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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 “대림신앙, 기다림은 찾아감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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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20-12-19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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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근거에 ‘기다림’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기다림은 오고 있는 그것이 현재의 나를 변화시켜 주리라는 기대의 기다림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해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소박한 희망이 있기에 지금의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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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칸트의 세 가지 명제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무엇을 희망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기다림은 아는 것을 희망하고 행함은 희망 성취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실천 이성인 무엇을 한다는 것은 이론을 실천하려는 마지막 단계를 말하는데, 단순히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적합한 목적을 가진 실천이기 때문에 목적을 이루려는 기다림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몰트만은 인간이 무엇을 기다리는 희망을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몰트만이 성경에서 발견한 희망 신학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희망”그 자체를 강조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몰트만은 아우슈비츠에서 불가항력적인 생사의 고난을 이겨낸 것은 소박한 희망에 의해 가능했었다고 하면서 아무리 희망하고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 할지라도 희망을 열매 맺기까지의 기다림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그 희망은 누구나 꿈꾸는 단순한 꿈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희망 자체를 믿거나 집착하게 하지 않고 희망의 대상이나 내용인 하나님께 희망을 두라고 가르치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바라라고 가르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말씀만 희망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이생만을 위해 산다면 방자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단순한 희망은 인간의 행위를 사랑과 정의, 도덕과 윤리의 고상한 행위를 지향하도록 이끌지 못합니다. 따라서 인격적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이나 정의나 도덕이나 윤리도 의미가 없습니다. 희망과 기다림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대 명제인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 희망과 기다림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기다리는 동안 어떠한 고통과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 없는 하나님의 응답은 기대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과 기다림은 그 자체보다 희망과 기다림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하고 희망이나 기다림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어서, 성경을 구속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중심축으로 진행된다고 보는 것이 성경의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에서 주역을 맡은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구속의 완성을 기다렸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 구속이 성취되기를 고대하는 기다림과 그것의 성취로 변천하고 발전하였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 시기를 거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 그리스 문화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가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이 한결같이 꿈꾸고 기다린 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고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며 그분의 다스림이 구체화 되는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절망과 고통으로 점철된 긴 역사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메시야 도래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는데, 이는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바벨론 포로 시기나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그 제국들이 제공하는 제한적 자유와 안전을 누릴 수 있었고 또한 나름의 꿈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 제국 안에서 자신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부와 권력을 누렸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제국이 보장하는 제한적인 자유와 안전과 부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메시야가 와서 자신들을 구원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기다림은, 메시야가 오시면 세상은 뒤바뀌고 자신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기다림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희망하며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림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다림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불확신 속에서의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일방적인 약속에 대한 것이라는 측면이 있고, 또한 오기로 되어있다는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반드시 온다고 약속되었기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게으르고 안일한 나태나 방종이 아닙니다. 그 기다림은 전폭적인 실존으로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이고 그 기다림에 온 생을 천착하는 것인데 그렇게 함에는 메시야가 더 빨리 오도록 거기에 참여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따라서 메시야를 기다림에는 내가 메시야에게로 나아감의 적극적인 행위가 포함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메시야를 기다림은 내가 메시야에게로 가기에 메시야가 오는 것으로, 기다림의 적극성을 강조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야에게로 가지 않는 것은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다. 기다림과 찾아감은 강조점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고 기다림의 진실성에 대한 진위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메시야에게로 찾아가는 기다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습에서 그 모범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의 신앙의 모습과 태도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정체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내는 편지 서두에 예수님에 대한 일정한 호칭이 반복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호칭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라는 호칭은 관계를, “예수”는 자연인의 이름을, 그리스도는 직임을 나타냅니다.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신앙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각각 받은 은사가 어떤 것이든지 그 은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데 집중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 때문에 분쟁이 많았습니다. 비록 은사를 활용하는 태도의 성숙하지 못함 때문에 책망을 받았지만 모든 은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기다리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자연인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재한 인물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 자연인 예수님에게 두 가지 다른 이름을 붙여 불렀습니다. 예수님에게 붙인 호칭은 “주”입니다. 주는 헬라어로 퀴리오스(κύριος)입니다. 이 호칭은 당시 로마 황제에게만 붙일 수 있는 호칭입니다. 이는 그 당시 로마 제국 안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황제는 로마제국 안에서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만인지상의 존재였습니다. 누구든지 황제를 절대적인 퀴리오스로 인정하면 소위 팍스 로마나의 수혜자가 되고 황제를 퀴리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기본적인 안전도 담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퀴리오스라는 호칭을 예수님께만 붙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와 근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기다리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을 또 다른 호칭으로 불렀습니다. 그 호칭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히브리어의 헬라어 번역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세주,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언젠가 메시아가 와서 자신들을 구원하고 세상에 평화를 실현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불렀습니다.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황제를 실제적인 메시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예수님 즉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황제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로마 제국이 메시야가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시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하거나 오해한 이들은 팍스 로마나를 메시야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정치 경제 문화가 점점 발전하고 좋아지는 것으로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도 그런 것들이 점점 발전하는 것을 지향합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그런 것들이 점점 발전하여 좋아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도 정치 경제 문화의 긍정적 발전에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임함은 그런 것과는 차원과 패러다임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이 그러한 사실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초자연적인 기적들과 장애인과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이전과는 다른 차원에서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경험하였던 사도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은 팍스 로마나가 보장하는 혜택을 마다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팍스 로마나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 것은 로마 제국이 제공하고 보장하는 것은 참 생명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참 생명이고 복음이라는 사실에 대한 삶으로의 신앙고백이고 실천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미국이라는 세계 초강대국이 보장하고 제공하는 것들이 하나님 나라의 생명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미국의 지도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성경적 가치관에 가까운 인물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지도자나 행정부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신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지도자가 나온다고 하여도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인간 지도자나 국가는 아무리 탁월해도 구원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국민 된 의무를 성실하고 바르게 잘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책임이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가 오셔서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할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은 메시야 통치를 지향하며 이 세상에서의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메시야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17-9)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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