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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철 목사 ① 청교도 예배회복과 주일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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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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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미국 이주 400주년을 맞아 “일어나 빛을 발하라(이사야 60:1)”라는 주제로 영적대각성 온라인 부흥회가 11월 16일(월)부터 21일(토)까지 진행되고 있다. 부흥회 주관은 자마와 청교도 400주년 준비위원회(대표 한기홍 목사)가 하지만, 미주 각지역 교협 등이 협조하여 전미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주최 측이 부흥회 6일간 매일 새벽에 2개의 설교를 유튜브로 올리면 개인별로 새벽 5시30분과 저녁 7시 30분에 영상으로 참가하면 된다. 유튜브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s://www.youtube.com/user/JAMAMedia2 

 

강의제목과 강사는 1일 '우리가 제2의 청교도가 되어야 합니다'(한기홍 목사)와 '청교도 그들은 누구인가?'(허연행 목사), 2일 '청교도 예배회복과 주일성수'(이성철 목사)와 '청교도의 자녀교육과 가정'(위성교 목사), 3일 '청교도의 감사생활'(강민수 목사)와 '청교도가 세운 위대한 나라'(위성교 목사), 4일 '청교도의 기도생활'(호성기 목사)와 '청교도의 거룩한 삶의 추구와 성령충만'(진유철 목사), 5일 '청교도 일터에서의 삶-직업관'(양춘길 목사)와 '청교도 재정관리-유산상속'(이은상 목사), 6일 '청교도 교육과 회복'(김춘근 교수)와 '청교도의 가정예배'(권준 목사) 등이다. 

 

17일(화) 둘째 날 집회에서 이성철 목사(달라스연합감리교회)는 “청교도 예배회복과 주일성수”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이 목사의 메시지는 팬데믹으로 아직도 현장 대면예배 대신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많은 가운데 큰 도전을 주었다. 2번에 걸쳐 메시지의 내용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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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예배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청교도들은 여러 방향에서 영향을 많이 주고 있다. 지금도 청교도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반성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청교도들은 예배에 마음을 두었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의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1. 성경중심의 예배였다. 

 

그냥 예배가 아니다. 청교도들은 성경이 말하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찾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들을 예배에서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 내려왔던 미신적인 요소들이나 인간의 업적을 드러내는 예배의 모든 예전적인 것을 철두철미하게 뺐다. 가능하면 단순하게 찬양과 기도와 말씀으로 이루어진 예배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청교도들은 성경의 사람들이다. 성경말씀을 깊이 묵상한 사람이다. 성경이 이러한 예배를 우리들에게 명령한다고 판단하고, 찬양과 기도와 말씀 중심으로 예배를 단순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시대에 여러 예배가 있었고 특히 종교개혁자에 의해서도 예배형태가 바꾸어지기 시작했지만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을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진행형이었다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은 어떻게 하면 더 정확하게 성경이 명령하는 예배로 드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릴 것인가에 마음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청교도들에게 회중주의자들이 많이 모였다. 흔히 칼빈이 회중주의라고 한다. 회중주의는 교회에 어떤 것을 결정할 때 교회리더, 당회나 임원회, 가톨릭으로 말하면 사제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뜻을 모아 교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형태이다. 회중주의자들이 청교도에 많이 들어왔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건너온 사람들 중에 회중주의자들이 있었다. 당연히 그들을 통해 교회에 일반 사람들이 합류하고 그럴수록 교회는 예전적인 분위기보다는 심플하면서 하나님 말씀중심적인 예배를 만들어갔다.

