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경동 목사 솔직담백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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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ㆍ2008-01-25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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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넷 기자는 집회차 뉴욕에 온 장경동 목사를 인터뷰 했다. 그는 거침없지만 성실한 대답을 통해 청중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바로 알며, 들리는 설교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설교를 재미있게 하시는데 '설교철학'은 무엇입니까?
설교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들리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하는 것은 설교자 책임이고 듣는 것은 교인이 책임이라는 것은 성숙되지 않은 생각이다. 성숙된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사람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설교가 정말 잘 안들어 온다. 설교를 하는 사람도 고역스럽고 듣는 사람도 고역스럽다. 그런데 들리는 설교를 하면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재미있다.
들리는 설교, 다시 말하면 듣는자의 위치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설교를 하려면 그들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설교자는 자신만 알지 청중을 너무 모른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앉아 있고 얼마나 힘들게 데려다 놓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쉽게 대하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설교자도 안타깝지만 모르고 안타까운 것과 알고 안타까운 것은 서로 다르다. 청중을 좀 알고 들리는 설교를 하려는 몸부림이 설교자와 청중 모두를 즐겁게 한다.
노래나 유머도 설교원고에 포함됩니까? 아니면 즉석적으로 사용하시나요?
원고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설교를 머리에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준비한다. 자꾸 설교를 하다 보니 그런것들이 자연스럽게 개발된다. 어떻게 그순간에 노래나 유머를 사용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하겠는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이다.
사용하는 지혜와 사용하지 않는 지혜는 다르다. 만약 탁구에 소질있다고 해도 소질을 묵히는 경우와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자꾸 소질을 사용하면 늘게 된다.
같은 말만 계속 하는 것 보다는 노래하는 것이 좋다. 교회노래만 하면 교인은 좋겠지만 세상사람은 안듣는다. 세상노래를 한소절 불려질때 그들의 귀가 번쩍 열리고 그때 찬송을 넣는 기술적인 면이 있다. 그런데 왜 목사가 유행가를 부르냐고 단순하게 비난하는 것은 근시안적 사고이다.
위문공연과 부흥회라는 방식이 많은 호응을 받지만, 반면 목회자의 품위를 떨어 뜨린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목회자의 품위란 과연 무엇인가? 가운입는 것이 거룩한 모습인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경건이 과연 경건인가? 다시 말하면 설교자가 거룩함을 가지고 있지만 청중이 설교를 하나도 듣지 않는다면 그 거룩함이 거룩함인가? 생폼 아닌가?
진짜로 알면서 오는 존경심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가운을 입어서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속에서 나타나는 능력과 인품 인격 생명력 때문에 예수님이 존경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가운에서 나오는 존경이 아니다. 가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상적인 것으로 본질까지 평가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맞을수 있지만 꼭 맞는 것은 아니다.
내려가더라도 소리가 들리는 것이 올라와 있어도 안들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 물론 올라와 있으면서 들리는 소리가 가장 낫다. 낮은데다가 들리지 않는 것이 가장 나쁘다. 그래서 제일 좋은 것과 나쁜것이 간단한데 세상을 두박자로민 볼수는 없다.
세상에 나가면 죄를 지을수 있다. 그렇다고 세상에 안나가면 세상을 누가 구원할것인가? 그래서 죄짓는 것도 잘한 것도 없는 것 보다는 하나 잘못하고 하나 잘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설교를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고 알려졌는데 얼마나 노력하십니까?
제일 중요한것이 많이 사색하는 것이다. 똑 같은 것을 보아도 담임과 부목회자가 보는 것이 다른것 처럼 설교를 잘해야 겠다는 몸부림이 필요하다. 둘째는 많이 읽고 그것을 내것으로 소화하면 남의 지식이 내 지식화 되어 간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타고 나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못하나? 안타고 났어도 노력하면 된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잘하면 타고 났다 못하면 안타고 났다고 그런 이분법적인 이야기는 바른자세는 아니다.
'언어의 마술사'인데 언제부터 말씀을 그렇게 잘했습니까?
제 속의 잠재적인 능력을 많이 캐낸것 같다. 말을 바꾸면 내속에 잠재적인 능력이 없다면 집어 넣으면 된다. 예를 들어 머리 좋은 사람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공부를 제일 잘한다. 하지만 머리 좋은데 공부를 안하는 것보다 머리를 나빠도 계속 열심히 하는 사람이 더 낫지 않겠는가?
타고난 것이 내 소관 아니므로 끓임없이 노력하고 연습하고 개발하면 타고 난 사람보다는 못하겠지만 노력한만큼 남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집회를 하다보면 성도들에게 하고 싶은 속내 깊은 말이 있을텐데?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을 지혜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정대로 표현하면 욕 얻어 먹을 소리가 많다. 내가 말을 할수 없는 말도 있다. 어떻게 말을 다하고 사는가? 그렇지만 할수 없는 말이 반드시 전해져야 하는 말일수 있다.
이것을 어떻게 오해사지 않게 적절하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 표현의 기술이다. 그래서 교인들로 하여금 듣고 싶은 말을 역으로 찾아서 대중처방을 잘하는 사람이 유능한 설교자이고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좋은 설교자이다.
