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목사 “뭘 위해 나가고, 뭘 위해 남으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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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21-06-29 04:5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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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혼란과 전환의 시점에 살아왔다고 생각해온 내게 어느 날 한 언론사는 ‘혼란과 전환의 시점에 목회자와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연합감리교뉴스로부터 “무엇을 지킬 것인가?”라는 주제의 글을 부탁받았습니다. 연합감리교회가 분리를 앞두고 나간다 남는다 논란이 큰데 도대체 뭘 위하고, 뭘 지키려고 그러는 것이냐에 관한 내용의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영화 ‘곡성’의 대사 “뭣이 중한디, 뭣이 중하냐고?”가 유행했었습니다. 요즘 교단 분리의 갈등이 한인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며, 사람 개인은 물론 제도(institution)가 그것이 지닌 장점보다 단점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뭣이 중할까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yhr)가 자신의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에서 지적한 문제처럼, 멀쩡하던 개인들이 진영논리와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개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파괴적인 언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르는 모습을 우리는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말에도 양면성이 있는 법이고, 사람마다 각기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아 모두 해답일 수도 있다는 마음을 품고 대화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결국 ‘프로토콜’이라는 것도 ‘거룩한 대화(holy conferencing)’가 불가능해졌다는 판단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한인교회에 현재 일어나는 문제 역시 교단의 문제 자체에 대한 논의보다 그동안 우리 한인 공동체 내부에 오랜 기간 쌓여있던 앙금들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좋은 시절에는 무엇이라도 함께 할 파트너로 여기던 집단들이 이제는 갈등과 적대 관계로 이해되고, 그동안 공동체라 생각했던 집단 중 누가 내 편인지 판단해가며 편을 가르기 시작하게 되니, 목회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던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불안해지고, 어느 편에 서야 안전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어려울 때 인간의 가장 좋은 면이 드러나고, 못난 모습은 극대화되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나가야 하는 사람들은 나갈 준비 잘하고, 남으려 계획한 사람들은 남아서 잘하도록 교단이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던 나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키기 위해 나가는 것이고, 남는 것이 지키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시작된 나간다 또는 남는다는 말 자체에 대한 논쟁도 우리가 알던 ‘연합감리교회’가 불가능해졌다고 보기 때문에 별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분리된 다음 남는 교단이 ‘연합’이라는 단어 쓰는 것도 좀 그렇고, 분리되어 나가면서 ‘글로벌’이라는 단어 쓰는 것도 모순이라는 말이 많이 회자됩니다.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에, 나는 이런 말장난으로 우리가 다시 만날 다리를 무너뜨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남거나 나가거나와 상관없이, 현재의 이런 현실에 아파하고 겸허하게 남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리교단은 교리로 만들어진 교회가 아닙니다.
나는 연합감리교회를 가능하게 한 것이 신학이나 제도가 아닌 ‘거룩한 대화’였다고 봅니다.
이단이 아니면 좌나 우나 보수나 진보나 상호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시대 선교적 필요에 따른 신앙운동으로 생겨나, 연회와 총회가 ‘거룩한 대화’(holy conferencing)를 통해 내린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안에는 대화를 통해 공동선을 추구하는 문화보다 나와 의견이 다른 개인이나 단체를 적대화하며, 교화의 대상으로 여기는 문화가 팽배합니다. 신념의 싸움이 이 지경에 이르면 ‘거룩한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누구는 신념이 없어서 ‘연회’나 ‘총회’의 결정을 존중할까요? 아닙니다. 이것이 없으면 글로벌한 교회이지만, 제도적이나 교리적으로 느슨한 현재의 우리 교단이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상호존중 신뢰성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그동안 연합감리교회가 귀하게 여기던 ‘열린 마음과 열린 가슴 그리고 열린 문’은 우리의 자랑이 아닌 부담이 되어버렸고, 연합감리교회의 자랑이었던 ‘상호연대주의(connectionalism)’는 서로를 속박하는 굴레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연회는 목회자들이 선교적 동반자요, 동지로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모임이었습니다. ‘순회전도자(circuit riders)’ 시대 전통에서 연회 ‘정회원들의 모임(clergy session)’은 항상 ‘생전에 우리가 또다시 만났네(Are Ye yet alive!)’ 찬송을 부르며 서로를 반기고, 살아있어 다시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모두가 싸움터 같은 세상에 나가 복음 증거를 위해 생명 바치는 헌신을 하다 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노래가 없어졌고, 어쩌면 더는 감리교 목사가 된다는 것에 그런 노래를 부를 자격이나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직위원회(Board of Ordained Ministry)가 복음증거 동지들을 세우는 곳이 아닌 연합감리교 목사들 가운데 혜택과 특권을 누릴 노동조합원들을 선별하기 위해 문을 지키는 곳이 되었다는 말도 무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가거나 남아서 무엇을 지켜내야 할까요?
무엇보다 복음증거의 선교적 마인드와 문화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파송제도라는 것이 의미가 있고, 성직공동체가 동지적 애정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단 감독제도를 포함해, 파송제도까지 이런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교회가 존재해야 할 목적은 나가거나 남거나와 상관없이, 잃은 영혼을 살리고, 지극히 작은 자들을 사랑하며, 복음을 증거하고, 요한 웨슬리의 ‘성서적 구원’을 이루어내는 일을 위해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일에 동참하는 사람이 어떤 제도보다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를 전멸하려 열심이었던 사울에게 교회를 핍박하는 일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라고 하면서 성령의 법을 따라 사랑하며 열매 맺는 삶을 살라(갈 5:13-26)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교단 분리뿐 아니라 앞으로 더 큰 어려운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연합감리교단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기성 교단들 역시 지난 20여 년간 크게는 40%, 작게는 20% 정도 교세가 극감했으며, 코로나 사태 이후에는 이마저 지키기 어려워졌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 나가고 남는 문제가 계속 지연되거나 갈등이 극대화되면, 교세의 지속가능성은 더욱더 어려워질 위험이 있습니다.
