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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말씀 포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적인 부패를 인정하는 목회적 지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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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2-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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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말씀 컨퍼런스' 10주년을 기념하고 정리하기 위한 포럼이 “우리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이라는 주제로 4월17일부터 19일까지 필라 기쁨의교회(박성일 목사)에서 열렸다. 포럼의 두번째 주제토론 내용은 “Soli Deo Gloria-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 부패를 인정하는 목회적 지도력”이다. 발제자는 정대성 목사(콜로라도뉴라이프선교교회)이고 사회자는 한규삼 목사(뉴저지초대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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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자 정대성 목사/사회자 한규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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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자 정대성 목사(콜로라도뉴라이프선교교회)

발제 정대성 목사
Soli Deo Gloria -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 부패를 인정하는 목회적 지도력


목회한지 20년차가 되는데 88년부터 풀타임 사역을 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 부패를 인정하는 목회적 지도력'라는 주제를 받은후에 고민을 많이 했다. 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전적인 부패, 목회적인 지도력 그리고 시간제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그 중 하나를 설명하는 차원이 아니라 3가지 주제가 연결이 하는 것이다. 주제를 묵상하며 키워드는 '인정하는' 이다. 그러면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차원에서 발제를 전개한다. 3가지를 간단히 정의하고 지나간다.

오늘 3가지의 큰 주제를 '인정한다'는 단어속에 연결되는지 생각해보고 간단한 정의를 내려본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좋은 정의는 역대상 29장 11-13절 말씀이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간략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이 무엇인가 할때 피조세계에 대한 소유적인 주권이 있다. 그렇기에 피조 세상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주권이 있으시다. 이렇게 3가지로 주권의 영역을 정의해보았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는 여러 성경구절을 통해 인간의 전적으로 부패한 영역을 볼수 있다. 예레미야 17장 9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이미 부패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으며, 시편 51편 5절을 통해 우리의 시작이 원죄적인 죄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창세기 6장 5절을 보면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주시고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어라고 하신다. 시내산 정상이 청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거룩해진 이유는 하나님이 그곳에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악화되는 것은 윤리적인 차원의 선함과 악함 이전에, 우리가 계획하는 것에 하나님이 없으시면 아무리 선한 행위같이 보여도 그것이 악한 것이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우리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부재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의 의미이다. 로마서 5장 12절을 보면 그래서 이 죄가 세상에 들어와 우리가 죄의 영향을 받고, 고린도전서 2장 14절과 욥기 14장 4절을 통해 욥의 말을 통해 인간의 전적부패의 결과에 대해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지도력은 어떤 상황에서 목표달성을 위해 어떤 개인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에 영향력을 주는 것이다. 지도력의 메인 포인트가 사람이라면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수 있을까. 그것이 키포인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권적인 분이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목회적인 지도력에서 목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아야 할 주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 부패를 어떻게 자각할수 있는가. 목회를 하면서 회개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후배목사의 설교를 듣는데 이런 기가 막힌 말을 들었다. "회개란 모든 율법을 등장시켜서 율법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기에 일어나는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극도로 드러나다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 회개이다."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을 어떻게 깨닫을수 있는가. 전적으로 그것이 인정이 될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이 창조에 대한 피조에 대한 절대지배권과 소유권과 영광을 받으실 권리가 있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두가지가 어떻게 우리 마음에서 합해질까 고민하다가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한 인정이 있을때만 전적으로 부패함을 깨닫을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어디서 드러나는가. 지금까지 성도를 바꾸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설교를 통해 성경공부를 통해 바꾸려 했는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저에게 아이디어를 주셨다. 개척을 할때 세계를 품고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드디어 교회를 시작하는데 세계를 맡겨달라고 했는데 세계가 잘안변했다. 세계를 놔두고 미국만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했는데 미국도 안변했다. 그래서 내가 사는 도시만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다 보니 하나님은 "너나 잘해"라는 말씀을 주셨다. "네가 바뀌면 되지 않겠냐"는 말씀이다. 그것을 통해 목회의 진일보를 경험했다. 목회는 끓임없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하게 하는 것이구나를 깨닫았다. 주권을 행사할때 결국 진정한 주권은 남을 바꾸는 권리가 아니라 자기를 바꾸는 권리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이 극단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통제하시고 절제하셔서 아들을 보내주신 사건이다. 하나님의 주권의 총체적인 표현이라고 본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과 동등됨으로 여길수 있던 모든 권리, 인간들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생명에 대한 권리를 통제하셨다. 인간은 자기 손가락에 상처가 나는 것 보다 온세계가 멸망하는 것을 선호하는 이기적인 존재라는 말이 있다. 자기 생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불가능한 사건이다. 그러니 궁극적으로 주권은 자기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자기의 권리를 내려놓일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권리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전적인 부패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자기 생명의 권리를 다 포기하시고 아들로 보내주셨다는 생각이 올때야 비로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이 온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전적 부패는 내가 얼마나 부족한가, 내가 얼마나 못하고 있느냐, 내가 얼마나 율법에 대해서 죄인이냐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들어서 아들로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성육신에 대한 자각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자각이고 그 하나님을 만날때야 비로서 인간은 온전한 부패의식이 생긴다고 본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은 목회적 지도력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고 그것이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기의 절대적인 부패를 인정하는 목회적 지도력을 가지고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것인가를 3가지로 적용해 보았다. 결국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는 목회적 지도력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지도력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인간의 절대적 부패를 인정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마오의 독서생활'이라는 책을 읽었다. 중국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한 마오는 독서광으로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 책을 읽었다고 한다. 마오가 가장 좋아한것은 루쉰의 전집이다. 그 책을 읽을수록 혁명적인 전투사상을 고취한다는 생각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마오는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그 책을 읽고 동의가 된 것이다.

