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4. 하나님 앞에서 분노라니
페이지 정보
대장쟁이ㆍ2024-11-12관련링크
본문
14. 하나님 앞에서 분노라니
(욥 36:18-19)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찌니라. 너의 부르짖음이나 너의 세력이 어찌 능히 너의 곤고한 가운데서 너로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난 시간에 살펴본 엘리후의 지적은 그것이었습니다. 말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라 하면서 욥은 자기 의를 의지하고 그것을 움켜쥐었다는 것입니다.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한 것, 하나님이 욥의 의를 인정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요구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 교만이요 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악, 인간의 의는 하나님께 아무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36장에서 엘리후는 계속 말합니다. “나를 잠간 용납하라. 내가 네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내가 먼데서 지식을 취하고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진실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지식이 구비한 자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거만하고 건방진 것 같기도 한 엘리후의 이 말은 영적비밀, 복음의 비밀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함일까요?
엘리후는 17절부터 다시 욥에게 직격탄을 날립니다.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공의가 너를 잡았나니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찌니라.” 욥이 바로 악인이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에게 심판과 공의가 내렸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를 달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욥이 분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이는 어떤 큰 대속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큰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행하시는 엄위하신 일들을 말합니다. 폭풍우와 파도와 지진이 땅을 뒤흔든다 해도 땅이 잠잠하고 고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순종하는 것처럼 너는 고요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분격(분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조물의 본분이요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본 인터넷 신문 기사 한 토막입니다. “건강음식-화를 다스리는 것이 장수의 첫걸음. 무엇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해왔을까. 바로 노여움과 분노다. 분노로 몸을 가득 채우는지, 도전으로 승화시키는지에 따라 수명이 결정된다. 노여움은 분한 감정에서 유발되고 이는 분노로 파생된다. 쓸데없는 노여움은 자기 명줄을 끊는 칼이 되고 칼날 선 분노는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부메랑이 되어 명을 단축한다. 이것들이 자신의 몸 안에 암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즉 마음에 노여움을 품어 그것이 쌓이면 스스로 독이 되는 것. 분함을 품지 않고 노여움을 없애는 것이 즐겁고 유쾌하게 장수하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사람들도 분노하는 것, 화내는 것이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욱-’ 하는 성격, 순간적인 분노폭발이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분노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파괴하고 비극을 초래합니다. 분노는 외부로의 다툼과 공격, 폭력으로 이어지고 외부로 분출되지 못 하면 자신의 내면을 파괴하는 자해로 나타나게 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분노를 다스리라고 권하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욥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기의 의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빼앗아 가셨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분노였던 것입니다. 욥이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죄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엘리후가 지적한 것입니다. 결국 욥의 이 분노는 완전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불만이라는 것을 욥 자신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확신한다면,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반드시 선한 뜻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러한 분노는 잘못일 것입니다. 죄 없으시면서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전혀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아버지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기를 통하여, 엘리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는 나를 믿고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느냐?” 수많은 고난당하는 자들과 순교자들을 향하여, 또 그들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들아, 너희는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주 안에 있는 자에게 분노란 당치 않습니다. 분노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고난이 닥치고 어떠한 일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믿음, 이것이 진정 깊은 신앙이며 참 된 경건일 것입니다.
.
(욥 36:18-19)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찌니라. 너의 부르짖음이나 너의 세력이 어찌 능히 너의 곤고한 가운데서 너로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난 시간에 살펴본 엘리후의 지적은 그것이었습니다. 말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라 하면서 욥은 자기 의를 의지하고 그것을 움켜쥐었다는 것입니다.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한 것, 하나님이 욥의 의를 인정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요구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 교만이요 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악, 인간의 의는 하나님께 아무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36장에서 엘리후는 계속 말합니다. “나를 잠간 용납하라. 내가 네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내가 먼데서 지식을 취하고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진실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지식이 구비한 자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거만하고 건방진 것 같기도 한 엘리후의 이 말은 영적비밀, 복음의 비밀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함일까요?
엘리후는 17절부터 다시 욥에게 직격탄을 날립니다.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공의가 너를 잡았나니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찌니라.” 욥이 바로 악인이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에게 심판과 공의가 내렸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를 달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욥이 분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이는 어떤 큰 대속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큰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행하시는 엄위하신 일들을 말합니다. 폭풍우와 파도와 지진이 땅을 뒤흔든다 해도 땅이 잠잠하고 고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순종하는 것처럼 너는 고요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분격(분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조물의 본분이요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본 인터넷 신문 기사 한 토막입니다. “건강음식-화를 다스리는 것이 장수의 첫걸음. 무엇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해왔을까. 바로 노여움과 분노다. 분노로 몸을 가득 채우는지, 도전으로 승화시키는지에 따라 수명이 결정된다. 노여움은 분한 감정에서 유발되고 이는 분노로 파생된다. 쓸데없는 노여움은 자기 명줄을 끊는 칼이 되고 칼날 선 분노는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부메랑이 되어 명을 단축한다. 이것들이 자신의 몸 안에 암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즉 마음에 노여움을 품어 그것이 쌓이면 스스로 독이 되는 것. 분함을 품지 않고 노여움을 없애는 것이 즐겁고 유쾌하게 장수하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사람들도 분노하는 것, 화내는 것이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욱-’ 하는 성격, 순간적인 분노폭발이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분노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파괴하고 비극을 초래합니다. 분노는 외부로의 다툼과 공격, 폭력으로 이어지고 외부로 분출되지 못 하면 자신의 내면을 파괴하는 자해로 나타나게 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분노를 다스리라고 권하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욥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기의 의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빼앗아 가셨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분노였던 것입니다. 욥이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죄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엘리후가 지적한 것입니다. 결국 욥의 이 분노는 완전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불만이라는 것을 욥 자신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확신한다면,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반드시 선한 뜻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러한 분노는 잘못일 것입니다. 죄 없으시면서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전혀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아버지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기를 통하여, 엘리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는 나를 믿고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느냐?” 수많은 고난당하는 자들과 순교자들을 향하여, 또 그들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들아, 너희는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주 안에 있는 자에게 분노란 당치 않습니다. 분노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고난이 닥치고 어떠한 일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믿음, 이것이 진정 깊은 신앙이며 참 된 경건일 것입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