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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박정희의 기록담은 영화 '하보우만의 약속’ 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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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3ㆍ2025-04-15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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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하보우만의 약속'이 4월 14일(월) 오후 4시 프라미스교회에서 시사회를 진행했다. 영화 제목 '하보우만'은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에서 유래되었다. 이 영화는 4월 15일(화) 프라미스교회에서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7시 세 차례 상영된다.827991592ad8b88a7281be73ae476da6_1744715176_0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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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문무일 사무총장은 시사회 사회를 보았다. 시사회에서는 정운찬 전 국무총리와 이장호 감독의 강연 및 인사, 김남수 목사의 인사, 영화상영, 김명옥 목사의 광고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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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일 사무총장의 영화 소개는 단순한 영화 설명을 넘어 대한민국 건국과 기적의 역사를 되새기는 선언 같았다. 그는 대한민국의 기적은 정치인이 아닌 바로 국민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그 기적을 선도한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이장호 감독의 50주년 작품이자 다큐멘터리 영화 <하보우만의 약속>은 두 지도자의 이야기를 꿰어내며 대한민국의 기적을 스크린에 담아냈다.

 

이승만과 박정희, 그 운명적 만남에 대하여

 

영화 '하보우만의 약속'은 이승만과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영화는 둘의 '운명적 만남'을 조명하며, 특히 이승만 전 대통령이 여러 차례 박 전 대통령의 위기를 막아주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과연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그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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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일 사무총장에 의하면, 두 사람의 첫 번째 인연은 1948년 여순 반란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남로당원으로 활동했던 박정희는 군사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배려로 사형을 면하고 군복을 벗는 선에서 마무리되어, 문관으로 근무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박정희의 인생에 있어 첫 번째 결정적인 고비를 이승만의 도움으로 넘긴 셈이다.

 

두 번째 인연은 6.25 전쟁 이후 찾아왔다고 이야기된다. 전쟁 중 탁월한 공적을 세운 박정희는 장군 진급 대상이 되었지만, 과거 남로당 활동 이력이 문제가 되었다. 군 내부에서는 당연히 반발이 있었지만, 이때도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이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지시 혹은 배려 덕분에 박정희는 무사히 별을 달고 군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역시 박정희에게는 큰 고비였을 것이다.

 

세 번째 결정적인 순간은 1956년에 발생했다. 시사회에서 문무일 사무총장이 언급한 내용과도 연결되는데, 당시 5사단장이었던 박정희의 부대에서 폭설로 인해 장병 59명(혹은 60여 명)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다. 군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인재(人災)'가 아닌 '천재(天災)'로 판단하며 박정희를 보호했다고 한다. 문 총장은 이 일이 있기 전 1955년 두 사람의 만남을 언급하며, 이 결정이 이승만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처럼 영화와 관련 증언들은 이승만이 박정희의 인생과 경력에 있어 결정적인 순간마다 도움을 준 은인과 같은 존재였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박정희가 이승만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는 기존의 일부 인식과는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역사의 평가는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두 거인 사이에 이러한 '운명적 만남'과 인연이 있었다는 해석은 그들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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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보우만의 약속'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내용

 

해방 직후,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였다. 북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체제를 정비하며 공산주의 노선을 확고히 했고, 남은 미군정 아래 체제 혼란과 좌우 충돌로 고통을 겪었다. 분단의 현실 앞에서 그는 단독 정부 수립을 외쳤고, 그것은 ‘정읍 발언’으로 역사에 남았다. 당시로선 무모한 선택처럼 보였지만, 그 판단이 대한민국 건국의 물꼬를 텄다.

 

남한의 사회 분위기는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사회주의 지지 여론은 77%에 달했고, 자유주의는 겨우 14%에 그쳤다. 이승만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외침과 함께 남한만의 정부 수립을 밀어붙였다.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는 계속 실패했고, 결국 이승만은 유엔을 설득해 한국 문제를 국제무대로 옮겼다. 유엔은 총선거를 결의했고, 대한민국이 세워질 길이 열렸다.