 

다시 말하면 청교도들은 철두철미하게 성경이 말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성경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에 포커스를 맞추어 말씀중심의 예배를 철두철미하게 드렸다.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의 예전적이며 제의적인 예배에서 말씀중심의 예배로 회복을 말했다면, 청교도들은 말씀 회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예배를 강조한 무리들이었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굉장히 도전을 준다. 요즘 팬데믹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지만 전에는 너무나 많은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예배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인가 보다는 예배드리는 자들을 얼마나 편안하게 하고 마음에 평안을 줄 것인가를 고민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중심에 두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자에 예배의 중심이 있었는데, 청교도들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이 어떤 예배를 기뻐하실 것인가를 고민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성경이 말하는 예배라고 생각하여 철두철미하게 성경중심적인 예배의 모습을 찾고 고민하고 기도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청교도들의 예배가운데 중요시 한 것은 설교였다. 성경중심의 예배를 강조하다보니 설교중심이었다. 설교가 예배의 핵심이 되면서 강대상이 중앙에 왔다. 중앙에 강대상을 세우는 것은 말씀선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암암리에 강조한 것이다. 가톨릭을 보면 성찬을 할 때만 중앙에서 하고 설교와 강론은 옆에서 한다. 그러나 청교도들이 제단이 아니라 강단을 강조했으며, 설교를 강조하며 강대상을 교회본당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점을 깊이 생각하면 좋겠다. 우리들은 예배 가운데 지금 무엇을 가장 중요히 여기는가?

 

물론 청교도들이 말하는 심플한 예배가 반드시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정말 중요한 거룩한 예배적 행위가 빠져있다고 지적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인간적인 모든 것을 다 제거하고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말씀에만 집중하는 예배, 하나님만 높여드리는 예배를 추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당시 설교자들은 오늘날 내 설교가 마지막인 것처럼 설교했다고 말한다. 리차드 백스터가 말하기를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설교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다. 그 말에는 귀한 의미가 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전했겠는가? 그런 마음으로 청교도들은 예배를 만들어갔다.

 

정확히 말하면 청교도들의 예배는 설교중심적인 예배였다. 물론 조금은 문제가 있을 수 있고 현대교회 예배의 요소를 고려하면 부족한 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예배형태를 만들어가려는 청교도들의 모습만큼은 배워야 할 것이다.

 

당연히 설교를 성경중심으로 하니, 설교도 철두철미하게 말씀중심적인 설교였다. 성경이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지를 고민하며 설교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리스도 중심, 말씀 중심, 성령 중심의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설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대언하는 것처럼 들리도록 설교하려고 청교도 설교자들이 노력했다. 성경중심의 설교를 하다 보니 설교하는 목회자도 듣는 평신도들도 경건한 삶, 사치하지 않고 검소한 삶, 그리고 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2. 가정예배를 굉장히 강조했다. 

 

초대교회를 보면 교회에서 모여 성찬식을 하고 말씀을 나누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가정에 가서 가정예배를 드렸다. 청교도들은 그것을 그대로 삶속에 적용했다. 청교도들은 삶으로 살아내는 복음, 삶으로 살아내는 말씀을 중요시했다. 그러려면 가정예배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장이 목회자들처럼 말씀을 나누고, 식구들이 성도처럼 말씀을 듣고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교육되고 선포될 때 가정이 복음화 되고, 그 가정들이 모여 주님의 교회를 강건하게 하는 것을 깨닫고 가정예배를 중요시했다.

 

어쩌면 이런 점들은 오늘도 교단들에 영향을 미쳐 속회나 이름은 다르지만 소규모 모임들이 청교도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가정예배는 생각할수록 귀중한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주님이 주신 은혜를 가지고 다시 가정에 돌아가 아버지가 풀어 말씀을 증거하고 아내와 자녀들이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가정, 그 가정들이 모이는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라는 생각을 청교도들이 가지게 된다.

 

요즘 팬데믹으로 참 어렵다. 함께 모이는 공예배도 힘들지만 소규모 모임도 모이기가 힘들다. 물론 화상으로 모이기도 하지만 힘든 시기이다. 모이기 힘들다보니 공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모이는 것이 힘들다보니 몇몇 가정들이 소규모로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고 친교하고 성경을 배우고 함께 기도하는 가족 같은 모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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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삶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청교도들은 교회에 와서 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회개했다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예배에서 말씀을 받고, 말씀을 가정에서 나누고,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려고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청교도 설교가의 설교가 그것에 초점을 두었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 낼 것인가? 단순히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것에 설교의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아멘 할렐루야하고 받은 은혜로 진리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도록 하는 데에 설교자의 주된 목적이 있었다. 