성경에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많은 경우에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쓰여진 것을 행위적으로 따르는 것이 순종인가. 성경을 읽다보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는 지도력은 일차적으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읽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읽을수록 우리의 모난 부분이 깍아져 나가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려 한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고백의 원리이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서 1장 17절(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앞 뒤 믿음이 달라야 한다. 제가 받아들인 것은 앞에 있는 믿음은 로고스 되신 예수그리스도이다. 성경을 해석할때 예수그리스도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예수안에서 총체적으로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의 구절을 맞추어 해석하면 자기가 원하는데로 맞추어 낼 수 있다. 그렇기에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지도력을 위한 선결적인 요건은 (이런말을 하면 불경하게 들릴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성경에 대한 인식으로 성경을 맹신하는것이 아니라 오픈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서 성경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계속하여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으로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진실됨을 드러내지 못한다.

저는 아이폰과 아이패드 같은 기술적인 기기를 좋아한다. 특별히 목회에 도움이 된다기 보다는 내가 좋아한다. 그런데 그 좋아하는 것 조차도 만약에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버릴수 있는가. 그냥 목회에 필요하다며 스스로 욕망을 정의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려놓으라 하시면 내려놓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새벽기도에서 성도들은 여러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왔지만 나갈때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여러분의 마음이 되어서 나가기를 소원한다고 기도한다. 하나님을 자꾸 설득해서 달라고 하고 달라는 것을 안주시면 40일동안 굶을 것이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도 내려놓으라고 하면 내려놓을 준비를 해야 하도록 하는 것이 목회적인 지도력이다.

2.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는 지도력이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를 아는가. 그는 행인을 유혹하여 침대에 눕혀놓고 침대보다 다리가 길면 짤라버리고 짧으면 늘려버렸다. 많은 경우에 자신의 부족을 하나님앞에 인정하고 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 그라다 보니 자신의 부족을 인정한다는 것은 겸손할수 있는 지도자이다. 자신의 부족을 인정한다는 자체가 겸손이다.

