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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 목사 "교회부흥의 삼대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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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1-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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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목사회(회장 김용익 목사)는 10월 11일(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뉴욕실로암장로교회(김종덕 목사)에서 권준 목사(시애틀형제교회)를 초청하여 "부흥의 원칙과 목회자의 창조적 변화"라는 주제로 목회자 세미나를 열었다.


▲권준 목사 - 교회부흥의 삼대원칙

권 목사는 2008년에도 뉴욕목사회 세미나 강사로 참가한 한 바 있다. 권 목사는 뉴욕을 방문후 뉴욕과 뉴저지 4기 목회자 아버지학교 강사로 서며, 10월 21일부터 3일간 뉴저지 한소망교회(이승준 목사)에서 부흥회를 인도한다

권준 목사는 뉴욕실로암장로교회에서 열린 첫번째 강의에서는 "목회자의 창조적 변화"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으며, 금강산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점심삭사후 열린 세미나에서는 "교회부흥의 삼대원칙"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다.

다음은 "교회부흥의 삼대원칙"강의 내용이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을 통해 목회하는 가운데 3가지 목회원칙을 정했다.(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첫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즉 하나님과 나의 관계(예배)이다. 둘째는 너희도 서로사랑하라 즉 나와 너의 관계(친교)이다. 셋째는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즉 나와 모든 사람(전도)이다.

이 순서는 바뀌어서는 안된다. 친교가 아무리 좋아도 예배가 안되면 끝난다. 인간적인 관계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사랑이 한계에 다달을때 그것을 뛰어 넘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다. 그것은 에배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예배-친교-전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공급받고 회복되어지고 그 사랑으로 나누면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것 바로 그것이 전도이다.

노방전도나 관계전도도 해야 하지만 최고의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고 넘쳐 흘러 사랑함으로 말마암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룸으로 소문을 듣고 소망을 잃은 사람이 몰려오는 것이 초대교회의 놀라운 역사이다. 당신은 왜 그 교회를 갔느냐 물으면 듣고 싶은 말은 그 교회가면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 고갈된 시대에 사랑이 있는 공동체를 찾게되는 것이다. 하늘향해 열린교회, 서로를 향해 열린교회, 세상을 향해 열린교회가 되어야 한다.

① 하늘을 향해 열린 공동체(예배)

예배는 교회의 심장이다. 교회를 움직이는 엔진은 예배이다. 예배가 살지 않으면 다 죽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패는 예배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말이 있다. 예배는 그냥왔다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으로 치유 회복 성령이 있는 현장이다. 전통교회 문제는 모르는 사이에 예배가 서서히 메말라 간다. 그런 예배가 예식화 형식화 습관화 되어가고 있다. 왜 예배를 드리는지 모르고 너무 익숙하다 보니 습관화되어 간다. 한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한해에 북미주에서 문을 닫는 교회는 2,700-3,000교회가 된다. 영적능력을 잃어버리고 매말라가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가득한 곳이다. 마음이 움직여지는 찬양과 기도와 헌신과 결단을 가져오는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 우리는 5번 예배드리니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1시간 15분을 넘기면 다음예배가 문제가 된다. 예배에 늦게오면 일정시간을 지나면 문을 닫고 다음예배로 가라고 한다. 너무 습관적으로 오는 사람이 있다. 해보고 싶은 것은 예배축도후 문앞에서 나가는 성도와 악수할때 은혜받은 사람만 내보냈으면 한다. 좀 일찍 나가는 것이 다가 아니다. 중요한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가야 한다.

예배가운데 안타까움은 일주일내내 성도들이 힘들고 지치고 살았다. 어려워도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모습이 감사하다. 그런데 주일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만나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 향해 나가야 하는데 아무런 변화와 회복없이 가는 성도들이 안타깝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인 힘을 가지고 세상의 영적전쟁을 향해 나가야 한다. 예배시간을 보내고 교회에서 섬기기도 했는데 하나님을 못만나고 나갈 성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우리 모두는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형제교회를 부임하기전에 두달전에 궁금해서 방문하여 뒤에서 예배를 드렸다. 한번으로 족한 예배였다. 어떤 교회는 목사도 드리기기 싫은 예배도 있다. 순서에 입각한 기계적인 예배를 성도들이 드린다는 것은 안타깝다. 아무런 변화와 감동이 없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영광적인 경험이 있어야 한다. 예배는 장례식이 아니라 축제이다. 어느 경우는 장례식 수준이다. 마치 하나님이 돌아가실때가 다 된것 같다.

회개의 눈물이 있고, 나를 사용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격의 눈물이 있는 축제가 예배이다. 많은 경우 예배가 전통에 사로 잡혀 있다. 예배문화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잘 예배를 드릴수 있을까 하고 만들어놓은 순서이고 문화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순서가 바뀌면 큰일나고 마치 세속화되는 것 처럼 생각한다.

