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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모 목사 ① 개혁의 출발점: 말씀 앞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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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7-03-2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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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뉴욕장로회신학교와 뉴욕과 뉴저지 교협과 목사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공동 학술 세미나가 3월 26일(주일) 오후 5시에 뉴저지 필그림교회(양춘길 목사)에서 열렸다. 유철운 목사가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과 목회 리더십"에 대하여, 조진모 목사가 "마틴 루터의 성경적 종교개혁과 이민교회"에 대하여 강의했다. 

 

조진모 목사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하고 합동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필라연합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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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모 목사는 “마틴 루터의 성경적 종교개혁과 이민교회”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는데 △개혁의 출발점: 말씀 앞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개혁의 원동력: 나는 무엇을 믿으며 어떤 삶을 살고 있나? △개혁의 영향력: 날카로운 소리인가, 낮아진 마음인가? 등 3가지 질문에 답을 하는 형태로 강의를 인도했다.

 

그리고 결론을 통해 △개혁된 교회는 계속 '성경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섭리, 소명과 사명에 대한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작아도 분명한, 내용이 있는, 근본을 붙잡는, 결과를 맡기는 개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진모 목사는 뉴욕장로회신학교 유재도 학장의 같은 제목의 강의 부탁을 받고 14년 정도 이민목회를 했으며, 자신은 루터가 전공이 아니라 칼빈이 전공이었기에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루터를 공부한다는 자세로 강의를 준비했는데 칼빈과 다르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었다고 말했다. 또 “마틴 루터의 성경적 종교개혁과 이민교회”라는 제목이 주어졌지만 둘 사이에 서로 연관성을 찾기에 쉽지 않았다며, 이민교회가 어떠한 상황인가를 살펴보면 루터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서론과 첫째 질문인 “개혁의 출발점: 말씀 앞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에 대한 내용이다. 세 번에 걸쳐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들어가는 말

 

1) 마르틴 루터와 500년 역사의 개신교 

2017년은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그 중심에 독일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의 주도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38-1546)가 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 속에서 태어났고 성장하였다. 초기에 그의 마음에 지녔던 개혁 사상은 마치 작은 불씨 같았다. 그 안에 생명력이 있었기에 큰 힘을 발휘하며 거침없는 불길이 되어 번져나갔다. 그는 중세 교회와 새롭게 출발한 개신교의 역사를 이어주는 다리를 놓았다. 현재 많은 개신교 교단들이 있다. 신학과 사상을 달리하여도, 루터가 종교 개혁의 길에 남긴 흔적을 공유하고 있다.

 

2) 마르틴 루터와 21세기 이민교회 

마르틴 루터와 21세기 이민교회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루터는 중세 말기의 인물이다. 그가 교회를 바라보며 개혁을 의도하고 실행한 실제적인 고민들은 그 당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민교회의 배경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이 5세기라는 긴 세월의 간격을 넘게 하는 연결고리일까? 오래전부터 한국교회와 나아가서 이민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이 되어왔다. 매우 시급해진 상태 속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게 되었고, 당면한 과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자연스레 개혁의 선구자인 루터에게 관심이 쏠리게 된다. 우리의 관심사인 개혁 정신과 원리를 그에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3) 내용 전개의 한계와 방법론 

루터는 자신의 사역 전반부에 로마 가톨릭 교회를 주된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후로는 개신교의 신앙적 기초를 놓으며 새로운 교회의 전통을 세우는데 주력했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면서 그의 사상은 점점 발전되어 갔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그가 붙들었던 교회 개혁의 원리가 무엇이었을까? 그는 시종일관으로 성경을 중심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성경 말씀에 붙잡힌 개혁자였다.

 

이민교회의 개혁에 언급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 개혁의 대상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이 강의의 목적은 루터를 영웅으로 추앙하거나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선배인 그가 후대 교회에 남겨준 귀한 영적 유산을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고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물론 루터가 이민교회가 당면한 모든 과제에 대해 답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을 그대로 모방하려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 강의의 주된 관심사는 루터가 지녔던 개혁의 출발점, 원동력, 그리고 영향력을 주위 깊게 관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이민교회의 현실을 간단히 살핀 후에 루터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다. 

     

1. 개혁의 출발점에 대한 질문: 말씀 앞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1) 이민교회의 현실: 정체성의 혼동  

 

① 이민 한인사회와 한인교회

 

한인들이 본격적으로 미국 이민을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후의 일이다. 아시아인의 이민을 배척하는 내용을 골자로 1924년에 제정된 이민법이 대폭 수정되면서 문호가 열린 것이다. 한인 이민사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특이한 점은, 한국인이 거주하는 대부분의 도시에 한인 단체로서 가장 먼저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민자가 급증하면서 한인교회의 수도 덩달아 늘어났다. 1970년까지 70개 미만이던 교회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2017년 현재 4000개를 넘은 상태이다. 

