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태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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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100.♡.♡.223)ㆍ2018-02-17 22:19관련링크
본문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잉태의 고통을 여자에게 주십니다.
인간의 육체적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이 출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와에게 주어진 그 잉태하는 고통이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잉태의 고통이 저주라면 하나님은 하와를 저주하신 것일까요?
선악과 사건으로 정작 가장 큰 고통을 당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품안의 독생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가슴을 찢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 대속물, 속죄제물로 내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찢는 고통일 것입니다.
그 고통을 어찌 잉태의 고통에 비기겠습니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그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뭉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의 머리를 뭉개겠다는 것은 뱀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진노를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뱀에게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후손은 어떻게 와야 합니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와야 합니다.
여자의 몸을 통하여 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
그 여자의 후손은 이제 선악과를 따먹고 영원히 죽게 된 아담과 하와에게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오직 여자의 후손, 메시아,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잉태의 고통을 주신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하와야, 내가 너무나 고통스럽구나. 이 고통을 너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도 함께 해야 하지 않겠느냐?"
잉태의 고통은 여자의 후손을 내어주실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고통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영광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여자의 후손을 오시게 하는 고통입니다.
먼 훗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남자들에게 할례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에다 합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거기에다 할례를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왕이면 등짝이나 가슴이나 이마에 칼로 십자가를 그으라 하시면 얼마나 폼 나겠습니까?
남자의 생식기 표피를 자르는 할례, 그것은 여자의 후손의 약속, 독생자의 약속, 아들의 약속의 표였던 것입니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진노하실 때마다 그 할례의 흔적을 보시고 “참 그렇지. 내가 이 백성들에게 아들을 내어주기로 했지!” 하면서 독생자를 보내실 약속을 기억하고 진노를 참으시지 않으셨겠습니까?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여자가 잉태하는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실 때마다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내가 죄인들에게 여자의 후손을 약속했었지.”
그리하여 잉태의 고통들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때가 차매 여자의 후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그 잉태의 고통 즐겨 받은 많은 여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라가 그렇습니다. 90세에 기어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레아와 라헬이 그랬습니다. 서로 더 낳으려고 경쟁을 했습니다.
다말이 그랬습니다. 목숨을 걸고 기생으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해서까지 아들을 낳고 기어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시는 길은 이와 같이 여자들의 잉태의 고통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잉태의 고통으로 난 그 길을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의 마지막 길목은 잉태의 고통에 비할 수 없는 참혹한 고통의 십자가였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은 울부짖으며 그 참혹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기어이 죄인들을 살려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고통 없이 구원의 기쁨만을 누리는 것이 축복일까요?
하나님은 구약시대의 성도들에게만 잉태의 고통을 주셨을까요?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기쁨만 주셨을까요?
그리스도의 신부의 가장 중요한 자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 순결? 믿음?
아닙니다. 신부의 가장 중요한 자격요건은 잉태하는 것입니다. 낳는 것입니다.
잉태하지 못 하고 낳지 못 하는 여자는 석녀(石女)입니다. 신부가 될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을 얻은 신약성도들, 교회들, 그리스도의 신부들은
더욱 잉태의 고통, 복음으로 자녀를 낳고 기르는 수고를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은 거저 탄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어 죽어야 새 생명이 탄생합니다.
생명을 낳고 살리는 일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치러야 하는 잉태의 고통입니다.
댓글목록
짐보님의 댓글
짐보 108.♡.♡.226
생명은 생명을 났지만
생명을 품는 잉태는 고통이라시니 참 고통입니다.
밀알도 그렇고 돌밭에 뿌려진 자 같은 저도 그렇고,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는데,
그래서 옛사람이 죽어야 산다시는데,
아직도 펄펄 살아있고 상처투성이의 자신을 봅니다...
바울도 가시를 간직했고, 베드로의 장당했건만 한 밤에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고 제자들 모두는 몸을 피했고, 요한은 제자 중 혼자 남아
지난날을 떠오르며 감사도 했지만 한 인간으로 회한도 많았으리라...
그래서 예수님 처럼 고난이 소망을 이룸을 경험하고
담담 했겠지요.
죽으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
복음의 길, 그 길에 어그러진 저를 바라봅니다.
대장쟁이님의 댓글
대장쟁이 100.♡.♡.223
맞아요. 그게 참 고통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고통 슬쩍 밀쳐놓고 뻔뻔하게 하루를 보냈네요.
흑....
내일은, 내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