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환 총장 “걸어 다니는 교회가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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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7-07-14 20:3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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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한교회(남일현 목사)는 교회 설립 26주년을 맞아 “하늘나라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7월 8일(토)부터 2일간 부흥회를 열었다. 강사 김인환 목사는 총신대학교와 대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아프리카 스와질란드 크리스천대학 총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남일현 목사의 총신대 은사이다. 김인환 목사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외국인 최초로 재단이사로 섬기고 있으며 회의차 방미했다.
김인환 목사는 8일 토요일 저녁에는 에베소서 2장 1-10절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걸작품", 9일 주일 오전에는 에베소서 2장 11-22절을 본문으로 "한 새 사람", 오후에는 요한복음 12장 23-26절을 본문으로 "위대한 능력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다음은 "한 새 사람"으로 주일 오전에 한 설교내용이다.
▲강사 김인환 목사 ⓒ 복음뉴스(BogEumNews.Com)
▲든든한교회 남일현 목사 ⓒ 복음뉴스(BogEumNews.Com)
교회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절대로 교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막상 교회가 무엇이냐 질문을 받으면 당황스럽다. 교회라는 것이 너무나 신비스러운 것이기에 그렇다. 창세기부터 이어지는 구속의 역사 속에서 아주 긴 과정을 거쳐 비로소 등장하는 실체이기에 교회를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렵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성경공부를 조직적으로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교회는 성경공부를 깊이 한다. 미국교회들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복음적인 교회가 계속적으로 성장하면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참된 모습은 여기서 나온다는 것을 느낀다. 한국교회는 냄비처럼 끓었다가 팍 식어버린다. 그만큼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과 말씀대로 인생을 사는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어휘도 혼란스럽다. 깊게 들어가면 무슨 말인지 모를 수밖에 없는 용어들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도 그중의 하나이다. 교회가 무엇인가? 여러분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례”도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지만 과연 세례가 무엇이고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인지 말하라 하면 멍해진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모르면서 교회생활을 잘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이루기도 어렵다. 사실은 불가능하다. 교회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생활을 하면 엉터리가 된다. 그런 교회는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없다.
특별히 든든한교회 26주년을 맞이하여 교회의 본질을 살펴보고 교회본질에 맞는 교회를 이루기위해 교회의 부속물인 우리가 어떻게 생활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교회의 기능을 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교회와 우리는 분리할 수 없다. 내가 곧 교회이고, 교회가 곧 나이다. 내 개인도 교회이지만 우리가 모인 모임도 교회이고, 사람과 교회라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성도들은 절대로 교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도 인생을 살 수도 없다.
일차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지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본문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한 새 사람’이다. 영어로는 ‘one new humanity’ 라고 번역한다. 성경을 보면 새롭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성경에 사용되는 새롭다는 것에는 3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첫째, 갱신과 회복의 의미이다. A가 완전히 없어지고 B라는 새로운 종류가 생겼다는 의미에서 새롭다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죄로 오염되어지고 타락된 인간을 예수님을 통해서 갱신하고 회복시키고 전환했다는 차원에서 새롭다는 말을 사용한다. 둘째, 생명이라는 의미에서 새롭다는 말을 사용한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새로운 것이기에 주님의 모든 생명이 주님의 모든 다양함과 생명과 능력이 반영되었다는 의미에서 새롭다는 단어를 사용한다. 셋째는 영원하다는 말이다. 전혀 새로운 종류가 또 생겨나는 차원에서 영원하다는 말이 아니라, 갱신되고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이 반영된 역동적인 모습들이 영원토록 존속한다는 의미에서 새롭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갱신되어지고 주님의 생명이 넘치고 영원토록 존속한다는 의미에서 ‘한 새 사람’을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지어진 사람이다. 구체적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총장이고 은사인 에드먼드 크라우니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정의한 것을 소개하면 교회는 첫째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언약 맺은 백성들의 회집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과 나라이다. 셋째, 성령의 교제이다. 삼위 하나님과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그러한 본질과 성격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핵심은 교회는 곧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성삼위 하나님 각위 사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셋째는 주어진 기능과 책임을 이런 맥락에서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에서 ‘한 새 사람’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지시해 주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교회라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고 성경 저작자들이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용도와 의미를 살펴보면 더욱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우리말 성경에는 교회라고 할 때 교회라는 의미는 신약에서는 주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 단어에 대한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의 고유명사이다. 전쟁의 발발과 진행과정과 결과를 알려주는 메신저의 소식을 들으려고 모든 동네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 모임을 로마문화에서는 이것을 에클레시아라고 부른다.
