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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 목사] ② 마이크 비클에 대한 의문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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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ㆍ2011-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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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4개 단체에서 공동주관하는 신사도운동 대응전략 세미나가 1월 13일(목) 오후 1시 금강산 연회장에서 열렸다. 먼저 김재성 목사는 "신사도운동의 신학적 문제와 교회의 입장"에서 연구발표를 했다.

김재성 목사는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로 현재 필라이대위 위원장으로 있다. 김 목사는 웨스터민스터 신대원에서 Ph.D., 미국 칼빈신학대학원에서 Th.M 학위를 받고 한국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했다.

김재성 목사는 자녀가 다니는 교회에서 IHOP을 간다고 해서 IHOP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 장로교 목사가 지적하는 타교단의 신학문제가 아니라, 미국교회 심지어 오순절계통의 A/G교단에서 신사도운동을 문제시 하고 있다고 서두를 꺼냈다. 김 목사는 부흥회를 하듯히 확신있는 발표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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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 목사(필라 이단대책위원회 위원장,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제 2 부 가짜 부흥운동의 이합집산

IHOP(국제기도의 집)을 역사적으로 검증해 볼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는 이들과 연합했다가 나뉘어진 빈야드 운동과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일이다. 얼핏보면, 전혀 관계가 없을 두 집단이 일시적이나마 각각 필요에 의해서 결합했었다. 이것은 극단적인 은사운동가들의 허점이 잘 드러나는 사례이다.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과 마이크 비클을 비롯한 캔사스 예언가들이 1989년부터 서로 결합되었다가 긴장관계가 형성되어 다시 1991년에 각각 갈라서게 된다. 그러면 왜 이들 양 진영이 갑작스럽게 연합하게 되었던가? 극단적인 은사운동이 막다른 장벽에 부딛혔기 때문이다. 1985년 극단적인 성령 “파워”를 통한 치유와 기적 운동이 풀러신학교에서 몰수를 당하자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은 누군가 동지를 필요로 했다. 한편, 캔사스 IHOP의 예언가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폭로되는 어니 그루웬 목사의 보고서로 인해서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야할 절실한 시점이었다. 이들 두 집단이 서로의 입장을 세우려는 동기에서 한 단체로 뭉치게 되었는데, 얼마 못가서 다시 분열하였다. 이것은 이들 집단의 정체성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다.

자신들의 집단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전략상 필요할 때는 합하여 서로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 이것은 거짓된 부흥운동의 중심진리가 헛된 것임을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이다. 극히 짧은 기간에 같이 뭉쳐서 서로를 이용하다가, 양 진영의 모임에서 주도권 다툼과 노선시비가 일어나서 나뉘어졌다면, 그야말로 이들의 정체성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 이상 무엇을 추가하겠는가? 이미 복음적인 한국교회 주요 교단들이 이단으로 정죄하고 참여를 금지한 빈야드 운동이 한때마나 자신들의 파트너를 삼아 적극적으로 영접한 자들이 바로 캔사스 시티 선지자들이다.39)

이들이 어떤 공통점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다가, 이제는 각각 자신들만의 운동이 더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가를 살펴서 그 허상들을 파악하여야 한다. 싸우는 교회는 결국 사탄의 세력들에 의해서 조종을 받고 영향을 입은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빈야드는 그 후에 카나다 토론토 블레싱을 받아들였다가 또 다시 나뉘게 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물론, 캔사스 선지자들은 그들 주요 리더들의 추행과 스캔들과 부도덕성이 폭로되면서 서로 간의 연대성이 무너졌다.

1. 빈야드 운동과 캔사스 선지자들의 연합과 분열

오순절파 성령운동의 특징은 성경에 따르는 객관적인 신학의 검증없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정 지도자, 즉 교주나 교황과 같은 핵심 우무머리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한 두 사람 지도자의 주관적인 결정에 따라서 일순간에 혼란에 빠진다. 존 윔버는 풀러신학교에서 "교회 성장학“ 과목에서 ”능력과 기적“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다가 몰수를 당하고,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자, 곧바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다. 그리고 마이크 비클, 밥 존스, 폴 케인 등 캔사스 시티 펠로쉽 예언자들과 결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성령 체험은 이제 병 고치는 은사 운동에서 예언과 집중 중보기도로 전략수정을 시도 하게 되었다. 여기서 바로 이들 은사운동가들의 허구성이 잘 드러난다. 빈야드 운동이 철저히 검증되지 않은 거짓 부흥운동이었듯이, 그들과 결탁한 선지자들의 예언활동 역시 다를 바가 없다.

