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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목사 세미나 “한국교회 성장과 쇠퇴의 한국교회사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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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ㆍ2007-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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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하여 의미있는 영적대각성연합집회를 인도하고 있는 박용규 목사(총신대학교 신대원 역사신학교수)가 6월 25일(월) 오전 10시부터 2시간동안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국교회 성장과 쇠퇴의 한국교회사적 평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인도했다.

박 목사는 세미나를 통해 평양대부흥 전후부터 오늘날까지의 한국교회의 부흥과 쇠퇴 원인을 분석했다. 또 오늘날의 시점에서 교회가 쇠퇴하지 않고 부흥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박 목사는 세미나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심령의 변화를 요구했다. 세미나가 끝난후 질답도 없이 기도로 들어갔다.

필라, 뉴저지, 뉴욕에서 참석한 목회자들은 두명씩 손을 잡고 서로의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이제 부흥은 확대되어 두명이 아니라 4명의 손을 잡고 기도를 햇다. 이어 하디 선교사가 100년전에 했던 것 처럼 서로의 마음을 열고 서로의 기도제목을 놓고 통성기도를 인도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3명의 목회자가 나와 기도를 했다.

"나는 기도를 잘못하지만 나와 기도할수 밖에 없다",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장작개비가 되어 이제는 더 이상 나누어 줄 떡이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이 될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부흥의 방관자가 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라고 울부짖었다.

다음은 박용규 목사의 세미나 내용이다.

어제 저녁집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회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는 않았지만 50개 이상의 교회가 연합으로 모였으며, 회개와 부흥이라는 주제가 분명한 집회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나로 하여금 여러 강사초빙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집중하도록 하신 것 같다. 제가 이곳에 선 것은 신학교교수로서 기능의 차이로 안 것을 나누고자 한다.

오늘 강의는 여러번 한 것이다. 한국 교갱협 1200명 모인 곳에서, 250명이 모인 성시화 지도자 모임에서, 시카고 지역 목회자들이 모였을 때, 보스톤의 30명의 목회자들 모임에서, 그리고 지난 달 KAPC 뉴욕총회에서 일부를 다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내용들은 아니다.

이것은 7년동안 행한 목회와 15년동안 신학교의 교회사 교수로서 실존적으로 부딪힌 주제였고, 언제 부흥하고 쇠퇴했는지에 대한 경험을 통해, 나아가야할 방향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실제적인 실존적 고민의 산물이다.

14만 4천명이 주는 교훈

2006년 통계청에서 종교인구를 발표했다. 통계청 종교인구는 교계에서 발표하는 수치와 달리 신뢰성을 주는 통계치이어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개신교 인구는 1995-2005년간 10년 동안 876만에서 861만으로 약 2%가 줄었다. 반면, 카톨릭은 295만에서 514만의 78%가 성장했다. 카톨릭이 한국선교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220년의 역사에서 10년간 이렇게 성장한 사례는 없다. 이러한 성장세가 계속된다면 10년후 개신교를 능가할 것이다.

한국 개신교의 25% 점유는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통계는 기독교 개신교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객관적으로 밝혀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통계는 그동안의 한국교회의 침체의 원인을 통계가 보여주는 면도 있지만 줄은 개신교인구 2%를 눈여겨 본다. 2%는 성경에 나오는 천상의 구원을 받는 14만 4천명이다.

이 상징적 숫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평양 대부흥 운동을 앞둔 싯점에서의 종교인구의 이러한 상징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한국교회가 숫자상징의 충격을 극복하고 성장하느냐 아니면 유럽교회 처럼 후퇴하느냐 하는 시점에 있다. 최근 한국교회의 쇠퇴가 일면서, 사람들간에는 ‘개신교에 희망이 있는가?’, ‘깊은 밤을 맞은 기독교’라는 말이 회자 되기까지 했다.