요즘 사도 바울이 외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는 말씀이 많이 생각납니다.
이와 연관해, 토드 볼싱거(Tod Bolsinger)라는 저자가 자신의 책 <노를 저어 산을 넘기: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서의 크리스천 리더쉽(Canoeing the Mountains: Christian Leadership in uncharted territory)>에서 말한 오늘 이 시대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인격과 실력 그리고 인간관계의 중요성이라 했던 것도 같이 떠올려집니다.
교단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게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어쩌고… 아무리 말을 해도 그런 말을 하는 우리 자신들이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인격과 실력 그리고 인간관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연합감리교회만큼 신학교육 수준이 높고, 제도적으로 잘 되어있는 곳에서, 왜 오늘의 암담한 현실을 해결하지 못하고, 분열과 갈등을 드러내고 있을까요?
90년대 우리 교단의 제자사역부에서 많이 했던 ‘데밍의 질적향상 추구(Quest for Quality) 세미나’의 기본 이론은 “결과물이 잘 안 나올 때 사람을 비난하기 이전에 과정을 고쳐라.”였습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데밍이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 바로 그것이고, 그런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문제가 커진 데에는 우리가 제도와 과정을 고치려 하지는 않고, 사람을 비난하는 일에는 서로 너무 빨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나는 ‘중도’의 입장에서 양비론을 말한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연합감리교회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거룩한 대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양극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느라 대화조차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해서라도 ‘대화’의 공간을 지켜보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겪어보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항상 혼란과 전환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일상으로의 회복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간 삶의 질적 향상의 중요성과 예수 목회 본질로의 회복을 생각합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이미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전도의 문이 막히고 교세가 급감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다시 예수가 답이고, 예수가 시대의 소망이라는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는 신뢰와 실력을 회복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 인격 향상’일 것입니다.
전도가 안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나 교회의 모습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단 분리의 문제를 놓고도 목사들이 고민하고 던지는 질문들을 평신도들이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평신도에게 물으면 교단을 지킨다는 것보다 예수 잘 믿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 말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현실 가운데 우리는 지금 다른 기성 교단들이 이미 10여 년 전 진통을 겪고, 교세를 감소시켰던 사안을 가지고 이러고 있으니, 이 모습을 가지고 전도가 어찌 가능하고 어찌 부흥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성도가 되고, 시대의 소망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또 다른 문제는 우리 스스로 인격과 실력이 있다고 여기지만, 결과물에 그것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목회를 잘하기 위해 자기성찰과 뼈를 깎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나는 목사로서 설교 제대로 해야 한다는 부담이 목회 기간이 늘어날수록 더 커집니다. 지난 40년을 거의 매주 설교했는데, 그 어떤 설교도 부끄럽지 않은 설교가 없는 것 같습니다.
목회를 생각해봐도, 아무리 변명하려 해도, 교인들에게 미안하고 민망한 모습이 많습니다. 아직도 못 나게 노는 교인들 미운 생각에 예수님 골고다 십자가 찬송은 부르고 싶지도 않고, 선한 목자라는 성경구절이 나오면 외면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목회 제대로 하고 설교 제대로 잘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합니다.
롤로 메이는 전환시대에 필요한 것이 ‘창조하는 용기’라고 했고, 수잔 뷰몬트는 ‘옛날 잘하던 것 더 잘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뜻 잘 살피고 진실한 존재가 되어 성령이 열어주시는 새 역사를 잘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웨슬리도 이런 것들을 ‘거룩함의 회복’이라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말하는 예수의 ‘희년’ 목회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분리 문제로만 혼돈을 경험하고 있는 것인지, 목회자적인 양심과 정직성을 가지고 우리의 상황을 냉철하게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단 분리 문제가 아니라도 교회에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었고, 주일학교는 없어지고 있었으며, 그냥 목회가 안 되고 있었던 것인데, 목회 엉망으로 하는 우리 목사들이 제대로 목회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과 정당성을 이 문제로 돌리고, 교단 지도자들이 교단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만들어가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교단 분리를 말할 때 우리가 정말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간판만 감리교회가 아니라 정말 감리교적인 정신과 신학을 가지고 목회를 했는지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감리교회가 처음 가졌던 교리와 정신 그리고 훈련을 게을리하고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지, 심지어 무지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아서 지키겠다는 사람들이나 나가서 새롭게 뭘 하겠다는 사람들이나 과제는 동일합니다. 예수 잘 믿는 것입니다. 나가서 잘 믿을 것 같으면 나가고, 남아서 잘 믿을 것 같으면 남는 것입니다. 결국 어디에 있건 웨슬리의 영성을 회복하고 선교적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에 대한 의견이 달라 심하게 다투고 각자의 길을 갔지만, 갈라져서 서로 주의 일을 잘 감당했던 것을 감사하고 칭찬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감리교회가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감리교회가 생명을 잃어버리고 능력이 없는 종교의 형태가 되어 죽은 종파로 남는 것이다. 감리교회가 처음 시작했던 교리와 정신과 훈련을 게을리 한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라고 했던 요한 웨슬리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감리교인들이 성령의 능력이나 감동이나 우리를 위대하게 만드는 영성을 잃어버리고도 만족하게 사는 것이다.”
김정호 목사(후러싱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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