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주 교수 “김창길 목사의 시와 칼럼 모음집 <이제야 알았습니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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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2ㆍ2025-04-10 20:3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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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가요라는 넓은 음악 울타리 안에는 장르가 많다. 형형색색의 텐트촌과 같다. 팝, 록, 트로트, 발라드, 팝페라(팝과 오페라의 합성) 등이 자리한다.
나는 회고록 또 자서전을 즐겨 읽는 편이다. 역사 학도로서, 인물을 알아감이 역사 이해의 길이란 확신을 갖고 있다. 책을 읽고 나면 나는 그 책에 나름대로 장르를 설정하는 버릇이 있다. ‘독백’, ‘호소’, ‘기록’, 심지어 ‘왜곡’도 있다.
지은이가 독자들의 후담, 또는 흔히 말하는 ‘역사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내면과 지난날의 경험을 있었던 그대로 토로하는 내용의 책은 “독백”이란 장르에 넣는다. 지은이가 자신보다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환경과 사건들에 치중했다는 인상이 남으면 “기록”의 장르가 적합하다.
뉴저지 장로교회에서 30년 이상 목회를 하고 지금은 ‘개신교 수도원 수도회’에서 목회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김창길 목사의 시와 칼럼 모음집 “이제야 알았습니다(쿰란 출판사刊)”를 읽고 나는 이 책을 ‘겸손’이란 내가 만든 장르에 꽂았다.
1940년생인 저자는 196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59년 목사로 살았다. 그가 목회자의 삶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수, 또 경험했던 일들은 다 기억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산전수전, 공중전, 우주전, 사이버 전쟁까지 다 겪었을 저자가, “생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책”의 제목을 “이제야 알았습니다”로 했다.
“세수(世數)로 졸수(卒壽)가 멀지 않은 저자가 성직자들이 간직해야 하는 덕목의 하나로서 ‘겸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제목을 정했나?” 처음에 나는 책 표지를 보면서 조금 삐딱한 생각을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저자의 시와 칼럼들을 읽어 가면서 ‘겸손’의 장르에 꼭 넣어야 할 책이라 확신했다. 책의 제목이 내용을 정확히 묘사한다.
‘겸손’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을 낮추는 자세이다. 그러나 내가 “이제야 알았습니다”를 통해 만난 김창길 목사의 “겸손”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고, 은혜에 감사하며, 은혜에 합당한 삶의 길을 찾아 묵묵히 멈춤 없이 걸어왔다.
미국의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이 떠오른다. “A great man is always willing to be little”이라 했다. 위대한 사람은 항상 낮아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의역할 수 있다.
저자의 글과 생각이 그렇다. 굴지의 동포 교회를 성장시킨 동력이었던 목회자이지만, 그의 빛나는 사목 여정에 대해서 이 책은 침묵한다. 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지만, 신학과 관련된 고담준론(高談峻論)도 찾을 수 없다.
김창길 목사가 간직하고 있는 겸손의 원천은 “사람”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겸손은 “주 하나님 지으신” 자연 속에서 성숙해졌다. 그는 ‘어머니 나의 어머니’에서 고백한다. (저자의 어머니 안마리와 권사는 한국 전쟁 발발 2개월 뒤 납북된 남편 없이 아들 여섯을 장성시켰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있는 것 다 주시고도 더 줄 게 없는가 주춤하는
있는 것 다 주시고도 더 줄 게 없는가 하시는
매사 모자람과 아쉬움에 사시는
오늘 나눔과 희생을 실천하게 했습니다(어머니 나의 어머니)
팔순의 저자는 이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이가 된다. 전혀 부끄럽지 않다.
이제 오래전부터 제 옆에 계시지 않습니다
꿈에서라도
생각 중 기억나게라도
맘으로 진정 그리워하며
엄마
얼굴 한번 보고 싶어 불러 봅니다
어머니 음성 듣고 싶어 귀 기울입니다(엄마, 우리 어머니)
저자가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음성에는 다음도 있음을 저자는 고백한다.
