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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근 목사 “창립 50주년: 하늘 색깔 잃어버린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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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2ㆍ2022-10-14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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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감리교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기념 주일인 10월 9일 주일예배에서 강원근 목사는 누가복음 7:11-16 말씀을 본문으로 “창립 50주년: 하늘 색깔 잃어버린 세상에서”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다음은 정리하여 아멘넷에 기고한 내용이다. 

 

 

1. 들어가는 말: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는 시대

 

최근에 인류의 발전 역사를 보여주는 간단한 그림 한 장을 보고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 그림은 이런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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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처음 시작할 때는 신체 구조상 하늘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얼굴을 계속해서 똑바로 볼 수 없는 구조였기에 주로 땅을 보면서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인류의 허리와 목이 펴지면서 비로소 상대의 얼굴을 장시간 응시할 수 있게 되면서 인류는 서로 소통하고, 서로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서 꿈과 소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가 되면서 이 인류는 갈수록 상대방을 보거나 하늘을 보기보다는 주로 컴퓨터나 TV를 많이 보면서 허리가 구부정해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신체구조가 고대 시대로 회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학 연구에 따르면 아이를 마주보면서 키우면 아이가 자폐증에 걸릴 확률이 낮아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옥시토신이라고 하는 사랑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입니다. 반려견도 자주 눈을 맞추면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반려견에게도 주인에게도 좋다고 합니다. 우리 서로 자주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가벼운 미소를 짓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얼굴 - 얼이 지나가는 굴

 

‘얼굴’이라는 단어는 순수한 한국어로서 ‘얼이 지나가는 굴(tunnel)’이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정신이 지나가는 통로’라는 뜻으로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정신과 복잡한 내면의 총체를 대략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 번은 제가 아는 목사님과 그 분의 친구들이 상담 전문가를 초청해서 몇 번에 걸쳐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첫날 강의가 끝나고 질문을 받는 시간에 수강자 한 분이 손을 들어서 말을 했습니다. “강사님은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상담에 대해서 강조하시는데, 강사님의 얼굴을 보면 너무 침울한 얼굴입니다. 얼굴은 얼이 지나가는 굴인데, 침울한 얼굴로 용기와 희망을 말하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강사는 그 다음 날 강의 시간이 되었을 때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 진실로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강사의 얼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언급한 사람이나, 또 그 언급을 듣고서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 사과한 사람이나 모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3. 유서프 카쉬: 얼굴의 표정을 잘 잡아낸 사람

 

지난 20세기에 사람의 얼굴 특히 유명인의 얼굴 표정을 아주 잘 잡아낸 사람이 캐나다의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Yousuf Karsh)’입니다.  그가 93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60여년 동안 20세기를 이끌었던 세기의 위인들은 거의 모두 이 사람의 카메라 렌즈를 거쳐 갔습니다.  

 

1941년 12월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이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카쉬는 케나다 총리의 주선으로 처칠의 인물 사진을 찍을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진을 찍을 방에 있는 가구를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대신 텅 빈 공간을 밝은 빛으로 환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방으로 들어온 처칠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만면에 웃음을 띈 행복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편안하게 의자에 앉았습니다.  당시 처칠은 자주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에서도 그런 모습의 자신이 나오기를 원하고,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었습니다.

 

카쉬는 처칠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서 몇 번 사진을 찍더니 갑자기 사진 찍기를 멈추고 처칠에게 다가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처칠의 입에서 파이프 담배를 빼 버렸습니다. 이 무례한 행동에 처칠은 즉각 깊게 찡그린 얼굴이 되어 카쉬를 향해 그의 머리를 호전적으로 쳐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은 노여움으로 흔들리며 카쉬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서 곧 큰소리칠 것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카쉬는 계속해서 셔터를 누르면서, 처칠의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포효하는 사자(The Lion’s Roar)’라는 제목의 인물사진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처칠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사진을 찍은 카쉬는 처칠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편안한 안락의자에 않아서 찍었던 처음 사진과 나중에 분노하며 찍었던 사진을 비교해서 처칠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처음 사진은 복덕방에서 장기를 두는 노인의 모습과도 같은 평범한 사진인 반면, 두 번째 사진은 히틀러조차도 도저히 꺾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그야말로 대영제국의 수상과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후 이 사진은 영국의 5파운드 지폐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60년 동안 무려 50,000장이 넘는 인물 사진을 남긴 카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얼굴이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독특한 얼굴과, 독특한 달란트와, 독특한 인생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 독특한 것들을 감사함으로 누리고, 또 이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줄로 믿습니다.