 

청교도들은 성경적인 예배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가정예배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예배가운데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삶속에서 살아내야 할 것인가에 강조점을 두었다. 성경을 연구해서 가장 귀중한 삶의 원리를 찾아내어 삶에 가장 중요한 원리로 접목시키는 운동이 청교도 예배운동이었다.

 

한번쯤 마음깊이 생각할 중요한 것이 있다. 예전에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현대에 들어와서 “예배를 본다”고 말한다. 설교 후에 “목사님의 옷이 좋고 어디서 이발하셨다. 목사님이 사용하는 언어가 재미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예배를 듣고 보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들려진 말씀을 마음에 담고, 마음에 담겨진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려고 노력했다. 굉장히 중요하다. 청교도들은 어떻게 하면 성경중심적인 삶을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래서 청교도 설교자의 설교는 다른 말로 말하면 실천신학에 가까웠다고 한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구도적인 설교보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라는 실제적인 문제, 실천적인 부분을 건드는 설교가 당시에 청교도 설교가들의 설교핵심이었다. 그래서 청교도들의 신학을 실천신학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들은 삶으로 살아내는 예배를 강조하며 우리가 택함받은 거룩한 백성인데 어떻게 그것을 알 것인가를 고민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이 세우신 목사인가? 내가 정말 구원을 받았는가? 사람들은 나를 착하다고 하는데 정말로 내가 착한 사람인지 묻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청교도들의 고민은 성경을 강조하며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진정한 백성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답을 찾아냈다. 정말로 하나님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증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바쁜 세상에 사니 교회를 다닌지 얼마나 되었으며, 직분을 받은지 얼마나 되었다는 정도로만 생각만 한다. 정말로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인지, 정말로 구원을 받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다 부흥회 때 강사가 구원받았는가 물으면 당연한 것을 묻는다며 짜증을 낼 때가 있다. 하지만 청교도들은 이것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니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분명 증거가 있을 것이라며 2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내가 정말로 회심한 증거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느 날 내 삶이 바뀌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특별하고 뜨거운 경험이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흔히 이단이 말하는 몇일 몇시에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정말 구원받고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내 삶이 거듭났다고 하는 분명한 확신, 경험,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회심한 사람은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청교도들은 생각했고 이를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둘째, 내가 정말 구원받은 선택받은 사람이라면 정말로 구원을 받았다는 삶의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점은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선행이나 경건한 행동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경건한 행동이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경건한 행동과 선행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청교도들은 굉장히 강조했다. 청교도들은 집요하게 내가 지금 성경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내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하는 것을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했다.

 

목회를 하다보면 제일 어려운 것은 가끔 자신의 신앙이 보기에 어떤가를 묻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가 중요하다고 답을 한다. 저도 목회자이지만 완벽하지 않다. 저도 개인적인 감정에 휩싸일 수도 있고,  목사이지만 때때로 상처도 받고 두려움도 있으니 잘못 볼 수 있다. 그래서 저에게 묻지 말고 하나님께 물으라고 말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삶을 기쁘시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청교도들은 이런 의미에서 ‘의무’라는 단어를 굉장히 귀중하게 여겼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면 나에게 주신 분명한 일이 있을 것이고 나는 그것을 행하여 하는 거룩한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그것을 발견하고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사업이 잘되어 그런 가운데 십일조 이상을 드렸다. 그리고 따로 고아를 도왔다. 그럴 때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성령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하나님 말씀이 나를 그렇게 인도하셨기에 그럼으로 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하나님 백성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확신을 가지기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할 수도 있다. 구원을 받지 않았는데도 자선사업을 하며 구원을 받았다고 자위를 할 수 있지만, 청교도들은 심각하게 자기 삶에 나타난 열매를 보고 나는 구원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의무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특히 여러분들은 팬데믹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거룩한 의무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물어보았는가? 청교도들은 수백 년 전에 그것을 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요,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를 집요하게 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계속하여 묻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거룩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청교도들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렸다.

 

(2번째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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