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는 고통(苦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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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142.♡.♡.150)ㆍ2024-07-08 11:5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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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는 고통(苦痛)
<요한복음 1장 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장 12절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13절 말씀은 그리 자세히 살펴보아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13절 개역한글 우리말 성경을 좀 간단하게 줄인다면 “이것은 사람이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다.”라는 이 말씀 속에 얼마나 큰 하나님의 고통이 들어있는지에 대하여는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반하였을 때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시고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고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 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가슴을 찢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피로 하나님의 자녀를 낳으시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말을 하는 인간이나 말 못 하는 짐승이거나간에 자신에게 닥친 극심한 고통을 피하거나 줄일 재주는 없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왜 모든 동물들이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는 방향으로 진화해오지 않았는지 그 모순성을 설명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고통 없이 탄생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어머니의 산고(産苦)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고 부모님의 수고와 희생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1969년에 제이거와 에반스(Zager and Evans)가 부른 유명한 노래 “서기 2525년(In the Year 2525)”에는 먼 미래에 인류는 출산의 고통 없이 기다란 유리관 아래에서 아들과 딸을 집어서 데려올 것이라는 가사가 들어있는데, 글쎄요, 고통 없이 공장에서 시험관으로 만들어 집어온다면 그 자녀가 과연 소중하고 사랑스러울까요? 우리 인간 뿐 아니라 모든 동물의 자식을 사랑하는 눈물겨운 모성애는 잉태와 출산의 고통을 통하여 형성되고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크게 더 하신 잉태의 고통도 다시 생각해보면 징벌이나 저주가 아니라 어머니와 그 낳은 자식 사이를 목숨 같은 사랑으로 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작 더 큰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여자의 후손, 곧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서 끊어내어 십자가에 내어 주셔야 할 하나님의 고통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미리 막지 못 하셨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섭리, 아담과 하와의 배반과 이로 인한 잉태의 고통과 가슴을 찢고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는 하나님의 더욱 극심한 고통과 떠나고 잃어버렸던 죄인들의 회개와 돌아옴은 인류의 재창조(再創造),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의 창조과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흙을 빚어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만들어져 아무런 고통 없이 에덴동산에서 평안한 삶을 사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과연 얼마나 큰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배반과 잃음, 사랑과 증오, 희생과 고통, 눈물과 피흘림, 그 숱한 사연과 곡절을 통하여 마침내 잃어버렸던 자식, 죽었던 자식을 다시 되찾아 얻은 기쁨, 울면서 돌아와 그 품에 안기는 사랑과 감사와 감격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위하여 그 고통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눈물로 찬송합니다. 가슴을 찢어 그 참혹한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잃어버렸던 나, 죽었던 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그 고통을 당하시며 나를 낳으신 하나님, 이제 목숨보다도 더욱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영원히, 영원히 송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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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장 12절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13절 말씀은 그리 자세히 살펴보아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13절 개역한글 우리말 성경을 좀 간단하게 줄인다면 “이것은 사람이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다.”라는 이 말씀 속에 얼마나 큰 하나님의 고통이 들어있는지에 대하여는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반하였을 때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시고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고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 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가슴을 찢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피로 하나님의 자녀를 낳으시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말을 하는 인간이나 말 못 하는 짐승이거나간에 자신에게 닥친 극심한 고통을 피하거나 줄일 재주는 없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왜 모든 동물들이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는 방향으로 진화해오지 않았는지 그 모순성을 설명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고통 없이 탄생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어머니의 산고(産苦)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고 부모님의 수고와 희생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1969년에 제이거와 에반스(Zager and Evans)가 부른 유명한 노래 “서기 2525년(In the Year 2525)”에는 먼 미래에 인류는 출산의 고통 없이 기다란 유리관 아래에서 아들과 딸을 집어서 데려올 것이라는 가사가 들어있는데, 글쎄요, 고통 없이 공장에서 시험관으로 만들어 집어온다면 그 자녀가 과연 소중하고 사랑스러울까요? 우리 인간 뿐 아니라 모든 동물의 자식을 사랑하는 눈물겨운 모성애는 잉태와 출산의 고통을 통하여 형성되고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크게 더 하신 잉태의 고통도 다시 생각해보면 징벌이나 저주가 아니라 어머니와 그 낳은 자식 사이를 목숨 같은 사랑으로 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작 더 큰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여자의 후손, 곧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서 끊어내어 십자가에 내어 주셔야 할 하나님의 고통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미리 막지 못 하셨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섭리, 아담과 하와의 배반과 이로 인한 잉태의 고통과 가슴을 찢고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는 하나님의 더욱 극심한 고통과 떠나고 잃어버렸던 죄인들의 회개와 돌아옴은 인류의 재창조(再創造),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의 창조과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흙을 빚어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만들어져 아무런 고통 없이 에덴동산에서 평안한 삶을 사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과연 얼마나 큰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배반과 잃음, 사랑과 증오, 희생과 고통, 눈물과 피흘림, 그 숱한 사연과 곡절을 통하여 마침내 잃어버렸던 자식, 죽었던 자식을 다시 되찾아 얻은 기쁨, 울면서 돌아와 그 품에 안기는 사랑과 감사와 감격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위하여 그 고통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눈물로 찬송합니다. 가슴을 찢어 그 참혹한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잃어버렸던 나, 죽었던 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그 고통을 당하시며 나를 낳으신 하나님, 이제 목숨보다도 더욱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영원히, 영원히 송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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