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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말씀 포럼] 성경중심의 설교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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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2-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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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말씀 컨퍼런스' 10주년을 기념하고 정리하기 위한 포럼이 “우리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이라는 주제로 4월17일부터 19일까지 필라 기쁨의교회(박성일 목사)에서 열렸다. 포럼의 첫 주제토론 내용은 “Sola Scriptura-성경 중심의 설교가 무엇인가?”였다. 발제자는 한성윤 목사(나성남포교회)이고 사회자는 최정권 목사(첼튼햄장로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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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하는 한성윤 목사. 12인의 연대원중 한명으로 2007년부터 컨퍼런스에 참가했다.

다음은 한성윤 목사의 발제내용이다. 한 목사는 유인물로 준비한 내용과 상당히 다른 발제를 진행했다. 설교를 어떻게 하는가가 아니라 성경중심의 설교를 다루다 보니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많이 나왔다. 특히 목회자로서 목회자에 대한 자성이 아프게 보였다.

성경 중심의 설교가 무엇인가?

목사라면 설교때문에 다 고생할것이다. 설교때문에 여러번 절망도 한다. 훌륭한 목사일수록 절망을 더했을것이다. 말씀을 어떻게 소통할것인가. 성경에 대한 권위를 중요하게 여긴다. '오직 성경으로' 라는 말은 오직 성경만이 신자의 양심을 구속할 궁극적인 귄위를 가진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오직 성경'이라는 말은 루터와 개혁주의자들이 캐톨릭과 주위의 사상에 대해 성경만이 사실 모든 것의 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정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모든 귄위의 위에 있음을 강조했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성경해석을 위한 무오한 밥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귀절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에 대해 의문이 생긴때에는 보다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다른 귀절을 통해서 연구하고 알아내야 한다)를 보면 성경해석을 위한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라고 선언함으로 사실상 성경의 귄위를 높였다. 성경의 권위를 과학적인 사실이나 혹은 성경을 증명할수 있는 고고학적 지리학적인 사실로 증명하려고 애를 쓰지만 사실상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의 본성으로 부터 나온다.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시므로 하나님의 완전성때문에 우리도 성경도 완전성을 주장하고 있고 모든것의 기초라고 믿고 있다.

성경중심의 설교라면 1. 성경이 의도하는 바를 목적으로 삼고(성경해석) 2. 성경이 의도하는 열매를 추구하고(설교내용) 3. 성경은 성도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도구(설교대상)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도전

교인들이 겪는 세상적인 조류들은 목회자의 관심과 생각과 확신과는 다른면이 많다. 한국교회가 이런 비판을 많이 받는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따라, 믿음때문에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삶에는 더이상 십자가가 필요없다고 한다. 사영리에서도 십자가는 사람과 하나님과 연결할때만 필요하다. 하나님께로 건너가면 십자가가 필요없다. 그러다보니 삶을 사는데는 예수와 십자가가 소용없고 구원을 얻는데만 십자가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 십자가의 능력은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 한국교회에 실제로 도덕적인 불감증으로 나타났다. 신문의 일면에 교회분들이 특히 목사들이 채우고 있는것이 부끄럽다. 사과를 해도 끝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세상사람뿐만 아니라 믿는자도 반발이 일어났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도전이 있다. 그동안 십자가의 예수는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는 예수를 따라가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히 맞는 이야기이다. 둘을 신학적으로 분리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 십자가 예수보다 예수를 따르는데 관심을 가진다.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자는 말은 좋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지적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사는것은 당연하지만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단순한 모범으로 삼고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서 살았던 삶을 따르라고만 한다면 예수님이 왜 오셨을까. 우리가 하지 못하기에 예수그리스도가 왔는데, 마치 할수 있는 것 처럼 예수그리스도를 따라가겠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한국교회에서 많이 일어나는 일중 하나는 교회에서는 절대로 의심하지 말고 질문을 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다. 나도 어렸을때 부터 들었던 말이다. 의심하는 것은 불신앙이고 믿음에 대해 질문하는 것 자체가 환영받지 못하고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다. 문제는 심각한 반응이 많이 나왔다. 우리교회에서도 한두명과 심각한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이미 한국교회안에 많은 신자들이 성경이 정확하고 무오한 말씀이라 믿지 않는다. 교회와서 문제를 안일으키려고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성경은 어느정도 권위가 있으며, 인간의 말중에 가장 뛰어난 말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미국의 주류교단 세미나에서 "성경의 정확무오함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한 완고함과 부정직한 지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단적인 주장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큰 회의에서 많은 목사들에게 전달되어 큰 어려움이 없이 받아들여 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 말이 맞다면 우리 대부분이 이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이다.

