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 목사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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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21-05-30 03:3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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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과 정신세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창조하였고, 자유의지란 그 어떤 원인과 동기 부여 없이도 스스로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과학은 무엇이든지 원인 결과의 방식으로 규명하는 데, 인간의 자유의지란 원인 없이 무엇이나 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이 인간의 심리나 정신을 탐구하면서 무리수를 두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규명하였다는 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고 이러한 정신세계에서의 갈등과 문제가 육체로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육체는 정신에 부속되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데, 그는 정신 자체도 무의식과 의식으로 나누면서 심층적으로 그 원인을 규명하려고 하였습니다. 학문과 과학계에서 모호하기만 했던 인간 정신을 나름 과학적으로 설명하자 학계는 대단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주장하는 인간 무의식의 존재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접근이었기 때문에 흥미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 무의식을 언뜻 생각하면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은 현상들이 의식의 밑바닥에 인과관계로 얽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 정신세계의 활동은 이런 무의식 세계에서 일어나며, 의식 세계로 나타나는 것은 물 위로 떠 오른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인간 무의식의 존재와 그 의미를 강조한 결과 의식세계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장으로는 무의식의 세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억압과 압력인데, 무의식이 의식세계로 올라오지 못하는 이유는 억압과 압력 때문이고 무의식이 점차 성장하여 결국 의식 수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식 수준에서의 현상들에 대한 원인 규명이 어렵던 심리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주장과 이론은 무신론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이해가 기독교의 인간관과 다르고 인간 탐구의 방법 또한 기독교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치명적인 주장은 인간의 모든 갈등과 억압과 압력 대부분이 성적인 것에서부터 나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과 이론의 폐해는 매우 심각하고 치명적입니다. 그의 주장과 이론은 철저한 무신론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의 인간 이해의 접근 방법이 인간의 정신과 심리를 알 수 있는 좋은 도구라는 가치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기독교인 중에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프로이트의 인간 정신과 성 이해는 단순한 학문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목적과 지향성을 왜곡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데 그의 이론은 인간을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합니다. 성경은 모든 불행의 원인을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의 결과로 보는데, 그는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성욕의 억압과 억제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억제된 성을 해방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 성경적으로 표현하자면 성의 해방이 곧 인간 구원이라고 주장한 셈입니다. 그의 이론은 그의 후학들에 의해 인류에게 더 심각한 폐해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신분석이 성경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나름 유용성과 이바지하는 바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현대적 성 해방의 단초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고 그의 정신분석을 이용하여 기독교가 인간성과 성을 억압했다고 비판하는 학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신분석이론을 이용하여 기독교가 인간성과 성을 억압했다고 말하며 그 억압에서 벗어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1960년대에 성 해방 운동과 반문화운동으로 폭발하였습니다. 반기독교나 반 서구적 입장에서 활동한 대표적 인물 중에 오토 그로스와 빌헬름 라이히가 있고, 또한 철학자로서 정신분석 이론을 사용하여 기독교를 비판하는 대표적 인물로는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 미셸 푸코가 있습니다. 이들은 정치 사상적으로 좌파 또는 네오마르크스주의자이고 모두 성 혁명과 프리섹스를 옹호합니다. 오토 그로스는 지나치게 무리한 주장을 하다가 주류 정신분석 운동에서 축출당하였으나 그들 중 대부분은 지금까지 현대적 성 해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유대인 빌헬름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제자이며 정신분석 의사이고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그는 프로이트의 “성욕론”을 확대하여, “오르가슴 능력”(orgastic potency)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였습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신체적 오르가슴의 쾌락이 행복의 최고의 경지이고 그 쾌락을 반복 경험하게 되면 노이로제와 모든 신체의 질병도 치유되지만, 성욕의 억제는 온갖 질병뿐 아니라 파시즘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가난한 지역에 무료 성 상담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사람들에게 오르가슴 능력을 위한 정신분석적 상담과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정치적 조언을 해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 해방 사상이었습니다. 그는 성을 도덕적 평가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과학적 정신분석의 대상으로 보았고, 그 같은 이론에 근거하여 서구에서 실패한 공산혁명에 대응하여 새로운 혁명 전략, 즉 성 혁명을 제안하였으며, 그 실현을 위해 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그는 피임, 이혼, 낙태 그리고 동성애를 옹호하였고 성 해방을 위해 청소년들에게 피임 도구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특히 그는 “억압은 악”이라고 주장하면서, 오스트리아 청소년과 미혼자들에게 프리섹스를 교육하였습니다.