100년전 한국교회 선교의 급성장 원인

1910년 영국 에딘버러 컨퍼런스에서 <24년된 한국교회 선교>가 급성장하게 된 원인에 대한 분석했다. 그것은 1)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우수성 2)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선교정책의 탁월성 3) 시대적으로 종교적 공백기 때문이었다.

1)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우수성.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우수한 사람들이며, 좋은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선교사들은 면면은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박사학위가 통과된 사람도 있었으며 뛰어난 전문의 출신들도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신앙의 부흥의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언더우드의 경우는 19-20세기에 미국의 선교를 대표한 아더 피어슨에게 엄청난 신앙적 교류를 했으며, 신앙적 민감성을 가지고 교제했다. 특별히 시카고 매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은 무디의 부흥을 경험한 자들이었다. 부흥을 경험한 자들이 부흥을 사모할 수 있다. 이들이 부흥의 불씨를 한국에 던질 수 있었다. 그래서 선교지는 25년만에 부흥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한국 외에 다른 선교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흥을 경험한 사람만이 부흥을 나눌 수 있다. 부흥을 경험한 목회자만이 교인들에게 부흥을 나눌 수 있다. 그것이 기독교 역사의 패턴이다. 베드로의 은혜를 통해 오순절의 역사가 있을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그렇게 초기에 엄청난 성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앙적 자질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2)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선교정책의 탁월성.

카톨릭은 직접선교에 중점을 두었지만, 개신교는 직접과 간접선교에 균형을 두었다. 복음을 증거한 것뿐만 아니라, 교육과 의료에 집중했다. 알렌의 경우 광해원에서 하루에 100명을 치료하였다. 이런 선교방법을 통해 왕실과 민중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이 치료를 통해 전도부인의 잇따르는 복음증거는 퇴원할 때 거의 다 예수를 영접하고 신앙을 갖기 마련이다. 이러한 균형적인 선교전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략이다. 사도행전2:42에서는 제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다음, 떡을 떼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직접과 간접 선교의 모습을 샘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은 각개 전투가 아니라 연합전선을 썼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경우, 1885년 교파가 다른 선교사로인데도 같이 입국했다. 이들은 장로교, 감리교 대표로서 양교단의 협력을 상징한다. 이 둘의 연합을 통해 학교기관과 종교기관들이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연합하여 움직이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들은 선교지 분할정책을 사용했다. 인도와 이란의 선교의 실패를 경험삼아, 한국선교는 한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는 정책을 세웠다.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한반도 전 지역을 선교회별로 나누어 선교에 집중하였다. 선교지 분할정책을 협력하여 모든 지역을 복음전파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한국에 골고루 복음이 증거될 수 있었다. 지금 선교지 현황을 보면 선교인력이 지역의 수도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1890년에 한국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펼쳤다. 이 당시 선교사들은 복음의 열정이 대단했지만, 대부분이 20대였기에 그들 스스로도 연륜이 있는 선교사가 그들에게 필요했다. 그래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인 네비우스를 받아들여 그의 선교정책을 통해 선교전략을 세우게 된다. 한국선교사들은 네비우스의 선교전략을 아버지의 유언같이 받아들여 펼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경회를 들 수 있다. 곽안련 선교사의 경우 시카고대학 박사학위 논문에서, 한국의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자립, 자치, 자전> 보다는 성경공부에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 선교정책이 발전하게 되어 나타나게 된 것이 사경회였다.

1주에서 1달간 지속되는 사경회는 오전에 성경공부를 하고, 오후에 복음을 증거하고 저녁에는 전도된 자와 함께하는 집회가 개설되었다. 부흥회는 참석한 사람들을 역동적으로 참여시키는 데 핵심이 있었다. 오늘날 부흥집회는 부흥사 중심으로 참가자들의 역동적인 참가를 이끌어내지 못해 실패하기 마련이다. 결국 부흥사의 개인 장기만이 드러나는 집회로 전락했다.