최근에 읽은 책중에 생각하게 했던 책이 있다. "Escondido Theology"라는 책은 학교를 다닐때 90년대에 일어난 일을 쓴 것이다. 노년의 프레임 교수는 젊은 목회자들의 신학을 지적하는 것 보다 어떤면에서 오만함을 지적하였다. 마치 자기의 신학으로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와 같이 모든 사람을 자기 침대위에 맞추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설교를 해도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을 맞추려 한다. 프레임 교수가 다른 사람의 다름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우리의 부족을 인정하는 갖추어야 할 자세이다.

3. 건강한 영성을 통해 교회를 세워나가는 지도력이다.

WCC가 발간한 "신학교육에 있어서 영성 형성"이라는 소책자를 읽어보니 이렇게만 교회를 세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우리가 건강하게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고 교회와 세상과 다른 사람을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영성이라고 본다.

"화해적이고 통합적이다, 성육신적이다, 성경적이며 기도로부터 영향을 공급받는다, 희생적이다, 해방적이다, 공동체적이며 성만찬 중심이다, 봉사와 증거안에서 표현된다, 하나님의 주도하심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땅위에 전개하는 영성이다, 세계를 향해 개방되어 있다."

저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드러난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전적 부패의식이라고 본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이 요구하는 것으로 내자신을 바꾸려 하지, 내 신학이나 사상으로 성경을 읽어 성경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건강한 영성의 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세워간다면 교회가 선한 영향력가운데 세워지고 교회와 주의 백성들이 선한 영향력을 가지는 역사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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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에 대한 토론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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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준 목사의 질문

정 목사님의 발제를 듣고 실제적인 것을 질문하고 싶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부패, 그리고 목회적인 지도력을 말하지만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이 기대하는 지도력과 우리가 말하는 지도력과 괴리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들을때마다 조금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은 '목사님의 비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전제하고 과연 내 비전을 말하는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교회가 빨리 성장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이라던지 내가 이렇게 목회를 한번 해보겠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주권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하는 고민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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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자 정대성 목사의 답

목회를 이제는 20년정도 하고 교회도 두번 개척하면서 하나님 전적인 주권과 인간의 부패를 인정하는 목회적인 지도력으로 누리고 싶은 것은 자유이다. 어떤 자유인가. 최근에 김용옥의 노자 강의를 재미있게 들었다. 그는 철학은 무전제의 사유라면서 어떤 전제를 들어가는 순간부터 철학이 아니라고 했다. 결국은 무전제의 사유도 전제아닌가. 그것을 보면서 제 모습이 보였다.

목회를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내가 너무 매여있다. 매여있다 보니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나는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가, 나는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듣는가의 수준을 초월하지 못했다. 아직도 마음속에 내가 이런데서 이렇게 있어야 하나, 더 큰비전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내인생이 이러다가 끝나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빠질때가 있는데 그럴때마다 자유하지 못함을 본다.

나는 비전이 없다고 하는 것도 비전이라고 본다. 내 답은 생긴대로 살면된다.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 살면 된다. 첫번째 개척할때 첫 3년동안 몸을 많이 상했다. 왜냐하면 완벽주의적인 성격이 있다. 목회를 하다보니 교회지도자가 교인에게 누가 되는 말 또는 못한다는 말을 못했다. 그래서 목사는 무엇이던지 잘해야 하고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나의 모자람을 인정하니 자유로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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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영 선교사(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 발언

지난주에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서부에서 홍정길 목사와 젊은 목회자들이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분이 목사님은 비전을 어떻게 세우고 끌고 왔냐고 묻자, 홍정길 목사는 기대를 뒤집는 발언을 했다. 우리는 리더는 무슨 큰 꿈을 가지고 선교단체나 교회를 끌고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서 나온것인가. 성경에서 나온것인가 세상적인 면에서 나왔는가.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가 다 하려고 한다면 성령에 맡긴다는 것은 무슨말인가.

