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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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태복음 19:21]
주님께서 부자이자 관원인 청년에게 하신 말씀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줌이, 하늘에 보화를 두는,
그러나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은
주님의 비유의 말씀을 문자대로 해석하여
주님의 말씀을 비틀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소유를 나누어 주라는 말을 제외하고
교회에 헌금을 하는 방법이 하늘나라에서 보화를 간직하는 수단이라 가르쳤고
아직도 이렇게 가르치는 자들이 허다하다.
천국에 보화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천국이 아니라 세상일 진데,
주님은 청년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신 말씀도 아니며,
또 십일조와 온갖 율법의 세세한 조항을 지킨 이 청년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십일조를 행함을 주님은 올바르게 보시지도 않으셨고
청년에게 말씀하신 ‘보화’ 는 문자 그대로 ‘보화’ 가 아니라
청년이 원하는 영생을 얻는 방법이라
영생을 얻는 자의 도리라,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주님을 닮아가는 길을 제시하셨다.
다시 보면 주님은 청년에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다 지켰다 했지만
주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온전하고자 한다면, 영생을 얻는 온전한 길은
율법의 계명을 다 지킴이 영생의 보장이 아니라 하셨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인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등
모든 비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천국은 마치...” 와 같이, 모든 비유도 마찬 가지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여기서 ‘자기의 소유’ 란
청년에게 말씀하신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와 같은 의미라
주님은 ‘새 계명’ 인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같은 말씀이며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같다는 말씀이라
율법의 완성은 ‘사랑’ 이라
주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 하신 말씀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린 외식이라
십일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의를 말씀하셨고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더 중한 바, 율법의 의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 을 버린 것은
십일조의 근본의를 버린 것을 말씀하시면서 십일조를 하라는 차원을 넘어선 말씀이라
청년에게 하신 말씀과 천국의 비유는 모두가 십일조 이상을 말씀하셨음은
십일조는 단지 소득의 10분의 1의 수자적인 분량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개념이면서
하나님의 의를 행함이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미 율법의 의이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라,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탐욕에 물들어
십일조의 정당성을 말하면서 더 많은 종류의 헌금과 충성을 강요함은
또 다른 외식이다.
십일조,
소출의 10분의1을 바치는 율법의 규정으로 그 기원은 족장 시대에 두고 있었는데
모세의 계명에서 법제화 되었고 이 십일조의 근본 취지는
자신의 소유에 대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웃 사랑(구제) 및 성전의 운영이었으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발적인 사랑의 예물이 아닌 강제적 의무 규정으로 고착화 시켜 이것을 율법 지킴의 규범으로 삼았고,
주님께서 십일조의 ‘정의와 긍휼과 믿음’ 버렸다 하신 뜻은
율법의 의가 사라진 형식적인 규범이 되어 껍데기만 남은 종교화 한 외식을 탓하셨음은
그런 종교 의식적인 타락을 주님은 조금도 용납하시지 않으셨고
그런 의식화 한 종교적인 선(善)은 하나님의 의(義)를, 인(仁)을, 신(信)을
악용하였기 때문이다.
의(義),
옮음(right) 와 정의(justice) 로 의(righteousness)로
하나님의 의(義)인 공의인 정의와 공평, 공정하심으로 재판, 판단의 의미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선을 따름이라,
인간관계의 근본이 된 올바름이라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신명기 16:19-20]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는 일이 선행이며 정의를 구하는 일이라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1:17]
장차 종말적 심판의 의미 한다 할 수 있다.
인(仁),
자비(mercy)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대하는 사랑으로, 선하시고 인자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베풀음을
의미 한다 할 수 있다.