사경회는 말씀을 근거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그 이후에 이들을 대상으로 전도에 치중했다. 전도된 사람이 거듭나는 것을 보고 전도한 사람이 영혼에 대한 열정을 느끼게 된다. 서울 사랑의 교회의 대각성집회에는 전도된 사람과 전도자가 함께 참가한다. 옥한흠 목사는 초신자를 대상으로 설교를 하는데 전도자도 눈물을 같이 흘린다. 하나님의 역사를 느끼기 때문이다. 한사람을 구원해본 사람만이 구원의 기쁨을 안다.

사경회는 1-3년 지나가게 되면서 영적강성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원산부흥운동, 미국의 부흥도 사경회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사경회는 교파를 초월하고 목회자와 평신도가 같이 모여 기도하며 성령의 임재를 간구했다. 이제 이런 사경회 정신이 사라졌다.

3) 시대적으로 종교적 공백기 때문이었다.

민족적 전환기에 불교, 도교, 샤머니즘이 쇠퇴함으로써 기독교와 천도교의 등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천도교가 정치화되어 버림으로써, 기독교는 민중의 종교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간접선교를 통해 뿌리내린 기독교가 자연스레 종교적 공백기에 대안으로 받아들이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당시 민중의 신앙의 모델이 되었고, 설득력있는 종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예수를 믿으면 술과 담배를 끓고 무엇인가 달라졌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자녀들에게는 교회에 가게 했다. 개신교인 25%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10명만 진정으로 삶이 달라지면 성장은 저절로 된다. 한국교회는 이런것을 간과하고 전도에만 열중하므로 뒤로 다 새는 것이다.성장에 관심을 두는 것은 소용이 없다.

왜 한국의 경우 특히 서북쪽에 복음이 집중되어 발전하게 되었는가?

1)선교사들의 희생의 가득한 곳이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했다. 백홍준이가 봉천에서 순교했다. 순교의 피가 흐른 곳이다.

2) 성경중심의 선교정책을 구현했다. 이 지역의 사경회는 다른 지역과 다른, 특징이 있는 사경회였다. 은혜가 더 있는 이 지역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 그리고 심양에서까지 보따리를 싸들고 30일씩이나 걸려 사경회에 참석했다는 보고가 있다. 반면 당시 서울지역은 냉냉했다.

3)평양지역 교회의 선교전략이 특이하다. 평양지역 선교사들은 장로교와 감리교가 서로 연합하여 사역했다.

특별히 장로교의 경우, 장대현교회는 영어로 Central Church로 지칭했다. 이것은 평양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평양 중앙에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남쪽, 북쪽, 동쪽, 서쪽으로 발전해 나감으로써 교회를 지역적으로 전략적으로 분립개척하여 세웠다.

장대현교회는 39개 교회를 분립시켜 평양에 복음증거에 집중하도록 했다. 분립할때는 성도들도 나누어 주었다. 그런 나눔과 분립에도 불구하고 장대현교회는 계속 성장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반면 서울지역은 분립이 없었다. 그래서 영락교회가 분립을 했으면 좋았을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교회가 3만명의 교인을 자랑하지 말고 3백명씩 100교회를 만들면 한국은 10년안에 복음화가 될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하나님은 숫자에 관심이 없으시다. 숫자에 기죽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몇명 목회를 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목회를 했냐고 하는 것이다.

1930년대 한국교회

한국교회의 쇠퇴는 감리교에서 일어났다. 감리교는 한국교회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감리교는 1920년대 말, 그리고 1930년대 초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감리교의 쇠퇴의 원인은 먼저 복음전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사회복음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에 비해 기관을 담당하는 목사가 많이 배출되었고, 시골 목회지를 떠나 도시로 집중화되었다.

또 신학의 변질이 또 다른 원인을 제공했다. 1910년대에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은 그리 차이가 없었다. 1920년대 양주삼 등이 감리교회의 흐름을 바꾸었다. 장경옥은 신학교에서, 유형기는 출판물에서, 이용도는 신비주의 부흥운동의 변화를 주도했다. 감리교는 신학, 교단, 부흥의 흐름을 다르게 맛보기 시작했다.