목사님의 라이벌이 김xx목사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저는 그런 착상 자체가 잘못된 설정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다 그릇대로 쓰시는 것이다. 누구하고 누구를 비교하면 안된다. 옛날 대학다닐때 안토니오 이노끼와 무하마드 알리와 싸웠는데 게임이 안됐다. 하나는 누워 있고 하나는 일어나 있는데 싸움이 되겠는가?
김문훈 목사는 그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나는 나대로 열심히 하는 것이다. 둘을 비교시키는 것은 흥행을 유발하려는 상술인들의 농간이다. 비교할 것도 없다. 주어진 그릇대로 사용하면 된다. 선풍기와 히터를 비교하면 되는가? 하나는 여름에 쓰고 하나는 겨울에 쓰면 되는 것이다.
최근 목사님의 정치참여설이 있었는데, 목사의 정치참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사가 정치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찬반이 있지만, 그것을 보는 관점이 다양했으면 좋겠다. 저는 근본적으로 세상은 크리스찬이 살려야지 세상사람은 못살린다고 본다. 크리스찬이야 말로 세상에 나가 세상을 살려야 한다.
그것이 정치 참여가 되던지 무엇이 되던 간에 탁월한 목사가 있으면 그가, 탁월한 장로가 있으면 그가 나가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찬은 달팽이처럼 우렁안에만 있지 세상으로 나가지를 못한다. 나는 그런 바보같은 상태에 대해 채찍이라도 해서 크리스찬들이 세상에 나가 세상을 살리라고 말하고 싶다.
베뢰아 출신이라는 꼬리가 따라 다니는데?
그런식으로 자꾸 이야기 하면은 비난을 위한 비난이다. 예를 들어서 여호와 증인을 전도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면 그 전도자들도 여호와 증인인가? 그런식으로 이야기하면 안된다. 구원파가 구원의 확신을 강조한다고 해서 크리스찬은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런 무식이 충만한 소리를 하면 안된다.
가르침이 성경에 근거한다면 해야 하는 일이다. 성경가르침에 위배된다면 천하에 없는 것이라도 움추려 들줄 알아야 한다.
한가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호와 증인도 베뢰아도 구원받고 천국가야할 불쌍한 영혼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그들을 붙들고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들을 배타하는 자세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다.
두부 짜르듯이 하는 것은 옳고 그런것을 분별하는 은사로는 훌륭하지만 사랑의 관점으로 보면 결여 된 것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같은 신앙인이라면 아픔도 괴로움도 같이하면서 만들어 가고 살려나가는 자세가 한국교회에 필요하다고 본다.
ⓒ 2008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설교를 재미있게 하시는데 '설교철학'은 무엇입니까?
설교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들리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하는 것은 설교자 책임이고 듣는 것은 교인이 책임이라는 것은 성숙되지 않은 생각이다. 성숙된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사람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설교가 정말 잘 안들어 온다. 설교를 하는 사람도 고역스럽고 듣는 사람도 고역스럽다. 그런데 들리는 설교를 하면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재미있다.
들리는 설교, 다시 말하면 듣는자의 위치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설교를 하려면 그들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설교자는 자신만 알지 청중을 너무 모른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앉아 있고 얼마나 힘들게 데려다 놓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쉽게 대하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설교자도 안타깝지만 모르고 안타까운 것과 알고 안타까운 것은 서로 다르다. 청중을 좀 알고 들리는 설교를 하려는 몸부림이 설교자와 청중 모두를 즐겁게 한다.
노래나 유머도 설교원고에 포함됩니까? 아니면 즉석적으로 사용하시나요?
원고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설교를 머리에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준비한다. 자꾸 설교를 하다 보니 그런것들이 자연스럽게 개발된다. 어떻게 그순간에 노래나 유머를 사용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하겠는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이다.
사용하는 지혜와 사용하지 않는 지혜는 다르다. 만약 탁구에 소질있다고 해도 소질을 묵히는 경우와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자꾸 소질을 사용하면 늘게 된다.
같은 말만 계속 하는 것 보다는 노래하는 것이 좋다. 교회노래만 하면 교인은 좋겠지만 세상사람은 안듣는다. 세상노래를 한소절 불려질때 그들의 귀가 번쩍 열리고 그때 찬송을 넣는 기술적인 면이 있다. 그런데 왜 목사가 유행가를 부르냐고 단순하게 비난하는 것은 근시안적 사고이다.
위문공연과 부흥회라는 방식이 많은 호응을 받지만, 반면 목회자의 품위를 떨어 뜨린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목회자의 품위란 과연 무엇인가? 가운입는 것이 거룩한 모습인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경건이 과연 경건인가? 다시 말하면 설교자가 거룩함을 가지고 있지만 청중이 설교를 하나도 듣지 않는다면 그 거룩함이 거룩함인가? 생폼 아닌가?
진짜로 알면서 오는 존경심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가운을 입어서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속에서 나타나는 능력과 인품 인격 생명력 때문에 예수님이 존경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가운에서 나오는 존경이 아니다. 가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상적인 것으로 본질까지 평가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맞을수 있지만 꼭 맞는 것은 아니다.
