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칠 목사 "'산밑에 백합'은 내려가자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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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1-05-31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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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조정칠 목사(78세)가 목사와 성도를 대상으로 "산 밑에 백합" 운동을 시작했다. "산 위에 백합"이 아니라 "산 밑에 백합"이다.
"산 밑에 백합"은 아가서에서 나온 말로 원래 "골짜기의 백합"이 찬송가로 불리우면서 "산 밑에 백합"이라고 쉽게 표현했다. "산 밑에 백합" 운동은 교만하여 산 위에 기어올라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되찾아 예수님이 계신 산밑으로 내려오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5월말 홈페이지(lotv.org)를 개설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한다. 홈페이지에는 말씀동산, 감사언덕, 회개장막, 간증계곡등의 주요메뉴가 있다. 조 목사는 말씀동산을 통해 백합의 향기를 내는 메세지를 전하게 된다.
조정칠 목사는 "산 밑에 백합" 운동과 본질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는 "좋은 목자의 동산" 운동을 2005년 시작한 바 있다. 홈페이지(pastorjo.net)를 만들고 매월 1회 채플을 열었으며 출판물을 준비하는등, 쉴만하고 풍요한 곳인 '동산'처럼 교회를 동산화하는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1년뒤 조 목사는 조직이 확대되면서 한계를 느꼈다며 해체를 결정했다.
조 목사는 "이번에는 조직의 압박이 없으니 천천히 네티즌들과 더불어 가겠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원봉사자와 자원적인 헌금은 있어도 특별한 조직은 없다. 아직 특별한 정기모임도 없다. 홈페이지와 팜플렛등을 통해 민들레 홀씨처럼 전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조정칠 목사는 뉴욕목사회 회장(16,17대)을 역임했으며, 한국 신용산교회와 이민교회에서 50년간 사역하다 2003년 은퇴했지만, 은퇴후에도 여러교회에서 초청을 받아 주일말씀 사역을 계속해 왔다.
조정칠 목사가 말하는
"산 밑에 백합" 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
나이가 이만큼 되니가 책임을 느낀다. 노인이라는 것은 그냥 나이만 먹는것이 아니라 책임이 따른다. 앞에 가는 사람이 일을 당하면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이 앞에 가는 사람의 책임이다. 노인이라는 것은 앞서가는 사람으로 뒤에 가는 사람에 책임이 있다. 50년 목회를 했는데 그 양만큼의 책임이 있다. 나의 지난 일이 잘했다고 할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교회가 지금 바로 가고 있느냐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는 하나님을 창조주이시며 절대 주권자로 받아들이는 신앙과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성경은 다 박사들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날 사회는 더욱 복잡해지고 다양한 형태의 현대 기독교가 있는데, 제대로 가고 있는지는 누구도 장담못한다. 아니 잘못가고 있는 것은 상당히 많다.
하나님을 믿는데 믿지 않는 것 같은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하나님을 믿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한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이라면 교회에서 그것을 못하는데 과감히 하는 교회가 너무가 많다.
그것은 아니올시다 하는 사건이 너무 많고,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보다는 단체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조직을 굉장히 싫어하셨기에 12제자에 직책을 아무도 안주셨다. 그럼에도 교회가 조직위주, 단체가 운영하는 운영위주가 된다. 이런 문제를 보면서 이제까지 목회한 것을 바탕으로 이제는 자유롭게 할 이야기하려고 '산밑의 백합'을 시작했다.
'산밑의 백합'이라고 이름을 정한것은 오늘날 교회가 위치를 잘못잡고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낮고 겸손하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낮은 곳을 싫어하고 기어 올라가기 시작한다. 끝없이 올라갔다가 내려올때 사고치고 추락한다. 그렇게 사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겸손하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다. 하늘나라는 어린아이같이 겸손한 자가 간다고 못을 박아놓으셨다.