중요한것은 신령과 진정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날수 있어야 한다. 신령과 진정으로 진실됨으로 예배를 드릴수 있어야 한다. 어느 교회는 헌금순서때문에 싸우다 교회가 갈라졌다. 헌금순서는 비본질이다. 본질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 물흐는듯한 예배, 하니님이 임재하신 예배를 위해 끓임없이 노력하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예배를 어떻게 드릴수 있을까. 제가 노력하는 부분은 어떻게 하면 습관적인 예배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될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고 있다. 예배의 부흥없이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날수 없다. 심장을 나쁜데 다른것에 바꾸는 것은 성형수술을 하는 것과 같다. 성령의 임재가 있는 그러한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배가 끝나고 자기마음에 들면 예배가 좋았다고 한다. 그럴수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 진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법궤를 옮겨야지 인간의 합리적인 방식으로 하면 안되는 것이 성경에 나와있다.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해야 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성도에게 열정도 좋지만 순종이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는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내가 원하는대로 해달라는 신을 만들고 자신이 움직인다. 우상숭배이다. 자기가 주인이 된다.

성도들에게 예배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해야 한다. 조금만 느슨해지면 나사가 풀린다. 그래서 자주 튜닝할 필요가 있다. 피아노를 가만히 놓아두면 음색이 변한다. 차도 튜닝을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나와 예배해야 한다. 이것을 놓치면 친교와 전도로도 이룰수 없다.

예배를 위한 중보기도팀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형제교회에 왔을때 먼저 한분이 시작했다. 너무나 감사하다. 목회자가 예배가 잘 안풀릴때가 있다. 그럴때면 기도하는 중보기도자를 생각하면 힘이 난다. 교회에 예배를 위한 중보기도팀을 세우고 그것을 강조해주라. 너무나 힘이되고 중요하다.

② 서로를 향해 열린 공동체(친교)

다음은 친교이다. 교회가 추구할것은 하나됨이다. 하나님은 진정한 커뮤니티를 원하신다.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저들도 서로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시며 진정한 공동체에 대한 꿈을 가지셨다. 공동체안에서 놓칠수 없는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 장로가 부목사와 사이좋게 지내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 그 장로는 이전에 다녔던 교회에서 사역자간의 갈등때문에 아픔을 경험한 장로이다. 목회를 하면서 결코 놓칠수 없는 부분이다. 성도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됨을 이루기위해 힘써 지켜나가야 한다.

목사가 설교하는데로 살면 된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목사가 그렇지 못할때가 많이 있다. 벡스타 목사라는 분은 목사가 예수를 잘믿으면 교회의 문제 대부분이 해결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공동체의 능력은 하나님이다.

목회를 하면서 고난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감사한 것이 고난이 잘 생각이 안난다. 그것이 감사하다.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형제교회 부임후 맞은 첫 위기는 14년 목회후 은퇴한 전임목사님의 문제였다. 문제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잘 해결하고 그것을 넘어서면서 부터 하나님이 힘을 실어주셨다. 들리는 말에 성도들은 영적인 귄위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또한 목사가 자기를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자기 신분을 내놓는 것을 보았다. 그런것들이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목사의 영적인 두려움을 가지게 했다. 또 한가지는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자신들이 실수해도 저 목사가 평안하게 감싸줄것이라는 신뢰를 가졌다. 하나님이 반전시켜 주셨다.

감사한것은 교회가 건강해 지니 여유가 생긴다. 상대를 향했던 상처와 미움과 아픔이 건강해지니 여유가 생기고 품어주고 서로 용서해주는 관계가 발전했다. 관계를 풀어지고 하나됨의 능력으로 교회가 힘있게 나가기 시작했다. 중요한것은 하나님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하나됨을 함께 이루어가야 한다.