신(信)
신뢰, 신용, 약속, 증거, 보증, 확신 등 믿음을 뜻하며
신뢰라 함은 하나님의 신뢰는 이웃에 대한 신뢰로 타나 남음,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현제 나를 보고 계시다는 믿음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믿음으로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함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진실함이 믿음이라
하나님을 사랑함이 이웃을 사랑함이라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시편 15:3-4]
주님은 이를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의(義)의 개념은
십일조에 녹아 있는 율법의 의 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웃의 관계라
그리스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믿음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함이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같이 형식화 한, 단지 십분의 일이라는 십일조의 차원이 아니라
모든 소유와 생명까지도 하나님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청년에게 “온전하고자 할진데” 하신 말씀은
율법을 지키고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고 죄가 없다는 의미도 아니라
영생의 길을 알고자 하느냐, 구원의 받고자 하느냐, 로
청년이 받고자 하는 ‘영생’ 에 이르는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상태는
절대적인 자기 부인과 그리스도 주님을 따르는 순종이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줌이 율법에 벗어난 것 같으나
주님은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온전히 섬길 수 없음을 아시기에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 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됨으로 하나님과 멀어져서
하나님의 의에 반하기에, 땅에서의 욕심은 하나님 나라의 관심이 적어지게 되기에
주님은 진정한 영생의 삶을 땅에서도 누릴 수 있기를 바라셨기에
주님은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름은 자기 자신의 포기라
거듭남이라, 제자의 길이라
주님은
누구든지, 주님을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2]
청년은 재산이 많으므로 세상에서 풍요한 삶을 설계하며 풍족하게 살기를 원했고
영생을 얻기도 원했지만 결국은 다 얻지 못함을 알고 근심하여 주님을 떠나감이라
보이는 세상의 소망을 따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했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라는 영원한 관점에서 볼 때는 재물 등은
상대적인 가치에 불과한 것들이라 자기 자신이 절대화 한 것은
복음을 가로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
십일조로 세분화한 율법을 지킴이 선이라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이
청년은 외식하는 자 이었으리라.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청년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떠났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가복음 10:22]
부자는 구약의 전통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복이라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준 사건을 보면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기 42:10]
하나님은 이전 소유의 갑절이나 주셨고
잠언은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며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 잠언 18:11]
높은 성벽 같이 여겼다 했고,
청년은 재물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했으며, 영생 까지도 원했지만
재물을 포기할 수 없어서 주님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근심하면서 갈등하였기에
슬픈 기색을 띠며 돌아갔음은
또 다시 영생을 얻지 못하는 형식적인 율법 준수의 길로 가
복음의 길을 포기 했고,
주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복음의 길을 포기하고
선(善)이라 주장하면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가는 외식하는 자들과
이들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종교적인 선(善)으로 보고, 착각으로 잘못 보는 착시(錯視)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음을 말씀하시며,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었던 물음과 같이
주님을 따른다는 자들에게 오늘도 똑같이 성령님을 통하여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하였고
고백에 따른 삶을 살았는데,
거짓 선생들이 말하는 십일조 랴,
이런 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은 자들이랴,
종이라 하면서 상전(上典)이 되었고
종의 종이 된 자들이 망령되이 부르는 그리스도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태복음 19:21]
주님께서 부자이자 관원인 청년에게 하신 말씀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줌이, 하늘에 보화를 두는,
그러나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은
주님의 비유의 말씀을 문자대로 해석하여
주님의 말씀을 비틀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소유를 나누어 주라는 말을 제외하고
교회에 헌금을 하는 방법이 하늘나라에서 보화를 간직하는 수단이라 가르쳤고
아직도 이렇게 가르치는 자들이 허다하다.
천국에 보화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천국이 아니라 세상일 진데,
주님은 청년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신 말씀도 아니며,
또 십일조와 온갖 율법의 세세한 조항을 지킨 이 청년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십일조를 행함을 주님은 올바르게 보시지도 않으셨고
청년에게 말씀하신 ‘보화’ 는 문자 그대로 ‘보화’ 가 아니라
청년이 원하는 영생을 얻는 방법이라
영생을 얻는 자의 도리라,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주님을 닮아가는 길을 제시하셨다.
다시 보면 주님은 청년에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다 지켰다 했지만
주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온전하고자 한다면, 영생을 얻는 온전한 길은
율법의 계명을 다 지킴이 영생의 보장이 아니라 하셨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인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등
모든 비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천국은 마치...” 와 같이, 모든 비유도 마찬 가지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여기서 ‘자기의 소유’ 란
청년에게 말씀하신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와 같은 의미라
주님은 ‘새 계명’ 인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같은 말씀이며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같다는 말씀이라
율법의 완성은 ‘사랑’ 이라
주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 하신 말씀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린 외식이라
십일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의를 말씀하셨고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더 중한 바, 율법의 의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 을 버린 것은
십일조의 근본의를 버린 것을 말씀하시면서 십일조를 하라는 차원을 넘어선 말씀이라
청년에게 하신 말씀과 천국의 비유는 모두가 십일조 이상을 말씀하셨음은
십일조는 단지 소득의 10분의 1의 수자적인 분량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개념이면서
하나님의 의를 행함이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미 율법의 의이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라,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탐욕에 물들어
십일조의 정당성을 말하면서 더 많은 종류의 헌금과 충성을 강요함은
또 다른 외식이다.