빈야드 운동이 미국교게를 흔들었던 1988년부터 존 윔버와 마이크 비클, 폴 케인, 밥 존스 등이 교제를 나누게 된다. 1989년부터 마이크 비클은 빈야드 운동에 속한 대회에서 예언과 중보기도 운동에 대해 강의하면서 깊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빈야드 운동은 주로 능력과 기적의 은사와 치유를 중점으로 하던 그룹이었기에,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존 윔버는 “처음에는 예배와 치유였고, 신약성경에 나와 있듯이 예언으로 적합한 균형을 맞추게 될 것이다”고 방향 수정을 정당화했다.40) 하지만, 이런 윔버의 기대는 불과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깨어졌다. 캔사스 선지자들 중에 밥 존스의 성추행 스캔들이 알려지면서 빈야드 운동과 결별하게 되고 말았다. 신비적인 부흥 운동가들의 허점은 인격의 성숙을 소홀히 하다가 경건과 성화의 밑바탕이 없어서 형편없이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빈야드 운동의 존 윔버 (John Wimber, 1934-1997)는 요바 린다에서 퀘이커교회에서 5년 동안 사역하던 중, 회중들 속에서 신유 은사를 운동을 전개하다가 맞지 않아서 탈퇴하였다. 그 후로 척 스미스가 이끌던 "갈보리 채플"에 소속하여 목회하던 중 또 다시 신유은사 문제로 배척당하자 자신만의 독립교회를 개척하였다.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약 2천명의 성도를 모으게 되면서 주목을 받아서,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에서 처음 개설된 “교회성장학”이라는 과목의 기초설계자가 되었다.

이때 당시에 풀러신학교 피크 왜그너 교수의 제자가 되어있었는데, 1982년부터 ‘Signs and Wonders and Church Growth,"라는 과목을 개설하여 은사논쟁이 일어나자 1986년 3월 신학부 교수진의 반발로 강좌폐쇄 결정이 내려졌다.41) 이때까지 자신의 강의를 수강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빈야드 운동‘을 전개하였고, 왜그너 교수는 “제 3의 물결”이라고 주장했다.42) 그러나 빈야드 운동에 대한 공개적이며, 학문적인 공격이 지속되어서 윔버는 성령의 치유은사를 강력히 표방하던 사역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43) 가장 저명한 학자들이 죤 윔버를 비판한 것은 1992년에 나온, “파워 종교”라는 책이다.44)

2. 존 윔버의 ‘파워’ 운동

극단적인 은사운동으로 1980년대에 소용돌이를 일으킨 존 윔버는 오늘날 그 다음세대 성도들에게 극도의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마이크 비클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도 큰 피해를 끼쳤다. 1995년을 전후하여 한국교회에서는 성령론의 오류, 특이한 체험현상의 강조, 무질서한 예배 행위 때문에 빈야드 운동의 도입을 거부했고, 참여를 금지시켰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제 10장로교회”는 역사과 전통을 자랑하는 정통장로교회인데, 그 담임목사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Dr. James M. Boice) 박사가 빈야드 운동의 허구성을 가장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빈야드 운동이 “거짓 종교”이므로 반드시 피해야만 한다고 했다. 보이스 목사는 존 윔버가 “기적”은 설교하지만, “복음”을 무시하였다고 비판했다. 윔버를 따르는 성도들은 마치 기적을 보고서야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누가 우리를 구원하는가? 보이스 목사는 오직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45)