어떤 기업이 성공하는 것은 훌륭한 제품때문만이 아니다. 애플같이 탁월하게 성공하는 기업의 성장원인을 탁월한 상품이라고 말하는데 성공한 기업의 원인은 훌륭한 제품만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성장부흥은 프로그램만이 아니다. 후배목사들이 이야기할때 보면 저 교회는 프로그램으로 성장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속상하다. 기업의 성장과 교회의 성장은 제품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어떤것도 해낼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팀플레이가 있다. 즉 동역의 관계가 있다. 중요한것은 팀플레이를 할수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강력한 전도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이루는 것이다. 저 교회에 가면 뭔가 위로받고 재미있을 것 같고 무엇인가 얻을수 있을 것 같다. 성도들에게 목사가 줄 수 있는 가장 귀한것은 어디에 가도 우리교회에 와보라고 말할수 있는 자신감을 불어넣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계신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교회의 영향력은 교인수나 건물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에 달려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능력은 바로 하나님이다. 조직이 크면 비효율적이라는 이야기도 옛이야기이다. 조직이 크도 팀웍이 단단한 조직의 시너지 파워는 상상을 초월한다. 어떤 중요한 일이 한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있다. 하지만 능력있는 그 사람뒤에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능력뒤에는 그가 가지지 않은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하나됨을 이루어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 조직이 강하게 하고 성장하고 부흥한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 라는 말을 좋아한다. 배가 어떻게 산으로 올라 가겠는가. 그 말은 개인의 능력은 있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엉뚱한 곳으로 간다는 말이다. 엉뚱한 곳의 극치가 산이라 표현한것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 라는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공이 팀플레이해서 배가 산로 갔으면 좋겠다. 그런 기적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교회는 기적공동체이다. 세상사람이 보지 못하는 기적을 교회에서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하나됨를 이루어 세상이 생각하지 못하는 놀라운 역사를 함께 이루어 가는 공동체, 그러기에 하나님을 힘써 지켜야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자신을 내려놓고 희생해야 한다.

③세상을 향해 열린 공동체(전도)

결국 전도 공동체라는 말이다. 영혼을 구하기위해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이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꿈은 교회성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교회성장은 목표이지 목적은 안된다. 목표와 목적은 다르다. 그런데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세상적으로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목표이다.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올바르게 살 수 있는 올바른 목적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 사회에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되도록 꿈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부모들이 대부분 자녀에게 목적이 아니라 목표를 심어주니 좋은학교에 들어가도 세상을 향해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 다 자기중심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세상적 좋은 직업을 가지라는 것은 부모와는 달리 좀 편하게 살라는 것이다. 그리고 너 덕좀 보자는 의미도 있다. 자기울타리를 뛰어넘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주신 꿈은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킹덤 드림이다. 잘먹고 잘사는 것은 단지 목표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때 하나님이 주신 꿈을 자각해야 한다. 그 꿈은 킹덤 드림이다.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것을 확장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지 염려말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없으니 고아인생을 산다.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고아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다 아신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생각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 의를 구하는 킹덤 드림을 구하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지만 하나님이 일하신다. 거룩한 민족을 이루고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하신다. 복을 얻기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것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안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안주하면 망하게 된다. 떠나는 것이다. 정체되어 있으면 퇴보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떠난다.

그러니 중요한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라는 교회사명이 중요한것이지 교회성장이 중요한것이 아니다. 교회하면 묻는 질문이 사이즈이다. 그러니 모르는 사이에 크기가 너무나 중요하게 된 것이다. 교회의 크기에 상관없이 각자의 모습과 각자의 사명이 있다. 어떤 크기이던지 주어진 사명에 열중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교회성장에만 관심있으니 전도목적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라 자기교회 성장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교회는 성장할지 몰라도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안 이루어진다.

우리 모두는 교회가 더 커지면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면 목회는 끝이다. 그것은 인간의 야먕이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아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 비전을 가지고 땅끝까지 부르신 곳에 또는 세상 한복판에 빛과 소금으로 살아감으로 복음을 함께 나누고 그러므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루어 간다. 여기에 몇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지고 삶의 한복판에 나가는 꿈을 이루고자 살아가야 한다.

이민자들은 굉장히 폐쇄적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있기에 잘먹고 잘살아야 한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움켜진다.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만났으면 인생의 패턴이 바뀌어야 한다. 축복의 통로가 복의 근원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언제 변했는가. 사도행전 1장 성령의 사건으로 인해 변했다. 그 전에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고백하지만 내가 주인된 삶을 살았다.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살기를 원한다. 성령에 속한 사람이다.

4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고 선교하고 전도하고 희생도 한다. 하지만 자기뜻을 이루어지기를 결국 원했다. 그들의 꿈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야 한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서 사도행전의 제자들로 바뀌어졌다. 우리도 킹덤드림으로 살아야 하는데 아메리칸 드림을 산다.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헌금하는 이유는 내게 복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와 헌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러한 삶의 패턴이 바뀌어야 한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킹덤드림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가지고 살면 모든것을 더해주겠다는 것이다. 사람도 재정도 보내주고 모든것을 다 공급해주어 열매를 맺게하여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단하고 나가는 것이다. 이민사회는 폐쇄적이라 받을것은 악착같이 받으려 하지만 반대는 아니다. 그것은 노예근성의 삶이다. 신앙생활을 광야의 여정이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시켜 가나안땅에 들어가기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40년을 광야에서 생활하게 하신것은 백성들이 가나안에 있으면서 80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노예 정체성을 없애는 작업이다. 노예근성이 아니라 복의 근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성도들에게 심어주어야 하는 것은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민하여 선교하기 힘들다. 일년에 2-3차례 선교를 한다. 성도들을 동력화시키려니 내가 먼저 가야 한다. 리더가 본을 보여야 교회가 움직인다. 선교지에 가면 자기들이 은혜를 받는다. 선교지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살수 있다는 비전을 준다. 선교지에 가면 내가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구나 하며 힘을 얻는다.