겸손하지 않은 것은 신앙이 아니다. 목사가 겸손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수 있는가. 그렇다면 거짓말이다. 이것이 교회의 가르침이고 교회가 지켜야 할 성격이라면 '산밑에 백함'이라는 말로 많은 사람에게 좀 내려와서 주님가까이 편안하게 있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낮은데에 계시는데 자꾸 올라가면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예수님과 같이 낮은데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보다 높은데 있으면 결국 예수님을 내려다 보아야 한다.
산밑에 내려가보면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니 얼마나 편할것인가. '산밑에 백함'은 내려가자는 운동이다. 예수님은 겸손하라, 온유하라고 하셨다. 산밑에 내려오면 예수님과 높이가 같아진다. 사람이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교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무시당하고 설움당하고 짖밟히고 스테레스를 당하는 실정이다. 그런곳은 교회가 아니다.
세상같이 교회가 싸울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도 교회가 싸운다. 싸워서 교회가 문제가 생겨 사회의 지탄을 받는다. '산밑에 백함'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호소하는 운동이다. 특히 목회자에게 하고 싶은 것은 교회는 목회자가 하기에 달렸다. 교인들은 목사를 닮는다. 목사가 예수님을 닮지 않았다면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무엇을 보겠는가.
높고 낮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에서 느끼는 감각이다. 교만이라는 것이 높다. "산 위의 백합"이 아니라 "산 밑에 백합"라는 의미는 낮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남보다 높아지려는 것은 욕심이다. 욕심은 높아지랴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단체 회장하려고 목숨걸고 싸운다.
조정칠 목사가 소개하는
"산 밑에 백합" 운동이란?
산 밑에 백합이라는 말은 아가서에서 나왔습니다. 아가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 한 쌍의 주인공을 신랑과 신부, 즉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가서는 시가서로 분류하지만 예언서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듯 합니다. 아가서의 사랑은 세속적인 연애 감정을 진하게 묘사한 것이 약점으로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을 보여주기에는 오히려 부족할지 모릅니다. 만물 중에 으뜸으로 창조된 인간의 사랑을 신의 연출로 무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 아가서입니다.
산 밑에 백합은 “골짜기의 백합”으로 기록된 원문을 현대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골짜기든 산 밑이든 가장 낮은 곳이라는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아가서는 천하 제일의 지혜자 솔로몬의 작품입니다. 그의 풍부한 지혜와 세련된 필치로 애정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 이유때문에 학자들 중에는 아가서를 정경에 포함시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성(聖)스러운 구속사적인 사랑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수용합니다. 다만 정경을 존중하여 염문처럼 취급하는 편견을 경계하고 거룩한 정경의 권위를 지지합니다.
산 밑에 백합은 그리스도의 순결과 평화를 나타냅니다. 기독교의 최대 명절인 부활절에는 백합으로 교회를 장식합니다. 그것은 온 세계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반영하는 숭고한 전통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산 밑에 백합이라는 찬송가에는 예수님을 아름다운 꽃으로, 견고한 산성으로, 빛나는 새벽별이라는 탁월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교회도 역시, 아름답고 평화롭고 밝고 투명하여야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산 밑에 백합은 예수님의 임재를 그곳에서 체험한다는 암시입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예수님의 소재를 교회에서 파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어떤 교회에는 예수님의 이미지와 향기는 고사하고 예수님의 분위기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인간 냄새만 가득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세속화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잘 팔리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많이 팔리는 것이 유행이 되고 인기를 누립니다. 교회도 그런 세속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유행을 따라 교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임재는 모호해지고 교회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산 밑에 백합은 위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필이면 밑에 라고 누누히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낮은 곳은 아이들도, 노인들도, 어떠한 약자라도 갈 수 있는 곳임을 강조합니다. 대체로 산의 구조는 산 마루, 산 허리, 산 아래로 3등분하는 것 같습니다. 산은 높아야 멋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산 밑은 높이가 제로(0) 지대입니다. 아마도 마음이 가난한 자의 상태가 제로(0)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게 되면 마음이 제로(0)의 상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자기보다 낫다고 하려면 마땅히 자기는 제로(0) 지대에 있어야 됩니다.