문제중 하나는 성경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은 교회안에 있다. '믿습니까' 하면 '아멘'하는 것은 좋은데 아무때나 '아멘'한다. 아니라고 해야할때도 '아멘'한다. 이런분들은 실제적인 반성경주의자가 될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 예배나 설교시간에는 아멘하면서 정확무오한 말씀을 믿는다고 말로는 하지만, 실제적인 삶에서는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순종하려는 마음도 없다. '실제적인 무신론자'라는 말과 같이 실제적인 반성경주의자이다. 성경에 대한 교회안에 있는 무서운 적대세력이라고 본다.

성경을 설교하는데 필요한 태도

먼저 성경을 설교한다고 하면 필요한 태도는 성령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성경기자들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전달해야 한다. 오늘날 성령 하나님께 사로잡혀있지 못하면 성경저자들의 의도를 잘이해하고 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더 깊이 있는 연구를 내놓는다는 목적아래 성경의 귄위를 무시하는 일들이 많이 생긴다. 성경저자들이 성령 하나님에 의해 사로잡힌 사람이고 그들이 가진 의도를 인간적인 저자의 생각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한 이유와 배경까지도 많이 생각해야 할 시대이다.

다른 원리는 성경전체를 설교해야 한다. 성경을 부분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설교내용이 될 수 없다. 설교를 하다보면 겪는 어려움은 특정 본문이 너무 좋지만 전체적인 역사적 배경과 문맥이 본문을 거의 지지해 주지않는다는 것을 어렴픗이 알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어 그 본문을 사용하려는 유혹을 이기기 어려울때가 많다.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사용한다고 스스로 정당화 하는 경우가 생길때가 있다. 몰라서 그렇다면 어쩔수 없지만 알면서 하는 경우가 많다. 성전건축을 하면서 느헤미야 설교를 하지말라고 목사들에게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막상 우리교회 예배당 헌금할때가 되자 느헤미야가 그리웠다. 그 본문을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설교자는 정말 이길수 없는 유혹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열린 말씀 컨퍼런스 핵심가치중 성경에 대한 관점은 "우리는 구속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복음적으로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것에 헌신한다"이다. 구속사를 통해 성경을 이해하고 전달한다는데, 쉽게 바꾸어 말하면 설교자는 예수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 이것이 쉽지 않은 부분이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설교하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다. 먼저 체험적인 설교로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방법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사는 것에 대해 강조하고 예수에 촛점을 모으는 좋은 설교이다. 청교도의 설교가 주로 그런 설교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하나의 설교는 예수그리스도를 그냥 바라보게 하는 설교가 아니라 구속사적인 설교가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예수그리스도 자체를 우리의 삶에 적용으로 삼는 설교이다.

경험상, 예수그리스도를 설교로 하는데는 구속사적인 설교가 좋다. 개인적으로 처음 구속사적인 설교를 할때 굉장히 어려운 부분도 있고 교인들이 이해하지 못해 따라오기 힘든면도 있다. 구속사적인 설교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여 하기에 성경을 모르는 분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설교이다. 그래서 성경을 처음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압력이 있다. 이민성도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운분이 절반도 안된다. 처음부터 성경을 가르치는 것 때문에 어려웠지만, 한번 병원에 갔을때 환자와 이야기를 하고 생각이 달라졌다. 운명을 앞둔 그 환자는 자기에게 그리스도를 설교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내가 예수를 위해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고 설교했다면 죽는 순간까지도 안식과 평안을 누릴수 없었을텐데 예수그리스도를 설교해주어 감사를 표했다. 포기하다가도 성도 한명때문에 다시 용기를 얻는 것이 목사이다.

