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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 “인종차별 오해, 범죄자의 인권을 제재하는 것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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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귀 싸호는 골에 白鷺(백로)야 가지마라/ 셩낸 가마귀 흰빗츨 새올세라/ 淸江(청강)에 죠히 씨슨 몸을 더러일가 하노라."- 이 시조는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 가던 날에 팔순의 노모가 꿈이 흉하니 가지 말라며 부른 노래입니다. 정몽주는 결국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자객에게 피살되고 맙니다. 여기 등장하는 까마귀는 소인배를 가리키고 백로는 순결하고 강직한 이들을 가리킵니다. 이방원과 그 일당을 소인배로 정몽주를 비롯한 충신들을 백로라고 지칭한 시조입니다. 까마귀와 백로를 소재로 한 또 다른 시조에는 조선조 개국 공신인 이직의  "가마귀 검다하고 白鷺(백로)야 웃지 마라/ 것치 거믄들 속좃차 거믈소냐/ 것 희고 속 거믄 즘생은 네야 하노라."가 있습니다. 

 

이런 시조를 두고 까마귀가 정말 나쁜 새이고 백로는 착한 새냐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은 이성이 없기 때문에 착하다 또는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문학에서는 비유나 은유로 이성 없는 미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에도 도덕적 평가를 포함하는 설명과 묘사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속담이나 고사성어나 격언이나 금언 중에는 뜻과 교훈은 서로 상충하지만 나름의 교육적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뚝배기보다 장맛"과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은 서로 반대되는 교훈을 주는 속담이지만 그러한 속담이 상반되는 뜻이라 하여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때로는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말라고 교훈하기도 하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까마귀 검다고 백로야 웃지 말라는 속담으로 교훈을 합니다. 위의 두 속담이나 시조가 담고 있는 교훈이 논리적으로는 모순되지만, 자녀를 교훈하거나 학생을 가르치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과 역사는 반드시 논리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논리와 상식을 무시해도 안 되지만 인간의 삶은 논리라는 그릇에 다 담아낼 수 없으므로 지나치게 논리에 얽매일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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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의인은 없다고 하지만 같은 성경이 의인과 선하고 착한 사람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물론 인간을 의인이나 선인이라 함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의롭고 선하다는 뜻이 아니고 상대적인 의미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 교리적으로는 인간이 죄인이고 악하지만 의와 선의 절대적 기준이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렇게 불러주셔서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는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을 닮음 중 중요한 하나는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를 전제하면 논리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이야기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닮음은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 둘이 논리의 영역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에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책임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책임이 가능하게 하려면 자유의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할지 불순종할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착하고 선하게 살지 악하게 살지를 결정할 수 있고 그 결정과 노력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한, 인간은 삶의 환경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기에 쉽게 만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교육자와 국가는 어리고 젊은 세대가 의와 선을 추구하고 실천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선을 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개인이 자신의 비도덕적이고 법을 어긴 책임을 환경에 돌리면 안 됩니다. 좋은 환경을 만들 책임이 기성세대나 정부에게 있다고 해도 개인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그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이 책임져야 할 문제를 환경 탓으로 돌렸는데 이는 타락의 영향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짓는 것을 피할 수는 없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길은 회개하는 것이고 핑계하고 탓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회개하기보다는 환경이나 누군가를 탓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환경을 탓하는 것을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좋은 환경이었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는데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재해나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전쟁은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에 상식이나 일반적인 윤리 도덕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경우는 인간이 비록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여도 개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그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원칙이 무너지면 누구나 불법을 저지르고 그 책임을 환경이나 남 탓으로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향이 심화 되면 법을 어긴 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법이 문제라고 주장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사상적으로 상대주의는 이런 경향과 주장에 대한 학문과 철학과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어서 개인이나 정당이나 집단들이 불법과 비도덕적인 행위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상대주의는 개인이 무슨 행위를 하더라도 정당하고 옳다고 갈채를 보내기 때문에 사람들은 법을 어기고 죄를 지으면서도 의기양양합니다. 

 

미국에서는 바이든 정부가 들어선 이후부터 부쩍 인권을 강조합니다. 인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인권은 진정한 인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권 신장 운동을 주도하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자신과 그 단체가 불법과 위선으로 활동한 것이 드러나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고, 많은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경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권을 강조하고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권은 물론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인권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나 국가도 그것을 빼앗거나 억압하면 안 됩니다.

 