산 밑에 백합은 목자의 일터이며 양들의 뛰노는 초원입니다. 산에서도 활동이 가장 자유로운 곳입니다. 위로 올라 갈수록 활동이 제한됩니다. 교회는 자유하는 곳입니다. 장로교 신조의 제1조는 양심의 자유입니다. 진리 안에서 개인의 자유가 보장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헌금을, 세금 걷듯이 강요한다는 소문도 나돕니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과 자유를 갈망합니다. 교회 밖에는 그런 요구를 충족시킬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심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는 자기 위상을 너무 높게 설정하여 평등도 자유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산 밑에 백합의 이미지는 예수님이 높고 낮은 차별을 철폐하셨다는 평등의 이미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으십니다. 교회도 역시,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교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자기 교회를 위하여 적당한 부담을 인식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바른 태도입니다. 현대교회의 문젯점은 교인들에게 조급하게 부담을 떠안기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생각 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무섭다고 하는 교인도 있고, 심지어 자기 교회의 목사가 무섭다는 교인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 모든 목사가 다 그럴 리는 없습니다.
산 밑에 백합을 주제로 지은 찬송가가 있습니다. 이 찬송가의 선호도가 높은 편에 속합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아플 때, 외로울 때, 내 몸의 모든 염려, 시험을 당할 때, 온 세상 날 버려도와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애환을 공감한다는 뜻 같습니다. 예수님만은 끝 까지 내 곁에서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의 응집같습니다. 이 노래는 작가 자신의 신앙 체험을 그대로 담아서 뿜어내는 신앙 고백과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자기 가족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습니다. 선풍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한 생애를 주님께 바친 고귀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 밑에 백합은 성경이며, 노래이며, 생활입니다. 의식이 있는 고상한 사람이라야 이해가 되는 내용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산이란 정상에 올라야 멋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의 압권은, 산 밑에서 누리는 행복을 말합니다. 그것은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고,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것이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행복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더 많이 늘어 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백합처럼 아름다운 성도들의 영향력이 세상을 바꾸는 날을 보았으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어찌 아니된다 하겠습니까?
산 밑에 백합이 행복이라는 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올라 갈수록 행복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이 높아지려는 것을 애써 말리셨습니다. 또, 으뜸이 되려는 것을 매우 꾸짖으셨습니다. 더구나 부자가 되려는 것은 엄하게 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가르침은, 지금도 변하지 않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신앙은 끊임없는 자기개혁입니다. 신앙인이란 계속적으로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산 밑에 백합을 예수님으로 인정한다면 성도들도 당연히 백합을 닮아야 합니다. 아가서에는 신랑 자신이 '나는 백합'이라 하였고, 자기 신부를 부를 때도 '너는 백합'이라 하였습니다. 둘이 한몸이듯이 성도는 백합같아야 합니다. 백합의 순결은 성도의 진실같은 것입니다. 마음이 높은데 있으면 남을 무시하게 됩니다.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교만은 사람을 추악하게 만듭니다. 백합은 순결한 점이 다른 꽃과 구별됩니다. 오늘의 세상은 진실이 실종된 위선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산 밑으로 향한 운동이 절실할 때 입니다.
산 밑에 백합 거기가 교회의 자리입니다. 교회가 제 자리에 서 있지 않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교회를 산 밑이라고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위치가 높다면 특수한 사람 밖에 올라 갈 수 없습니다. 교회란 누구나, 언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입니다. 누구도 교회를 개혁하라고 강요할 권한은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평지에 선 느낌을 주지못하고 있습니다.