그런 어려움이 있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구속사적인 설교가 파워가 있고, 잘 된 구속자적 설교는 처음 듣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뒤집어지게 한다. 하지만 여러번 들으면 아무리 잘해도 기대감이 줄어든다. 구속자적인 설교는 틀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이미 기대치를 가지고 있으며, 적용부분이 항상 약하다. 개인적으로 구속사적인 이해만큼 중요한것이 체험적인 전달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설교자도 살고 교인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체험적인 전달이 성도의 삶에서 열매를 맺게하는 중요한 이유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 교리가 요즘 인기가 없다.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성경을 설교하고 싶은 사람은 조직신학에 열심히 해야한다. 성경신학은 말할것도 없다. 조직신학에 세야지 교리가 약하면 보호막이 없다. 엉뚱한 성경구절을 꺼집어 내어 사용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모를때가 많다.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들을 설교하면서 성경전체를 설교하기위한 도구로 교리적인 조직신학적인 확신이 깊어질수록 도움이 된다.

설교에 대한 도전

세상사람들이 생각할때 목사들은 골통보수주의 근본주의 배타주의 우월의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속으로 나는 인정을 하는 편이다. 우리끼리 있으면 모르지만 남들이 보면 분명히 있다. 특히 예정론에 있어 은혜보다는 선택에 대해 강조할수록 그런면이 더 강하다. 유대인을 보면 택한자에 대한 의식이 인간을 굉장히 교만하게 만들수 있다. 우리도 그런면이 있지 않나.

설교에 대한 또 하나 중요한 도전이 있다. 설교자의 설교와 설교자의 삶이 다르다는 정도는 요즘 교인들은 어느정도 다 이해한다. 그런데 해도 너무 한다는 것이다. 이방인도 안하는것을 설교자가 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안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걸핏하면 성경을 들먹인다. 아내는 나에게 성경을 들먹이며 부부싸움은 하지말자고 부탁한다. 교인들은 대개 설교자에게 교리가 아닌 예수를 달라며, 교리에 갖혀있는 예수 성경 설교는 지겹다고 한다. 그것은 교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교리대로 우리가 살아가지 못한다. 설교자가 삶에서 교리를 보여주는 것에 실패한 것 같다.

오늘날 점점 설교의 내용보다는 교인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는지가 설교의 중요한 포인트가 되어간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설교에 담는것이 아니라, 교인의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하고 얼마나 감동을 먹는가가 설교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교회에서 교인들이 오늘 은혜받았다는 말을 한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의 99%는 설교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정말로 속는다. 설교를 듣는 교인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그리스도를 알았기에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하는 성도를 만나고 싶다. 문제는 말씀을 전하는 나도 설교를 한 후 그리스도가 안남고 내가 남는데, 어떻게 성도에게 예수가 남겠는가. 목회자와 교인들의 이러한 패턴과 삶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교인들의 의견이 아주 틀린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주로 우리만이 옳고 선택받았다고 한다. 나는 의인이고 당신은 죄인이라는 그런 태도가 사람으로 하여금 기독교만이 진리라는 교만함을 인정못한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유일신이라면 모든 신은 하나님에게 통하는 것이 아니냐는 종교다원주의가 심지어는 보수적인 신앙인에게도 매력적인 것이 될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만함이 그분들로 하여금 다른 탈출구를 없게 만드는 것도 있다. 그분들이 만든것도 아니고 그분들을 어떻게하던지 유일하신 그리스도의 삶으로 가게한다는 교리와 확신은 있지만 그분들에게 갈 길이 없다. 정말 당신이 믿는 예수는 얼마나 좋을지 모르지만 당신하고 같이 간다면 그 예수와 같이 안있겠다고 되어가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그중의 하나가 나라는 것이 더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바꿀수 있을까 고민이다.