 

② 이민 교회에 대한 기대감

 

초기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교회는 한인회의 역할을 감당했다. 정착하는 과정가운데 생기는 각종 문제에 대한 도움을 얻는 곳으로 각인되어갔다. 언어의 장벽과 이질 문화 속에서 직장과 자녀교육은 물론 간단한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창구가 된 것이다. 심지어 비행기를 내리자마자 무작정 교회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초기 이민교회 목회자들의 사역은 매우 고달팠다. 이민자들의 거주지를 정하는 일, 면허증을 딴 후 차를 구입하는 일, 그리고 직장을 알선해 주는 일 등을 도맡아 처리하는 해결사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③ 교회의 정체성과 개인 신앙

 

지금과 같이 SNS가 발전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이민교회는 타국 생활에 지친 이민자들에게 정신적 안식처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번 같은 동포를 만남으로서 고독을 이겨내고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랠 수 있었다. 자녀들에게 한글과 한국 문화유산을 가르침으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일도 중요한 사명이 되었다. 교회가 이민자들에게 생활의 길잡이로 알려진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라는 사명을 잘 감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라는 교회의 고유 정체성을 제대로 가르쳤는지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존재한다. 신앙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 교회는 십자가 복음을 분명하게 깨닫고,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는 성도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이런 변화를 경험하지 않은 교회 출석 성도들에게 교회란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곳으로 남아 있게 된다. 교회는 '신앙 공동체'라는 정체성에 대한 확립이 시급하다. 

 

2) 루터의 고민과 해결책: 이신칭의

 

① 중세 교회가 낳은 아들

 

루터는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중세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심을 키워갔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경험을 가지고, 영리한 아들의 교육을 위한 것이라면 전혀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1497년, 루터는 학업을 위해 가족을 떠나 마그에부르크(Magdeburg)로 가게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경건 운동의 회원인 ‘공동생활 형제단 (Brethren of the Common Life)'이 운영하는 중등학교 과정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도들은 성경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사제들이 미사 시간에 성경 낭송을 할 때에 듣는 것 외에 직접 성경을 읽고 묵상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나마 사제와 청중 모두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니, 영적 생명력을 상실한 채 형식적이 신앙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가 이 학교에 1년간 머무는 성경에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한 듯하다. 

 

‘공동생활 형제단’은 전통적으로 성경읽기를 영적 성장의 필수 조건으로 여겨왔다. ‘공동생활 형제단’은 12세기의 중세 교회 신학의 흐름 속에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12세기에 대학이 설립되면서 이성을 강조하여 사변적 이론을 중시하는 스콜라주의 신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수도원 신학, 즉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묵상과 신비스러운 내적 관계를 강조하는 신학과 결별을 가져왔다. 

 

‘공동생활 형제단’을 시작한 제럴드 흐루터(Gerard Groote, 1340-1384)는 독일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도리어 신비주의가 지닌 문제를 지적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성품을 본받는 경건한 신앙을 중시하였다. 그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 비록 그들은 중세 교회 신학의 틀에 갇혀있었지만,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강한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인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 Kempis, 1380-1471) 도 이 운동에 속한 인물이다. 

 

루터가 교사들을 통하여 성경읽기의 중요성에 대한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나아가서 성경을 통해 신앙을 갖는 것은 이성적으로 그 진리를 깨우치는 것 이상의 일, 즉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모시고 본받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라는 사실에 눈을 떳음에 분명하다. 루터는 1501년에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 진학하였다. 개혁적인 마인드를 지닌 교수들이 가르쳤던 학교였다. 어느 날 그는 학교 도서실에서 평생 잊지 못할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태어난 후로 처음 직접 성경을 읽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사무엘상 앞부분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성경을 읽으면서 양심의 찔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성경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의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그가 성경을 처음 대하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였다는 점이 우리를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1505년, 갑자기 부친과 상의도 없이 법학 공부를 그만두고 수도사가 되었다. 천둥번개를 만난 뒤 공포에 질려 수도사가 될 것을 서원한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지체하지 않고 같은 도시에 자리한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원을 찾았다. 수도 생활이 구원에 이르는 최선의 길이라는 확신이 수도사의 길을 선택하게 한 것이다. 1507년 4월, 루터는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분명 중세 교회가 낳은 아들이었다.  

 

② 피할 수 없는 신앙의 갈등: Anfechtung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수도원을 찾아간 루터에게 신학과 신앙의 지도자로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요한 스타우피츠(Johannes Staupitz)를 만났다. 스타우피츠는 튜빙겐 대학에서 ‘공동생활 형제단’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던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 1410-1495)에게 박사학위를 취득한 개혁적인 마인드를 지닌 훌륭한 영적 지도자였다. 그는 다른 수도사들보다 루터를 매우 특별히 대해주었다. 루터의 뛰어난 학문성이 눈에 띄였기 때문이다. 루터에게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에서 성경학사를, 나중에는 같은 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공부하도록 권장하고 주선하였다. 