내려가더라도 소리가 들리는 것이 올라와 있어도 안들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 물론 올라와 있으면서 들리는 소리가 가장 낫다. 낮은데다가 들리지 않는 것이 가장 나쁘다. 그래서 제일 좋은 것과 나쁜것이 간단한데 세상을 두박자로민 볼수는 없다.
세상에 나가면 죄를 지을수 있다. 그렇다고 세상에 안나가면 세상을 누가 구원할것인가? 그래서 죄짓는 것도 잘한 것도 없는 것 보다는 하나 잘못하고 하나 잘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설교를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고 알려졌는데 얼마나 노력하십니까?
제일 중요한것이 많이 사색하는 것이다. 똑 같은 것을 보아도 담임과 부목회자가 보는 것이 다른것 처럼 설교를 잘해야 겠다는 몸부림이 필요하다. 둘째는 많이 읽고 그것을 내것으로 소화하면 남의 지식이 내 지식화 되어 간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타고 나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못하나? 안타고 났어도 노력하면 된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잘하면 타고 났다 못하면 안타고 났다고 그런 이분법적인 이야기는 바른자세는 아니다.
'언어의 마술사'인데 언제부터 말씀을 그렇게 잘했습니까?
제 속의 잠재적인 능력을 많이 캐낸것 같다. 말을 바꾸면 내속에 잠재적인 능력이 없다면 집어 넣으면 된다. 예를 들어 머리 좋은 사람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공부를 제일 잘한다. 하지만 머리 좋은데 공부를 안하는 것보다 머리를 나빠도 계속 열심히 하는 사람이 더 낫지 않겠는가?
타고난 것이 내 소관 아니므로 끓임없이 노력하고 연습하고 개발하면 타고 난 사람보다는 못하겠지만 노력한만큼 남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집회를 하다보면 성도들에게 하고 싶은 속내 깊은 말이 있을텐데?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을 지혜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정대로 표현하면 욕 얻어 먹을 소리가 많다. 내가 말을 할수 없는 말도 있다. 어떻게 말을 다하고 사는가? 그렇지만 할수 없는 말이 반드시 전해져야 하는 말일수 있다.
이것을 어떻게 오해사지 않게 적절하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 표현의 기술이다. 그래서 교인들로 하여금 듣고 싶은 말을 역으로 찾아서 대중처방을 잘하는 사람이 유능한 설교자이고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좋은 설교자이다.
목사님의 라이벌이 김xx목사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저는 그런 착상 자체가 잘못된 설정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다 그릇대로 쓰시는 것이다. 누구하고 누구를 비교하면 안된다. 옛날 대학다닐때 안토니오 이노끼와 무하마드 알리와 싸웠는데 게임이 안됐다. 하나는 누워 있고 하나는 일어나 있는데 싸움이 되겠는가?
김문훈 목사는 그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나는 나대로 열심히 하는 것이다. 둘을 비교시키는 것은 흥행을 유발하려는 상술인들의 농간이다. 비교할 것도 없다. 주어진 그릇대로 사용하면 된다. 선풍기와 히터를 비교하면 되는가? 하나는 여름에 쓰고 하나는 겨울에 쓰면 되는 것이다.
최근 목사님의 정치참여설이 있었는데, 목사의 정치참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사가 정치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찬반이 있지만, 그것을 보는 관점이 다양했으면 좋겠다. 저는 근본적으로 세상은 크리스찬이 살려야지 세상사람은 못살린다고 본다. 크리스찬이야 말로 세상에 나가 세상을 살려야 한다.
그것이 정치 참여가 되던지 무엇이 되던 간에 탁월한 목사가 있으면 그가, 탁월한 장로가 있으면 그가 나가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찬은 달팽이처럼 우렁안에만 있지 세상으로 나가지를 못한다. 나는 그런 바보같은 상태에 대해 채찍이라도 해서 크리스찬들이 세상에 나가 세상을 살리라고 말하고 싶다.
베뢰아 출신이라는 꼬리가 따라 다니는데?
그런식으로 자꾸 이야기 하면은 비난을 위한 비난이다. 예를 들어서 여호와 증인을 전도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면 그 전도자들도 여호와 증인인가? 그런식으로 이야기하면 안된다. 구원파가 구원의 확신을 강조한다고 해서 크리스찬은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런 무식이 충만한 소리를 하면 안된다.
가르침이 성경에 근거한다면 해야 하는 일이다. 성경가르침에 위배된다면 천하에 없는 것이라도 움추려 들줄 알아야 한다.
한가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호와 증인도 베뢰아도 구원받고 천국가야할 불쌍한 영혼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그들을 붙들고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들을 배타하는 자세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다.
두부 짜르듯이 하는 것은 옳고 그런것을 분별하는 은사로는 훌륭하지만 사랑의 관점으로 보면 결여 된 것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같은 신앙인이라면 아픔도 괴로움도 같이하면서 만들어 가고 살려나가는 자세가 한국교회에 필요하다고 본다.
ⓒ 2008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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