다른 하나는 목사도 똑같이 돈을 좋아한다. 그런데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결국은 돈때문에 예수가 필요하다. 마음은 아프지만 우리가 나중에 교회를 놓지 못하는 이유가 먹고 살기 위해서일까 두렵다. 여기서도 복도 받고 천국에도 가고하니 얼마나 얄밉겠는가. 둘중이 하나를 포기안하려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금 현재 지식인에겐 천민 자본주의와 같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자본주의 논리가 같다고 보기에 기독교는 지식인으로 부터는 이때까지 공격을 받았지만 앞으로 세대는 더욱 걱정이다. 젊은 목사들이 목회하는 시기에 기독교가 진짜 자기모습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니 망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앞에 가서 우리들은 무슨말로 변명할지를 모르겠다. 한국의 젊은이 75%가 기독교는 자기확장이 종교라 생각한다. 기독교가 관심있는 것은 건물짓는 것, 사람많이 모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놀랐다. 우리 교회 청년에게 물어보니 그것도 아직 몰랐냐는 식으로 대답했다. 답답한 현실이다.

교인들과 세상사람들도 두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그러한 성공과 부를 주는 하나님에게 매달려 나도 편승하여 멋있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이런분들의 성공신화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간증거리가 된다. 모든 간증이 잘나가다가 마지막에 마음을 섭섭하게 하는 것이 있다. 처음에는 주님을 만나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마지막에는 그래서 망했던 회사가 다시 일어나 십일조를 이십만불했다고 하면 받았던 모든 은혜가 쏫아지는 기분이다. 물론 복은 복이다. 틀린것도 나쁜것도 아니고 더구나 헌금했다는데 왜 그러냐고 하겠지만 안타깝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주지마시고 감사하도록 만드실수 없냐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문제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그렇게 간다. 기복신앙을 비판하면서도 기복신앙에 편승해서 교회를 확장하려고 한다. 60-70년대 부흥사이후 요즘은 기복신앙을 직접으로 이야기하는 분은 없다. 세련된 목사는 기복신앙을 이야기 안한다. 기복주의를 나쁘다고 이야기 하지만 편승해서 역시 교회를 크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목사도 일반사람도 여기에 쫓아가는 사람이 생긴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르침이 중요하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맞지만, 가르치는 대로 따라갈수 있다면 왜 힘들게 예수를 믿고 왜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죽으셔야 했는가.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 이렇게 밖에 못사는데 무슨 힘이 있겠는가. 변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진짜 기독교 십자가의 복음이 없기에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성경이 틀리지 않는 한 복음을 들었는데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진짜 복음을 듣지 못했다고 말할수 있다. 열매로 나무를 안다는 말이 있다. 열매만 가지고 그 사람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지만 열매가 전혀없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복음을 다시 듣는 방법외에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을 것이다.

성경을 설교하는 실제적인 과제

성경을 설교하려면 우리가 전인격을 향해 그리스도를 알게하고 품게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하는 설교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전에는 설교를 준비할때 교인들이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동이 있으며 나에게도 어떤 감동이 있을것인가에 자주 멈추었다. 설교했을때 좋은 반응도 있었다. 그런데 교인들은 2주일만 지나면 제목도 본문도 대지도 기억을 못한다. 그래서 짜증이 났는데, 어느날 차를 타고 가다가 설교테입이 있었는데 오래되어 이름이 없었다. 들어보니 설교내용이 괜찮았다. 나중에 보니 내 설교였다. 감짝 놀랐다. 내가 설교하고도 끝까지 들을때 까지 설교내용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교인들이 본문과 대지와 소대지와 좋은예화와 감동을 오래기억하기를 설교자들이 원하겠지만 불가능하거나 사실은 설교의 목적이 아니다. 설교는 영원히 기억할분 예수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진짜 설교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에드워드 크라우드 목사가 찬양을 이야기할때 노래하는 예수, 설교하는 예수라고 한다. 내가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설교의 중보자인 예수님이 설교하고 목회자는 잘차린 밥상에 숫가락을 올리듯이 예수의 설교에 참여한다는 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진정한 설교의 주체이고 그 분이 중보한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말씀을 깨닫게 하고 전달하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가 전달될수 없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의지가 없이는 강단에 서는 것을 두려워할수 밖에 없다.