무책임하게 되는대로 살라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상을 생각하는 것을 비전이라고 할수 있는가. 홍정길 목사의 답은 "비전이라는 핑계로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리더들이 많기에, 가장 반복음적인 형태로 비전이 사용되기에 나는 비전을 거부한다"고 했다. 나는 마음속에 "그러나 완전한 대답은 아니네요. 나는 비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화를 통해 정리되는 것이 많았다.

노진준 목사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단체나 교회의 회중들이 우리에게 큰 목사가 되기를 요구하는데 우리가 그런때 우리가 말씀안에서 과연 이런 꿈을 꾸는 것이 하나님과의 뜻과 같은 것인가를 끓임없이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이 첫번째 덕목이다. 과연 리더십을 발휘한다고 할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리더십인가를 좀 더 깊이 생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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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영 선교사 사모

목회적인 리더십이라면 목회라는 것은 대상이 있어야 한다. 여기 있는 분은 모두 목사로서 생각을 나누지만 듣는 사람들은 어떨까. 설교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하지만 성도들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같이 가야 한다. 목사님들이 아무리 자유롭고 괜찮다고 하지만 요즘 성도들은 똑똑하다. LA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성도들이 인터넷에서 설교를 많이 듣고 설교자가 조금만 무슨 이야기를 하면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안다고 하는 것이 충격이었다. 성도들은 이미 강사의 설교와 삶조차도 알고 있다. 목사님이 정말 고민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다가와야 하고, 성도의 삶의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목사들의 노력에 성도들이 같이 해야 바뀐다. 목사들이 아무리 변해도 성도들이 인식하지 못하면 너 나 잘하라고 식의 끓임없는 소모전이 될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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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자 정대성 목사의 발언

개인적인 간증을 한다면 목회의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중 하나는 자유함이라고 말할때, 내가 계획한대로 되야 한다고 생각한것이 많았다. 어느때부터는 내가 계획한것이 안되어 된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어떤 제안을 하면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평신도 지도자를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한번 내놓고 아니라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가 꼭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잘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하는 것은 부수적으로 해도 좋고 안해도 좋다는 관점이 생겼다. 단언하는 것은 우리교회에서 계획을 세우지만 다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장일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계획을 세울때 준비를 많이 하지만 그것이 아까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테이블에서 결정한다. 물론 내가 이래도 되는가 또는 무능한 지도자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다. 목회를 시작하고 3년동안 새벽에 나가 밤늦게 들어오니 딸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목회가 이것이 아닌것 같은 생각이 들어 위기감이 들었다. 못하는 것을 그 다음부터 안했다. 이런 자유를 얻은 것은 2차 개척을 할때는 좋았다. 거창한 계획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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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참가자의 질문

교인들도 알고 그런식의 지도력을 따라오고 좋아하는 것인가. 아니면 교인들과 상관없이 나의 길을 가는 것인가. 과연 교인들이 좋아하고 따라오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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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자 정대성 목사의 발언

70%는 좋아하고 30%는 싫어하는 것 같다. 저는 30%의 반대가 있어야 공동체가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테이블 위에 반대를 내놓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나는 몰랐다는 이야기를 많이 할수록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다. 30%는 반대하지만 적대시 되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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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일 목사(필라기쁨의교회)

이번에 주제에 소통이라는 주제로 정한 분이 정대성 목사이다. 제가 소통이야기를 듣고 예민해 졌는지 모르지만 리더십의 이슈가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귄위주의적인 목회, 다음 포럼 주제인 성령의 역사와 연결된다. 내가 하나님에 권위를 받았으니 교인들은 따라오라는 이런 비건전한 영성주의가 리더십과 연결된다. 탈권위주의적인 분들이 여기에 많다. 하지만 다음 단계가 걸린다. 저는 무엇이 다르냐고 할때 설득력에 강조를 두었던 같다. 하지만 설득만을 가지고 현장 목회에서 문제점이 드러난다.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제가 볼때 소통의 문제가 리더십 입장에서 탈권위만으로는 안되고 설득만으로도 안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소통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직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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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준 목사(LA한길교회)