 

건국 직후 남한은 산업기반도 없고 군대도 부족한 나라였다. 북한은 압도적인 자원을 가지고 있었고, 남한은 농업 중심, 전력까지 북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향토 방위군은 죽창을 들고 다닐 정도로 열악했다. 6.25가 발발했을 때 국군은 무장도 안 된 상태였고, 전쟁 초기 서울은 쉽게 함락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고 맥아더 장군과의 협력을 통해 반격의 전기를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전세를 바꾸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까지 진격했다. 당시 평양 시민들의 환영 속에 남한과 북의 운명이 다시 교차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급격히 뒤바뀌었고, 흥남철수 당시 수많은 피난민들이 겨울 바다를 넘어 남한으로 탈출했다. 그들의 눈물 속에는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외쳤다. 그는 휴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공포로 2만7천 명을 전격 석방했다. 이 사건은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뜨렸고, 윈스턴 처칠도 면도기를 떨어뜨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다. 석방된 포로들 가운데는 조국을 위해 다시 싸운 이들도 있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자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다.

 

이승만은 교육을 국가의 책임으로 삼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도 배움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그는 문맹 퇴치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고, 공민학교와 무상교육 정책을 통해 1950년대 말 문맹률을 10% 이하로 낮췄다. 이는 국가 재정의 큰 부분을 투입한 '교육 혁명'이었다. 대한민국의 교육 기초는 이렇게 마련됐다.

 

그는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안보를 지켰다. 미국과 맺은 이 조약은 영국과 필리핀 다음으로 세 번째이며, 영구적 효력을 갖는 외교 걸작으로 평가된다. 미국의 식량 원조와 군사 협력은 한국의 자립 기반이 되었고,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경제성장의 길을 걷게 됐다. 자유와 안보의 두 기둥이 동시에 세워졌던 것이다.

 

하지만 정권 후반기 자유당 정권은 부정선거로 국민의 신뢰를 잃는다. 마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4.19로 번졌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당시 이승만을 반대하며 외쳤던 젊은이들조차 그가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닦은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하게 된다. 시대적 책임을 지고 하야한 그는 조용히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독재자라는 평가도 있지만,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건국 대통령으로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무게를 감당했다. 실패도 있었지만, 그의 유산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국가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토대였다. “하나님, 분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은 분단을 통한 자유의 선택, 그 고백이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단지 한 인물의 기록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를 다시 묻는 질문이다.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며 자유를 지켜낸 이승만의 길 위에서 오늘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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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보우만의 약속'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내용

 

1960년대 한국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이승만 정부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은 끊임없는 시위와 정치적 불안정으로 몸살을 앓았다. 학생부터 군인까지 거리로 나섰고, 북한은 이 틈을 타 연방제를 제안하며 남북 협상론이 고개를 들었다. 배고픔에 지친 국민들은 통일에 대한 낭만적 기대감을 품기도 했다.

 

이런 혼란 속에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사 혁명이 일어났다. 군사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내걸고 국가 재건을 외쳤다. 사회 질서 확립을 위해 부랑아 단속, 장발 단속 등을 시행했고, 식량 배급, 도시 정비, 국토 건설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다큐는 당시 사회 분위기 쇄신 노력을 비중 있게 다뤘다.

 

박정희 의장의 가장 큰 목표는 '민생고 해결'이었다. 다큐는 그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다고 전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전시회까지 열어 국민들에게 청사진을 제시했다. 틈만 나면 산업 현장을 직접 찾아 독려하는 그의 모습에서 맹자의 '하늘이 큰일을 맡기려는 자에게 시련을 준다'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고 영화는 설명했다.