구약에서는 특별히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 자주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의 원래 히브리어 해당하는 단어는 ‘카할’이라는 명사이다. ‘카할’은 출애굽기 19장의 내용에서 가장 생생하게 모습을 그려준다. 출애굽기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내는 장면이 나오다가 19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내어 시내산에 야영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강림하실테니 시내산 앞에 다 모이라는 것이다. 언약을 맺는 목적으로 이스라엘 모든 민족들이 다 하나님 중심으로 모였다. 신명기 9장 10절에 보면 이 모임을 ‘카할’이라고 했다. 우리말 성경은 ‘총회’라고 번역했는데 헬라어 성경에서는 ‘에클레시아’로 번역했다. 이때부터 에클레시아 단어가 본격적으로 성경에 나타나면서 역사의 진행과정에 통해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은 출애굽기 19장 내용에 가장 근본적인 배경은 창세기 1장부터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을 하나로 하여 그 중심에 하나님이 좌정해 계시고 우리 인간들이 땅을 채우고 땅을 정복한 상태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큰 회집을 이루면서 하나님을 칭송하고 감사드리고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해서 하나님의 일을 지속적으로 이루어내는 일련의 모든 그림, 상황이 사실은 출애굽기 19장의 배경이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사실 출애굽기의 모든 배경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출애굽기 19장에서 그리는 교회라는 패턴의 가장 근본적인 배경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천지창조이다. 그때부터 에클레시아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의 역사의 진행과정을 통해 비로소 가시적으로 그림자적이기는 하지만 출애굽기 19장에 모습을 드러나 보인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참 실체 교회에 대한 일종의 그림자이고 모형이고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렇게 이루어진 교회가 예수님의 참 구속사역의 완결을 통해 새롭게 갱신이 되었다.
그때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언약을 맺는 모든 백성들의 회집, 이것이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갱신되었다. 구약의 언약이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갱신되어 새언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그 언약의 백성들도 새롭게 갱신되었다. 이제는 그들 모두가 다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주님의 생명이 넘쳐나는 그러한 백성들의 회집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백성들은 영원한 백성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신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회는 이미 창세기에서 보여준 것에 대한 완결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에 그려진 모든 에클레시아의 최종 완결판이 신약의 교회이다. 교회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시간물이다. 굉장히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이 많은 정성을 기울여서 온갖 노력을 하시면서 결국은 생성해 놓으신 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가 교회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참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의 산물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산물이고, 만유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사단의 모든 방해를 쳐부시고 궁극적으로 승리한 그 승리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교회는 하나님의 걸작품들이 하나로 유기적으로 묶여져 있는 그런 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장 중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교회는 기관이나 조직이나 건물이 아니다. 사람이다. 하나님이 물론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이 부패했을 때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재창조한 바로 그 걸작품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교회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서 사람의 모든 모습을 당연히 나타내야 한다.
우리 인간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불순종하는 사람이 있다. 중립의 사람은 근본적으로 결국은 불순종이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산 자와 죽은 자 두 부류 밖에 없다. 사실 에베소서 말씀을 보면 우리 모든 인간들은 모두가 다 아담부터 범죄한 자이기에 하나님과 분리된 자이다. 이들은 모두가 성경적인 정의에 의하면 죽은 자들이다. 아무리 멋있고 권력 있고 학식 많고 온갖 세상의 것을 누리는 자라고 할지라도 에베소서 1장 말씀을 보면 그들은 죽은 자이다. 그 죽은 자의 모습이 2장 1절 이하에 표현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죽은 자들이었다. 성경은 죽음을 분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육체와 영혼의 분리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흙으로 만드시고 호흡을 불어넣음으로 생명체가 되었는데,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가 육체적인 죽음이다. 누구나 다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영적인 죽음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맺는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쫓겨나는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성경은 영적인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인생을 출발한 자들이다.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이 미리 예정하시고 택하시고 사랑을 베푸셔서 적절한 시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주권으로 예수님을 믿게 함으로서 우리가 다시금 주님 때문에 하나님과 연합되었다. 이것을 성경은 다시 산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산 자들이다.