“어머니는 아들이라도 목사를 존경하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셨다. 내가 설교할 때 어머님은 앞자리에 앉아서 귀를 기울이고 듣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 ‘아멘’ 하셨다. 설교가 끝난 다음에는 조용히 내게 와서 은혜받았다고 하셨다. 정말 잘한 설교가 아닌 것 같은데도 말이다.”(평생을 목사의 아내로, 목사의 어머니로)
저자의 삶에 기둥이 되어 준 또 하나 강한 존재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의 등불과 함께 그의 삶의 등대 역할을 했다. 서소문 교회를 세운 아버지 야성(野聲) 김동철 목사이다. 한국 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납북되어 순교했다. 언급한 대로 그와 안마리와 권사 사이에는 여섯 아들이 있었다. 그중 다섯째가 김창길 목사이다. 10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서울을 떠나지도, 교회 문을 닫지도, 설교를 멈추지 않았던 김동철 목사의 마지막 설교는 이렇게 끝났다.
“지혜롭다는 것은 인간적인 모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늘로부터 나는 선한 생각과 지식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고 기도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어려움을 피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이 왔을 때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준비된 신앙이 절실한 때입니다. 조선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이 교회 터 위에 영광스럽게 부르심을 받은 서소문동 75번지의 성도답게 우리의 생이 마무리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6.25 동란과 94일)
김동철 목사는 목숨과 신앙을 바꾸었다. 저자는 이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아이 같은 순수한 언어로 전한다. 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리워 많이 울었다. 아버지를 부르고 싶어 남산에 혼자 올라가 아버지를 크게 부르며 울었다.”(아버지 용서해 주옵소서)
저자는 목사가 되어 아버지를 뒤따름으로써 이 눈물을 승화시켰다.
순교자의 아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올곧은 신앙과 사목관, 탄탄한 신학, 목회 트레이닝을 받은 저자 김창길 목사는 목회자로서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 지난날도 감추지 않는다. 정직은 겸손의 기본적 구성 요소이다.
어느 집에서 집사 몇 명이 모여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 주시기를 원한다며
그 소식을 전하러 대표로 지명받아 온 발걸음
평생 처음 듣는 날벼락 같은 소리
그 울림이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어
"이제 셋째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삼십 대 초반 아내(김에스터 목사)에게 말할 면목"조차 없었던 저자는 이 순간에 역시 그를 상징하는 겸손에 매달린다.
주님, 이 교회는 제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이므로
주님이 해 주셔야 합니다.
주님, 이 교인들은 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이 주장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이 교회에서 삼십 년 십 개월의 목회를 마쳤다.(떠나 주시겠어요?)
목회를 온전히 하늘에 맡긴 사목의 여정에 같이한 동역자들 또한 저자를 통해 겸손의 깊이를 더 한 것 같다. 옛말에 근주자적(近朱者赤)이라 했다.
목사님, 지난날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저희 가족들의 신앙을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시오.
제가 죽으면 이 몸을 의과 대학 해부실에 보내어
의학도들의 실험용으로 쓰게 해 주십시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가진 것을 인류를 위해 쓰고 싶습니다.
먼저 주님 나라 가겠습니다. 거기서 기다릴게요(김장로의 유언)
저자가 속삭이는 겸손의 언어는 그가 바라보는 한인 이민사에도 녹아있다.
이제사
이국땅에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혼자 가지고 있는 게 아닌
부단히 주변을 치고 중심에 서려는 안간힘
그래도 기득권에 끼지 못한 소수자로 남아
변두리에 남아 새 역사를 창조합니다.
옛것은 다 지나가고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씨앗이 부서져야 새싹이 움트는
세계사를 쓰기 위해 미국에 왔습니다.
김창길 목사가 그리는 한인 디아스포라가 만들어야 하는 미국 사회 또한 겸손한 곳이어야 한다.