기적에 매달리면 고난의 역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미국 시카고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D. A. Carson 교수는 너무나 에수님의 기적에만 집중하는 빈야드의 불건성을 지적하였다. 거짓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든지 기적을 연출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최고의 회심은 기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가르침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1990년 7월, 존 윔버는 위기를 겪으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중 빈야드 운동 지도자들의 모임에 폴 케인, 마이크 비클, 밥 존스르 초대하였다. 그러면, 이들 “캔사스 시티 펠로쉽” 선지자들은 어찌하여 합류하였는가? 이 때에 바로 그루웬 목사의 ‘문서’가 폭로되어서 예언 사역을 하던 그들에게도 새로운 모색이 필요할만큼 궁지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1990년 1월 21일, 주일 아침에, 어니 그루웬 (Ernie Gruen) 목사가 “우리가 웃음을 유지하면서 아무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설교를 통해서 캔사스 시티 선지자들의 오류에 대해서 폭로하였다. 따라서, 이런 각각의 위축되어질 상황과 필요로 인해서 전혀 모르고 지내던 두 그룹의 성령 은사주의자들이 합하여 진 것이다.46)

또한 카나다 ‘토론토 블레싱‘의 특이한 현상들이 소개되어졌다. 밥 존스와 빈야드 예언가들 ( Jim Goll and John Paul Jackson)은 토론토 블레싱을 용납햇다. 피터 왜그너와 그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Cindy Jacobs, Dutch Sheets, Chuck Pierce, Ted Haggard) 등이 외곽에서 측면지원을 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활동하던 릭 조이너(Rick Joyner)가 가담했고, 전 달라스 신학교 교수 Jack Deere는 1980년대 후반부터 윔버가 죽을 때까지 빈야드 운동을 하다가 선지자의 한사람으로 가담하였고, “토로토 블레싱”을 인정했다. 이들 가운데 폴 케인과 밥 존스는 대단한 영향을 발휘했다.47) 그러나 이들 가운데 핵심인사들이 차례차례 자신들의 부도덕성이 드러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선지자 운동과 빈야드의 능력체험 신유은사가 충돌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탄의 권세를 사용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와는 상관없이 각각 자기들만의 ‘왕국’ (kingdom)을 건설하려 하기 때문이다.

몇 종류의 성령은사주의자들이 합작에서 결별에 이르기까지 긴장과 대립, 빈야드의 혼돈과 마이크 비클과의 결별수순은 이미 예고된 씨나리오와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빈야드 운동에 가담했던 스타이프 목사의 증언을 통해서 선지자들의 예언활동이 끼친 피해와 오류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이해하고, 이들이 결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를 확인할 수 있다:

3. 톰 스타이프 목사의 증언: 빈야드 입장에서 체험한 캔사스 선지자들의 지배 실상을 폭로하고 탈퇴함.48)