십일조,
소출의 10분의1을 바치는 율법의 규정으로 그 기원은 족장 시대에 두고 있었는데
모세의 계명에서 법제화 되었고 이 십일조의 근본 취지는
자신의 소유에 대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웃 사랑(구제) 및 성전의 운영이었으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발적인 사랑의 예물이 아닌 강제적 의무 규정으로 고착화 시켜 이것을 율법 지킴의 규범으로 삼았고,
주님께서 십일조의 ‘정의와 긍휼과 믿음’ 버렸다 하신 뜻은
율법의 의가 사라진 형식적인 규범이 되어 껍데기만 남은 종교화 한 외식을 탓하셨음은
그런 종교 의식적인 타락을 주님은 조금도 용납하시지 않으셨고
그런 의식화 한 종교적인 선(善)은 하나님의 의(義)를, 인(仁)을, 신(信)을
악용하였기 때문이다.
의(義),
옮음(right) 와 정의(justice) 로 의(righteousness)로
하나님의 의(義)인 공의인 정의와 공평, 공정하심으로 재판, 판단의 의미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선을 따름이라,
인간관계의 근본이 된 올바름이라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신명기 16:19-20]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는 일이 선행이며 정의를 구하는 일이라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1:17]
장차 종말적 심판의 의미 한다 할 수 있다.
인(仁),
자비(mercy)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대하는 사랑으로, 선하시고 인자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베풀음을
의미 한다 할 수 있다.
신(信)
신뢰, 신용, 약속, 증거, 보증, 확신 등 믿음을 뜻하며
신뢰라 함은 하나님의 신뢰는 이웃에 대한 신뢰로 타나 남음,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현제 나를 보고 계시다는 믿음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믿음으로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함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진실함이 믿음이라
하나님을 사랑함이 이웃을 사랑함이라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시편 15:3-4]
주님은 이를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의(義)의 개념은
십일조에 녹아 있는 율법의 의 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웃의 관계라
그리스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믿음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함이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같이 형식화 한, 단지 십분의 일이라는 십일조의 차원이 아니라
모든 소유와 생명까지도 하나님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청년에게 “온전하고자 할진데” 하신 말씀은
율법을 지키고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고 죄가 없다는 의미도 아니라
영생의 길을 알고자 하느냐, 구원의 받고자 하느냐, 로
청년이 받고자 하는 ‘영생’ 에 이르는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상태는
절대적인 자기 부인과 그리스도 주님을 따르는 순종이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줌이 율법에 벗어난 것 같으나
주님은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온전히 섬길 수 없음을 아시기에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 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됨으로 하나님과 멀어져서
하나님의 의에 반하기에, 땅에서의 욕심은 하나님 나라의 관심이 적어지게 되기에
주님은 진정한 영생의 삶을 땅에서도 누릴 수 있기를 바라셨기에
주님은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름은 자기 자신의 포기라
거듭남이라, 제자의 길이라
주님은
누구든지, 주님을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2]
청년은 재산이 많으므로 세상에서 풍요한 삶을 설계하며 풍족하게 살기를 원했고
영생을 얻기도 원했지만 결국은 다 얻지 못함을 알고 근심하여 주님을 떠나감이라
보이는 세상의 소망을 따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했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라는 영원한 관점에서 볼 때는 재물 등은
상대적인 가치에 불과한 것들이라 자기 자신이 절대화 한 것은
복음을 가로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
십일조로 세분화한 율법을 지킴이 선이라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이
청년은 외식하는 자 이었으리라.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청년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떠났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가복음 10:22]
부자는 구약의 전통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복이라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준 사건을 보면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기 42:10]
하나님은 이전 소유의 갑절이나 주셨고
잠언은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며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 잠언 18:11]
높은 성벽 같이 여겼다 했고,
청년은 재물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했으며, 영생 까지도 원했지만
재물을 포기할 수 없어서 주님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근심하면서 갈등하였기에
슬픈 기색을 띠며 돌아갔음은
또 다시 영생을 얻지 못하는 형식적인 율법 준수의 길로 가
복음의 길을 포기 했고,
주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복음의 길을 포기하고
선(善)이라 주장하면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가는 외식하는 자들과
이들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종교적인 선(善)으로 보고, 착각으로 잘못 보는 착시(錯視)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음을 말씀하시며,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었던 물음과 같이
주님을 따른다는 자들에게 오늘도 똑같이 성령님을 통하여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하였고
고백에 따른 삶을 살았는데,
거짓 선생들이 말하는 십일조 랴,
이런 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은 자들이랴,
종이라 하면서 상전(上典)이 되었고
종의 종이 된 자들이 망령되이 부르는 그리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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