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엘리트, 문화적 영향력인가 세속적 타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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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2ㆍ 2025-06-0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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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약] 미국 복음주의계는 문화적 영향력을 위해 엘리트 양성에 힘썼으나, 이들이 오히려 신념을 타협하는 '엘리트 스캔들'이 대두되고 있다. 프랜시스 콜린스, N.T. 라이트와 같은 저명인사들의 사례는 복음주의계의 오랜 열등감과 교회의 영적 훈련 부재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세상의 인정보다 진리 증거를 우선하는 새로운 리더 양성이 시급하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는 한결같은 목소리가 있었다. 학계, 예술계, 정부, 언론, 과학, 비즈니스 등 사회의 정상에 더 많은 복음주의 엘리트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문화의 중심에서 물러난다면 국가의 도덕적 상상력을 형성할 기회를 잃게 되며, 지적으로나 직업적으로 경쟁력 있는 리더를 키우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편협한 것으로 비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러한 생각에는 분명 지혜로운 부분이 있다. 문화 속에서의 존재감은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이 좋은 책을 쓰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며,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또한 공적 영역을 형성하는 기관들 안에서 제자리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복음주의자들이 종종 지성을 외면하거나 문화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는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의 증거들은 엘리트를 배출하는 것이 약속된 만병통치약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우리가 애써 배출한 엘리트들은 실망스러운 결과로 이어진 경우가 더 많았다.
타협으로 얼룩진 엘리트들
저명한 기독교 과학자이자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프랜시스 콜린스 국립보건원(NIH) 전 원장의 사례를 보자. 그는 복음주의자가 세속 권력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델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반대 의견을 소외시키고 자유로운 토론보다 이념적 순응을 선호했으며, 연구 및 공공 정책에 수반되는 도덕적 위험을 경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리더십은 기독교인이 엘리트 기관 안에서 구속적인 영향력을 미칠 가능성보다는, 권력에 동반되는 미묘한 부패를 더 명확히 드러냈다.
저명한 성서학자 N.T. 라이트 역시 한 세대의 복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그의 정치·문화적 논평은 종종 서구 지성계의 진보적 합의와 구별하기 어려운 소리를 냈다. 그는 미국 복음주의를 향해 노골적인 우월감을 드러내기도 했고, 최근에는 특정 상황에서 낙태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부활을 부인했던 그의 친구 마커스 보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무모한 발언도 더해졌다. 우리 시대에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변호하는 기념비적인 저서를 썼던 그가, 정작 부활을 부차적인 문제처럼 다루는 모습은 놀랍고 혼란스럽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며 엘리트의 지위에 오르는 목적이 과연 기독교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좌파주의와 세속주의라는 지배적인 정설에 순응하여 한 자리를 얻기 위함이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문제는 더 이상 1990년대 복음주의의 반지성주의를 진단했던 마크 놀의 유명한 문구,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 아니다. 오늘날 젊은 복음주의자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은 자격을 갖추고 문화적으로도 깨어 있다. 진짜 문제는 바로 ‘타협하는 엘리트들의 스캔들’이다.
무엇이 그들을 흔드는가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엘리트 기관에 접근한 후 용기를 잃어버리는 듯하다. 그들은 신념을 지키기보다 인정을 갈망하고, 권력에 가까워지는 것을 문화적 영향력과 혼동하다가 결국 자신이 영향을 받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세속 지성인들 사이에서의 좋은 평판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래되고 고질적인 ‘복음주의적 열등감’이 한몫한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오랫동안 주류 개신교와 세속 엘리트들의 눈치를 보며, 자신들을 시골뜨기나 촌뜨기로 보는 이들로부터 인정을 갈망해왔다. 이 불안감은 깊은 유혹을 낳는다.
젊은 복음주의자가 마침내 하버드에 입학하거나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쓰게 되면, ‘합리적이고’, ‘세련되며’, ‘미묘한 차이를 아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압박이 압도적으로 커진다. 확고했던 신념은 엘리트 세계의 암묵적 동의라는 산성비에 부식되기 시작한다.
또 다른 요인은 복음주의 공동체 자체의 실패다. 우리는 장차 엘리트가 될 이들에게 문화적 권력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며, 기독교적 신실함은 언제나 시대정신과 어느 정도 불화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훈련시키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중 누군가가 영향력을 얻으면 환호하지만, 그 영향력에 따르는 영적 위험을 견디는 데 필요한 신학적, 도덕적 형성을 제공하는 데는 소홀했다.
이는 결코 문화 참여로부터의 후퇴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 리더를 세우자는 요청이다. 즉, 찬사를 얻는 것보다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공적 영향력은 신분의 상징이 아니라 청지기적 사명임을 이해하는 리더 말이다.
우리에게는 문화의 엘리트 공간에 더 많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명철하고, 도덕적으로 용감하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꺼이 그리스도를 위해 어리석은 자로 여겨질 준비가 된, 올바른 종류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러한 지도자를 세우기 전까지, 타협하는 엘리트들의 스캔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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