산 밑에 백합이라는 작은 공간 하나를 만들어, 함께 낮아지자고, 낮은 곳에 오신 주님을 같이 좇아가자고, 이렇게 수다를 떨고 있습니다. 모쪼록 너그럽게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산 밑에 백합" 홈페이지 방문하기
http://www.lotv.org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산 밑에 백합"은 아가서에서 나온 말로 원래 "골짜기의 백합"이 찬송가로 불리우면서 "산 밑에 백합"이라고 쉽게 표현했다. "산 밑에 백합" 운동은 교만하여 산 위에 기어올라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되찾아 예수님이 계신 산밑으로 내려오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5월말 홈페이지(lotv.org)를 개설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한다. 홈페이지에는 말씀동산, 감사언덕, 회개장막, 간증계곡등의 주요메뉴가 있다. 조 목사는 말씀동산을 통해 백합의 향기를 내는 메세지를 전하게 된다.
조정칠 목사는 "산 밑에 백합" 운동과 본질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는 "좋은 목자의 동산" 운동을 2005년 시작한 바 있다. 홈페이지(pastorjo.net)를 만들고 매월 1회 채플을 열었으며 출판물을 준비하는등, 쉴만하고 풍요한 곳인 '동산'처럼 교회를 동산화하는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1년뒤 조 목사는 조직이 확대되면서 한계를 느꼈다며 해체를 결정했다.
조 목사는 "이번에는 조직의 압박이 없으니 천천히 네티즌들과 더불어 가겠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원봉사자와 자원적인 헌금은 있어도 특별한 조직은 없다. 아직 특별한 정기모임도 없다. 홈페이지와 팜플렛등을 통해 민들레 홀씨처럼 전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조정칠 목사는 뉴욕목사회 회장(16,17대)을 역임했으며, 한국 신용산교회와 이민교회에서 50년간 사역하다 2003년 은퇴했지만, 은퇴후에도 여러교회에서 초청을 받아 주일말씀 사역을 계속해 왔다.
조정칠 목사가 말하는
"산 밑에 백합" 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
나이가 이만큼 되니가 책임을 느낀다. 노인이라는 것은 그냥 나이만 먹는것이 아니라 책임이 따른다. 앞에 가는 사람이 일을 당하면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이 앞에 가는 사람의 책임이다. 노인이라는 것은 앞서가는 사람으로 뒤에 가는 사람에 책임이 있다. 50년 목회를 했는데 그 양만큼의 책임이 있다. 나의 지난 일이 잘했다고 할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교회가 지금 바로 가고 있느냐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는 하나님을 창조주이시며 절대 주권자로 받아들이는 신앙과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성경은 다 박사들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날 사회는 더욱 복잡해지고 다양한 형태의 현대 기독교가 있는데, 제대로 가고 있는지는 누구도 장담못한다. 아니 잘못가고 있는 것은 상당히 많다.
하나님을 믿는데 믿지 않는 것 같은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하나님을 믿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한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이라면 교회에서 그것을 못하는데 과감히 하는 교회가 너무가 많다.
그것은 아니올시다 하는 사건이 너무 많고,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보다는 단체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조직을 굉장히 싫어하셨기에 12제자에 직책을 아무도 안주셨다. 그럼에도 교회가 조직위주, 단체가 운영하는 운영위주가 된다. 이런 문제를 보면서 이제까지 목회한 것을 바탕으로 이제는 자유롭게 할 이야기하려고 '산밑의 백합'을 시작했다.
'산밑의 백합'이라고 이름을 정한것은 오늘날 교회가 위치를 잘못잡고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낮고 겸손하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낮은 곳을 싫어하고 기어 올라가기 시작한다. 끝없이 올라갔다가 내려올때 사고치고 추락한다. 그렇게 사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겸손하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다. 하늘나라는 어린아이같이 겸손한 자가 간다고 못을 박아놓으셨다.