그들이 의미를 찾으니 열방을 꿈꾸고 돈을 벌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 자신을 위해 물질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선교하고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려고 하니 축복해달라고 기도가 바뀐다. 선교를 하니 우리가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교가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어 간다. 열방을 품고 선교하고 선교사를 돕는 것은 교회를 위해 너무 중요하다. 하나님의 꿈을 향해 나아가면 하나님이 모든것을 채워주신다.

우리 성도들이 전도와 선교를 해야 한다. 그리기 위해서는 세상과 접속이 컨텍트가 되어야 한다. 20세기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세대였다면 21세기는 "나는 접속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이제는 접속이 되어야 한다. 시대의 변화에 있어 생각해보아야 할 이슈이다. 문화를 알고 어떻게 그것을 뛰어넘는 사역을 할것인가. 아이폰을 나온 97년도 이후 접속 즉 터치의 시대가 되었다.

과연 교회가 세상과 접속이 되고 있는가. 세상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알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기독교는 게토화 되어간다. 고립화와 왕따가 된다. 겸손과 섬김으로 나갈때 접속이 이루어 진다. 세상은 교만해서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독선적인 태도가 싫다는 것이다. 크리스찬들은 절대 진리를 알고 있는데 감사할일이지 교만할일이 아니다. 절대 진리를 아는 확신에 찬 태도가 세상사람에게는 교만과 독선으로 비추어 질수도 있다. 그러니 정말 겸손함과 섬김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접속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간다.

성도들을 세상을 향해 겸손함과 섬김으로 나갈수 있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복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라고 했는데, 내가 그런 고통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그럼으로 자유한자이지만 스스로 종이 되었다고 말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 방법의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문화로 들어가면 그 사람들의 옷을 입고 그 사람들의 모양으로 변화하여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본질까지 변하는 것은 새속화이다. 그런데 본질에 깊게 서서 방법을 바꿈으로 그들과 하나됨을 이루는 것은 토착화라고 한다. 사도바울은 토착화의 천재이다. 그 모습을 닮고 싶다. 사도바울은 유연함으로 구원을 이룬다. 강하고 딱딱한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 이는 다빠진다. 하지만 유연한 혓바닥은 남는다.

융통성과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복음의 진리에 굳게서서 다가갈때, 저 사람의 입장으로 변해서 내가 다가갈때 바울은 토착화의 존재이다. 그런데 그것은 바울이 고안해낸 전도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성육신의 원리이다. 사도바울이 끓임없이 고백한 내용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한다며 나머지는 다 배설물이라고 했다. 성육신의 하나님의 원리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고 천대받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와서 십자가에 달려 구원의 역사를 이루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예수님을 닮기를 원했다. 그럼으로 끝이 없이 불신자의 입장으로 성도들의 입장으로 믿지 않는자에게 다가가 접속을 이룸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분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해야 한다.

우리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전도와 선교이다. 성도들에게 킹덤드림을 심어줌으로 잃어버린 자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그들에게 어떻게 겸손함과 섬김으로 다가가게 할것인가.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세상을 섬겨야지 어떻게 세상을 보고 교회를 섬기라고 할것인가. 나는 MBC 피디수첩 나는 아간이 아니다를 보았다. 뭐길래 그렇게 떠들석하나. 공영방송에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것이 안타갑다, 더우기 존경하는 조용기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안타까웠다. 그것을 보면서 느낀것은 지금은 왜 세상이 저러냐 말하기 이전에 이제는 우리가 회개할때이다.

세상에 비추어진 교회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세상이 교회를 향해 떠들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런 경우에 우리의 잘못과 책임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 비추어진 우리 기독교의 모습이 한국교회의 모습이 안타깝다. 우리가 회개하고 자성할 부분은 자성하고 좀 더 지혜롭게 세상으로 향해 나아갈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나는 아간이 아니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아간이다면서 용서해달라는 참회의 기도가 우리안에 있어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로운 일을 해서 의인이 아니라 날마나 십자가에서 죄사함을 받아 죄씻음을 받음으로 의인의 삶을 살아간다. 어떻게 하던지 우리가 그 주님의 용서함과 은혜때문에 우리가 의인으로 이땅을 살아가고 그 주님을 세상에 연결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겠는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을 보고 안다. 성도들과 목사들을 보고 알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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