세상적인 성공주의나 자본주의적인 발상이 우리의 목회현장에 주도적으로 들어와 있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리더십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가서 이제는 내가 괜찮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가 상당한 압력을 받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내 목회를 어떻게 평가할가에 대해 이기적인 생각을 가진다. 이웃교회가 어렵다면 기분이 좋은 것이 현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정말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회를 하는가 고민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주도하고 있는 세속적인 성공지향주의나 아니면 자본주의적인 발상과 역행하고 스스로 부패를 누르기위해 네트위킹을 통해 끓입없이 확인하고 붙들어주는 역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 목회를 하는 동안에는 교인들과 주변에서 받는 압력으로 인해 나쁜 영향을 자꾸 받는다. 교인들이 줄면 불안하고 많이 오면 잘하는 것 같고 그것이 좋은 리더십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목회를 한다. 그래서 목회자 스스로를 점검할수 있는 네트워킹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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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요 목사(세리토스장로교회)

6개월의 안식기간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안식기간이 끝난후 비전을 묻는 질문이 많았다. 앞에서 홍정길 목사의 예화를 들었는데 나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비전이 없다. 사람들이 묻는 안식년후 비전은 앞으로 교회건축을 하고 교인 몇천명의 볼륨을 기대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실은 그런 것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이 없는 제가 비전이 없다고 말하면 바보가 된다. 마치 교회리더로서 결격사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비전이라고 하면 말씀대로 충실하게 목회를 하려고 하는것이 내 비전이다. 그것이 과연 성도들에게 소통이 될까 하는 어려움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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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일 목사(필라기쁨의교회)

리더와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보고 가도록 하는 것이 리더십이다. 하지만 그것을 공유하는 작업이 힘들다. 서로 다른 꿈을 꾸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것이 하나님 영광중심적으로 전환되는 심각한 신학적인 변화가 교회안에 불어와야 하는데 그 자체도 좋은 모델이 없으니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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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삼 목사(뉴저지초대교회)

'Soli Deo Gloria'가 종교개혁이후 개혁교회에 주요한 모토가 된다면 나는 그대로 믿는다. 목회자가 'Soli Deo Gloria'를 가지고 지금은 목회자만 말했지만 교회전체이다. 교회전체가 'Soli Deo Gloria'라는 모토를 가지고 교회지도력을 이끌어 간다면 된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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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상 목사(필라개혁장로교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 부패를 연결시킨 것이 중요하다. 결국은 우리가 목회현장에서 소통이 부족한것은 어떤 면에서 내가 틀릴수 있다는 전제를 안받아들이기에 실천적으로, 쉽게말하면 목회자 리더십이 강하다는 분이 자기확신이 강하기에 다른것을 들을 의지가 없다. 그런데 인간의 전적부패라는 것은 그것을 해석학적으로 표현하면 틀릴 가능성이 있다. 어제 말한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무오하고 절대적이지만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이해나 해석은 틀릴수 밖에 없고 그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목회적인 지도력을 고민하고 성도와 소통을 고민한다. 개혁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나누고 있지만 개혁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주는 원리는 하나의 결론이나 구호나 선동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을 보고 사람들을 대하고 함께하는데 있어 기본적인 원리이고 태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회현장에서 말만 하나님의 절대주권, 인간의 전적 부패, 소통하는 지도력이 아니라 실제로 좀 더 다양한 신학적인 전통이나 관심에 대해서 오픈된 태도, 다양한 목회적인 실천이나 의견에 대해 오픈된 태도,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개혁주의 목회자이고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목회를 하려는 목회자이지만 자칫 개혁주의 원리나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태도가 하나의 우리의 주장이나 확신이나 또하나의 선동구호가 되어 인간적인 리더십으로 전락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우리들 목회자들에게 개혁주의 목회자들에게 실제로 좀 더 넓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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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환 목사(글랜데일뉴라이프선교교회)

