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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페이지 정보

대장쟁이2024-11-05

본문

욥기 23: 8-10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이런 것을 ‘자기 의’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믿음과 소신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하고 남을 억울하게 만드는 것 말입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은 지금 자신들의 하나님께 대한 굳센 믿음과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욥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을 ‘자기 의’라 할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절대로 부당하고 그릇된 일을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은 욥이 틀림없이 악한 자이기 때문이다."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을 옹호하고 변론하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요 영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자기 의’로 친구인 욥을 억울하게 만들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노하시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다시 나서서 욥을 비판하는데 아예 욥을 악한 인간으로 단정해 버립니다. “(네가)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갈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가 거기서 사는구나.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이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며 어두움이 너로 보지 못하게 하고 창수가 너를 덮느니라.(욥기 22: 6-11)” 그리고 욥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말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 옳은 말이 옳지 않은 것은 친구인 욥을 악인으로 단정해놓고 억울하게 하고 원통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그런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으면서 틀림없이 욥이 그런 악행을 했으므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것이라고 단정해놓고 욥을 짓밟다시피 정죄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라도 되는 양 말입니다. 친구들이 이제 더 이상 친구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친구에게 위로는커녕 가시와 바늘 같이 찌르는 고통과 숯불과 더럽고 낯 뜨겁고 수치스러운 오물 구덩이에 떼밀어 넣는 것 같은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욥이 하소할 곳은 단 하나, 하나님뿐입니다. 아무리 당하는 고난이 억울하고 이해할 수가 없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그의 손)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욥의 탄식이 눈물겹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분이 없고 다른 길이 없습니다. 고난이 더 하면 더 할수록, 억울함이 더 하면 더 할수록 오직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며, 오직 참 친구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굳게 의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욥은 말합니다.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욥23:6-7)”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어 쫓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십니다.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억울함과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탄식합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23:8-10)” 그 하나님이 아니 보이고 만날 수 없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영이십니다(요 4:24). 하나님은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딤전 6:16)이십니다. 

그러나 욥은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은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욥을 보고 계시며 욥을 아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단련작업일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은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단련은 고난이지만 고난이라고 해서 모두 단련은 아닙니다. 단련은 그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당하면서 고난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며 그 하나님을 찾아 싸우는 믿음의 싸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믿음의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 싸움, 그 단련이 끝나는 곳에 마침내 정금같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금같이 되는 것은 단순히 고난이나 연단을 당함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그 속에 있는 정금이 연단에 의하여, 믿음에 의하여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연단을 허락하신 것은 그 속에 믿음, 아니 정금이 들어 있음을 이미 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 나의 속에도 그 정금이 있기 원합니다. 아니 있음을 믿습니다. 아, 그러나 고난은 싫네요. 고난 없이도 나의 정금이 하나님 앞에 찬양으로 곱게 드러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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