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7. 하나님이 찾아오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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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ㆍ2024-11-1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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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하나님이 찾아오신 이유
(욥기 42:4-6)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 욥에게 나타나셔서 욥의 죄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욥의 죄라니, 무슨 죄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 한 죄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타나지 아니하셨다면 욥과 친구들의 논쟁은 어떻게 결말이 났을 것 같습니까? 옳고 바른 결론에 도달하였을 것 같습니까?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토론과 논쟁이 아무리 계속된다 해도 결코 옳은 결론과 진리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토론은 다람쥐 쳇바퀴같이 돌고 또 돌았을 것이며 기껏해야 ‘세 친구들보다는 욥이 더 옳다, 엘리후도 훌륭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무지 모르겠다.’ 같은 정도로 끝나지 않았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높은 곳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 죄인이 다가갈 수 없는 영광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고난 중에, 절망 중에, 죽음의 고통 가운데 있는 욥에게, 또 의문과 혼란 가운데 있는 친구들에게 오신 이유가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가 누구냐?‘ 하고 따지시려는 것이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아니 오셨다면, 세 친구, 엘리후까지 네 친구의 논쟁이 헛바퀴만 돌다가 거기서 끝났다면 욥기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길고 긴 토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보지도 못 했으면서 나름대로의 지식과 주장을 가지고 함부로 떠벌린 결과가 되었을 것이고,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 무지, 착각은 여전히 남았을 것이고, 곧 죄로 남았을 것입니다. 욥을 포함하여 그들은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 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롬 3:23).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인은 누구나 그 죄 가운데서 죽을 것입니다(요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욥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는 그렇게 끝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욥을 구원하기 위하여 욥에게 하나님을 알려야 했고 그래서 반드시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폭풍 가운데서 말씀으로 욥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 인간의 모든 문제는 반드시 하나님이 오셔야, 하나님을 만나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욥기는 단순히 고난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다만 욥과 친구들의 토론에 관한 책도 아닙니다. 욥기는 바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인간은 스스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과 그러한 절망적인 죄인을 구원하려고 폭풍을 뚫고 찾아오신 하나님’ 곧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책인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된 것처럼 아, 우리에게 주님, 곧 성자 하나님이 폭풍우, 아니 그 참혹한 십자가로 오셔서 만나고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욥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 ‘알지도 못 하면서 안다고 떠든 자’가 바로 욥 자신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깨닫지도 못 했으면서 깨달은 듯 말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죄, 곧 하나님을 몰랐던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엎드려 여쭐 때 하나님이 말씀으로 알게 해 주셔야, 계시로 보여주셔야, 하나님을 만나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귀로 듣고 배운 지식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 한 것, 그것이 죄입니다. 그 죄는 경외와 경건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욥이 아무리 동방에서 가장 경건하고 정직하며 자식들이 혹시 범했을지 모르는 죄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고 빈천한 사람들을 돕고 구제하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끌고 칭송을 받았다 할지라도 해결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직 그 죄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만나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야다”, 곧 아는 관계, 친분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나고 보고 만지고 사귀지 아니하고는 알 수 없는 그런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그렇게 알지 못 했던 것, 귀로 들은 지식으로 아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것이었고 죄였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한하며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 우리도 예수님을 알게 된 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던 때, 예수님을 알지 못 한 채 무지하고 교만하여 세상 가운데 장님처럼 살면서 멸망길을 가던 지난날을 한하며 회개하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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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2:4-6)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 욥에게 나타나셔서 욥의 죄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욥의 죄라니, 무슨 죄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 한 죄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타나지 아니하셨다면 욥과 친구들의 논쟁은 어떻게 결말이 났을 것 같습니까? 옳고 바른 결론에 도달하였을 것 같습니까?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토론과 논쟁이 아무리 계속된다 해도 결코 옳은 결론과 진리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토론은 다람쥐 쳇바퀴같이 돌고 또 돌았을 것이며 기껏해야 ‘세 친구들보다는 욥이 더 옳다, 엘리후도 훌륭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무지 모르겠다.’ 같은 정도로 끝나지 않았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높은 곳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 죄인이 다가갈 수 없는 영광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고난 중에, 절망 중에, 죽음의 고통 가운데 있는 욥에게, 또 의문과 혼란 가운데 있는 친구들에게 오신 이유가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가 누구냐?‘ 하고 따지시려는 것이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아니 오셨다면, 세 친구, 엘리후까지 네 친구의 논쟁이 헛바퀴만 돌다가 거기서 끝났다면 욥기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길고 긴 토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보지도 못 했으면서 나름대로의 지식과 주장을 가지고 함부로 떠벌린 결과가 되었을 것이고,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 무지, 착각은 여전히 남았을 것이고, 곧 죄로 남았을 것입니다. 욥을 포함하여 그들은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 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롬 3:23).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인은 누구나 그 죄 가운데서 죽을 것입니다(요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욥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는 그렇게 끝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욥을 구원하기 위하여 욥에게 하나님을 알려야 했고 그래서 반드시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폭풍 가운데서 말씀으로 욥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 인간의 모든 문제는 반드시 하나님이 오셔야, 하나님을 만나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욥기는 단순히 고난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다만 욥과 친구들의 토론에 관한 책도 아닙니다. 욥기는 바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인간은 스스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과 그러한 절망적인 죄인을 구원하려고 폭풍을 뚫고 찾아오신 하나님’ 곧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책인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된 것처럼 아, 우리에게 주님, 곧 성자 하나님이 폭풍우, 아니 그 참혹한 십자가로 오셔서 만나고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욥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 ‘알지도 못 하면서 안다고 떠든 자’가 바로 욥 자신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깨닫지도 못 했으면서 깨달은 듯 말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죄, 곧 하나님을 몰랐던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엎드려 여쭐 때 하나님이 말씀으로 알게 해 주셔야, 계시로 보여주셔야, 하나님을 만나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귀로 듣고 배운 지식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 한 것, 그것이 죄입니다. 그 죄는 경외와 경건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욥이 아무리 동방에서 가장 경건하고 정직하며 자식들이 혹시 범했을지 모르는 죄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고 빈천한 사람들을 돕고 구제하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끌고 칭송을 받았다 할지라도 해결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직 그 죄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만나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야다”, 곧 아는 관계, 친분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나고 보고 만지고 사귀지 아니하고는 알 수 없는 그런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그렇게 알지 못 했던 것, 귀로 들은 지식으로 아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것이었고 죄였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한하며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 우리도 예수님을 알게 된 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던 때, 예수님을 알지 못 한 채 무지하고 교만하여 세상 가운데 장님처럼 살면서 멸망길을 가던 지난날을 한하며 회개하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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