인종 구별 없이 서로 나누며
문화 차이 없이 뛰어넘어 하나 되는
만국 언어 쉽게 통하는
둥근 지구처럼 둥글게 살고자
우리는
이 나라를 이루기 위해 미국서 삽니다.(이제사 알았습니다)
저자는 특별할 것 없는 꽃망울, 나무 잎사귀에서도 겸손을 배운다. 그에게 자연은 바로 겸손이다. 그는 겨울의 끝자락 또 아주 이른 봄 피어나는 ‘스노플레이크(눈송이꽃)’의 소중함을 노래한다. 개나리나 수선화 또 벚꽃처럼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지만, 이 꽃이 있어 봄을 꿈꾸게 하지 않나?
양지바른 포도나무 아래
쌀쌀한 바람 부대끼며 솟아난
꽁꽁 얼어붙은 땅 마다하고
눈 더미 헤치고 하얗게 피는 꽃
아직
나뭇가지 우두커니 싹 트기 기다리는데
봄이 오기 전
조그만 이파리 하얀 꽃송이
차분히 고개 내밀어 미소 머금다
낮은 키로 가만히 서서
차가운 겨울을 단단히 보낸다(스노플레이크(눈송이꽃))
김창길 목사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에서도 자연의 겸손을 만난다. 낙엽을 잎새의 종말이 아니라, 자연이 품고 있는 인간에 대한 배려로 본다.
수없이 매달린 나뭇잎은
겹겹이 막았던 나뭇잎은
그늘과 그림자를 훌훌 털어내고
지난날 다 지워 버린다
하늘을 우러러보라고 자리를 비워 주네
사방을 둘러 보도록 잎사귀를 비껴 주네
지금 아래로 다 쏟아붓는
한 자리 홀가분하게 서서(가을 나무)
고백을 한다. 글을 읽을 때 내게 “별 쓸데없는 짓을 다 한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버릇이 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 석 자를 풀어 그의 삶과 대비해 보기도 한다. 이름의 의미와 삶의 궤적이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날짜 풀이도 한다. 이런 식이다. 저자 김창길 목사는 이미 밝힌 대로 1966년 6월 26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6.25 다음 날이다. 이미 적었듯, 한국 전쟁은 저자의 삶과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전쟁의 발발 기념일 바로 그다음 날에 순교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 안수를 받은 사실은 우연일 따름일까? “6.25 전쟁은 우리 집의 두 기둥을 뽑아 갔으며 폭삭 가라앉은 지붕처럼 우리 가정을 망가뜨렸다.”(아버지, 용서해 주옵소서)
이 전쟁과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을 미워하며 한평생을 살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김창길 목사는 말한다. “지난날의 아프고 슬픈 역사는 이제 다 지나 새롭게 발전하는 오늘의 새로운 역사를 낳았고 다시 내일의 힘찬 대한민국을 창조하기에…”(6.25 동란과 94일)
이 창조의 과정에서 한인 디아스포라가 감당해야 할 짐을 겸손하게, 묵묵히 지고 오늘까지 온 김창길 목사. 그의 “이제야 알았습니다”가 생의 마지막 책이 아니길 바란다. 저자가 말하지 않았나?
아직도
남은 길 혼자 가야 하는
뒤돌아보면
아무도 같이 갈 이 없는
인적 드문 오솔길 따라
아름드리 나무 숲을 지나
매일 매일 흙을 밟으며 자연에 잠긴다
마감할 품이 못 되어
떫고 설익은 성품이 잘 영글도록
불림을 받아야 각성하기에
불려져야 제대로 되겠기에
가야 할 길이 더 남은
해야 할 일이 더 남은
끝까지 사명 감당하리라
꼿꼿이
남은 길을 걸어간다(아직도 가야 할 길)
*이 글에서 인용한 시는 필요한 경우 본래의 작품을 중략(中略)한 경우가 있음을 밝힌다.
이길주 (버겐커뮤니티 칼리지 역사학 교수)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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