 

4. 슬픈 얼굴: 하나님의 얼굴

 

프랑스 철학자로서 우리 기독인들에게 많은 영감은 주는 레비나스는 얼굴 중에서 가장 거부할 수 없는 얼굴은 슬픈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슬픈 얼굴은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슬픈 얼굴은 절망할 때, 굶주릴 때, 목마를 때, 헐벗을 때, 병들었을 때, 억울한 일로 감옥에 갇혔을 때 가지게 되는 얼굴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슬픈 얼굴을 볼 때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함께 마태복음 25:35-36을 읽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즉,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바로 그들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을 하자 사람들은 이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꾸합니다. “주여, 우리가 언제 주님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 때 주님을 돌보았습니까? 우리는 그런 적이 없는데요…”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여기서“지극히 작은 자”는 슬픈 얼굴을 가진 자 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슬픈 얼굴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함께 마음 아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슬픈 얼굴을 가지게 된 자에게 우리가 자비를 베풀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한 것과 똑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5. 본문: 슬픈 얼굴의 과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오늘 본문은 외아들을 잃고서 슬퍼하고 있는 과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과부는 그야말로 그 사회에서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데가 없는 최악의 지위였습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자는 늘 남자에게 종속되고 보호받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부재 시에는 큰 오빠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남편이 죽으면 장남에게 종속되는 것이 그 당시 여인의 일생이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시대에 재산의 상속은 철저하게 남자 후손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위한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는 한, 아내의 몫은 장남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과부의 경우에도, 남편의 모든 유산이 외아들에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과부에게는 이 아들만이 삶의 유일한 의지요 방패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갑자기 죽음으로 가장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외아들의 유산이 자연스럽게 죽은 남편의 형제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외아들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과부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극진한 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그간 유일하게 남아 있던 ‘사회적 보호막’이 사라지는 극심한 삶의 충격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과부의 딱한 처지를 이해해서, 과부 외아들의 장례 행렬에는 ‘나인 성’의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성경은 언급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장례 행렬이 지나가고 있을 때, 그곳에는 또 다른 큰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중에, 예수님은 갑자기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장례 행렬에서 통곡하며 걷고 있는 과부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울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우리 함께 누가복음 7:13을 읽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이렇게 과부를 위로하신 예수님은 이제는 죽은 외아들의 시체가 담겨 있는 관으로 다가 가셔서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을 살려내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청년이 살아나자 예수님은 그냥 가시지 않으시고,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과부에게 가셔서 “그를 어미에게 건네 주셨다”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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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적보다도 더 중요한 긍휼의 마음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읽으면서 죽은 청년이 다시 살아난 ‘기적’에 초점을 맞춥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갈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말합니다(고전 1:22).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유대인조차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표적과 기적을 더 갈구한다고 한탄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초점은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과부를 향한 ‘긍휼’ 입니다. 바로 이 과부에 대한 불쌍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 신앙의 순서와 관심도 ‘기적’보다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선적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람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있을 때, 그 긍휼 때문에 우리의 삶은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아픈 자들을 위해 손을 얹은 즉,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긍휼의 마음이 없어지는 순간 그 아무리 대단한 은사를 가졌을지라도, 그 은사는 그 때부터 변질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중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구절은 “예수께서 그 외아들을 어미에게 [돌려]주신대”라고 표현된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인생의 보물이었던 외아들을 살려서, 다시 ‘돌려’ 주신 것입니다. 나인성의 과부는 결코 예수님에게 아들을 살려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적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그 사회에서 가장 미천한 한 여인을 위해서, 기적을 위한 대본을 직접 쓰시고, 연출하시고, 제일 나중에는 죽었던 아들을 다시 어머니 손에 쥐어 주는 ‘감동’까지 이끌어내셨던 것입니다.

 

그 기적을 체험한 과부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슬픔의 얼굴이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의 얼굴로 변화가 되는 그 모습, 그 모습을 보시면서 우리 예수님 또한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가장 힘없고 미천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을 줌으로, 완벽한 ‘감동’을 선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누이 말씀하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일 줄로 믿습니다.