미국에서 나온 빈야드 운동에 대한 가장 본격적인 비판서를 출간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행크 해너그라프 목사는 원래 ‘갈보리 채플’ 소속의 평신도 출신 목회자로서 탁월한 변증가적인 안목을 가지고 분석하기를 잘한다. 그가 목격한 것을 근거로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 서문은 덴버에 있는 크로스로드 교회 (Crossroads church of Denver)의 담임목사 톰 스타이프 (Tom Stipe) 가 썼는데, 그는 원래는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에 소속 목사였다가 그 허상을 파악하고 성경적 교회로 돌아와서 다시 수천 명의 성도들을 회복하여 목회하고 있는 중이다.49) 그는 행크 헤너그라프의 증언들이야말로, 마틴 루터가 95개조문을 빗텐베르그 예배당 문에 걸어놓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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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서부에서 리더회의가 일주일 동안 열렸는데, 몇 사람이 사적인 모임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 모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예언자들’'을 만나는 자리라고 했다. 우리는 이미 교회 안에서 영적은사를 열심히 사용하고 있던터라 이 만남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후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보여 주실지 기다리고 있었다. 예언자들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교회에 다섯 가지 사역, 즉 사도, 예언자, 목사, 교사, 복음전도자의 사역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중에서 특히 예언자와 사도의 사역이 회복된다는것에 큰 도전을 받았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는 이미 목사와 교사, 복음 전도자들이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예언자와 사도의 사역만 회복된다면 분명 이 땅위에 큰부흥이 일어날 것이었다. 예언자들은 우리가 바로 이 마지막 때의 부흥을 이끌자들로 선택받았다고 했다. 또한 이런 마지막 때의 부흥을 이끌 기름부음 받은자들을 찾아내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예언자들’'에게 자신들과 우리 빈야드 교회연합이 선택된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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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중에 예언자들을 다시 만났을 때, 이들이 우리를 한 사람씩 데리고 나가 우리의 비밀을 상세히 드러냈을 때 의구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예언자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온 자들이 아닐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확하게 예언하는 모습을 보며 더욱 예언자들을 신뢰하게 되었다. 우리는 예언자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며 개인적인 일들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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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후 몇 달 동안 우리 중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서 자신이 하게 될 역할과 위치와 성공여부에 대해 ‘'개인적인 예언’'을 받았다. 또한 앞으로 다가올 위대한 ‘'회복’'과 우리가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리라는 예언을 받았다.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땅’'으로 오게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즉시 짐을 꾸려 달려가 확신 가운데 예언을 받았고, 성공적으로 사역하게 되리라는 예언이 현실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다. 심지어 예언자들은 목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며 교회 직원을 교체하기도 하고, 교회의 정책과 관행을 바꿔 버리기도 했다. 예언자들은 목사들 개개인에게 기름부음을 행하고 그들에게 치유와 사도적 약속을 주었다. 그러자 점점 목사들은 예언자들이 전화를 걸기도 전에 자기들이 먼저 예언자에게 전화를 걸어 가르침과 조언을 받고자 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불편해하며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름부음을 받는 땅’'으로 달려갔다가 뭔가 일이 실패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어떤 목사들은 자신들이 영적범죄를 저질렀다는 예언자들의 꿈과 예언 때문에 잘못 비난받기도 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기보다는 ‘'점괘가 든 과자’'를 믿으려는 신앙이 더 활개를 치게 되었다.몇몇 목회자들은 이런 모임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조금 마음이 꺼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영적인 은사가 늘 완벽한 방법으로 역사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풀이 다 자랄 때까지는 베지마라”"는 철학을 들이 대며 계속 밀어붙였다. 즉“"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다려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당분간 손을 놓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자 예언자들은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며 교회를 마음대로 휘둘렀다.약 2년이 지나자 모두가 예언자가 돼버린 것 같았다.

수 백 명의 빈야드 교회 성도들이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지도자며 성도며 할것없이 부지런히 예언을 하며 다녔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해준 예언을 작은 노트에 적어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또 여기 저기서 우후죽순 격으로 열리는 예언 집회에 떼로 몰려 다녔다. 노트를 들고 몰려 다니는 군중은 더 많은 예언을 들으려는 희망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치유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세미나를 열어서 치유 기도의 공식과 방법을 가르쳤고, 몸에서 ‘'열점: 연약한 부분’'을 찾아내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기도받는 사람의 몸에 육체적인 ‘'떨림’'이 일어날 때 그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도 가르쳤다. 예언집회에서 꿈과 꿈해석이 중앙무대를 차지하면서 사람들은 꿈을 그대로 노트에 일일이 적어서 가지고 오곤 했다. 그러면 이 꿈을 나중에 하나님의 메시지로 해석했다. 사람들은 예언의 약속들이 현실로 이루어지길 기다리며 조바심내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다림은 수포로 돌아갔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예언행렬’'이 유행한지 얼마되지 않아 수많은 사람이 절박한 심정으로 목회자에게 상담을 받고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십대들은 십대에 성공하여 스타가 되리라는 예언을 받았지만 그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십대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이 위대한 사역을 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받았지만,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가 그런 자신의 ‘'기름부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 은사를 ‘'발전시켜’'주지 못하는 것에 분노하여 지도자들에게로 몰려 들었다.어떤 사람들은 너무 예언에만 치중한 나머지 점점 성경에는 무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 보다는 그저 ‘'직통계시’'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자신들이 받은 예언이 성취될 수 없을까 두려워하며 이 예언자에서 저 예언자로 옮겨 다녔다. 예언자의 전화번호를 하나라도 더 알고 있는 것은 마치 보물지도를 얻는 것과 같았다.