선배 목사님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2세 젋은 목사가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영광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교회차원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드리는가. 우리 목사는 교회가 일터이니 그렇게 되지만, 성도들은 자기들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도들도 교회만을 너무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교인들이 교회이다. 가정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저희 2세들은 1세들이 보기에 오픈되어있다. 목사님 설교도 중요히 생각하지만 목사님 가정에서 성경적으로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대하느냐도 중요하다. 우리는 과연 그것을 보여줄수 있는가. 목회자의 지나친 헌신을 2세들은 안좋게 생각한다, 목회를 하면서 나는 설교할때도 어디든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2세들도 그런 생각을 한다. 대학에 다닐때부터 제는 신학교 가야 할 아이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것이 'Soli Deo Gloria' 신학에 맞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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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삼 목사(뉴저지초대교회)

'Soli Deo Gloria'를 시작할때 이것은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삶의 원리임이 분명한데, 목회자 모임이므로 목회에 맞게끔 주제를 내고 발제했다. 특히 기억하겠지만 정 목사는 하나님의 주권을 통해 우리가 내려놓을수 있는 삶의 원칙, 그리고 전적부패를 통해 남의 것을 받아들일수 있는 원칙만 받아도 양 목사의 질문은 많이 해결이 된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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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윤 목사(나성남포교회)

목회하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다는 어감이 성도, 목사, 하나님에게 모두 다르다, 그래서 목회가 어렵다. 아닌것 같아도 이미 우리는 기득권을 가진 세대가 되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 문제는 내가 기득권자로 누리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기득권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생각이 잘안된다. 도전정신이 사라진 것 같다. 교인과 이야기하면서도 이미 가지고 있는것을 어떻게 더 많은 것으로 끌고 갈지가 관심이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 처럼 살고 싶은데 힘들다. 교인들도 어느 정도 규모가 되면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부빅부 빈빅빈이다. 미국에 큰교회가 많아지고 대세를 이루고 있다. 코스코가 주위의 모든 가게를 문을 닫게 하는 것 처럼 큰교회가 규모가 작은 교회에게는 생사의 문제를 가지게 한다. 목회는 시작했는데 살아남기 위해서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야 한다. 자기가 원하는 교회에서 교인하고 조용히 살방법이 없다. 어느정도 교회 규모가 되어야 일을 하고 자급을 할수가 있다. 너무 슬픈데 어느새 나도 그 자리에 들어갔다. 열린말씀 컨퍼런스도 10년이 되고 관련된 목사들 교회규모도 커졌다. 한편으로 좋은데 한편으로는 10년전의 초심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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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성 목사(콜로라도뉴라이프선교교회)

왜 그렇게 큰교회가 되는 것이 잘못된것인가. 이해가 안된다. 왜 우리가 여기가지 온 것에 대해 자책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큰교회가 되었으면 된것이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어쩌면 사회속으로 큰교회가 된것에 대한 죄의식을 가진다는 느낌을 가진다. 그래야 되는가. 우리 성도에게 예화중의 하나가 이웃이 좋은 차를 사면 우리가 할일은 축하하고 밥얻어먹으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이 하는 말은 옆에서 5천불 세일한다며 도움이 안되는 말을 한다. 큰교회와 작은교회에 대한 이중적인 생각보다는 각자 다른 교회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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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권 목사(첼튼햄장로교회)

그것이 맞는데 현재 주어진 교회의 현실을 놓고 보면 한국 개신교 현실을 보면 상황적으로 지금 우리가 무엇을 더할수 있을까 생각하면 고민이 된다. 규모가 큰 교회가 나쁘다 생각하거나 자본주의적인 생각자체가 틀렸다고 보기는 사회적인 책임감과 시대적인 책임감을 생각할때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내 교회를 놓고 여러 이야기를 하는 것을 감당하는 것이 벅찬 상황임이 맞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교회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지금 무엇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생각을 해보면 어려웠을때 보다는 규모가 큰 교회에 사회적인 시대적인 책임을 요구하는 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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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의 두번째 주제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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