 

7. 단독자의 모습을 뛰어 넘어 슬픈 얼굴의 타인에게 관심을

 

오늘날 우리들 신앙의 가장 큰 병패 중에 하나는 모든 것이 나 자신에게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헤겔까지 인류는 개별 인간을 전체 공동체 안에 있는 개인으로 이해했습니다. 어떤 큰 틀 속에 있어서, 독특한 단독자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인간입니다. 그러다 기독교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가 나와서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개인을 부각시켰습니다. 즉,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 단독자로서 신과의 대면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획기적이고, 가슴 떨리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우리 모두 QT(경건의 시간)를 할 때, 또 찬양할 때 이런 자세로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만 바로 보는 단독자에게는 그 옆에 있는 무수한 슬픈 얼굴의 타인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를 추구하다 보니, 신앙의 넓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유대인이 구하는 기적과 표적, 그리고 헬라인들이 찾는 지혜는 지금 우리들도 구하고 있는 것들인데, 문제는 이 기적과 지혜도 나만을 위한 기적과 지혜로 국한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은 좀 다른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그분 자신의 프로젝트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오늘의 본문 이야기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과 업적을 위해서 바삐 이 장면을 지나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분의 예정된 계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섭리’ 속에서 만난 과부를 향한 긍휼의 감정을 거부하지 않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8. 결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하나님께 한 것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제가 중학교때부터 들었던 팝송 중에서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팝송 중에 하나는 돈 맥클린이 불렀던 ‘빈샌트(Vincent)’라는 곡입니다. Starry, starry night (별이 쏟아지는 밤…)  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묵상을 노래로 만든 것입니다.

 

사진작가 카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 잘 알려진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묘사했다면,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일상의 삶을 연명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서 아예 얼굴자체가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위대하게 묘사한 사람이 인류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인 빈센트 반 고호입니다. 네덜란드 사람으로서 프랑스 파리의 화방에서 일하던 고호는 종교심으로 불타는 열망을 안고서 목사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암스테르담에서 신학을 공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학 공부를 중도에 포기하고 25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소개로 벨기에 남부의 탄광촌인 ‘보리나주’로 가서 그 곳 교회에서 목사 견습생, 즉 전도사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1년 만에 쫓겨나게 되는데, 그곳에서의 생활을 전후로 그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고통받는 많은 인생들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가난한 농부, 중노동하는 광부, 버림받은 창녀, 쉬는 시간 없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직물공 등이 그의 초기 작품세계라고 하겠습니다. 특별히 <석탄 자루를 나르는 광부의 아내들>이란 작품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추운 한 겨울에 광부의 아내들이 채굴 후 버려진 부산물 더미에서 쓸 만한 석탄을 골라내어, 그것을 등에 지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이 가난한 여인들의 등에는 석탄자루가 얹혀 있고, 허리는 90도로 꺾여 있기 때문에 이들은 하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땅 속 갱도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하늘을 볼 수 없고, 아내들은 짐을 나르기 때문에 하늘을 볼 수 없습니다. 고호가 이 그림에서 그린 하늘의 색깔은 땅의 색깔과 똑 같은 진한 흙색입니다. 하늘을 볼 수 없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슬픈 인생을 암울한 색채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호가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이렇게 땅을 하늘로 삼고서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허리가 꺾인 여인들과 함께 걸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허리 꺾인 여인들과 함께 걷는다면, 먼 훗날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허리가 꺾여 하늘을 보지 못하고 걸어가고 있었을 때 바로 너가 나와 함께 걸었느니라…”하며 우리에게 감사를 표시하며, 칭찬하실 것입니다.  우리 함께 마태복음 25:40을 읽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은 뉴욕감리교회 창립 5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 교회의 출발은 53년전 고단하고 지친 슬픈 얼굴의 선원들을 위로하는 사역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정신을 계속 이어나가 향후에 더더욱 하늘 색깔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마음을 더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코로나 시대, 인플레이션의 시대, 경제 불황의 시대, 전쟁의 시대, 빈익빈 부익부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 상황 가운데서 하루에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슬픈 얼굴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더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긍휼의 사람, 슬픈 얼굴을 거부하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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