이제는 예배시간에도 성경보다는 작은 노트를 더 소중히 여기며 붙들었다.어떤 사람들은 몸을 떨고 눈을 깜빡이는 것이 성령이 임한 증거라는 말을 듣고 그것을 흉내내기도 했다. 그리고 사역팀이 그것이 하나님의 사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자신에게 달려와 손을 높이 들고 “"주님, 더 임하소서!”"라고 기도해 주기를 원했다. 몸을 떨고, 웃고, 울고, 눈을 씰룩 거리는 것은 성도들이 지도자들과 동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이었다.한 집회에서 8 천명을 대상으로 설교하던 설교가는 목사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 주석서를 보거나 원어사전을 들척이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대신 목사들은 예언을 통해 주일날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 지 들을수 있어야 한다고했다.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 되었다.우리 교회의 한 성도는 뭔가를 결정할 때 자신의 손이 ‘'뜨거워’'지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이런 이상한 징조를 추구하는 현상은 바로 우리 교회에서부터 시작했다.

내가 속한 노회의 교회들은 점점 침체되기 시작했다. 그이유는 복음주의가 신비주의로 대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출석률이 뚝 떨어졌다. 이유인즉, 사람들이 다른 동네에 사는 자신의 친척들을 교회에 초대하기 꺼려해서였다. 사람들은 너무나 이상한 모습으로 진행되는 예배에 사람들을 초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5년 된 우리교회에도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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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확신이 서지 않거든 하나님이 이미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라.”
" 바로 성경이다!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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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줄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라는 말씀을 임의로 적용하며 어떤 불안도 허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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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고전14:17~19) 질서를 명한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혼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것은 나 스스로 질서를 유지해야하는 나의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 옳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고 대신 주관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나는 회개해야 했고, 다시 참목자로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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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 교회는6천명 가량 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고자 애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기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매우 간단하다 (히4:12~13; 왕하22:8~13; 렘15:16).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과 같은 책은 반드시 출판되어야하고 독자들은 읽어야 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시대에도 바울의 사역을 막으려는 거짓 예언자들과 이교도들과 율법주의자들은 교회 안에 잘못된 교리를 심어 놓으려 애썼다. 몇 달씩 집을 떠나, 열기와 먼지 속에서 말을 타고 혹은 걸어서 먼거리를 여행하고, 또 힘들여 성경을 하나 하나 베껴쓰는 일을 한 것은 바로 거짓교리가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은 이상하게도 거짓 교리가 너무나 철저하고 신속하게 파고든다. 성경적으로 바로 잡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급박한 때다. 15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교회는 요한 테첼이라는 세속적인 사제의 계책에 말려들어 오염되어 있었다.

테첼은 사람들을 속여 형벌을 면하려면 면죄부를 사야한다고 현혹했다. 분노한 마르틴 루터는 테첼이 사람들의 영적 불안감과 무지를 이용해 구원의 중재자로 자처하는 것을 반박하며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였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가짜 부흥운동이 출몰하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지금이 그런 시대라면『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 이책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이책이 진정한 영적 은사를 사모하고,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에 현혹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자들의 손에 들려진다면 좋은 도구가 될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가짜 부흥운동에 현혹되었던 사람들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되돌아오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교회는 진정한 개혁을 경험할 때, 비로소 진정한 부흥을 맛볼 것이다.

톰 스타이프 목사, 덴버 십자로 교회

4. 1991년 가을, 밥 존스의 성추문과 몰락

1991년 가을 밥 존스의 비윤리적 행동이 폭로되었다. 그가 범한 부도덕한 섹스 행위가 터져 나온 것이다. 이 때부터 밥 존스는 특별한 지도가 필요한 인물로 간주되었고, 캔사스 예언그룹에서는 탈락하게 되며, 단지 빈야드 운동의 일원으로 특별보호 속에 남게 된다. 그리고 그의 타락의 뉴스는 선지자들의 예언행위가 무너지는데 대못을 박는 것과 같았다.50)

1995년 존 윔버는 자신의 단체에 속한 자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하고 선지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운동이기에 결별을 선언했다. 그리고 윔버는 마이크 비클과 헤어지고 난 후, 같은 해 12월에는 카나다 “토론토 에어포트 블레싱”에 대한 인정을 철회하고 또 다시 나뉘어진다. 이단은 또 다른 분파를 낳고, 그들 사이에 합종연횡이 이루어 진다해도, 얼마 되지 않아서 서로 다투고 마는 것이다.