겸손하지 않은 것은 신앙이 아니다. 목사가 겸손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수 있는가. 그렇다면 거짓말이다. 이것이 교회의 가르침이고 교회가 지켜야 할 성격이라면 '산밑에 백함'이라는 말로 많은 사람에게 좀 내려와서 주님가까이 편안하게 있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낮은데에 계시는데 자꾸 올라가면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예수님과 같이 낮은데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보다 높은데 있으면 결국 예수님을 내려다 보아야 한다.
산밑에 내려가보면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니 얼마나 편할것인가. '산밑에 백함'은 내려가자는 운동이다. 예수님은 겸손하라, 온유하라고 하셨다. 산밑에 내려오면 예수님과 높이가 같아진다. 사람이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교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무시당하고 설움당하고 짖밟히고 스테레스를 당하는 실정이다. 그런곳은 교회가 아니다.
세상같이 교회가 싸울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도 교회가 싸운다. 싸워서 교회가 문제가 생겨 사회의 지탄을 받는다. '산밑에 백함'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호소하는 운동이다. 특히 목회자에게 하고 싶은 것은 교회는 목회자가 하기에 달렸다. 교인들은 목사를 닮는다. 목사가 예수님을 닮지 않았다면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무엇을 보겠는가.
높고 낮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에서 느끼는 감각이다. 교만이라는 것이 높다. "산 위의 백합"이 아니라 "산 밑에 백합"라는 의미는 낮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남보다 높아지려는 것은 욕심이다. 욕심은 높아지랴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단체 회장하려고 목숨걸고 싸운다.
조정칠 목사가 소개하는
"산 밑에 백합" 운동이란?
산 밑에 백합이라는 말은 아가서에서 나왔습니다. 아가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 한 쌍의 주인공을 신랑과 신부, 즉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가서는 시가서로 분류하지만 예언서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듯 합니다. 아가서의 사랑은 세속적인 연애 감정을 진하게 묘사한 것이 약점으로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을 보여주기에는 오히려 부족할지 모릅니다. 만물 중에 으뜸으로 창조된 인간의 사랑을 신의 연출로 무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 아가서입니다.
산 밑에 백합은 “골짜기의 백합”으로 기록된 원문을 현대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골짜기든 산 밑이든 가장 낮은 곳이라는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아가서는 천하 제일의 지혜자 솔로몬의 작품입니다. 그의 풍부한 지혜와 세련된 필치로 애정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 이유때문에 학자들 중에는 아가서를 정경에 포함시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성(聖)스러운 구속사적인 사랑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수용합니다. 다만 정경을 존중하여 염문처럼 취급하는 편견을 경계하고 거룩한 정경의 권위를 지지합니다.
산 밑에 백합은 그리스도의 순결과 평화를 나타냅니다. 기독교의 최대 명절인 부활절에는 백합으로 교회를 장식합니다. 그것은 온 세계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반영하는 숭고한 전통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산 밑에 백합이라는 찬송가에는 예수님을 아름다운 꽃으로, 견고한 산성으로, 빛나는 새벽별이라는 탁월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교회도 역시, 아름답고 평화롭고 밝고 투명하여야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산 밑에 백합은 예수님의 임재를 그곳에서 체험한다는 암시입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예수님의 소재를 교회에서 파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어떤 교회에는 예수님의 이미지와 향기는 고사하고 예수님의 분위기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인간 냄새만 가득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세속화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잘 팔리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많이 팔리는 것이 유행이 되고 인기를 누립니다. 교회도 그런 세속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유행을 따라 교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임재는 모호해지고 교회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산 밑에 백합은 위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필이면 밑에 라고 누누히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낮은 곳은 아이들도, 노인들도, 어떠한 약자라도 갈 수 있는 곳임을 강조합니다. 대체로 산의 구조는 산 마루, 산 허리, 산 아래로 3등분하는 것 같습니다. 산은 높아야 멋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산 밑은 높이가 제로(0) 지대입니다. 아마도 마음이 가난한 자의 상태가 제로(0)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게 되면 마음이 제로(0)의 상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자기보다 낫다고 하려면 마땅히 자기는 제로(0) 지대에 있어야 됩니다.