우리는 '성경만능'이 아니라 '성경중심'이 되어야 한다. 상대주의에 반대하다 보면 잘못하면 성경만능으로 가기쉽다. 모든것을 성경으로 대답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과 문제를 성경중심으로 겸손하게 접근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성경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성경이 의도하지 않는 대답을 하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사람에게 공격거리를 많이 준다.

상대주의가 가장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관용을 베풀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다. 남의것이니 인정하지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상대주의가 가장 이기적인 분들이라면 우리들도 점 더 성경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큐티를 할때 빠지가 쉬운 함정이 있다. 성경을 읽고 자기의 삶의 환경과 상황에 적용하는 것에서 벗어나, 삶을 가지고 성경으로 들어가는 훈련을 해야 한다. 어릴때 뽑기를 많이 했다. 설탕을 녹여 나비모양이나 꽃모양의 틀을 찍는다. 우리도 우리라는 틀을 가지고 성경을 찍어낸다. 내 환경이라는 틀을 가지고 찍어낸다. 그러다보니 나머지 성경부분을 다 짤라내 버린다. 그러지말고 내 삶을 성경이라는 틀에 부딪혀 내삶에서 짤려나가야 할 것이 짤려나가지 않으면 절대로 성경적인 삶을 살 수 없다. 그런면에서 내삶을 성경에 맞추고 적용하는 훈련이 설교자로서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세속적인 가치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교회도 그렇다. 부동산으로 돈을 많이 번 분들이 많다. 부동산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중의 하나는 불로소득이다. 물론 부동산을 사고파는 것이 기술이고 실력이라고 하면 할말이 없지만, 일반적인 노동보다 훨씬 많은 양이 주어진 것은 사회로부터 온것이다. 한 정치인은 사회에서 부를 누리는 사람은 환원할 책임이 있는 이유는 돈을 벌기위해 세금을 사용하여 만든 도로나 인재를 사용하여 돈을 벌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인들은 모른다. 교인들의 역사의식이나 경제의식이 일반보다 같거나 떨어진다. 본인들이 부자라는것에 자랑스럽게 여기고 교회에서 부자티를 안낸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남들은 명품옷을 입을때 일반옷을 입고, 교회올때 집에 좋은 차를 두고 나쁜차를 타고 다닌다. 그렇게하고 검소하고 깨끗하게 산다는 오해를 한다. 적극적으로 세상적인 가치관에 맞서 싸울 준비를 안시켜 주는 것이 설교자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바울은 세상가치에 대해 하나님 가치로 싸웠다. 설교자는 영적인 싸움이라는 애매한 테두리를 만들어 놓고 모든것에 대해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한다. 그런 부분에 있어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청중가운데 목회자가 예수를 섬기는것이 아니라 예수때문에 호사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 것이 꼭 잘못된 말이 아닌것이 우리의 아픔이다. 그리고 성도들도 설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목사를 청빙해도 설교를 가장 중요시 한다. 물론 설교는 목사의 은사이다. 설교만 보고 목사를 청빙하는 사회가 되간다. 마치 한국에서 공부만 잘하면 어떻게 살던지 관계없는 것 처럼, 목사가 설교만 잘하면 되지 무슨 상관이 있으냐는 식이다. 하나님보고 교회다니지 목사보고 교회다니냐는 식의 말이 너무 싫다. 나는 목사보고 교회를 다녔으면 좋겠다.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는 말을 했다. 우리도 그런 말을 한번은 하고 죽었으면 좋겠다.