미국 교계에서 은사운동을 하던 오순절파의 이단적인 요소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 앞에서 순종하고 복종하는 훈련이 없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된다. 하나님의 계명과 교훈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개인의 성령체험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배우려 하지 않고, 사람이 느끼고, 듣고, 보고, 체험하는 것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직통 계시와 음성을 듣는다는 신비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성령운동가들로 전락하여 서로 다른 은사들을 주장하다가 모두 다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20세기에 등장한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방언파, 치유파, 예언파, 귀신쫓아내는 파, 신령한 웃음과 넘어짐 현상에 치중하는 파, 관상기도파, 직통계시파 등등 도무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이 옳은 것이지 혼돈 그 자체이다. 포스퀘어 교단과 케이커가 서로 다르고, 척 스미스의 갈보리 채플이 떨어져 나와서 평신도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등, 21세기 일부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자들의 행태는 혼돈상태에 빠져있다.

기독교 역사적으로 돌이켜 보건데, 처음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던 무렵, 성경중심적이며, 체험을 중시하며, 복음 전도에 열정을 가진 교회들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종말적인 인식을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은 ‘복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여겨졌다. 미국 기독교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전후 세대에게 성경의 종말을 강조하면서, 초교파 운동과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운동이라는 흐름이 나타났다.51) 제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서 일어난 변화였다.52)

특히, 오순절 교단 내에서마저도 삼위일체를 거부하여 이단으로 추방을 당한 윌리엄 브랜험이 등장하면서, 미국 은사운동은 성경에서 완전히 떠나 버린 불순한 씨앗이 뿌려졌다.

한편 복음주의 운동은 빌리 그래함 목사의 대중전도와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개신교인들이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 여론형성을 주도하면서 1970년대에 강력하게 대두하였다.53)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근본주의자들의 경직화된 신앙에 새로운 바람이 불러오면서 오순절 은사체험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기존의 정통교회들 보다는 자유스러운 개인체험을 강조하면서 함께 상부상조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자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고 성경비평가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비평적인 학설들을 거부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까지는 좋았다. 그리고 자신의 교단만이 정통이라는 주장들이 지나친 교파 분열을 일으키고 있던 때에, W.C.C. (세계교회협의회)와 N.A.E. (복음주의 연맹) 사이에 냉전시대의 대립이 깊어지던 시기가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였다. 초교파적인 선교적 연대를 강조하던 복음주의자들과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파와는 상호 공통점이 많았다.

하지만 복음적인 교회들의 강조는 ‘회심체험’이다. 하나님의 영적인 감동에 사로잡혀서 회심체험을 하는 것은 전인격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것은 사역에 임하는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능력이다. 그래서, 일상적인 생활에서 철저한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지 않다. ‘회심체험’과 ‘은사체험’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중심이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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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부 마이크 비클에 대한 의문점들

1. 직통 계시파에서 흘러나온 변형

사람이나 사상이나 진공 상태에서 나오지 않는 법이다. 어머니의 품에서 나오며, 시대와 환경의 흐름 속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마이크 비클은 그가 몸담고 배웠던 뿌리가 왜곡된 은사주의, 신비적인 예언활동, 변질된 성령운동이었다. 그가 말세에 내린 은사들을 강조하고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예언활동을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바로 그의 목회자로서의 출발이 잘못된 은사운동파 기독교 교회임을 말해준다. 비클은 두 가지를 강조한다: “prophetic ministry"와 "the End time"에 오는 기적과 초자연적인 이적들이다.54)

1979년 목사가 된 마이크 비클은 처음부터 정통 기독교 교단에서 안수를 받은 목사로서의 정확한 신임이나 검증이 (credentials)이 전혀 없다. 자신이 미주리 세인트 루이스에 있던 수 천명의 성도가 모이는 성령은사파 교회에서 부목사로 초빙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목회자가 누구였는지? 어떤 상황에서 그 교회의 목사가 뒷좌석에 있던 자신을 지목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모호하게 포장하였다.55) 전혀 목회자로 준비가 없던 그는 자신을 지목한 계시에 따라서 토요일 연속 12주 성경공부를 인도하다가 초빙받아서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출발에서부터 하나님의 예언을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은 그의 경력에 항상 일관되게 나타나는 환경적 영향을 말해 주는 것이다.