 

1963년 군복을 벗은 박정희는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 선거에 도전, 윤보선 후보와 겨뤄 15만 표 차이의 박빙 승부를 거뒀다. 제5대 대통령이 된 그의 최우선 과제는 경제개발 계획의 성공이었다. 공업 입국, 수출 제일주의를 내세웠고, 1964년 마침내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같은 해 서독을 방문해 차관 도입에 성공하며 경제 발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미국과의 관계도 변화를 맞았다. 1965년 존슨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 차관 확보와 과학기술연구소(현 KAIST) 설립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베트남 파병 결정은 국내외적으로 큰 논란을 낳았다. 야당의 반대와 여당 내 이견에도 불구하고 파병은 강행됐고, 다큐는 파병의 대가로 얻은 군수물자 수출 등 경제적 이익, 즉 '베트남 특수'를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국가 발전을 위해 학자 그룹 '화요회'와 언론인 그룹 '목요회'를 운영하며 정책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영화는 소개한다. 화요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국민교육헌장'이다. 이는 당시 박 대통령이 꿈꿨던 근대화된 국민상과 국가의 미래 비전을 담은 핵심 철학으로 평가받는다.

 

1960년대 후반, 도시와 달리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농촌 현실에 충격을 받은 박 대통령은 농촌 근대화에 눈을 돌렸다.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의 조언을 바탕으로 '근면, 자조, 협동'을 3대 정신으로 하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됐다. 이는 단순한 지원을 넘어 농민 스스로 마을을 바꿔나가도록 독려하는 운동이었다.

 

정부는 시멘트, 철근 등 기초 자재만 지원하고 마을 간 경쟁을 유도했다. 초가 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마을 길이 넓어졌으며, 다리가 놓였다. 박 대통령은 직접 현장을 누비며 새마을 지도자들과 소통했고, 엄격한 관리로 부패를 막으려 했다. 70년대 중반에는 농촌 소득이 도시 근로자 소득을 앞지르기도 했으며, 이 운동은 훗날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며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육성을 선언했다.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지만, 국민투자기금을 조성하고 중동 건설 붐을 기회로 삼아 돌파구를 찾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역시 그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사업이었다. '국토 해체'라는 야당의 극심한 반대와 기술적 난관 속에서도 정주영 회장 등과 함께 밀어붙여 완공, 산업 발전의 대동맥을 마련했다.

 

수출 1억 달러 달성 6년 만에 10억 달러, 다시 7년 만에 100억 달러를 돌파하는 경이적인 성장을 이뤘다. 포니 자동차 신화, 조선소 없는 유조선 수주 등 기적 같은 일들이 현실이 됐다. 다큐는 이런 성과 뒤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과 '잘 살아보자'는 열망이 있었다고 평가하며, 그를 '게임 체인저'이자 '월드 클래스 지도자'로 묘사했다. CIA 또한 그를 카리스마 있고 통찰력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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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영화는 프란체스카 여사?

 

시사회에서 문무일 사무총장은 이장호 감독에게 다음 영화 아이디어로 '프란체스카'를 제안했다고 전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이지만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한국 여자’라고 고백했던 프란체스카 여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아내로서 한국을 사랑하고 헌신했던 퍼스트레이디의 삶을 조명하자는 제안이었다. 프란체스카는 단순한 외국인 아내가 아니라, 이승만과 함께 자유대한민국의 정신을 공유한 동역자였다.

 

영남 지역의 할머니들이 이화장을 찾아와 “보소 호주댁 나와 보소”라며 정을 나누는 장면은 그 시대 한국인들의 따뜻한 심성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진심 어린 한국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을 열며 “나 호주댁 아니야, 한국 여자야”라고 말한 프란체스카의 고백은 단순한 언어의 표현이 아니라 마음과 정체성의 증언이었다. 그의 행보는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살아가려 했던 귀한 헌신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해마다 국립현충원을 찾아 남편 이승만 대통령의 묘소를 찾았다. 오스트리아 남성이 ‘오스트리아에서 오셨죠?’라 묻자, 그녀는 “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한국 여자입니다”라고 응답했다. 이 말은 단순한 시민권을 넘어선 정체성의 고백이었고, 외국인으로 시작했지만 끝내 한국의 역사 한복판에 남은 퍼스트레이디의 마음이었다.

 

이 이야기가 다음 영화로 구현된다면 또 다른 관심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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