프로이트는 기존의 문명을 성적 억압의 결과로 보았고 라이히는 성적 억압의 주된 이유는 기존 계급구조를 현상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해방 이론을 성해방이론에 적용하였습니다. 그는 성을 해방함으로 사회적 억압을 조장하는 파시즘을 치료할 수 있고, 공산주의 정치혁명을 완수함으로써 “유토피아”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가정, 학교, 그리고 교회가 성 억압을 조장하고 있다고 보았고, 성 혁명의 실제 투쟁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엽기적이라고 할 수준의 도를 넘는 성 해방운동에 집착하다가 공산당과 정신분석학계에서조차 축출당하였고 그를 반대한 의사들에 의해 사기죄로 고발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으며 1957년에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주장과 이론과 활동을 비판하지만, 그의 활동은 현대의 성 해방운동에 대하여 럭비공처럼 예측할 수 없는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나 미셀 푸코 같은 이들에 대한 네오마르크스주의에서의 평가는 다양하지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혁명 이론을 성 해방과 연계시키며 가정과 교회와 학교는 성을 억압하는 권력기관이라고 비판하였다는 점에서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음을 충분히 간파할 수 있습니다. 마르쿠제는 그의 작품 “에로스와 문명”을 통해 생물학의 사회적 의미, 즉 계급 투쟁이 아니라 본능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미르쿠제와 프랑크푸르트 학파, 빌렐름 라이히와 미셀 푸코의 주장과 이론들은 68혁명, 프리섹스 운동, 반문화운동이라고 부르는 성 혁명에 불을 질렀고 오늘날 동성애 운동, 페미니즘, 젠더주의 등 온갖 성 해방운동이 그들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동성애자들이나 페미니즘 그리고 젠더주의자들은 그들을 계승하고 있으며 성적 다양성과 소수자 인권 보호라는 이름으로 성 혁명과 그것의 합법화를 소위 억압적 관용의 방식으로 관철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과 한국에서는 포르노 수준의 성교육을 시행하는 학교가 늘어나고 있고 전통적 가정과 가치 질서가 해체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벌거벗음과 부끄러움을 상식적으로 지나치게 성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마치 성의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는 성에 대한 일체의 억압 없는 자유와 개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서 아담과 하와가“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고, 창세기 3장 10절에서는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벌거벗었다는 사실은 같지만, 선악과를 먹기 전과 후가 다릅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부끄럽지 아니하였으나 따먹은 후에는 두려워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부끄럽게 느낀 감정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듯이 단순히 옷을 입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끄러워하다’라는 단어를 윤리 도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히브리어의 ‘부끄러워하다’라는 용어인 ‘보쉬’(בּוֹשׁ)는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① 적과 원수들이 그들의 노력이 좌절된 후 도주하게 된 경우, ② 예상치 못한 재난을 당한 사람에 대해, ③ 수확의 희망이 사라진 농부에 대해, ④ 낙담하여 어지러워진 마음에 대해 ⑤ 다른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소망을 실망시키는 것 등에 대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인간의 상태라는 것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의미와 반대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상황은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전제된 상황이고 죄를 범한 이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상황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안전하고 결핍이 없었기 때문에 행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깨어진 이후에는 그 모든 풍족과 안전과 행복이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에게는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이 두려움에는 당연히 수치심도 동반되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것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고 부끄러워한 것은 단순히 성적인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결과로 찾아온 두려움의 일부로서의 부끄러움입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도 성경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나 세상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당연하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중요한 성경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더 치명적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나타났던 유무상통(有無相通,행 4:32)의 하나님 나라 현상을 공산주의 이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오해하는 것이나,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을 성의 완전한 자유와 해방의 상태라고 상상하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무지이며 불신앙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죄를 범하기 이전 상태로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에 아래서의 상태에 대한 설명이고 묘사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1:31, 2:2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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