미주리 대학교 1학년이 최종학력으로 정규 신학교에서 수학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이 잠을 청하는 안방에서, 즉 스스로 침대 학교에서 성경을 읽고 공부했다고 주장한다. 바로 여기에 목회자로서, 감히 성경에 나타나는 예언자로서 그가 주장하는 것들이 허구라는 점이 드러난다.

마이크 비클은 캔사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 주요 사역지도 역시 캔사스 시티이다.56) 하지만, 그의 첫 목회사역은 1976년부터 1982년까지 세인트 루이스 서쪽 지역에서 스물 다섯 명의 청소년들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함께 했던 분들의 증언들에 의하면, 그가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던 사실들이 드러난다. 즉, 마이크 비클이 세인트 루이스로 돌아오기 이전에 자기 나름대로 교회사역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미주리주 로즈버드에서 교회를 세우려다가 실패하고, 세인트 루이스로 가게되었고 당시 극단적인 은사운동으로 엄청난 사람을 모았던 ‘뉴 커번넌트 펠로쉽’이라는 교회의 청소년 목사로 연관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자신이 간단하게 예언으로 목회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교회가 바로 이 교회였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남부 세인트 루이스 펠로쉽” (South St Louis Fellowship)이라는 교회를 그의 초기 사역 중에 두 번째로 세우고자 약 1년 반 동안 노력했었다. 푸트남 (Gene Putnam)이 목회하던 교회가 거의 죽어가는 상황에서 그들의 건물로 합하였고, 그때에 좀 더 급진적인 형식으로 춤을 추는 식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자신의 뜻대로 교회가 잘 되지 않자, 그는 익숙하던 도시로 다시 돌아가서 자신의 야심을 채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행보가 예언이라는 것으로 다시 포장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행적을 예언과 연결짓고 있다.

1) 신비주의와 예언

마이크 비클이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는 목회적 사역에 관한 예언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건은 1982년 6월 경에 일어났다. 마이크 비클은 그전에 전혀 알지 못하는 예언자, 어거스틴 알카라 (Augustine Alcala)라는 선지자가 교회의 모임 시간에 일어나서 공개적으로 “주님은 너와 너의 아내 다이앤의 갈 길을 다시 지도하고 계시는데, 너는 앞으로 캔사스 시티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들었다고 주장한다.57) 그래서 그는 “캔사스 시티로 이사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예언에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즉, 그 이전에는 이런 예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비로서 이 무렵부터 아주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의 초자연적인 예언에 대해서 개인적인 접촉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쓰여진 그대로 믿어야 할 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의문점들이 있다.58) 캔사스 시티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의문점들이 많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예언들은 진실된 것으로 인정하라는 것인데, 과연 이러한 예언을 받았는지도 의심이거니와, 그 당시 예언하는 자들이 누구였으며, 그들의 예언들이 어디에서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캔사스로 다시 돌아오는 데는 어거스틴 아톨라로부터 받은 예언의 지시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것일까? 당시 그의 주변에 있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새로운 형식의 교회를 세워서, 어느 교단에도 소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지도력을 발휘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권위에만 굴복하는 극단적인 무리를 만들어보려는 헛된 야심에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이단들은 오직 특정인 한 사람의 권위에만 의존하도록 심리적으로 교묘한 전술을 구사한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결정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예언자를 이용하는 것이다.

2) 침대 신학의 위험성:

앞에 언급한 예언을 듣게 된 무렵에, 마이크 비클은 인도에서 설교할 일정이 있어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순방하게 되었는데, 자신도 동일한 예언을 직접 받았다고 주장한다. 마이크 비클은 한달 동안 어디든지 다닐 수 있는 비행기표를 가지고,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서 하나님의 마음을 받고자 결심했다고 한다. 1982년 9월 인도와 한국을 거쳐서 이집트 카이로에 머물고 있던 중, 호텔 방에서 "내적으로 울리는 음성“을 들었다는것이다. 하나님께서 캔사스로 이사하여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기를 원하신다는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한다.59) 그는 두려웠지만, 곧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세상의 끝까지 미치게 될 사역의 동반자로 너를 초대한다. 나는 이 일에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고, 많은 사람들이 예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네가지 계획을 가지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다고 주장한다: 1) 밤과 낮으로 드리는 기도 2) 마음의 거룩함 3) 흔들리지 않는 믿음 4) 가난한 자들에 주는 흡족하게 나눠주는 일60)