살인은 개인의 인권을 파괴하는 가장 극단적인 경우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죽이면 그 살인자를 반드시 죽이라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물론 고의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 실수로 살인을 한 경우는 도피성으로 피하여 생명을 보존하게 하였습니다. 그 외 모든 살인자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인권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살인죄를 사형이 아닌 다른 벌로 다스리는 것은 인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해치는 것입니다. 최근 인권을 앞세워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나라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인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거나 왜곡한 때문입니다. 인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인권을 극단적으로 파괴하는 살인에 대해 사형으로 다스릴 것을 명령하신 것을 또 다른 살인이라고 하는 이들은 무식하거나 하나님 머리 위에 앉아 하나님을 판단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내리는 벌은 그 지은 죄의 경중에 맞도록 하셨습니다. 범죄를 중범죄처럼 다스려도 안 되고 중범죄를 경범죄처럼 다스려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법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반영되어 있고 인권 보호의 목적도 들어있습니다. 지은 죄에 대한 벌이 그 죄를 범한 자의 인권에 제재를 가하는 것이 결국에는 인권을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모든 국가의 법은 하나님의 법을 표방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인간이 하나님의 법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하나님보다 더 정의롭고 더 공평하고 더 인권을 위하는 법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형 제도 폐지, 동성 결혼 합법화가 바로 인간들이 하나님보다 더 옳고 선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하여 만든 것들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교만은 인종차별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선천적 조건이 차별의 이유가 되는 것을 인종차별이라고 해야 합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백인을 좋아할 수도 있고 흑인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취향은 개인의 조건에 따라 정해질 수가 있고 그 취향은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 이상의 원인과 이유가 따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흑인이 백인과 결혼을 하려고 할 때 흑인 부모가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 부모가 반대하는 데는 감정적으로 좋거나 싫어서가 아닌, 서로의 차이와 그 차이에 대한 자신과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판단과 그로 인한 부담까지를 감당할 능력도 고려한 때문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 흑인 부모의 경우, 자녀의 백인과의 결혼을 반대한 것을 인종차별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흑인 부모와 백인 부모의 입장이 뒤바뀐 경우, 백인 부모가 흑인 부모와 같은 이유로 자녀의 결혼을 반대하면 인종차별이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경우 엄격한 의미에서 인종차별이 아닌데도 인종차별로 취급되는 사회가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자녀를 둔 모든 부모가 겪게 되는 문제입니다. 백인에게는 백인이 편하고 흑인에게 흑인이 편한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친구나 결혼 상대를 편하거나 좋아서 선택하고 불편하거나 싫어서 선택하지 않는 것은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법을 집행함에서는 인종과 빈부귀천을 따라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무원이 법에 따라 공무를 집행할 때 그 대상의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나 빈부의 차별을 따라 법을 적용해서도 안 되지만 어떤 일이 뉴스가 될 때 백인 공무원이 흑인 민원을 처리한 것으로 보도하면 안 됩니다. 비근한 예로 "백인 경찰의 총에 흑인 중상"라는 제목의 보도는 인종차별을 부추기는 보도가 됩니다. 법을 지키고 범법자를 체포하는 경찰이 흑인일 수도 있고 백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건 경찰이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총을 쏘아 다친 것이지 흑인 경찰이 백인 범인을 쏜 것이라거나 백인 경찰이 흑인 범인을 쏘아 상처를 입혔다고 뉴스를 내보내면 안 됩니다. 뉴스뿐 아니라 글을 쓰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오해가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단어 하나의 선택에도 사려 깊게 처신해야 합니다. 별생각 없이 뉴스를 듣고 글을 읽는 사람은 왜곡된 정보를 접하게 되면 전혀 인종차별이 아닌 사건을 인종차별로 오해를 하여 화를 내게 되기도 하고 국가와 지도자와 사회를 탓하며 그 모두를 미워하게 됩니다.   

 

2007년 4월 16일에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는 33명이었는데 그 범인이 한국인이었습니다. 너무도 끔찍한 사건이라서 한국계 미국인들이 증오와 테러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미국언론과 시민들이 오히려 한국계 미국인들을 위로하며 정신 질환자가 저지른 사고인데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사건은 정신 질환자가 일으킨 단순한 사고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고를 단순한 사고로 보아 주는 미국언론과 시민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언론도 시민도 그 사건을 혐오 범죄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감동과 안도감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난 3월 16일에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는 8명이고, 범인은 미국 백인이며 희생자는 아시아계가 많았고 그중에서도 한국계 희생자가 4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성 중독자가 일으킨 사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2007년과 2021년의 미국의 언론과 정부와 시민들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대통령과 부통령이 이 사건을 사실에 따라 파악하고 이해하지 않고 혐오 범죄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였습니다. 언론은 이 단순 사고를 인종차별 혐오 범죄라고 보도하였습니다. 애틀랜타 한인회도 이 사건을 인종차별 혐오 범죄로 이해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한인 언론들도 인종차별 혐오 범죄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 중에도 이런 시각으로 이 사건을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인종차별 혐오 범죄로 몰아가는 데는 나름의 프레임이 있습니다. 백인들이 이 땅에서 인디언을 몰아내고 침략한 역사에서 흑인 노예의 역사와 극단적 백인 우월주의자들인 KKK의 활동과 그 연장 선상에 인종차별주의자 전 대통령 트럼프가 있고, 애틀랜타 총기 난사 사건을 트럼프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은 지나치게 비논리적이고 감성적이고 유치하여 측은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미국의 지도자나 언론이나 시민이 이 허구의 인권이나 인종차별 감성팔이에 놀아나는 것 같습니다.

 

보편 가치를 무시하고, 법을 예사로 어기고, 착하고 정의로운 체하고, 거짓말을 다반사로 하는 자는 그가 흑인이건 백인이건 경계하고 가까이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범법자에게는 그 벌로 인권에 제재를 가하는 것이 인권을 위하는 것입니다. 법을 어기는 자에게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주는 것이 진정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은 죄의 무게만큼의 벌을 주는 것은 회개할 기회를 제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법과 질서를 어기는 자의 인권을 제재하는 것이나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것도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전15:33)

 

황상하 목사(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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