말씀이 부흥사 중심, 신비주의 중심으로 흐르며 감리교가 침체를 맛보았다. 감리교는 지금도 쇠퇴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감리교가 거의 사라졌으며 미국에서도 가장 문을 많이 닫는 교회가 감리교이다. 신학의 변화는 교회를 쇠퇴하게 만드는 것이다. 신학이 다르면 어떻게 힘있게 말씀을 전할수 있나? 성경을 권위있는 말씀으로 받고 전할때 힘이 있다.

기장은 성경의 권위가 없어 성장할수 없다. 그런데 그 가운데 신화를 이룬 사람이 이중표 목사이다. 그는 졸업을 하며 교수의 강의를 들은 것이 아니라 4년간 성경을 깊이 연구했다고 말하며 신학교교육에 반발했다.

바른신학이 교회성장에 중요하다. 한국교회가 바른신학을 포기한다면 몰락의 길밖에 없다. 요즘 한국교회가 종교다원주의로 빠지는 것 같아 기도를 많이해야 한다. 한국교회를 보면 신학교는 자유롭고 교회는 복음주의라 오히려 평신도가 목회자의 신앙을 지켜주는 경향이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 당시 성결교가 주류 교단에 편입하게 된다. 1925년 2천명이던 성결교인이, 1933년에는 8년 동안에 2만명의 교세로 열배 성장했다. 그 원인으로 성결교 안에서 2번에 걸쳐 부흥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이들의 보고는 평양부흥운동의 부흥의 내용이 그대로 답습되었다.

한편, 1910년이후 장로교는 성장하고 감리교는 쇠퇴한다. 1930년 장로교인은 19만 4천명, 감리교인은 2만 2천이었다. 1936년에는 감리교는 같은 반면 장로교는 34만 1천으로 성장한다.

장로교의 성장 이유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들이 교회의 리더가 되어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반면 부흥의 현장이었던 웨일즈는 부흥자의 일선 후퇴로 10년만에 몰락의 길을 걸었다. 장로교는 부흥운동은 한시적인 것이 아닌, 김익두등을 통해 한국의 장로교회는 부흥운동을 계속 경험하도록 주도했다. 여전히 건전한 신학적 입장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직접선교와 간접선교의 균형을 이루었던 선교가 직접선교에 집중하는 모습이 노출되어 타세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근본주의 신앙이 자리잡게 되었다.

1950년대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

1945-60년까지 한국교회는 분열의 시기였다. 남북과 이데오르기로 분열되었다. 한국교회가 자성해야 할 움직임이 나타났다. 장로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영향으로 한국교회 지도자가 정치지도자로 변신하였다. 견제기능을 해야할 교회가 정치화되었다. 교회의 이미지가 세속화되었고, 부패의 연결고리로 작용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자성이 필요했다.

이 시대를 대변하는 교회는 남대문교회의 김치선 목사,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였다. 6.25 이후 피어선신학교를 세우고, 월드비전과 관련된 밥 피어스는 먼저 김치선 목사와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 이후 그는 그와 관계를 끊고 한 목사와 관련을 맺었다.

김 목사는 복음전도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한 목사는 복음선교와 사회선교를 병행했다. 영락교회는 통합측 대표교회로 그후 30년을 지배하였고, 남대문교회는 합동측 대표교회로 그후 30년을 지배하였다. 이 차이는 결국 어떻게 나타났는가?

1960-1988년대 한국교회

이당시 한국교회는 최대성장기를 구가했다. 80년에는 광주사건, 88년에는 올림픽이 있었다. 한국경제가 성장했으며 세계가 한국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한국교회 성장은 1973년 백만명이 모여 열린 빌리그래함 전도집회가 기폭제였다. 빌리그래함 대회 역사상 최대인원이 모인 집회였다. 또 다른 성장의 동기는 초교파 선교단체의 등장이다

그리고 순복음교회, 소망교회, 명성교회, 사랑의교회등 대형교회들이 등장했다. 대형교회들이 성장 모델이 등장했다. 이 대형교회를 모델삼아 순복음교회(성령운동), 소망교회(설교), 명성교회(새벽기도), 사랑의교회(제자훈련, 소그룹)를 닮은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가려고 했다.