그리고 “너의 마음에서 네 동료들이 이런 마음을 빼앗아 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주의를 받았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한가지를 더 첨가하여서 “이 한 세대 내에 교회의 이해와 표현을 내가 바꿀 것이다”고 하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구절을 믿지 않는 자들이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존경심과 두려움을 가지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이해했다고 한다. 비록 세상에서 미움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5장 13절에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는 것과 같이 되리라는 것이다.61) 정작 비클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로서 명성을 꿈꾸며, 챨스 피니 (Charles Finney) 죤 레이크 처럼 체험적인 부흥사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운동을 일으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마이크 비클은 정상적인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으므로 그가 주위에서 보고 배운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해아래 새것이란 없다”. 정통 기독교 신학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클의 문제점은 예언과 계시를 직접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다는 허황된 정당화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침대에서 신학을 마쳤다고 한다. 이것은 극도의 개인적 주관주의와 무지한 신앙심에 몰입하게 되어져서 허황된 야심으로 발전되고 만다. 보편적인 기독교 교회에서는 개개인의 성도가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은혜를 받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 다만, 어떤 사람이 공적인 예배 장소에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공적인 승인 절차를 거쳐서 자신의 신앙 조항을 밝혀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 교회를 차리고, 스스로 인정하여 어느 날부터 말씀의 사역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전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미국 내 다양한 교회들과 특히 이단적인 오순절파 성령운동가들은 일반 교회의 목회자 양육과정과 철저한 검증, 시험 등과는 달리 비교적 단순하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침례교회와 회중교회, 독립교회에서는 엄격한 교육과 객관적 검증절차를 신중하게 시행하지 않는다. 1920년대에 시작된 포스퀘어 교단이나, 척 스미스의 갈보리 채플, 수많은 독립적인 침례교회들에서는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의 사역에 강조점을 두었다. 지금도 얼마든지 신학공부를 하지 않아도 목사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빈야드 운동을 하고 있는 교회들도 평신도 목회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리고 캔사스 시티 예언자들도 모두 그러하다. 기독교가 과연 어떤 신앙을 핵심으로 가지고 있는지에 관하여 정밀하게 공부하지 않는다.

그러는 가운데 일부 오순절파 교회들은 너나 할 것없이 남보다 특이한 성령 체험을 가지고 앞장서서 나타났다. 방언을 하는 자, 병 고치는 은사를 행하는자, 기적을 행하면서 귀신을 ㅤㅉㅗㅈ아내는 자들, 이들은 현상적으로 성령을 체험했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스스로 목회자가 되었다. 누구에게서 어떤 영향을 받았고, 객관적으로 어떤 ‘자격’을 구비했는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수많은 오순절파 교회들은 교리적으로 혼란과 혼돈을 피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 전서 4장 14절에서,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없이 말며”라고 부탁한 바 있다. 마이크 비클과 그의 동료들은 기독교 교회의 어디에도 연계되어서 성장하거나 훈련받거나 지도를 받지 않고, 스스로 사도라고 칭하는 그룹에 연계되어서 활동하고 있다.

3) 밥 존스의 망토

마이크 비클은 1983년 1월, 한 형제가 자신에게 찾아와서 밥 존스라는 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3년 3월 7일, 밥 존스가 자신의 사무실에 와서 사도행전 시대를 뛰어넘는 “특별한 운동” (special movement) 과 “새로운 질서” (New Order)를 일으키게 될 것을 예언으로 받았다고 주장한다.62) 지속적으로 초기 시절에 마이크 비클은 자신의 출발을 신비스럽게 해 주는 밥 존스의 예언을 항상 내세운다. 그래서 예언의 내용에 따르자면 마이크 비클이 성령의 권능을 받은 ‘운동’의 주역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후에는 개인적으로 밥 존스를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멸시하고 깎아내리고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밥 존스의 후광을 얻으려 했고, 이제 자신을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자 거추장스러운 듯이 깍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필요할 때는 누군가의 권위를 사용하고, 그가 더 이상 가치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게 되자 더 이상 신뢰를 하지 않는 천박한 인격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밥 존스가 마이크 비클에게 해 주었다는 에언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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