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6.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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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142.♡.♡.150)ㆍ2024-10-29 02:0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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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
(욥 11: 5-9)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세 친구들이 욥에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라고 권면하고 욥은 한사코 자신의 순전함을 주장하면서 격렬한 쟁론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의 의견도 존중하고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겠지만 남의 이야기에 흔들려 자신의 믿음이 이리저리 갈대처럼 흔들린다면 이것은 더 큰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순전함을 확신하는 욥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를 온전케 하고 완전히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놀라운 능력을 확신하며 어떠한 마귀의 공격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은 세 번째 투수로 나아마 사람 소발이 등판합니다. 그리고 날카롭고 까칠한 비판을 강속구 직구로 던집니다. “욥아, 듣자 듣자 하니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구나. 네가 말만 많이 하면 의롭게 되는 줄 아느냐? 하나님이 어떠신 분이신 줄 알고 감히 잘 났다고 까부느냐? 하나님께서 너의 입을 막아주셨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권면합니다. 11장의 소발의 말은 점잖고 은유적이지만 그 내용을 노골적으로 간단히 줄이자면 “욥아, 하나님 앞에서 너의 행위를 돌아보고 똑바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에게 희망은 없다.”입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권면을 매몰차게 반박합니다. 12장에 들어가 욥의 대답을 보면 “오냐,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너희가 얼마나 안다고 잘 난 체 하느냐? 나도 너만큼은 안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되받아치고 있습니다. 네 사람의 친구들 사이에 격렬한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상대를 공격하고 설득하려고 하는 모양새입니다. 이 모습을 어떻게 보십니까? 멀리서 찾아와 7일7야를 곁에서 지켜준 고마운 친구들에게 욥이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오늘날을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 시대라고 합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시대입니다. '네가 옳을 수도 있고 내가 옳을 수도 있고 다 옳을 수도 있다.'는 상대적 진리의 시대입니다. “Truth for you, not for me.” ‘너에게 진리이지 내게는 아니야.’라는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개인적, 주관적인 판단에 따르는 시대입니다. 좋은 게 좋은,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해주는 것이 덕목인 시대입니다. 너의 종교도 나의 종교도 각자에게 진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네가 진리라고 믿으면 너나 잘 믿어라, 남에게 강요하지 말고."입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풍조는 동성애자도 성소수자라 하여 존중해주고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치자는 교회일치(애큐매니컬)운동이 일어나고 나아가서 세상의 모든 종교를 상호인정, 존중하고, 구원이 모든 종교에 있다는 종교다원주의, 나아가서 모든 종교를 통합하자는 종교합일화 운동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로마 캐톨릭이 있습니다.
고려말엽부터 조선조 초기, 세종대왕 때까지 황희정승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존중해주는 덕망으로 유명한 분이지요. 누구에게도 욕먹지 않는 둥글둥글한 처신으로 오랫동안 여러 임금 밑에서 정승을 하신 분입니다. 한 번은 두 종이 다투다가 황희정승에게 와서 서로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정승이 듣고서는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리고 다른 종에게도 “그렇구나, 네 말이 옳다.”고 합니다. 두 종이 물러간 다음 여종이 묻습니다. “마님, 이도 옳다, 저도 맞다 하시면 도대체 누가 옳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황희정승이 그럽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네 말도 옳구나.”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진리는 양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황희정승처럼 좋은 사람이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읽는 신약성경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진리 앞에 추호의 양보도 없었습니다. 율법문제에 관하여 베드로조차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도바울로 인하여 기독교의 교리가 바로 설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을 보면 주님은 거짓사도를 시험하여 드러내고 거짓에 대항하여 싸운 교회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목숨을 걸어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은 물러섬 없이 친구들을 반박합니다. “그래, 너희들이 보는 대로 나는 지금 이 꼴이 되어 있다. 내가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재앙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후히 주시고 형통케도 하시고 의인에게 재앙을 내리실 수도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다. 인간의 지혜와 모략과 도모는 그 앞에 먼지와 같다. 하나님이 하시면 막을 자가 없다. 만민의 두목들도 쓸어버리실 수 있고, 총명한 자도 하나님이 빛을 없애시면 다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린다. 너희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도 못 하면서 너희들 마음에서 거짓으로 지어내어 지껄이고 남을 가르쳐 고치려 하는구나. 너희는 다 쓸데없는 의원이니라.” 그렇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인간의 상식과 이성적인 판단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으며 그것을 가지고 욥을 설득하고 가르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친구들에게 욥이 주장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뜻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빛도 짓고 어둠도 짓고, 악인을 형통하게도 하고 의인을 망하게도 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제한이 없다는 말이다. 너희들 말대로 만일 하나님이 그러한 모든 일을 하실 수 없다면, 하나님이 어둠을 지으시면 안 되고, 악인을 형통케 하면 안 되고, 선인을 고통하게 하면 안 된다면....., 그게 하나님을 속박하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이 선과 악에 구속되어 뜻대로 못 하시는 분이신가? 전능하지 못 하신 분이신가? 그렇지 않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절대주권자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며 우주의 모든 것을 넘어서시며 선과 악조차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욥이 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초월성, 주권, 전능하심입니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아니하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자유, 무엇에도 속박되지 아니하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아무도 막을 수 없고 아무도 반대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판단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놓고 '옳다, 그르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되지,' 이런 판단을 한다는 것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의 판단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것을 욥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죄 없다 선언하셨습니다. 