고 다툼은 끝이 없어
서로가 편을 나누어 옳다고 주장하지만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듯이 시인하지 않는 회개가 없듯이
불의에 대한 항거(抗拒)라 면서 불의를 저지른 다면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 길래
세상의 정의보다 못하여
세상의 시류와 문화에 이리저리 흔들리는가.
인간은 시대의 이데 오르기와 문화 그리고 역사의 영향을 받지만
믿음이라는 의, 복음의 길은 이런 영향에서 자유로워야 하는데
지난 한국과 한인교회에서, 지금 교회에 일어나는 분란은 우연히 아니라
70년대 말에서 80년도에 극성을 부렸던 가짜 성령운동과
교회, 기도원 건축 등 그 당시의 악한 운동의 영향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의 목사였던 사역하였던 수많은 자들이 지난날 오늘날 은퇴하면서
챙길 수만 있다면 늦은 은퇴 연세에 물질을 많이도 챙기고도
은퇴 후의 소일거리로 명예를 탐하여 은퇴 목사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는 선교라는 명분을 내세워 실질적인 은퇴는 안중에도 없어 탈이 많고
여러 문제를 일으킴이 이것이 우연인가.
사람은 늙으면 분별력이 흐려져서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체력이 떨어져 활동력이 감소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은퇴 또한 당연한 일이거늘
그러나 은퇴를 부당함을 항변하는 자들은 구약의 제사장은 은퇴가
없었다며 어떻게 구약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는지 궁금하고
사도들은 은퇴가 없었다고 변명하지만 그럼 그들은 성령님의 감화를 받아
성령님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한 자들인가.
진정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자들이라면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우선순위로 성경을 가르쳐야 했는데
그 가르침을 남에게 미루고도 명예로운 담임목사라는 직분보다
당회장이라는 명예를 탐하였기에 강대상이 더 높아지고 화려해졌으리라.
진실로 이제라도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한 다면
은퇴 후 지난날 잘못된 공동체의 모든 외식을 조장한 일들을 회개하고
오늘을 있게 하신 자비에 감사하며 자신이 임명한 가장 낮은 서리집사가
되어 소소한 일을 하며 늦게라도 공동체의 질서를 지킴이
진리를 간직한 질서를 지키려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만약 그런 소식들 듣는 날이 온다면 한국교회가 한인교회가 낮아진 만큼
높아져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리라.
사실 교회의 분란의 대부분의 원인은 목사에게 있어 교회 건축 시
은퇴 시, 그 후임 등 거의라 할 만큼 돈과 연관되어 있어
또한 교회의 모든 직분을 맡은 자들의 책임도 여기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교회의 분쟁과 갈라짐이 유행처럼 된 오늘날의 현실은
외식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보면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5:7-9]
입술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면서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
입술로는 하나님을 영광을 돌린다 하면서
행위로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
입술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목에 걸고 살면서
행위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부적이 된 자들...
도대체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이란 하나님의 의(義)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대가없이 받았기에
그 은혜로 공의로운 자녀가 되었기에 믿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으로 대가 없이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부활로 확정하셨듯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복음의 길은 거듭난 길이라
그리스도의 고난의 흔적이 없는 신앙생활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라서 외식이 되며 죄가 되는 복음의 어그러진 길이라
그러기에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만큼의 분량이라
그 분량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만큼이 믿음의 분량이라
믿음이란 구실로 사랑을 외치지만
정의가 사라진 진리를 외침이 외식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과 받음이 외식이라
다시 이사야의 글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어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이사야 29:11-14]
입으로는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의(義)에서 멀리 떠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이 가려져서
사람의 가르침으로 외식하는 세대는
이사야 당시와 예수님 당시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찌 이리 똑같단 말인가!
보라.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소망이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영생이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시며 하신 말씀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He that loveth his life shall lose it;
and he that hateth his life in this world shall keep it unto life eternal.
요한복음 12:25]
우선 이 말씀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오늘날 교인이라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사는 자는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지 않기에
그리스도의 뜻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서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고 입술로는 공경한다 하지만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라서 삶의 우선순위를 자기 자신에게 두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생명을 잃는다.
이 생명은, 거듭난 자로 그리스도를 닮은 삶과 부활을
그리고 영생을 뜻하기에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라 부합된 의미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이라 또 이 말씀과 같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but whosoever will lose his life for my sake,
the same shall save it.” 는
예수님의 다른 말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와 같은 말씀이다.