한국교회의 잘못된 모습도 나타났다. 먼저 교회건축이다. 교회건축과 기도원 구입등이 이어졌다. 둘째 교회 분열의 모습이 나타났다. 또 무자격 목회자의 양산이 일어났다.

이민붐이 일어나자 태평양 신학교가 생겼다. 집사가 비행기 타고 미국에 도착하면 목사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 신학교를 졸업했느냐고 물으면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태평양신학교를 나왔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왔다. 목회자가 많이 필요해 일어난 불가피한 형상인지는 모르지만 목회자 질의 저하는 한국교회 질을 떨어지게 했다.

한국교회의 문제가 있다면 98%가 목사책임이다. 우리가 양들의 좋은 모델이 된다면 양들이 우리를 닮을 수 밖에 없다. 실력이 없으니 정치목사가 되는 세상이다. 이단들이 돈을 투자하여 정통교단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그것에 앞장서는 자가 무자격 목사이다.

이민교회의 작은 신학교가 문제가 아니라 알찬교육을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지 못하면 희망이 없다. 자정능력이 필요하다.

한국의 보수교단들이 박정희 정권에서 삼선개헌을 지지했다. 또 전두환 정권을 지지했다. 보수교단은 어용으로 편승했다. 이때 가톨릭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달랐다. 그는 현 체제에 대해 바른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천주교의 이미지는 사회정의의 종교로 평가받았다. 김수환 추기경의 이미지가 천주교였다.

이때 10-20대의 잠재교인들이 그 이후 개신교를 버리고 천주교에 편입했다. 다시 한번 회복을 위한 자성을 보여야 한다. 천주교는 여전히 향후 30년 이후에도 신앙의 잠재력을 키워갈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사회정의가 불가능한 종교아닌가? 남미의 카톨릭은 어떤가? 사회의 민주화와 정의를 선도할 수 있지 못하는 체제를 근본적으로 안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종교는 어떻게 되고,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개신교가 각성해야 한다.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내 교회만 우선시 한다. 새벽기도 성도들을 나르는 신도시 교회 밴들은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 다닌다. 불신자가 보면 무엇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카톨릭은 이제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교회의 좋은 정책을 가져간다. 카톨릭은 질서있게 움직이지만 개신교는 한 건물에 수개의 교회가 들어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반성과 자성을 일으켜야 할 때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한국교회가 프로그램 중심에서 말씀 중심의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개척교회들은 대형교회들을 닮아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한다.

교회는 대사회적인 민족적인 책임을 회복해야 한다. 이민교회와 한국 신도시는 비슷하다. 서로 경쟁을 한다. 성도들에게 다른 교회 목사를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옆에 있는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교회가 최고라는 전도지 보다는 가까운 교회로 가라는 전도지 운동을 할 때이다.

교회 사유화와 교회의 세습문제를 바꾸어야 한다. 사회가 사유재산을 나누어주는 것과 동일한 의식수준으로 교회를 세습을 인식한다면 절제하고 자제해야 한다.

한국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 후임으로 오정현 목사가 왔을때 언론을 대서특필했다. 기자에게 물으니 상식적인 것이 사라진 교회가 상식적인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랑의교회 이미지가 상승하니 일년만에 만명의 성도가 늘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인상을 가진 젊은이들이다.

부흥을 경험해야 한다. 부흥이 있으면 개인의 각성이 사회와 민족으로 이어진다. 교회가 성장하고 선교가 가속화된다. 나눔과 희생과 헌신을 실천하게 된다. 그리고 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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