누가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욥 11: 5-9)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세 친구들이 욥에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라고 권면하고 욥은 한사코 자신의 순전함을 주장하면서 격렬한 쟁론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의 의견도 존중하고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겠지만 남의 이야기에 흔들려 자신의 믿음이 이리저리 갈대처럼 흔들린다면 이것은 더 큰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순전함을 확신하는 욥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를 온전케 하고 완전히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놀라운 능력을 확신하며 어떠한 마귀의 공격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은 세 번째 투수로 나아마 사람 소발이 등판합니다. 그리고 날카롭고 까칠한 비판을 강속구 직구로 던집니다. “욥아, 듣자 듣자 하니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구나. 네가 말만 많이 하면 의롭게 되는 줄 아느냐? 하나님이 어떠신 분이신 줄 알고 감히 잘 났다고 까부느냐? 하나님께서 너의 입을 막아주셨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권면합니다. 11장의 소발의 말은 점잖고 은유적이지만 그 내용을 노골적으로 간단히 줄이자면 “욥아, 하나님 앞에서 너의 행위를 돌아보고 똑바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에게 희망은 없다.”입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권면을 매몰차게 반박합니다. 12장에 들어가 욥의 대답을 보면 “오냐,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너희가 얼마나 안다고 잘 난 체 하느냐? 나도 너만큼은 안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되받아치고 있습니다. 네 사람의 친구들 사이에 격렬한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상대를 공격하고 설득하려고 하는 모양새입니다. 이 모습을 어떻게 보십니까? 멀리서 찾아와 7일7야를 곁에서 지켜준 고마운 친구들에게 욥이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오늘날을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 시대라고 합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시대입니다. '네가 옳을 수도 있고 내가 옳을 수도 있고 다 옳을 수도 있다.'는 상대적 진리의 시대입니다. “Truth for you, not for me.” ‘너에게 진리이지 내게는 아니야.’라는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개인적, 주관적인 판단에 따르는 시대입니다. 좋은 게 좋은,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해주는 것이 덕목인 시대입니다. 너의 종교도 나의 종교도 각자에게 진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네가 진리라고 믿으면 너나 잘 믿어라, 남에게 강요하지 말고."입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풍조는 동성애자도 성소수자라 하여 존중해주고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치자는 교회일치(애큐매니컬)운동이 일어나고 나아가서 세상의 모든 종교를 상호인정, 존중하고, 구원이 모든 종교에 있다는 종교다원주의, 나아가서 모든 종교를 통합하자는 종교합일화 운동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로마 캐톨릭이 있습니다.
고려말엽부터 조선조 초기, 세종대왕 때까지 황희정승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존중해주는 덕망으로 유명한 분이지요. 누구에게도 욕먹지 않는 둥글둥글한 처신으로 오랫동안 여러 임금 밑에서 정승을 하신 분입니다. 한 번은 두 종이 다투다가 황희정승에게 와서 서로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정승이 듣고서는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리고 다른 종에게도 “그렇구나, 네 말이 옳다.”고 합니다. 두 종이 물러간 다음 여종이 묻습니다. “마님, 이도 옳다, 저도 맞다 하시면 도대체 누가 옳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황희정승이 그럽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네 말도 옳구나.”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진리는 양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황희정승처럼 좋은 사람이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읽는 신약성경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진리 앞에 추호의 양보도 없었습니다. 율법문제에 관하여 베드로조차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도바울로 인하여 기독교의 교리가 바로 설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을 보면 주님은 거짓사도를 시험하여 드러내고 거짓에 대항하여 싸운 교회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목숨을 걸어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은 물러섬 없이 친구들을 반박합니다. “그래, 너희들이 보는 대로 나는 지금 이 꼴이 되어 있다. 내가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재앙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후히 주시고 형통케도 하시고 의인에게 재앙을 내리실 수도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다. 인간의 지혜와 모략과 도모는 그 앞에 먼지와 같다. 하나님이 하시면 막을 자가 없다. 만민의 두목들도 쓸어버리실 수 있고, 총명한 자도 하나님이 빛을 없애시면 다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린다. 너희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도 못 하면서 너희들 마음에서 거짓으로 지어내어 지껄이고 남을 가르쳐 고치려 하는구나. 너희는 다 쓸데없는 의원이니라.” 그렇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인간의 상식과 이성적인 판단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으며 그것을 가지고 욥을 설득하고 가르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친구들에게 욥이 주장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뜻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빛도 짓고 어둠도 짓고, 악인을 형통하게도 하고 의인을 망하게도 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제한이 없다는 말이다. 너희들 말대로 만일 하나님이 그러한 모든 일을 하실 수 없다면, 하나님이 어둠을 지으시면 안 되고, 악인을 형통케 하면 안 되고, 선인을 고통하게 하면 안 된다면....., 그게 하나님을 속박하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이 선과 악에 구속되어 뜻대로 못 하시는 분이신가? 전능하지 못 하신 분이신가? 그렇지 않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절대주권자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며 우주의 모든 것을 넘어서시며 선과 악조차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욥이 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초월성, 주권, 전능하심입니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아니하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자유, 무엇에도 속박되지 아니하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아무도 막을 수 없고 아무도 반대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판단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놓고 '옳다, 그르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되지,' 이런 판단을 한다는 것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의 판단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것을 욥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죄 없다 선언하셨습니다. 누가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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