설교자가 설교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말씀이 설교를 설교되게 한다. 그런 설교자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말씀과 예수님에 집중함으로 인격을 통한 진정한 진리를 만들어 낼수 있는 것이 성경중심의 설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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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윤 목사의 발제는 약 45분간 진행됐다. 이후 발제에 대한 솔직하고 예측할수 없는 흥미진진한 토론이 1시간여 진행됐다. 토론내용은 아래의 링크를 누르면 된다.

- 한성윤 목사의 발제에 대한 토론을 보러가기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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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자 한성윤 목사(나성남포교회)/사회자 최정권 목사(첼튼햄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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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일 목사의 관련발언

미국에 내놓을 만한 개혁주의 신앙 컨퍼런스가 여러개 있지만 그 특혜를 미국주류사회에 있는 크리스찬은 누릴수 있지만 한인교회는 그런것을 누리기는 불가능하기에 역동성있는 교역자들이 신학적으로도 준비해 가려고 애쓰는 분들이 힘을 합해 일반 부흥회 정도의 스케줄에 특이한 것은 하루밤에 메세지를 하나가 아니라 두개씩 넣는다. 어떤 주제를 놓고 여러 소제목으로 나누어 다수의 강사들이 같은 주제를 놓고 여러방향에서 동시에 말씀을 전함으로 2박3일의 기간에 성도들이 많은 정보를 나누고 그 안에서 말씀의 풍성함을 나눌수 있고 깊이도 있게 된다.

모임을 하다가 목사와 사모간의 교제가 형성되고 어느 순간에 이제는 서로 모여서 즐기는 것만은 안되고 서로 목회자로서 성장하다 보니 사역에 대한 다양성과 여러가지 유혹도 있게되고 단순히 말씀사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관을 설정하고 가치관들을 함께 지어 나가도록 격려하는 그룹을 만들어야 겠다. 또 잘못하는 사람이 있을때 서로 사랑으로 진실을 말하면 좋겠다고 하여 긴 시간의 토론을 통해 연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4가지 중심가치를 구호처럼 세웠는데 깊이 토론하고 이러한 내용을 공유하는데 좀 더 의식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12명의 연대원이 모이는데 다른시각에서 참가해주는 분들을 비슷한 숫자로 초대하게 되었다. 의식있는 목회를 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을 선별하여 모시게 되었다. 중심가치관을 나누어서 주제발표를 하고 포럼이라는 좋은 장점을 통해 시간을 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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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요 목사(세리토스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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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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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최정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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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자 한성윤 목사(나성남포교회)/사회자 최정권 목사(첼튼햄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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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하는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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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 목사(서울강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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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현 목사(뉴프론티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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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상 목사(필라개혁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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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성 목사(콜로라도뉴라이프선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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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최정권 목사(첼튼햄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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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준 목사(LA한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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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준 목사(LA한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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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산 목사(믿음으로사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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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산 목사(믿음으로사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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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산 목사(믿음으로사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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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에 대한 설명-정민영 선교사

포럼의 대가는 아니고 몇가지 포럼에 관여를 하는데 이번 모임도 마찬가지이지만 좋은 내용인데 확 열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나누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배타적인 포럼이 되려는 것은 아니다. 포럼은 일반적인 대회하고는 다르다. 대회는 많은 사람이 모여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도록 완제품을 제공한다면, 포럼은 일종의 워크샵으로 완제품이 아니라 무균실 또는 생산실이다. 만들어진 것들의 분배는 대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해야 하지만 제작하는 무균실에 아무나 들어올수 없다. 문을 좀 더 열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포럼에 참가하니 너무 규모가 크면 질이 높지 않다. 정치적인 배려로 모인 자리는 건강한 제품이 나오기가 어렵다. 선별하여 좋은 결과가 나오면 나누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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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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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요 목사(세리토스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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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진 목사(필라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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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중 목사(잭슨빌벧엘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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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헌석 목사(앤아버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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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웅산 목사(한국 총신 신대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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