그래서 같은 ‘누구든지’ 로
그래서 ‘제 목숨을 잃으면’ 은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청하셨고
오늘날도 똑 같이 청 하신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미 자신을 부인한 결과로
옛 사람의 근성(根性)인 생각의 사고와 습관과 기질을 죽인
자기 목숨까지도 부인한 새로운 삶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자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의, 정의를 인정하고 행위로 시인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생활로,
“나를 위하여(life for my sake)”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 ‘믿음’ 이고 ‘구원’ 이라
이를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갈라디아서 2:20]
마태복음은 누가복음의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가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로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For whosoever will save his life shall lose it:
and whosoever will lose his life for my sake shall find it. 마태복음 16:25]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는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같은 의미로 구원을 뜻하지만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말씀하셨을 때 하신 말씀으로 목숨(생명)을 거듭 말씀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며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For what is a man profited, if he shall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his own soul?
or what shall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26]
이 말씀의 목숨은 영혼을 말씀하셨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what shall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그 전 구절은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으로
주제는 같은 ‘목숨’ 이라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지 않으신 말씀이며
목숨(생명)을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현재 능동 명령으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와 같이
현재를 말씀하시며 계속적인 행위를, 계속적인 관계를 말씀하시기에
천국에 이르기 까지라,
또한 이 땅의 삶과 천국을 분리하지 않으신 말씀이다.
죽어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이 아니다.
만약 죽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면
이 땅의 삶은 천국을 들어가기 위한 담보(擔保)적인 생이라면
노예적인 삶이라
천국 복음이 아니다.
여기서 이단과 사이비들의 주장이 난무(亂舞)하고
오늘날 외식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천국이 생의 보상의 성격으로 볼 수는 있겠으나
엄격히 보상(報償)이 아니며 보상이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며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 인간의 의(義)의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공로(功勞)나 그 무엇이라도 개입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시기에
하나님의 긍휼이며 자비며 사랑이기에
인간이 하나님께 손을 내미는 구원의 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셔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무조건적인 사랑과 혜택의 은총이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신 분이시라
복음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確證)하였기에,
하나님 사랑을 증거하며 증명하신 분이 그리스도로,
사도 요한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위하여
요한복음의 시작은 천지창조 이전에서 시작하며
태조에 계셨던 말씀 곧 하나님을 증거 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1:1]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The sam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2]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이 인간의 육체가 되어 우리에게 오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1:14]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사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시매,
인간을 향한 사랑의 확증이며 증거며 증명이라
인간의 삶에 직접 개입하신 은혜며 사랑이라
우리의 소망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gospel’ 이라 ‘Good news’ 라 좋은 소식이라
‘good tidings’ 로 같은 기쁜 소식으로 표현 하고
이는 ‘a reward for good tidings’ 의 짧은 구원의 표현으로
문자적으로 상을 주시겠다는 기쁜 소식으로
그 ‘상’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라 하나님 나라의 ‘평안’이기에
평안의 복음이라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your feet shod with the preparation of the gospel of peace;”
평안의 복음(the gospel of peace)은
천국 복음(the gospel of the kingdom)으로
다시 인간을 사랑하심을 확증하시며 구원을 표현하기에
마가복음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마가복음 1:1]
마태는 이 복음을 인간의 계보(系譜)에서 시작하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 1:1]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의 주제라 그분의 복음이지만
인간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복음이 되기에
마태는 천국 복음이라 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음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And Jesus went about all the citie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sickness and every disease among the people.
마태복음 9:35]
그러기에 신약은 그리스도의 통한 구원의 천국 복음을 이야기 하며
복음을 받은 자로 그리스도를 닮아 천국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의 삶은
이미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의 행위가 포함한
‘믿음’ 은 하나님 은혜의 증거로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기에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정의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한 삶이라
완전한 천국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천국의 모형이 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다가오는 천국을 향한 시간의 선상에 있기에
이는 마치 예수님의 ‘죽음’ 과 ‘부활’을 한 선상에서, 한 흐름으로
장래 이루어질 사건과 같은 한 사건으로, 하나님 나라와 분리가 아니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But I tell you of a truth, there be some standing here,
which shall not taste of death, till they see the kingdom of God.
누가복음 9:27]
베드로의 고백위에, 제자들의 고백위에
그리스도를 닮은 공동체가 세워지기 이전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도 있다 하셨다.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여기 서 있는 제자들 중에 죽기 전에 볼 자도 있다 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라라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그런 자들을 ‘성도’ 라 함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성도(聖徒)라 함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성도(every saint in Christ Jesus)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To the end he may stablish your hearts unblameable in holiness
before God, even our Father,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with all his saints.
데살로니가전서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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