 

수도원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마음속에 신앙의 갈등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고 싶었다. 루터의 신앙의 갈등은 매우 독특하였다. 그가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멀리 떠난 상태에서 방탕하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등의 일반적인 갈등이 아니었다. 그의 고민의 핵심은 하나님께 비춰진 자신의 모습이 너무 형편없다고 느낀 것이었다. 하나님이 항상 죄로 인해 더러워진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바라보고 계시하는  일종의 영적 압박감이었다. 이 독특한 감정을 독일어로 Anfechtung이라고 부른다. ‘두려움’ 또는 ‘영적 고통’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루터에 대해 가장 커다란 오해는 그가 정신병자였다는 것이다. 정신쇠약은 물론 정신분열 환자였다는 견해도 있다. 루터의 내면의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의 겉모습만 보면 충분히 이런 판단도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루터가 가졌던 '영적 고통' 실제적이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영적으로 민감하였던 그는 언제나 자신을 떠나지 않는 하나님을 피하거나 숨을 수가 없었다. ‘영적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갈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으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그가 에르푸르트 대학 도서관에서 성경을 처음 읽었을 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 후로 계속해서 찾아오는 '영적 고통'을 거부할 어떤 방법도 없었다. 루터의 ‘영적 고통’은 그의 실존 자체를 흔들어놓는 위기였다. 

 

스타우피츠는 루터의 신앙적 갈등을 분명하게 이해하였다. 루터의 고해성사 신부로서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백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스타우피츠는 루터의 순수한 마음을 잘 이해하고 ‘영적 고통’을 이겨내고 평안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어거스틴의 글을 읽도록 권장하였다. 또한 1510년에는 루터를 로마로 순례를 보내기도 하였다. 나아가서 더욱 진지하게 성경을 읽고 깊이 연구할 것을 권한 것이다.  

 

루터의 ‘영적 고통’은 그가 하나님 앞에 순수한 모습으로 서 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는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영적 갈등을 무시하거나 숨기려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양심이 무뎌지지 않았기에, 그가 죄를 짓는 나를 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 

 

③ 성경을 통한 영적 탈출

 

루터는 어거스틴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죄인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죄인이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허락받는 은혜에 버금가는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교리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이 확고해지기 시작하였다. 

 

1512년 가을,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 후로 그는 같은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하는 사역을 맡게 되었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먼저 자신의 신앙을 위해 성경의 진리를 깨닫는다는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1513년부터 시편 강의를 시작으로 로마서, 히브리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1518년에 다시 시편 강의로 이어갔다. 무엇보다 성경에 담겨진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을 통하여 루터의 신앙이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어느 날 루터 생애의 일대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가 복음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이로 경험으로 인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 동안 그가 ‘영적 고통’을 느낄 때마다 그토록 갈망하던 영적 탈출의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 중심에는 그가 ‘하나님의 의’에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다. 

 

루터는 그때까지 항상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잘못을 꾸짖고 정죄하는 분이라고 생각하여왔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의’를 죄에 대한 심판과 형벌의 개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의’는 징계의 개념이 아니라, 도리어 죄인을 용서하시며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해 허락하시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든지 죄인의 자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어진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루터가 ‘이신칭의 교리’,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깨달은 사건을 '탑실 체험(Tower Experience)' 이라 부른다. 그가 기거했던 비텐베르크 어거스틴 수도원의 탑에 있는 연구실에서 체험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우리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그의 체험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그의 겸손한 태도 때문이다. 자신의 연구의 결과 대단한 사실을 발견하였다며 자랑거리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오직 시편 강해를 시작한 1513년부터 로마서 강해를 막 시작한 1515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간단히 설명할 뿐이다. '이신칭의' 교리를 발견한 이후 전혀 다른 태도로 성경을 대할 수 있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새로운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이해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비춰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스스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모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 이 사건은 루터 혼자만의 경험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개인의 체험이 교회 역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 루터는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중세 교회의 교리가 성경의 진리를 위배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가 처음부터 종교 개혁을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성경을 통해 깨달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확신이 개혁의 불씨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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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리

 

우리의 질문은 개혁의 출발점이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 특별히 하나님 말씀앞에 선 나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질문의 출발점으로 생각했다. 하나님앞에 하나님의 말씀앞에 섰던 훈련이 되지 않았다면, 그 가운데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내가 정말 버린 바 된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지 아니하고서는 종교개혁은 없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진정한 종교개혁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이민교회는 특징 중 하나는 성경 앞에서 또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을 어떻게 라고 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이차적으로 두는 모순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정체성과 신앙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혁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것을 중요한 것이라고 테이블 앞에 놓고 팔을 거두어 붙이고 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그것을 향하여 가기 보다는 먼저 하나님 앞에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개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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