산 밑에 백합은 목자의 일터이며 양들의 뛰노는 초원입니다. 산에서도 활동이 가장 자유로운 곳입니다. 위로 올라 갈수록 활동이 제한됩니다. 교회는 자유하는 곳입니다. 장로교 신조의 제1조는 양심의 자유입니다. 진리 안에서 개인의 자유가 보장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헌금을, 세금 걷듯이 강요한다는 소문도 나돕니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과 자유를 갈망합니다. 교회 밖에는 그런 요구를 충족시킬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심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는 자기 위상을 너무 높게 설정하여 평등도 자유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산 밑에 백합의 이미지는 예수님이 높고 낮은 차별을 철폐하셨다는 평등의 이미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으십니다. 교회도 역시,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교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자기 교회를 위하여 적당한 부담을 인식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바른 태도입니다. 현대교회의 문젯점은 교인들에게 조급하게 부담을 떠안기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생각 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무섭다고 하는 교인도 있고, 심지어 자기 교회의 목사가 무섭다는 교인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 모든 목사가 다 그럴 리는 없습니다.
산 밑에 백합을 주제로 지은 찬송가가 있습니다. 이 찬송가의 선호도가 높은 편에 속합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아플 때, 외로울 때, 내 몸의 모든 염려, 시험을 당할 때, 온 세상 날 버려도와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애환을 공감한다는 뜻 같습니다. 예수님만은 끝 까지 내 곁에서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의 응집같습니다. 이 노래는 작가 자신의 신앙 체험을 그대로 담아서 뿜어내는 신앙 고백과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자기 가족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습니다. 선풍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한 생애를 주님께 바친 고귀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 밑에 백합은 성경이며, 노래이며, 생활입니다. 의식이 있는 고상한 사람이라야 이해가 되는 내용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산이란 정상에 올라야 멋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의 압권은, 산 밑에서 누리는 행복을 말합니다. 그것은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고,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것이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행복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더 많이 늘어 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백합처럼 아름다운 성도들의 영향력이 세상을 바꾸는 날을 보았으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어찌 아니된다 하겠습니까?
산 밑에 백합이 행복이라는 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올라 갈수록 행복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이 높아지려는 것을 애써 말리셨습니다. 또, 으뜸이 되려는 것을 매우 꾸짖으셨습니다. 더구나 부자가 되려는 것은 엄하게 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가르침은, 지금도 변하지 않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신앙은 끊임없는 자기개혁입니다. 신앙인이란 계속적으로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산 밑에 백합을 예수님으로 인정한다면 성도들도 당연히 백합을 닮아야 합니다. 아가서에는 신랑 자신이 '나는 백합'이라 하였고, 자기 신부를 부를 때도 '너는 백합'이라 하였습니다. 둘이 한몸이듯이 성도는 백합같아야 합니다. 백합의 순결은 성도의 진실같은 것입니다. 마음이 높은데 있으면 남을 무시하게 됩니다.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교만은 사람을 추악하게 만듭니다. 백합은 순결한 점이 다른 꽃과 구별됩니다. 오늘의 세상은 진실이 실종된 위선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산 밑으로 향한 운동이 절실할 때 입니다.
산 밑에 백합 거기가 교회의 자리입니다. 교회가 제 자리에 서 있지 않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교회를 산 밑이라고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위치가 높다면 특수한 사람 밖에 올라 갈 수 없습니다. 교회란 누구나, 언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입니다. 누구도 교회를 개혁하라고 강요할 권한은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평지에 선 느낌을 주지못하고 있습니다.
산 밑에 백합이라는 작은 공간 하나를 만들어, 함께 낮아지자고, 낮은 곳에 오신 주님을 같이 좇아가자고, 이렇게 수다를 떨고 있습니다. 모쪼록 너그럽게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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