에베소서 2장 말씀을 보면 살았을 뿐만 아니라, 왜 살았는가.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믿는 자들을 대표해서 부활하셨는데, 그 부활의 생명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우리들에게 다 나누어주셨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고 했는데,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시다. 자신이 부활하심으로 가지게 된 영원한 생명, 그 생명을 우리 믿는 모든 자들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를 살려주는 영이라고 표현했다. 그 주님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가 산 자가 되었다. 우리가 지금 가진 생명은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인해 얻게 된 생명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하다. 영생한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영생하는 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알았기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 1:21)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죽는 것은 손실이다.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오늘 이 세상에서 예수믿고 난 후 그의 인생은 주님때문에 다시 산자가 되었다. 그것이 영생하는 생명이기에 죽는 것은 어떤 순간인가? 이 세상에서 모든 한계와 좌절을 극복하고 우리속에 남아있는 모든 죄성이 완전히 종결된 상태에서 주님의 영원한 영광이 찾는 바로 그 순간으로 보았기에 죽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든 생명을 다 바쳐서 죽음을 향하여 돌진하는 용기와 능력을 가진 사도 바울이었다. 그렇기에 온세상을 뒤집어 놓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 사람이다. 우리 모두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는 것을 믿으라.
여러분은 사도 바울 같은 그런 사도가 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사도 바울의 삶은 얼마든지 주님의 은총과 능력에 힘입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여러분들도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확신속에서 주를 위해 죽음으로 돌진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보라. 그러면 반드시 살아난다. 그런 인생을 살기위해 여러분 자신을 다 버리면 더 풍성하게 채워지는 역설적인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두 부류, 죽은 자와 산 자 밖에 없는데 우리는 산 자이다. 갱신되어지고 또 예수님의 생명이 넘치면 예수님의 생명이 영원한 것처럼 우리의 생명도 영원하다. 이런 사람들로 모여진 바로 이것을 성경은 교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이 교회는 인격과 삶으로서의 역동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교회라고 하며 교회건물을 잘 짓고, 주일만 예배당 안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주일 하루만 살면 사람일 수 있는가? 365일 동안 그리고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이 사람은 계속 살아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도 이 사람은 계속 살아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들이 주일 하루만 모여서 앉아 거룩한 채 하며 앉아 있다가, 교회 밖으로 나가면 개판이면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이것은 이중인격자이다.
원래 성도들이 이중인격자이다. 우리 속에는 옛사람과 새사람, 겉사람과 속사람 두 인격이 우리속에 존재하기에 우리는 이중인격자이다. 이런 우리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시키시고 훈련시켜서 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4: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씀한대로 더욱더 성장하고 잘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주일만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다. 여러분은 걸어 다니는 교회이다. 내가 없으면 교회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려놓으신 사람들이 다 없어지고 나면 교회가 있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들어진 우리들이 이렇게 ‘한 새 사람’을 이루어서는 다이나믹하게 하나님의 모든 윤리적인 성품, 능력, 지혜를 최대한으로 발휘하면서 매일 살아가야 한다.
주일에는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금 재확인하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헌신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과 능력과 지혜를 공급받고 튼튼한 사람으로 변해서 월요일 나가서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세상을 채워가야 한다. 문화를 변혁시키고 사회의 모든 악한 질서를 변화시키면서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한 새 사람’으로서 교회가 해야 할 존재론적인 책임이다.
마음속에 굳게 확신해야 할 것은 교회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이 사람 속에 내가 구성원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각인하라. 그리고는 내가 걸어 다니는 교회가 되어서 사람의 모든 모습을 드러내라. 하나님의 형상의 재창조되는 자랑스러운 모습,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들어진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발휘할 것인가? 말을 하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통해, 직장생활을 통해, 여러분의 모든 삶을 통해 이런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간다면 여러분 자신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여러분을 통해 가정이 변화되어지고, 교회에 있는 힘없는 성도들이 힘을 얻고, 교회를 통해 주변의 모든 사회가 변화되어지면서 뉴욕이 하나님이 나라로 바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사진과 설교자료 제공 복음뉴스(BogEu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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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범님의 댓글
이문범 ()30여년전 학교에서나 지금이나 여전히 열정적으로 사역하시는 교수님의 모습에 큰 도전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